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러지 시대에 동양고전을 처방하다
연금술사 신영복의 <강의>,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평화롭게
오마이뉴스 - 정민호 (hynews20)
고난의 시기를 겪은 이들은 고난의 끝에서 자신을 탈바꿈해 돌아온다. 고난을 잊으려는 이들은 '로맨티스트'로, 고난을 준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이들은 '혁명가'로 돌아온다. 그런데 신영복 교수는 다르다. 누구 못지않은 고난을 겪었음에도 로맨티스트나 혁명가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를 보고 있자면 '연금술사'라는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 현대사의 희생양이 되어 혹독한 고난의 구덩이에 빠졌던 그는 고난을 희망과 믿음으로 승화시킨 연금술사로 탈바꿈했다.
승화시켰다는 것, 그것은 말이 쉽지 직접 그렇기 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다. 허나 신영복 교수는 그렇게 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영복 교수는 돌로 금을 만든다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연금술사처럼 고통이라는 단어를 자기성찰을 거쳐 희망과 믿음으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그것을 그 순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져 오게 만들고 있다.
원망의 대상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다'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라는 <강의>는 그러한 신영복 교수의 연금술의 정점을 이루는 결실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개인의 성찰을 이루어냈다면 <강의>는 개인을 넘어 사회의 성찰을 꾀하고 있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꾀하는 성찰의 대상인 사회가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혹독한 고행을 겪게 했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원망의 대상에게 구원을 손길을 내미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로맨티스트나 혁명가라면 결단코 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신영복 교수는 연금술사이기에 그것을 가능케 한다. 개인을 고난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혼란한 사회를 위해 기적을 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연금술사가 기적을 행하려면 '현자의 돌'이란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마음이나 열망을 구체화시켜줄 수 있는 '매개체'로 그것이 있어야만 돌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 신영복 교수도 그런 매개체가 필요했을 테다. 개인의 성찰과 달리 사회의 성찰은 개인의 마음과 열망만으로 가능할 수가 없다. 혼탁하고 무절제하고 광기가 넘쳐흐르는 사회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신영복 교수도 현자의 돌을 들었는데 그것의 정체는 낯선 것이 아니다. 현자의 돌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은, 공자와 맹자 그리고 노자와 장자 또한 순자와 묵자 등 그 옛날 세상의 순리를 바로잡기 위해 중국 땅에서 나타났던 동양의 사상들이니 누가 그걸 낯설다고 할 수 있겠는가.
허나 낯익은 것이기에 다소 뜻밖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이 사상들이 태어난 중국에서조차 문화대혁명을 끝내고 희대의 혼란기를 맞이했을 때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로 생각한 것이 사르트르와 니체 등의 이름을 앞세운 서양의 근대사상이었다.
왜 동양 사상가인가또한 오늘날에는 시장경제 바람이 불면서 피터 드러커 같은 시장경제의 대가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공자나 노자 등의 이름은 설 곳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태어난 곳이 이러할진대 먼 땅의 우리는 어떠한가? 마찬가지다. 동양의 사상가들은 존재했던 이름일 뿐이고 그들의 사상은 잊혀진 지 오래다. FTA라는 단어가 시대를 상징하는 이때 누가 과연 주역과 서경을 운운하겠는가. 이런 때에 그런 단어를 들먹인다면, 비웃음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 오늘의 시대다.
그런데 신영복 교수는 묵묵히 그 단어를 꺼내고 있다. 더군다나 시대의 구원으로까지 치켜세운다. 그래서 강의를 한다. 동양의 고전들, 저 멀리 중원의 대륙에서 뜨고 졌던 그것들을 유비쿼터스 시대를 앞둔 이때에 시대의 광기를 잠재우고 인간성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열쇠라고 말한다. 모든 연금술사가 꿈꿨던, 기적을 행하는 현자의 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신영복 교수는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과거를 재조명해야 한다며 운을 뗀다. 그리곤 그것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기본 관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신영복 교수의 말은 일견이 아니라 백번 타당하다. 누가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필연적으로 한 가지 걱정이 떠오른다. 오늘날처럼 빠른 것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이런 작업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인간과 자연, 그리고 조화와 균형신영복 교수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테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강의를 하려 한다. 마치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몸소 보여주듯이 강의를 한다. 하기야 단추를 하나만 잘못 꼈을 경우 아무리 서둘러도 제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과거를 제대로 우리의 내면화시키지 못했다면 아무리 빨리 서둘러도 오늘이나 미래의 모습을 보장할 수 없다. 과거와 단절된 채, 혹은 과거에서 고개를 돌린 채 무엇을 기약할 수 있겠는가.
신영복 교수는 <강의>에서 동양고전의 의의를 '인간'과 '자연', 그리고 '조화'와 '균형'으로 설명한다. 시경이나 서경, 논어나 맹자 등 동양고전들 각각을 살피기에 앞서 일종의 핵심 키워드를 알려주는 것인데 그런 만큼 동양고전을 넘어 <강의>의 의의 또한 이 네 가지 단어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조화와 균형으로 말이다. 이 키워드들은 어느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는, 서양이 아닌 동양 고유의 것인데 현대에는 그 의미가 빛바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동양 또한 '서양화' 되다 보니 우리의 것을 놓치고 만 것인데 신영복 교수는 오늘의 사회에 꼭 필요한 것들로 이 단어들을 꼽고 있다. <강의>는 누차에 걸쳐 그것을 강조하며 그것이 동양고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하는데 그 필요성을 역설하는 대목들에서는 가슴을 파고드는 간절함이 절실히 드러난다. 특히 자신이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벼랑으로 밀었던 사회를 자식 잃은 어미의 심정처럼 비통하고 안쓰럽게 바라볼 때는 신영복 교수의 연금술을 의심하고 싶어도 의심할 수가 없다. 그 진심을 욕할 수가 없기 때문이리라.
동양고전에 대한 신영복 교수의 박식한 해설, 주옥같은 문체와 문체에 담긴 진실함, 그리고 <강의>를 통해 말하려는 것에 대한 간절함 때문에 <강의>는 '책'이라기보다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 <강의>를 읽으며 단지 하나의 책을 읽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리라. 불가능해 보이던 것, 동양고전이라는 과거를 갖고 오늘과 내일을 모색한다는 그 허황된 것처럼 보이던 것을 꿈꾸는 신영복 교수와 마음이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적 그대로 단절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엮어주며 질주하는 테크놀로지를 인간과 자연의 가치로 막아서는 신영복의 <강의>. 고통을 희망과 믿음으로 승화시켰던 마음과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 대상에게 따스한 손을 내미는 마음이 담긴 신영복 교수 삶의 결정체라도 불러도 과찬이 아니리라.
< 오마이뉴스 - 정민호 (hynews20) 2005.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