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칼럼] 인향만리 - 신영복 선배를 추모하며
좋은 꽃의 향기는 백 리를 가고
좋은 술 향기는 천 리 간다지만
좋은 사람 향기는 만 리를 간다
사람을 상품으로 평가하지 않고
아름다운 사회에 헌신한 사람
타계한 신영복이 바로 그런 분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좋아하고 존경했던 신영복 선배가 지난달 15일 영면에 들었다. 조문을 다녀와 고(故)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을 찾아 읽었다. 시에서처럼 신 선배는 이 땅에서의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갔을 것이다. 국어사전은 소풍을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야외에 나갔다 오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하늘로 돌아간 신 선배는 20년을 감옥에서 보내고도 ‘한국에서의 75년의 소풍은 아름다웠다’고 이야기할까? 아마 그럴 것이다. 내가 아는 신 선배라면 20년을 감옥에서 보냈을지라도 분명 한국은 아름다웠고, 앞으로도 더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말할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많은 인연을 만난다. 돌아보면 그중 오늘의 나를 있게 하고 앞으로의 나를 만들 특별한 인연들이 있다. 나에게는 신영복 선배와의 인연도 그런 특별한 인연 중 하나다. 그 인연은 나의 경제학자의 길에,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영향을 줄 것이다.
신영복 선배는 내가 대학 1학년 때 처음 만났다. 신 선배는 내가 가정교사를 하던 집에서 오랫동안 가정교사로 있었다. 당시 나는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생활과 경제학에 흥미를 못 붙이고 방황하고 있었다. 신 선배는 시대의 지성으로 성공회대에서 후학을 양성할 때도 그랬고, 건강이 많이 안 좋다는 소식에 병문안 가서 뵈었던 운명 며칠 전에도 그랬듯이, 20대인 그때도 단정했고, 겸손했으며, 곧았다. 천생 선비였다. 그때 신 선배는 “자네보다 내가 서울상대를 7년 먼저 다녔으니 충고 한마디 하겠네”라면서 “나는 다른 분야에 관심이 많고, 학교에서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아서 경제학 공부를 별로 못했는데, 자네는 전공을 제대로 공부하게”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영국 경제학자 힉스(J.R. Hicks)의 『사회구조론(The Social Framework)』을 추천해주었다. 힉스는 그때부터 내가 아주 좋아하는 경제학자가 되었다. 헌 책방에서 구입한 『사회구조론』은 경제학에 정 붙이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경제학은 한번 도전해볼 만한 학문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신 선배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그 책의 존재를 몰랐다면, 나는 미련 없이 경제학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갔거나, 그 근처를 맴돌며 방황과 갈등을 거듭했을지도 모른다. 그 책은 이론 위주의 경제‘학’ 책이 아니라 현장 설명도 담은 ‘경제’학 책이어서 더 좋았다. 나는 교수 할 때 이 책을 ‘경제학개론’ 과목의 교재로 썼다.
신영복 선배는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동반성장연구소’ 현판도 써주었다. 나는 2012년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했다. 동반성장위원회를 그만둔 뒤 3개월 후였다. 나는 우리 사회가 부정의, 불평등과 설익은 시장자유주의 때문에 1:99의 양극화 사회로 구조화되면서 심각한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를 극복해 함께 잘 사는 동반성장사회로 바꾸는 일에 진력하기로 마음먹었다. 연구소를 만들면서 신 선배에게 현판을 부탁했고, 신 선배는 흔쾌히 ‘동반성장연구소’를 써서 보내주었다. 한편으론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론 현판에 스며 있을 신 선배의 ‘인간애’의 철학과 ‘역사진보에 대한 희망’의 가르침을 동반성장사회 구현으로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무겁게 다가왔다.
인향만리(人香萬里). 좋은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는 뜻이다. 좋은 꽃의 향기는 백 리를 가고(화향백리:花香百里), 좋은 술의 향기는 천 리를 간다(주향천리:酒香千里)는 말과 함께 음미하면 좋은 사람의 향기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좋은 사람의 향기는 다른 사람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좋은 향기 나는 사람이란 사람을 상품으로 평가하지 않는 ‘인간 존엄성’의 구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다. 신영복 선배가 그런 사람이었다. 사회활동을 다시 시작하면서 먹물이 한지에 스며들 듯 조용히 우리 사회에 인간애의 정신을 전파했고, 인간존중의 문화를 만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신 선배가 20년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한국에서의 75년의 소풍은 아름다웠다’고 이야기할 것으로 믿는다. 남아 있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당신이 꿈꾼 인간 존엄성이 보호·존중되는 아름다운 사회로 만들어갈 것임을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 나는 인간존중의 동반성장사회 구현을 꿈꾼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