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절망케 하는 것은 거듭되는 곤경이 아니라 거듭거듭 곤경을 당하면서도 끝내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은 반복입니다.
그러나 거듭되는 곤경이 비록 우리들이 이룩해 놓은 달성達成을 무너뜨린다 하더라도 다만 통절한 깨달음 하나 일으켜 세울 수 있다면 곤경은 결코 절망일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그것은 새출발의 디딤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꿈과 이상에 불타는 청년시절이 없다면 비록 세속적 의미에서 성공한 삶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대학은 그 사회의 청년시절입니다. 그 사회의 꿈과 이상을 창조하는 독립공간입니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으로부터 독립한 공간일뿐 아니라 무엇보다 바로 '오늘'로부터 독립한 공간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10년 후, 100년 후를 지향하는 대안담론, 미래담론의 창조공간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當無有用 당무유용
진흙을 반죽해서 그룻을 만들지만
그릇은 그 속이 비어있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깁니다.
유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입니다.
찻잔 한 개를 고를 때에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모양, 색깔, 무늬에 한정되어 있을 뿐
그 비어있음에 생각이 미치는
경우는 드뭅니다.
도무수유 道無水有
도는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물입니다.
지엽枝葉에 마음 앗기는 일없이
항상 근본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색色과 공空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부의 옛 글자는 사람이 도구를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일이 공부입니다.
공부란 삶을 통하여 트득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세계와 인간의 변화입니다.
공부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존재형식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존재형식은 부단한 변화입니다.
따뜻한 가슴(warm heart)과
냉철한 이성(cool head)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개인적으로 '사람'이 되고
사회적으로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사랑과 이성의
사회학이고 인간학입니다.
사랑이 없는 이성은
비정한 것이 되고
이성이 없는 사랑은
몽매蒙昧와 탐닉耽溺이 됩니다.
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워집니다.
고목古木이 명목名木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나무와 달라서
나이를 더한다고 하여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며
젊음이 언제나 신선함을
보증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노老가 원숙이
소少가 신선함이 되고 안되고는
그 연월年月을 안받침하고 있는
사색의 갈무리에 달려있다고 믿습니다.
어제의 반성과 성찰위에서
오늘을 만들어 내고
오늘의 반성과 성찰 위에
다시 내일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사색의 갈무리가
우리를 아름답게 키워주는 것입니다.
서삼독(書三讀)
책은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합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모든 필자는 당대의 사회역사적 토대에 발 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독자자신을 읽어야 하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필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脫走입니다. 진정한 독서는 삼독입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징역살이는 여름이 더 괴롭습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36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견디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구나 그 증오가
자기의 고의적인 소행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가장 큰 절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로부터 옵니다. 증오의 대상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
자기혐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