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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07-11-01
미디어 인물과 사상_지강유철대담

[인물과 사상] 2007년 11월호 신영복 인터뷰

 

“실천이 곧 우리의 삶입니다.”

성공회대 석좌교수 신영복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성공회대 석좌교수 신영복을 만났다. 식사 시간을 포함하여 3시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의 대화는, 예순 여섯의 나이에 2주간 금강산 기행을 너끈히 소화해낸 건강이 무색할 만큼 그의 사색과 문제의식이 여전히 깊고 치열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20년 감옥에서 나와 우리 곁에서 다시 20년을 산 신영복으로부터 조곤조곤 사색, 성찰, 실천, 희망,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에 대해 듣는 일은 행복했다. 이 인터뷰는 지난 10월 5일 성공회대학의 신영복 교수 연구실에서 진행되었다.


취재 : 지강유철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어떻게 보셨는지요.
 

남북의 평화정착과 교류, 협력의 확대에 관해 상당부분 합의되었다는 점에서 참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역사적으로 분단시대로 시대구분이 되리라고 하지요. 그러나 이 분단시대의 기본모순이 남북모순으로 기록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갖는 의미도 제한적이라고 보지요. 북에서는 북미관계가 모순의 기본축이라 생각하고 있고, 중국이나 일본은 대륙과 해양세력 간의 모순관계라고 보고 있거든요. 물론 남북관계도 일정 부분 모순관계에 있는 것만은 사실이고, 이번 정상회담이 남북 모순의 일정한 해소라는 의미에서 잘된 일이지요. 동북아시아 질서의 변화와 북미관계의 해결이라는 맥락 안에서 남북정상회담도 함께 가는 게 아니겠어요? 남북정상회담은 그러한 동북아시아의 일정한 정치변화와 진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번 회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지도층의 추락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회

 

이번 대선이 갖는 남다른 중요성이나 의의가 있다고 보시는지요.

 

우리 사회는 87체제와 97체제를 거쳐 2007체제에 이르고 있습니다. 너무 범박한 평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87체제는 불철저한 민주화체제였다고 봐요. 흔히 내각 책임제를 일컬어 지배세력 내부의 민주주의가 잘 관철되는 정치체제라고 하잖아요. 87체제는 학생, 시민, 노동자들로 대변되는 민중들이 최전선에서 싸워서 쟁취한 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불사르고, 구속되고, 감쪽같이 실종되는 등 엄청난 싸움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정부 그리고 김영삼 정부로부터 배제되었습니다. 88년에 출옥해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불만을 듣게 되었습니다. 민주화 투쟁의 성과를 빼앗겼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농담으로 그랬습니다. 재주는 곰이 부렸는데 돈은 중국 놈이 가지고 간다는 속담이 있지 않느냐? 왜 그런가 하면, 그 판을 중국 놈이 조직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웃음) 저는 감옥에 있을 때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성격이 궁금했어요. 어떤 정치적 성향의 집단이 그 참모부를 장악하고 있는가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물었는데 시원하게 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물론 87체제가 그렇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봐요. 당시의 민주화 운동역량이 취약하기도 하였고 특히 투쟁의 대상이 되었던 보수구조의 완고함도 대단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한 군사정권이 아니었다고 해야지요. 당시의 군사정권은 막강한 외세, 그리고 국내의 완고한 보수구조와 결합되어 있었지요. 이처럼 열악한 객관적 조건과 취약한 민주역량이라는 구도가 결국 불철저한 민주화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87년 이후에 민주화와 개혁이 상당 부분에 걸쳐서 진전이 있었지만 IMF 관리 체제인 97체제에 직면하게 되지요. 97체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97체제는 이전의 군사정권과 그 정권의 배후에 있던 오래된 보수구조를 상대하는 것에 더해, 소위 초국적 금융자본이라는 엄청난 군력과도 상대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어요. 우리는 이 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죠. 제가 4·19세대입니다. 59학번이니까 4·19때 대학 2학년이고, 3학년 때 5·16을 겪었어요. 어리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우리는 4·19에 굉장히 감동했어요. 엄청난 정치권력이 무너지는 걸 보았으니까요. 그리고 단순히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다는 의미를 넘어서 우리사회의 어떤 것들이 억압당하고 있었는지를 목격하게 되었어요. 4·19 이후 공간에는 80년대에 나타났던 부문 운동들이 거의 대부분 태동하였었지요. 노동운동은 물론이고 교원노조도 그때 결성되었어요. 심지어 지역에서는 피 학살자 유족회도 발족되었어요. 그래서 ‘4·19는 총탄이 이마를 뚫고 간 혁명’이라는 감동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년 후 5·16이 일어났어요. 4.19공간에서 나타났던 운동들이 전멸되는 그런 겨울공화국이 되어 버렸지요. 5·16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는 국내의 보수구조 뿐만 아니라 엄청난 외세구조가 하나 더 있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4·19는 총탄이 이마를 관통한 게 아니라 모자만 뚫고 지나간 혁명’이었다고 수정하게 되지요. 97체제란 그 때까지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억압구조가 드러난 것이었어요. 물론 97체제는 군사정권 기간,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해방이후 구축해 온 경제구조의 필연적 결과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97체제는 냉전구조가 일정하게 해빙되면서 그동안 유보되었던 한국지역에 대한 국제자본의 수탈체제가 작동한 것이기도 합니다. 97체제 이후 그 동안 쌓아왔던 여러 정치 경제적인 성과들이 급속하게 무너지게 되지요. 심지어는 민주화와 개혁을 통해 이룩한 여러 가지 정책들이 거의 희화되는 과정을 겪으며 오늘의 2007년에 이른 것입니다. 2007체제는 그나마 불철저한 민주화와 엄청난 국내외의 억압구조 속에서 답보해왔던 일정한 개혁적 흐름마저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됩니다.


 

신정아 씨의 알 몸 보도 사건에서 보여 지듯 제도 언론이나 검찰의 인권의식이 개탄스럽습니다. 우리의 인권의식을 어떻게 길러야 하겠는지요.

 

신정아 씨 사건을 인권문제로만 성격 규정 하기는 어렵지요. 신정아 씨 사건은 우리 사회의 잘못된 학벌 중시 구조를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고, 사회비리의 일환이기도 해요. 이번 사건의 보도를 선정성으로 일관하는 제도 언론의 상업성도 문제구요. 저는 오래전에 읽은 것이지만 『타락론』의 내용이 생각났어요. 일본에서도 사회의 주류층이나 저명인사들이 곤혹스러운 스캔들에 말려드는 사건이 일어나면 언론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그걸 즐기는 분위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의 추락을 가슴 아파하기보다는 그 사건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사회 심리적 현상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거죠. 20대 80의 사회구조 속에서 20에 속하는 사람들의 추락이 80에 속한 사람들의 심리적 위안이 된다면, 그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저는 이 사건이 단지 학벌이나 비리사건을 넘어 우리 사회의 균열이 심각한 수위에 이르렀다는 것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봅니다.


 

신영복은 1941년 밀양에서 지주의 딸이었던 어머니와 일제치하에서 일본인 교장의 차별에 저항했고 한글 연구 서클에 가담했다가 해직되기도 했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에 경험한 6·25와 그 시대의 가난으로부터 깊은 충격으로부터 자기반성을 배운 신영복은 서울대와 동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동안 경험한 4·19와 5·16를 통해 비판적 지식인으로 서게 되었다. 숙명여대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20년을 복역한 후 1988년 8월15일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하였다. 그 이듬해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비정규직 교수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동양철학’을 강의하던 중 1998년 3월 15일에 사면·복권되어 후학을 길러내다 2006년 8월 정년퇴임하였고 현재는 동 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 출옥 클래식 음악 담당 PD로 지내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고 지금은 고등학생 아들을 두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옥중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필두로 국내외 여행을 하고 쓴 『나무야 나무야』와 『더불어 숲』, 성공회대 동양고전 강의의 녹취를 풀어 엮은 『강의』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다이허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외국무역과 국민경제』 그리고 공역한 『노신전』과 『중국역대시가선집』 등이 있다.


 

문제는 이념이 아니라 양심
 

60년대 중반에 교수님께서는 가난한 어린이들과 청구회를 조직·운영함으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은 많은 독자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교수님의 남다른 어린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초등학교 3학년과 4학년 때 경험하셨던 충격적인 사건의 영향이었을까요, 아니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더 컸을까요.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하게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자각은 없어요. 우리 때는 모두가 어렵게 살았지만 저는 다른 친구들이 그렇게 어렵게 사는지를 잘 몰랐어요. 아버님이 교장선생이었기 때문에 학교 사택에 살았고, 집에는 전깃불이 들어왔으니까요. 그러다가 4학년 때에 한 친구가 매우 어렵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것은 전쟁기간 동안에 목격했던 교량의 양쪽 난간에 매달아 두었던 좌익들의 수급을 보았던 것만큼이나 충격적이었어요. 제게 어린이들에게 애정이 있었다면 당시의 가난하고 험난했던 세월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당시 어린이들은 대부분 부모나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했었어요. 요즘은 학습이든 육아든 과잉보호 상태여서 어린아이들에 대하여 과거와 같은 대한 애틋함이 많이 없어지지 않았나 생각해요. 어린이 천사론도 거짓말인 것 같고(웃음), 아이들이 대단히 이기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지금은 해요.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집안과 학벌을 가지셨던 교수님께서 어떻게 감옥 안의 가장 밑바닥 인생들을 가까이 하며 그렇게 열심히 배울 수 있었는지요.

 

어머니는 지주 집안의 외동딸이었어요. 아버님은 대구 사범학교를 나오셨으니까 그래도 자작농 정도는 되셨겠지요. 집안으로만 보자면 저는 좌익 사건에 연루될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어요. 때문에 독방에 갇혀서 “내가 왜 여기에 앉아 있는가?”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어요. 그러한 고민의 결론은, 이념 때문이 기보다는 양심의 문제였다는 것이었어요. 4·19와 5·16사이에 목격했던 우리사회의 억압구조에 눈 뜨게 되기도 하고, 그러한 엄청난 억압과 부조리에 대한 청년다운 감수성 때문에 감옥에 앉아 있다는 생각을 한 거죠. 어린이들이나 약자들에 대한 저의 감정이 특별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형님들과 누님들 사이에 끼어 있어서 집안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어요. 형제들도 많았고, 사촌 형님 두 분도 우리 집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그 많은 식구들 틈새에서 별로 존재감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바깥에 나가면 친구가 많았어요.(웃음) 왜냐하면 저는 가난한 친구들에 대한 배려도 없지 않았고, 어렵게 살고 있었던 친구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이 보호받는다는 미안함 때문에 벌을 자초해서 받기도 했었어요. 몇 년 전에 고향의 초등학교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어요. 감회가 새로웠지요. 교사(校舍)도 너무 작았구요. 그런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제가 자주 벌을 섰던 복도였어요. 그때 저는 일부러 벌 서는 일이 많았거든요. 친구들로부터 “너는 우리 학교 교장은 아니지만 아버님이 교장 선생이고, 너의 아버님 제자들 중에 우리학교 선생들이 많아서 1등을 한다.”는 말이 듣기 싫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이후에는 1등을 아마 안 했을 거예요. 1등을 못했는지 모르지만.(일동 웃음) 얼마나 벌을 많이 섰으면 수십 년 만에 학교를 방문했는데 벌 받았던 곳이 생생하게 기억났겠어요. 집안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그 대신 할아버님이 저를 많이 가르치셨어요. 형제들 중에 할아버님 사랑방에 제일 많이 불려가서 붓글씨라든가 학문을 배웠던 그런 손자였으니까요.

 

 

사상 보다는 그것의 인격화가 중요

 

교수님께서는 양심 때문에 감옥에 가셨지만 다른 분들은 이념이 아니라 체질이 문제라고 하던데요.

 

체질보다는 인간적인 바탕이란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만 그럴 수 있다고 봐요. 저는 5·16 이후 학생 서클을 시작한, 그러니까 60년대에 학생 서클 운동을 한 첫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소위 이념 서클에서는 이상적인 운동가의 자질로 평가했던 요건이 있었어요. 첫째, 사상이 진보적이어야 하고 둘째, 사회적 사명감에 투철해야 하며, 셋째로는 논리적이며 조직적일 뿐 아니라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제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 같이 운동했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를 가끔씩 생각했지요. 20년 후에 출소하고 나서 그때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수소문해보았어요. 그런데 예상 밖이었어요. 그렇게 뛰어났던 사람들, 진보적인 사상과 사명감과 대단한 역량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른 곳으로 갔더군요. 출세한 사람도 많았고, 심지어 사업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도 있었어요. 반면에 계속 운동 현장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생각 밖의 사람들이었어요. 당시에는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러니까 진보성이나 사명감보다는 친구들이 힘들게 운동하는데 자기가 참여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참여했던 사람들이 꾸준히 현장을 지키고 있었어요.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머리보다는 가슴이겠지요. 일생을 살면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논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냉철한 머리보다는 따뜻한 가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사상이나 논리보다는 그것을 품성화하고 인격화하는 것이 더 어렵고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와 가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요.


 

앉으실 때 벽에 기대지 않을 만큼 곧고 강직한 태도를 지녔던 부친의 태도는 조선시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선비의 전통에 맞닿아있는 것일까요. 또 하나, 교수님의 구도자보다 더 구도자 같은 모습은 아버님의 영향 때문이라 보시는지요.

 

저는 아버님만큼 구도자적인 삶을 살고 있지 못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감옥의 검열과 걱정하는 가족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쓴 엽서였어요. 당시 저는 감옥의 관리들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내용으로 쓰면 검열에 통과될 수도 없구요. 그렇게 엄격한 자기 검열을 했기 때문에 제 글속에 나타나는 이미지가 구도자와 비슷하다고 느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웃음) 그러나 아버님께는 그런 모습이 있었어요. 아버님의 세대가 그러하기도 했거니와, 절대로 거짓말이나 농담이나 노래 같은 걸 안하셨거든요. 가족들 간에도 별 대화가 없었고, 제자들도 한결같이 무서운 선생이라고 했었어요. 그런 성격 때문에 일본인 교장의 차별에 반대했고, 또 한글 연구 서클에 가담했다가 해직교사가 되기도 하셨지요. 제가 볼 때 아버님께는 식민지시대의 창백한 인텔리라는 자기 콤플렉스가 상당히 있었던 분 같아요. 저의 고향 밀양이라는 곳이 의열단의 본고장이거든요.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이 밀양 출신이고, 밀양에서 의열단을 처음 창립할 때에 함께 했던 13명 중 9명이 밀양 출신이었어요. 그래서 밀양 경찰서가 폭파되기도 했고, 해방 이후에는 유성모직이라는 큰 모직공장이 있어서 노동운동 기반도 상당히 강했습니다. 아버님은 고향 출신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김종직의 도학사상연구』라는 책을 쓰시기도 했는데 점필재 김종직은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이잖아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훈구세력에 대한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문화가 남아 있었던가 봐요. 아버님은 아마 그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창백한 관념성을 통절하게 깨닫게 해 준 20년 옥살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수신자가 가족으로 한정된 것은 어떤 연유 때문인지요.

 

일단 사상범들에게는 직계 가족 이외에는 서신·접견이 일체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20년 동안 가족 아닌 사람과 단 한 번도 접견하거나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없습니다.


 

20년 동안 가족 이외에는 어떤 사람과도 서신 교환을 못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그렇게 관리가 된 것이지요.


 

글을 못 쓰게 한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의 끔찍한 형벌이었겠네요.

 

재소자는 ‘누진 처우 규정’에 의해서 서신 발송 횟수가 제한이 됩니다. 처음엔 한 달에 한 번만 서신을 보낼 수 있었고, 다시 몇 년이 지나면 한 달에 두 번, 이런 식으로 차츰차츰 서신 발송횟수가 늘어갑니다. 제가 가족들에게 양말, 러닝셔츠 보내라는 내용이 아니라 다른 내용을 썼던 것은 징역살이를 처음 시작하면서 받았던 충격 때문이에요. 학교 공간에서 키워왔던 저의 생각이나 정서들이 감옥이라는 전혀 다른 공간에 던져졌을 때 굉장한 충격을 경험했어요. 그림을 그릴 때 주춧돌부터 그리는 나이 많은 목수로부터 충격을 받기도 하고, 큰 대(大)자, 옳을 의(義)자 이름을 가진 정대의란 청년을 보면서는 부모님이 좋은 뜻을 담아서 이름을 지었을 텐데 나이 서른에 절도 전과가 세 개나 되니 부모님의 속이 얼마나 상했을까, 라고 생각하였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고아로써 광주 도청 앞에 있는 대의동 파출소 앞에 버려졌기 때문에 이름이 정대의였어요. 이런 충격적인 경험들을 통해 저는 문자를 통해 사고하고 있는 제 자신의 창백한 관념성을 통절하게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러한 충격적 반성들을 엽서에 기록해 두었다가 언젠가 다시 그 글들을 읽으면 그 시절을 생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미리 메모를 할 수도 없고, 종이 한 장 볼펜 한 자루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기록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집으로 보내는 엽서였어요. 한 달 내내 머릿속에 정리해 두었다가 엽서에 기록했었어요. 아버님은 옛날분이어서 제가 보낸 편지들을 차곡차곡 모아두었어요. 양심수 석방운동을 하고 있었던 후배들이 옥중서신들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평화신문>은 엽서중의 일부를 요약해서 실었어요. 독자들의 반응이 참 좋다고 해서 몇 번 더 연재를 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책으로 내자는 의견이 모아져서 책으로 나오게 된 거죠. 물론 저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떤 교도관이 오더니 바깥에서 무슨 사건이 터졌나보다, 라고 하더군요. 안기부 분실 직원이 와서 제 서신대장을 전부 확인하고 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또 검찰 측 증인으로 법정에 호출되는가보다 했었어요. 그런데 교도관이 야간근무 때 <평화신문>에 실린 제 편지글을 보여주었어요. 안기부에서는 <평화신문>에 게재된 제 편지글 중 검열을 거치지 않고 나간 편지들이 있는가를 확인을 했던 것 같아요. <평화신문>연재에 이어 아예 책으로 출판하려고 했을 때 저의 부모님께서 연기를 요청하셨어요. “이제 20년 복역을 해서 곧 출소하게 될 텐데 이런 책이 나오면 오히려 불리하다”는 안기부의 전화를 받았던 때문이었어요. 출간이 한 차례 미뤄졌지요. 때문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출판일이 8월 15일로 찍혀 있지만 사실은 제가 출소하는 8월 15일보다 늦게 출간되었습니다. 저는 책의 제목만 붓글씨로 썼습니다.


 

형님들이 빠지고 형수님과 계수님께 엽서가 집중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계수님께 편지를 쓴 것을 두고 어떤 분들은 계수님께 연정을 품어서 그런 편지를 쓴 게 아니냐고 하더군요.(일동 웃음) 하지만 형수님과 계수님은 제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 시집온 분들이거니와, 형수님이든 계수님이든 저와는 인간적인 만남이 전혀 없었습니다. 형수님과 계수님을 수신인으로 하여 편지를 보낸 이유는 형님과 동생이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연좌제 때문에 제약이 많았습니다. 형님이나 동생의 이름이 서신대장에 기록되고 사찰 대상이 되는 걸 원치 않았어요. 제가 형수님이나 계수님의 이름으로 보내더라도 어차피 가족들이 전부 읽고 있었어요. 그래서 형수님 또는 계수님 ‘앞’이라고 쓰지 않고 ‘옆’이라고 썼지요.(웃음)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할 이야기에 따른 고민

 

앞으로 남은 20년 동안은 우리의 현대사 60년을 성찰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그것이 글쓰기로 결실이 맺어진다면 지금까지 써 오신 글들의 톤과 태도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형식이 될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이루는 엽서들은 지나치게 자기 검열을 하고 쓴 글이라는 걸 말씀드렸어요. 검열에 통과되어야 하니까. 사실 그 정도 수준의 글이 검열을 통과하였다는 것도 당시의 분위기에서 보자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어요. 행간에 나만 알게 묻어 두었던 이야기들도 없지 않지만 많은 이야기들을 쓰지 못 했지요. 그래서 ‘나의 대학시절’이라는 가제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났던 수많은 일반 수형자들의 참혹했던 이야기들 통해서 우리사회를 다른 시각에서 조명하기도 하지요. 그것은 이를테면 나의 사회학이 되는 셈이지요. 또 해방정국에서 활동했던 사람, 북에서 넘어 온 공작원이나 안내원, 특히 그 중에는 만주에서 태어나서 임표(林彪, 1906~1971)부대의 소년 나팔수로 북경을 거쳐 상해 해방까지 참가한 사람도 있었어요. 이런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현대사를 과거의 역사가 아닌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이야기로 생환하기도 하였지요. 그동안 써 놓은 원고가 상당한 분량에 달합니다. 그런데 작년 정년퇴임 후에 다시 읽어보았더니 두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우선은 어떤 서사의 형식으로 쓸 것인가가 문제였어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뿐 아니라 『나무야 나무야』와 『더불어 숲』은 모두 서간문 형식이었어요. 굳이 서간문 형식으로 쓴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지요. 하나는 감옥에 20년이나 갇혀 있었던 사람이 불특정한 다수에게 무언가를 주장한다는 게 외람돼 보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서신을 띄우는 형식이라면 독자들은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외람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었죠. 독자들로 하여금 그 서간문의 수신자가 바로 자기라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에 친근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서간문은 우리나라의 전통 문학사에 중요한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서간문이라는 게 참 답답해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감옥과 엽서라는 물리적인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고 또 멀리 있는 사람한테 쓰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친근한 대화가 불가능 합니다. 그에 비하여 『강의』는 실제 학교강의를 녹취하여 푼 것이기도 했지만, 일단 강의라는 형식이 참 편했어요. 우선 공간적으로 제한이 없어졌고, 가까이 앉아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어요. 곁길로 한 참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예화를 들기도 하였지요. 이 과정에서 저는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전범이 되는 글쓰기 형식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러시아 소설, 그리스 서사시, 그리고 영국 희곡에 비길만한 우리나라 고유의 형식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또 하나의 문제는 써 두었던 내용을 다시 읽어보면서 느낀 젊은 사람들과의 세대 차이였어요. 학교에서 젊은 학생들을 많이 만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투자체가 세대차이를 극복하고 있지 못했어요. 문장의 호흡이라든가 언어 선택을 획기적으로 바꿔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굉장한 작업이 되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현대사60년의 성찰과 관련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현대사를 본격적으로 대면하는 역사서술 형식의 글쓰기는 불편해서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현대사를 담는 방식이 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제가 정치경제학과 사회과학개론을 오래 강의했고, 한국사상사를 강의한 적도 있어서 이런 사회과학적 담론을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삶과 정서와 어떻게 결합시켜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소대장이 월북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수십 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던 사람의 기막힌 이야기를 쓰셨는데 이번엔 그런 이야기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되는 것인지요.

 

그 사람 이야기로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만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비단 그 사람의 사연뿐만 아니라 제게는 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지요. 20대 후반부터 감옥살이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로하신 분들은 제게 참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으셨어요. 당신은 이제 살아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제가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참 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된 셈이지요. 해방전후의 이야기에서부터 전쟁기간동안의 이야기 그리고 지리산 이야기도 대단히 많습니다. 88년 출소 당시에는 지리산을 소재로 한 소설들도 많았는데 제가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른 부분도 적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저도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책무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 숱한 이야기를 통하여 갖게 되는 생각은 역사란 그 흔적을 사람들 속에 가장 깊이 각인한다는 사실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한 성찰로서의 추체험
 

교수님의 책 읽기 습관은 가령 한 시간을 읽으면 30분은 사색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미덕은 느림의 미학인 것 같습니다. 빠른 템포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젊은 사람들의 정서와 동떨어져 있다고 한 것이 방금 지적하신 템포하고도 관련이 있습니다. 한정 없이 느린 템포로 가면 사람들이 지루해지고 해이하게 되지요. 가끔 악센트도 있어야 하고, 감정의 공감대가 형성될 때는 조금 속도를 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글쓰기에서 제 자신은 이런 것들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속도 보다는 여백이나 포즈(pause)를 더 중시하는 편입니다. 강조하기 보다는 오히려 절제하고, 다변적이기보다는 여백이나 묵언이 오히려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공감한 내용을 자기 공간으로 가지고 가서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죠. 저는 독서를 하면, 우선은 책의 텍스트를 먼저 읽고 다음으로는 그 텍스트를 쓴 필자를 읽고, 그 다음으로는 텍스트를 읽고 있는 나 자신을 읽는다고 생각해요. 때문에 제가 쓴 글을 독자들도 그렇게 읽기를 원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필자의 생각을 자기 공간으로 삼을 수 있는 여백이나 포즈를 두는 게 좋지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늦어지는지 모르겠어요. 독자와의 공감이 형성되고 있는 경우에는 좀 빨리 가져가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지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느끼게 되네요.


 

제가 음악을 통해 배운 가장 귀중하고 확실한 교훈은 반복이 주는 힘입니다. 교수님의 삶도 반복과 무관치 않을 듯싶은데…

 

저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이 성찰이라고 생각해요. 20년 동안 독방에 있었던 기간을 다 합치니 5년 쯤 되더군요. 그때 면벽명상(面壁瞑想)을 참 많이 했어요. 단전호흡을 하며 벽을 마주보고 앉아서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데 제 경우는 그게 잘 안 되었어요. 그래서 방법을 바꿔서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이나 겪었던 사건들을 다시 반복하면서 추체험(追體驗)했어요. 명상으로 다시 한 번 그 사건들이나 사람들을 체험한 거죠. 그 과정이 제겐 굉장히 의미가 있었어요. 아주 사사롭다고 알고 있던 사건 속에서 엄청난 해방정국의 정치적 성격이 들어 있었다는 걸 다시 발견하게 되었고, 잠깐 스쳤는데도 내 속에 오래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제 가슴과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이를 통해 저는 결국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어요. 진정한 자유란 다른 사람들과의 배타적인 정체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내 속에 들어 와 있고, 내가 겪은 모든 사건 또한 내 속에 들어와서 나를 만듦으로 동시대와 동시대 사람들과 얼마나 융화되느냐의 문제이거든요. 저는 그게 진정한 자유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체험이란 반복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반복이 주는 교훈과 힘을 몰랐을 때는 무슨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참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반복해 들은 것 외에 달리 한 게 없는데 완벽하게 느껴지던 음악의 허점이 보이더군요.

 

그럴 것 같아요. 제가 성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관계로부터 자연과의 관계까지를 브로드 캐스팅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토막 내서 소유하는 개인주의적인 아이덴티티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맺고 있는 사회 및 자연과의 일체성을 훼손하는 게 아닐까요.


 

무기징역이라는 길고도 어두운 좌절 속에는 괭잇날을 기다리는 무진장한 사색의 광상(鑛床)이 원시로 묻혀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우선 제 사고(思考)의 서랍을 엎어 전부 쏟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까울 정도로 과감히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지독한 ‘지식의 사유욕’에 어설픈 ‘관념의 야적(野積)’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늦게 깨달은 저의 치부였습니다. 사물이나 인식을 더 복잡하게 하는 지식, 실천의 지침도, 실천과 더불어 발전하지도 않는 이론은 분명 질곡이었습니다. 이 모든 질곡을 버려야 했습니다. 섭갹담등-짚신 한 켤레와 우산 한 자루-언제 어디로든 가뜬히 떠날 수 있는 최소한의 소지품만 남기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취사(取捨)의 작업은 책상 서랍의 경우와는 판이해서 쉬이 버려지지도 쉬이 챙겨지지도 않았습니다. ……까닭은 버려야 할 ‘것’, 챙겨야 할 ‘대상’이 둘 다 서랍 속의 ‘물건’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인 ‘소행’이었기 때문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나마 정돈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징역살이라고 하는 욕탕 속같이 적나라한 인간관계와, 전 생활의 공개 그리고 선승(禪僧)의 화두처럼 이것을 은밀히 반추할 수 있었던 면벽(面壁十年)의 명상에 최대의 은의(恩誼)를 돌려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실천이 곧 우리들의 삶

 

관념성으로부터의 벗어남은 많은 지성인들의 고민이자 딜레마인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실천과 사상과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까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 인생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가장 먼 여행이라고 했는데, 그와 함께 저는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이란 실천의 문제이자 현장의 문제이지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졌다면 개인으로서는 아주 훌륭한 품성으로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의 완성이란 낙랑장송이 되는 게 아니라 다른 나무들과 함께 숲이 되는 것이거든요. 그게 가슴으로부터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숲이라고 볼 수 있고, 삶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개인이 아름다운 품성으로 자기를 고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숲을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먼 여행을 하는 일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천이란 이론의 궁극적인 종착지입니다. 이론이 실천을 통해서 그 진리성 여부가 검증되기도 하고, 또 실천의 결과가 이론으로 다시 재정리어 나타나기도 하지요. 그게 다시 실천 과정에서 진리성이 검증되는 변증법적인 통일과정 속에 있게 되기 때문에 저는 실천의 문제가 가장 궁극적이지 않겠나 싶어요. 실천이 곧 우리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신 말씀은 이론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실천, 사상, 이론의 고유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이론이나 진리 자체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봐요. 불변하는 별처럼 우리가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이론이나 진리는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오히려 이론이란 세계에 대한 참여의 방식이자 세계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E. H. 카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를 보면 과거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이 역사가 아니라 역사가가 선택하여 조직한 것이 역사입니다. 팩트의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역사가가 자기의 입장에서 선택하고 조직한 히스토리컬 팩트가 ‘사실’(史實)이 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역사라는 것은 과거 그대로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읽은 과거입니다. 이론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론이란 그 자체가 항구성을 갖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어떤 주체가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고 조직하며 또 어디서부터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보는 거죠.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부터 특히 더 심해진,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 향해 가하는 폭력과 경박함을 보다보면 바로 저게 이념과 삶이 뒤바뀐 현상의 끔찍함이 아니겠나 싶더군요.

 

저는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에 대해 지지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장 중요한 사회개혁의 담론자체를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않습니다만, 방금 말씀하신 그 부분에서는 상당부분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합니다. 돌이켜보면 인간이나 사회를 어떻게 건축할 것인가에 대한 사전적(事前的) 선행의지가 역사적으로 있어왔고 또 그것이 중요했습니다. 신학적 구조에서부터 계몽주의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또는 헤겔의 시대정신이 보여주는 것처럼 과거에는 인간이나 사회에 대한 건축의지가 전재되어 왔습니다. 그러한 설계도면으로부터 당면의 실천을 받아오는 구조였죠. 때문에 실천 자체가 교조적 이데올로기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이 바로 그 건축의지를 해체한 것이거든요. 저는 이 점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뛰어난 역사적인 역할이라고 봐요.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에 분명하게 내제된 정치적 의도는 경계해야 합니다. 막강한 자본축척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정치권력과 그것들이 가지는 여러 가지 문화적인 기제들이 완비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회 개혁담론을 해체해버리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성이 섬뜩하기는 해요.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건축적 의지를 해소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막강한 지배기제가 작동하고 있는 현재 상황 속에서 우리가 나누는 대화나 소통이 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봐요.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지배구조와 우리들의 감성은 물론 문화적인 방식까지 포섭해 내는 새로운 기제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자유와 인간적인 정체성을 지켜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당면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나무처럼 주어진 조건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아름다움

 

난세를 어렵게 통과했던 옛날 어른들은 오로지 신념 하나만을 위해 냉혹할 정도의 절제로 자기 삶을 관리한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이념과 관계없이 존경스럽기는 합니다만 아쉬움도 적지 않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아버님보다는 음악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스포츠를 통해 삶을 향유하신다고 생각되긴 합니다만, 모든 걸 버리고 뜻을 이루는 것과 삶의 향유가 어떻게 조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자기의 철학이나 의지를 쉽게 버려서는 안 되겠지만 저는 나무같이 살면 된다고 생각해요. 나무란 자기의 자리를 선택하지 않아요. 저는 나무처럼 우리의 삶도 어느 지역, 어느 시공간에 던져졌다고 봅니다. 때문에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요. 이렇게 보면 아버님과 저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는 거죠. 던져진 시공이 다르니까. 탱자나무는 울타리 역할로 서 있기 때문에 계속 뻗으면 잘리고 또 잘려서 속 이파리나 가시가 안으로 키울 수밖에 없고, 반면에 넓은 벌판에 서 있는 활엽수는 자유롭게 뻗어나갑니다. 저는 자기가 던져진 시대와 사회의 여러 가지의 실존에 대하여 자기의 가치나 의지를 전면에 내세워 직선적 대결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생명으로서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참담하리만큼 직선적 삶이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감동적인 메시지를 던져주기도 해요. 그렇다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삶은 될 수 없다고 봐요. 사람들은 나무처럼 자기가 던져진 곳의 바람과 물과 토양 속에서 자기를 키워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는 나무나 물처럼 무리하지 않습니다. 물은 두 가지 품성을 가지고 있어요. 우선은 부쟁(不爭), 다투지 않지요. 제가 부쟁을 말하니까 노동운동하는 분들이 “그러면 전투성을 포기한다는 거냐?”고 묻더군요.(웃음) 그러나 ‘쟁’(爭)과 ‘전’(戰)은 다르거든요. 축구의 한일대항전에서 보듯 ‘전’은 상대방과 싸우는 것이고, ‘쟁’은 마라톤 같은 경기를 연상하면 돼요. ‘쟁’은 객관적인 조건과 주체적인 자기 역량을 잘 배려하기 때문에 물처럼 산이 막으면 돌아가고, 큰 웅덩이를 만나면 그 웅덩이를 차곡차곡 다 채운 다음에 뒷물을 기다려 나아갑니다. 물의 또 한 가지 미덕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다를 이뤄내지요. 우리 대학의 교육이념이 리더십보다는 펠로우쉽을 체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펠로우십 보다는 팔로우십, 그러니까 뒤 따라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웃음)


 

학생시절 줄곧 응원단장을 하였다는 것과 감옥에 이어 성공회대에서도 공을 잘 차는 축구선수였다는 이야기가 놀랍습니다. 현재의 교수님의 이미지와 쉽게 매치가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대다수 사람들에게서는 충돌하거나 한 쪽의 기능이 거의 소멸되는 반면에 선생님의 삶에서는 사색과 스포츠가 반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생각과 몸의 관계, 어떠해야 할까요.

 

몸 이야기를 하시니 메를로퐁티(Merleau-Ponty, 1908-1961)의 몸의 사회학이 생각이 나는군요. 메를로퐁티는 몸이란 세계와 내가 만나서 솟구치는 현장이라고 말했지요. 지금까지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몸의 문제를 굉장히 등한시 해 온 게 사실이에요. 인간의 문제를 정신의 문제로만 본 측면이 강했다고 봐요. 그러나 정신과 세계가 몸에서 만나잖아요. 그런 점에서 몸이란 주관과 객관이 동시에 용솟음치는 현장이라고 하는 메를로퐁티의 몸 철학에 상당부분 동의합니다. 제가 축구를 즐긴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저는 체육대회 같은 곳에 갔을 때 한 마디를 하라고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우리가 운동을 하는가? 그것은 생각대로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말해 정신의 한계를 깨닫기 위함이다.”(일동 웃음) 이처럼 운동은 우리가 도달한 관념적 수준을 반성하게 헤 주는 측면이 있어요. 문제는 20세기 말로 오면서 그간의 관념적 전통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몸을 지나칠 정도로 클로즈업 시킨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몸의 의미를 섹슈얼한 측면에서 일면적으로 부각시키지요. 물론 현대에 와서 몸이 사면(赦免)을 받아 온당한 자기 위상을 되찾게 된 것은 새로운 철학적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몸 자체를 상품화하거나 선정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몸의 타락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몸의 의미를 다시 부각시키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다시 새로운 전락(轉落)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생명의 외경과 존중을 상실한 할 현대과학

 

요즘 복제 인간들의 인격이나 존재까지도 인정하고 함께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데 교수님께서는 생명이나 환경 문제를 어떻게 사유하고 계시는지요.

 

예단이기는 합니다만 저는 인간의 인식 능력이 자연과 생명의 아주 오묘한 부분을 다 읽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대 물리학은 생명이든 물질이든 궁극적인 단자(아톰이라고 하기도 빌딩블록이라고 하는)가 없다는 가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당연한 결론으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자가 있다고 했지만 요즘은 그게 없다고 하죠. 최근에는 물질의 최소 단위를 길이를 가진 초끈으로, 초끈 이론(Super String Theory)에서 다시 1차원 늘린 11차원의 막이론(M-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물질이란 확률로서 존재하지 어떤 불변한 입자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물리학의 현 단계이지만, 저는 인간의 인식이 생명의 깊이를 다 읽어 내리라고는 절대로 예상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신약계발이라는 상업적인 발상에서, 약 10만개에 해당되는 유전인자를 게놈프로젝트가 찾아내기만 하면 10만 개의 신약을 개발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인류의 질병은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다고 예상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유전인자가 3만 개뿐이고 유전 정보는 15만 개 정도가 있어서 한 개의 유전인자가 한 개의 유전 정보를 형성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개의 유전 인자가 합해져서 복합적인 조합으로 간다는, 지금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현대과학의 연구가 상당한 부분까지는 그 신비에 접근하겠지만 그것으로 생명과 자연의 신비를 다 밝히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생명과 자연에 대한 외경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21세기에 있어서의 종교, 특히 한국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저희 집안은 완고한 유학적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별로 없어요. 성경은 감옥에 있을 때 물론 읽었습니다. 저의 경우는 지금까지 형성되어 온 내 생각의 틀을 종교적으로 바꾸는 게 불가능했어요. 그냥 쉽게 믿으면 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게 쉽지 않았고, 지금까지 구사하던 모든 개념들을 기독교 쪽으로 다 바꾼다는 게 마치 벽돌을 다 바꿔 집을 새로 짓는 것만큼이나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기독교를 신앙이 아닌 종교로서 이해하려고 하는 수준입니다. 저는 과학과 물질주의적인 가치가 마구 질주하는 세상에서 기독교가 굉장한 인문학적인 관점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를 절대 신의 개념으로만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우주의 질서는 과학으로는 다 밝힐 수 없다는 생각이고, 가끔은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질서나 운명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20년 징역을 살고 나온 제가 책을 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라는 것은 저도 예상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설명 안 되는 부분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봐도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마치 큰 강물이 흘러가는 속에 우리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씩 합니다. 이런 것을 통해 나 자신이 갖고 있는 집요함 같은 것들을 문뜩문뜩 반성하기도 하지요.


 

인성의 고양이 삶의 궁극적 가치

 

교수님의 평소 지론인 사람이 좋아야 예술이 좋다는 확신은 우리 문화예술계에서 대단히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고 치부되는 것 같습니다. ‘서도(書道)의 관계론’이 퍽 인상적인데,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아름다움이란 ‘앎’이란 어근이 나타내듯 잘 안 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름다움을 숙지성(熟知性)의 개념으로 이해하지요. 잘 아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때문에 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한 것이 아니라 모름다움입니다. 음악도 잘 아는 것이 아름답잖아요.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베토벤 5번 교향곡을 들려주면 다 달아난다고 하거든요. 지 선생님께서 정직한 것이 아름답다는 경험을 하셨다고 했는데 그것도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림도 어휘 자체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봐요. 그림이란 그리워하는 것이거든요.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그린다는 자체가 정직하지 않아요. 제가 삽화로 그린 그림 중에, 초등학교 때 그림을 그리라고 했더니 자기 어머니를 그린 친구의 이야기가 있어요. 나중에 보니 그 친구에게 어머니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 “이 친구가 자기에게 가장 그리운 것을 그렸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름다움의 문제를 피카소의 미형식이라든가 어떤 천재가 도달한 형식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어떤 건축적 의지에 갇히는 것이에요. 자기가 잘 알고 우리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을 정직하게 표현하면 그게 아름다움이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오늘날의 미학이 아름다움의 철학에서 굉장히 괴리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젊은 사람들이 수용하는 미적 정서라는 것은, 비록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한마디로 상품미학이거든요. 상품미학은 고도의 형식미이고, 상품은 어찌됐든 잘 팔리면 되는 것입니다. 별로 소용이 없거나 심지어 유해하더라도 가장 잘 팔리면 좋은 상품이라 하잖아요. 그래서 CF가 제시하는 수준 높은 약속에 속아 그 물건을 써보면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발견하게 되지요. 그러면 거기서 이탈하려고 하지만 상품회사는 이내 디자인을 바꿉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솎는 지점이 발생해요. 그 약속이 허구로 드러나는 지점, 바로 그 지점이 패션이 발생하는 지점이지요. 그래서 상품미학은 변화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어 버려요. 친숙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는 거대한 역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품미학은 아름다움의 정서를 크게 왜곡합니다. 그러나 상품미학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면도 지적해야 합니다. 문화적인 자기 결정력이 없는 종속 사회의 미학은 바깥에서 옵니다. 왜냐하면 주변부 문화의 특징이 중심부 문화를 이식하는 것이거든요. 종속 사회에는 옛날부터 배를 타고 오는 잘 모르는 외부 것에 대한 추앙이 있는 반면 자기 것에 대한 혐오와 패배의식이 있습니다. 이런 상품미학과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인 콤플렉스가 겹쳐서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희박해 지는 게 아닌가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동양 고전독법’이라는 부제가 붙은 『강의』 는 서양의 존재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동양의 관계론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동양고전을 통해 관계론을 주장하셨지만 20년 감옥 생활이 없었어도 이 책이 이런 모습으로 나올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 듭니다만.

 

저는 사회과학, 특히 경제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자기를 증식하려는 즉 자기 존재성을 키우려는 존재론적 패러다임의 전개과정이었고, 결국 국민경제 내부에는 독점으로 귀결되고,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일국 패권의 신자유주의 세계질서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적 필연성을 늘 비판해 왔었습니다. 제가 동양 고전과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를 대비시키는 이유는 감옥에서 동양고전을 많이 읽기도 했지만, 이런 패권적이고 존재론적인 패러다임의 압도적 포섭에도 불구하고 소비나 소유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동양고전에서 발견하는 것은 삶의 궁극적 가치는 ‘인성(人性)의 고양(高揚)’입니다. 물질적 성취가 아니라 인간적 성취가 더 높은 차원의 가치가 되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인간적 성취는 인간관계로 결실되는 것이지요. 훌륭한 사람, 훌륭한 사회, 그리고 훌륭한 역사의 문제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근대사회의 전개과정이 보여 온 존재론적 패러다임을 관계론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것이 오늘의 문명사적 과제라는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동양고전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관점을 들어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전공자의 자유로움을 살려서 고전에 대한 정통적이고 훈고학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항상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전을 읽으려고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고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고전에서 배우겠다는 관점’이 고전의 기본 독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21세기로 전환되는 새로운 시대에는 문명의 패러다임에 대한 자각적인 반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동양의 오래된 관계론적인 사상을 통해서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패러다임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지요.


 

항상 경계해야 할 생각과 관점의 교조화

 

끝으로 첨예한 모순과 밑바닥의 감옥 현장에서 발견한 여럿이 함께 하는 희망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저는 가끔 감옥은 우리 시대의 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산은 기름진 들판에 살지 못했던 사람들이 쫓겨나 들어가는 곳이거든요. 사실 임꺽정은 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름진 들판에 살 수가 없어서 산으로 들어 간 약한 사람이었지요. 저는 그 산 속에서 오히려 당시 사회의 모순 구조를 한 번 더 보게 된 셈이었습니다. 제가 대학시절 읽었던 경제학은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한 비판적 사회과학의 관점이었고, 그 위에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의 참담한 삶의 조건들을 경험하면서는 먼저 나 자신을 개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도 생각과 관점이 교조화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려고 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계급적 관점이 급속하게 탈색해버리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의적 질서 속에서는 그런 관점을 유지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느낍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출옥 이후 대학교수라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현장에서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셈이지요. 이런 저런 개인적 갈등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식인이란 자기가 계급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식인이 실천을 어떤 현장에서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물론 기계적이고 교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산당을 탈당하기 전의 이야기라는 전제를 해야 하겠지만, 피카소는 캔버스 앞에서 당당하게 공산주의자라고 이야기를 하고, 역할 분담이나 입장 차이를 승인했지요. 우리에게도 그런 예술적인 실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성찰적인 관점을 가지고 물처럼 내 역량과 객관적 조건이 허용된 범위 내에서 정직하게 살아가겠다는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긴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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