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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6.12.03 02:52

한 개의 송곳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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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을 누리고 있다. 딴엔 제법 '너'나, '우리', '그'나 '저들', 혹은 '세상'에만 관심 있다 여겨왔는데 알고 보니 그것들 모두 죄다 '나'였다. 나의 존재론이 결국엔 '관계론의 나'이며, 따라서 존재론과 관계론의 경계 역시 소용없다는 생각이 이제 나를 나에게 몰아간다.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하여, 내가 성장한 이 바닥을 읽어내는 일이고 나를 만들어낸 세계와 그 장치를 되짚어보는 일이며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은 '너'들을 새로 보게 되는 일이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덧니였다. 양쪽 송곳니가 모두 드라큘라처럼 나 있어서 "으엉~"하고 친구들 앞에서 종종 장난도 치곤 했던 기억이 있다. 당연히 어린 아들의 '뻐드렁니'를 걱정하셨던 부모님이 계셨고, 그런 엄마의 손으로 어떤 치과를 갔다.

치과에 간 이유는 아버지의 명쾌한 이론 때문이었는데, 두 송곳니 중 하날 빼면 이빨들이 저절로 이동해서 나머지 하나 남은 송곳니가 쏘옥 들어간다는 말씀이었다.

예상밖에도 치과의사는 간호사와 서로 멍하니 마주 보면서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이빨들이 이동하는 것은 맞지만 성장기에 턱뼈가 뒤틀릴 거라면서 바로 이런 경우에 교정을 하는 거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분노하셨다. 그 치과의사가 돈을 밝혀서라는 논리였다. 아버지에 따르면, 그 치과의사는 겨우 이빨 하나 뽑는 것보다 우리 집안의 기둥뿌리 하나를 더 탐내는 악한이었다. 결론이 나왔다. 치과는 대한민국에 거기 한 군데가 아니니깐.

새로 찾아간 치과에는 머리가 하얗게 내려 앉은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 계셨다. 어머니는 너무나 기가 막힌다는 어조로 처음 갔던 그 '탐욕적'인 의사의 음모를 고발하셨고 그 자상해 보이던 할아버지께서는 "허허" 웃으시며 아무 말 없이 문제의 이를 뽑아주셨다.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그 때 내 송곳니가 그렇게 긴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 새삼 놀랐으니깐.

그리고 한 일년 쯤 지나서였나. 나는 웃을 때 내 입이 조금씩 비뚤어지고 있다는 지적을 주변 사람들에게 받기 시작한다. 물론 그 때는 그게 사라진 송곳니의 노스탤지어라고는 전혀 연결시키지 못했다. 거울을 보면서 일부러 미소를 지어가며 나는 자꾸만 비뚤어지는 내 입모양을 바로잡는 연습을 했다.

그로부터 이제 이십삼 년이 흘렀다. 나는 현재 부정교합이다. 입이 비뚤어지고 턱뼈가 뒤틀릴 것이라던 첫번째 치과의사의 충고는 진실이었다는 것을 나는 지난 이십삼 년 간의 삶으로 체감했다. 물론 내 부모님께서 이 일로 인해 그간 얼마나 괴롭고 후회막심해 하셨는지 모른다. 두 분의 잘못은 아니다. 어떻게 그분들이 아실 수 있었겠는가.

단지 조금 화가 나는 것은 두 번째 의사다. 그가 첫번째 치과와 동일한 소견을 말했더라면 아마도 완고하신 아버지의 논리는 반증되었을 것이다. 의사의 재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않던 시절인지, 아니면 같은 동네의 경쟁 심리 때문이었는지 알 방법은 없지만, 이제 와서 해봤자 소용없는 분노에 불과하다.

아무튼 나는 송곳니가 하나다. 그 상실과 결핍의 결과, 나는 잠 자는 동안 이를 가는 습성이 있다. 군대에서나 각종 엠티에서 나는 이좀 그만 갈라는 사람들의 힐난 때문에 종종 잠을 깨곤 했다. 그러나 잠잘 때 이 가는 것만큼 고치기 어려운 것도 드물 것이다. 우선 나는 내 이 가는 소리를 도무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최근에 누군가가 이런 지적을 했다. 그건 무의식 중에 내 턱이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몸부림 치는 거라고.

논술 강사에게 수능시험은 단과반 강사와 종합반 강사와는 달리 '전쟁의 개전'이자 '대목의 시작'이다. 올 해 수시 파이널과 정시 기간 내내 나는 영남 지방의 두 도시를 돌며 '서울에서 오신 강사' 노릇을 하고 있다. 이 저열하고 치열한 전투 중 마침내 지난 달에 응시했던 교육대학원 합격자 발표가 났다. 결과는 당연히 낙방이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혀끝으로 살짝 벌어져 있는 이십삼 년 동안 없어온 송곳니 자리를 다시 훑었다. 오래도 된 습관.

아주 오랜 동안 나는 내 뒤틀린 턱뼈에 많이 속상해 하며 살았다. 언젠가 돈을 제법 벌면 인공 송곳니라도 다시 박아 넣어 최대한 턱뼈를 제 자리로 돌려보겠다고 계획했다. 신문에서 어쩌다 모 대학병원에서 획기적으로 부정교합 수술법을 개발했다는 기사라도 발견하면 조심스레 오려 서랍 안에 차곡차곡 모으기도 했다.

최근에 나는 조금씩 그깟 송곳니 하나, 라는 당연한 생각을 한다. 그래도 내겐 송곳니가 하나 남아 있다는 중얼거림이다. 어쩌다 만나는 장애인들을 생각해보면 엄살 중에 상엄살이요 호사스러운 밥투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도대체 우리들 중 누가 과연 장애인이 아닌가? 도무지 어디에 정상인이 있단 말인가? 누구나 다들 조금씩 아프고 조금씩 결핍되었고 조금씩 뒤틀어져 있지 않은가? 장애인 아닌 자 없다면 저마다 우리는 자기 손아귀에서 이제 그만 돌덩이를 내려 놓아야 한다.

내겐 아직 한 개의 송곳니가 있다. 내겐 한 개의 잃어버린 송곳니도 있다. 밤마다 나는 이별의 아픔과 서러움으로 하여 이를 벅벅 간다. 노래방에서 세 곡만 불러도 오른쪽 턱뼈가 아파오는 때, 나는 내가 버린 이십삼 년 전의 긴 이빨을 떠올린다. 삶은 때로 결핍이고 장애다. 그 아픔이 아무리 근소한 아쉬움과 소소한 불편이라 할지라도, 결코 누구도 공감해줄 수 없는 내밀하고 뼈저린 아픔인 것만은 맞을 것이다.  

단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더 늦기 전에 교정해야 한다고 되뇌이시는 어머님을 보며 "아무 불편 없는데 괜찮다"고 웃는 나는, 사실 내 방에 돌아와 담배를 빼어물며 다시 혀끝을 말아 올리곤 한다. 울산과 창원은 아직 화사한데, 서울은 확실히 겨울이다. 아직 내게, 삶은 살수록 새롭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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