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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16-02-02
미디어 아시아경제_김동선

사람, 아 사람의 향기


누구에게나 흠모하는 이가 한두 명쯤은 있기 마련이다. 흠모라는 것이 기쁜 마음으로 공경하며 사모하는 것이니 굳이 이성이 그 대상이 아니어도 좋다. 지난달 작고한 신영복 선생이 그런 사람이다. 20년 영어의 기간 동안 안으로 삭였을 울분을 지성의 자양분으로 삼았던 분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선생을 떠올리지만 나의 경우 좀 다르다. 내가 선생을 처음 접한 것은 그가 번역한 중국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였다. 대학 신입생 때 친구 녀석이 '내가 왜 태어났는지 상당한 의문을 품으며'라는 알 듯 말 듯한 글귀와 함께 생일선물로 건넨 이 책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생의 책으로 삼고 있다.


다이 호우잉(戴厚英)이라는 여성 작가가 쓴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휴머니즘 소설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선생이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원문을 충실히 옮긴 소설 곳곳에는 그의 철학과 삶의 자세가 배어 있다.


책장 한쪽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이 책을 선생의 부고 소식을 접하고 다시 꺼냈다. 세월의 흔적은 책에 고스란히 남아 손때가 묻었던 종이는 누렇다 못해 붉은 기운까지 감돈다. 책장을 넘기자 오래된 책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주옥같은 문장마다 그어진 밑줄은 새록새록 기억의 표피를 깨운다.


나의 태생에 상당한 의문을 품었던 친구 녀석을 흉내 내며 이직이나 부서이동으로 후배들과 헤어질 일이 생기면 이 책을 주문해 건네곤 했다. '함께 배웠다 하여 끝까지 같은 길을 걷는 것도 아니며 길이 다르다 하여 반드시 다른 목적지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는 식의 책에 담긴 글귀를 함께 적기도 했다. 재작년 취재차 잠시 함께 일했던 한 중국인 유학생에게도 이 책을 선물했었는데 얼마후 본국으로 갔다 돌아온 그 친구는 반갑게도 원서를 답례해 왔다.
 
선생의 이 역서가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새해 벽두부터 들려온 비인간적인 사건 소식을 접하였기 때문이다. 최근 빈발하고 있는 인면수심의 범죄 앞에서 숭고한 인간애를 내용으로 하는 소설은 여러 가지 생각을 교차시킨다.


초등학생 아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시신마저 훼손한 부모에게선 인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90㎏ 거구의 무자비한 무력 앞에 저항조차 벅찼던 16㎏의 어린아이가 느껴야 했을 공포의 무게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가족을 살해하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숨진 또 다른 가장의 이야기는 씁쓸하기 그지없다.


충격적 사건이 잇따르자 정부가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지만 잊힐 만하면 터지는 이런 사건이 사라질지는 미지수다. 우리 사회가 '더불어' 사는 곳이 아닌 '각자도생'의 전장(戰場)이 된 지 오래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조차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는데 생면부지의 남들과 부대끼는 전쟁터 같은 사회는 오죽하겠나 싶다. 이런 사회에서 가족애를 넘어 인간애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너무 순진한 발상이라는 자조마저 들게 한다.


갈수록 인간의 냄새보다는 짐승의 악취가 풍기는 시대에 사람의 향기가 그립다.

 
김동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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