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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06-03-02
미디어 서울대학교

2006학년도 서울대 입학식 축사


여러분들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오늘은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4년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 아름다운 시작을 이처럼 가까운 자리에서 축하하게 된 나 자신도
마치 47년 전으로 되돌아 간 듯 대단히 행복합니다.
나에게는 여러분이 지금 시작하는 4년의 대학 외에 또 하나의 대학이 있습니다.
20년의 수형생활이 그것입니다. 나는 그 20년 역시 "나의 대학시절“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개의 대학시절 동안 깨달은 것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대학시절에는 그릇을 키우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대학시절에는 그릇을 채우려고 하기보다는 그릇 자체를 키우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대학시절 이후에는 그릇을 키우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릇이 작아지고 굳어집니다.
그릇이란 물론 인간적 품성을 의미합니다. 인간적 품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이성과 감성을 열어야 합니다. 대문을 열면 마당이 넓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역사와 미래를 향하여 열어야 하고, 우리시대의 아픔을 향하여 열어야 하고, 한포기 민들레를 향해서도 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먼저 그릇을 비우고 그릇 그 자체를 응시하고 키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당장 소용되는 것들로 그릇을 채우려고 하기 보다는 더디지만 느긋한 걸음걸이로 냉철한 이성의 머리와 뜨거운 감성의 가슴을 보다 멀리, 보다 넓게 열어가야 합니다.

둘째, 대학에서는 주춧돌부터 집을 그리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나와 함께 징역살이를 한 노인 목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노인이 내게 무엇을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반대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맨 나중에 지붕을 그렸습니다. 그 분이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실로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붕부터 집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붕부터 집을 그리는 창백한 관념성을 청산하고 주춧돌부터 집을 그리는 튼튼한 사고를 길러야 합니다. 책과 교실, 종이와 문자에 갇히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대학시절에는 평생을 함께 살아갈 동반자를 발견해야 합니다.
대학 4년 동안에 여러분은 평생을 함께 할 사랑하는 반려자를 찾아야 합니다. 사랑은 자신을 빛나는 꽃으로 만들어줍니다. 그가 내게로 달려와 꽃이 되고 내가 그에게로 달려가 꽃이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신을 아름답게 꽃피우는 것일 뿐만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자기를 뛰어 넘는 비약입니다.
나는 어느 시나리오에서 왜 그 사람과 결혼하기로 결심하였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한 대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Because I really conceived I could be a better person with him.”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결혼을 결심했다는 답변이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뛰어 넘음으로써 자신을 키우는 비약 그 자체입니다.
한 개인에 대한 사랑도 물론 아름다운 것입니다만 여러분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시대, 우리사회의 어떠한 사람들을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과 함께 어떠한 사회, 어떠한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더 큰 비약입니다. 자기를 뛰어넘는 사랑, 좋은 사회, 훌륭한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며 여러분은 지금부터 그러한 사랑을 준비해야 합니다.

넷째, 대학시절은 씨앗을 땅에 뿌리는 계절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도 새봄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추운 겨울을 지내고 농사를 시작하는 정월보름에 오곡밥을 지어먹습니다. 오곡밥을 먹는 풍습은 땅에 씨앗을 심기 전에 먼저 씨앗을 확인하기 위해서 입니다. 겨울동안 곳간에 갈무리했던 씨앗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오곡밥을 지어 먹습니다.
봄은 꽃의 계절이 아니라 씨앗의 계절입니다.
여러분의 오늘이 아름답고 빛나는 날임에 틀림없지만 오늘은 결코 찬란한 꽃의 날이 아닙니다. 씨앗의 시작입니다. 아름다운 꽃도 결국은 씨앗을 위한 것입니다. 미련 없이 떨어져 씨앗을 영글게 하는 멀고 먼 여정의 어느 길목에서 꽃은 피었다 집니다. 그래서 꽃을 찬란한 슬픔이라고 노래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이 저마다 씨앗을 땅 속에 묻는 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땅 속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잎을 틔우는 긴 여정의 시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대나무는 사람들이 심어서 자라는 나무가 아니라 뿌리에서 죽순이 나오는 나무입니다. 땅 속의 시절을 끝내고 나무를 시작하는 죽순의 가장 큰 특징은 마디가 무척 짧다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마디에서 나오는 강고함이 곧 대나무의 곧고 큰 키를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훗날 온 몸을 휘어 강풍을 막는 청천 높은 장대 숲이 될 지언 정 대나무는 마디마디 옹이진 죽순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시작하는 사람들이 맨 먼저 만들어내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짧고 많은 마디입니다. 그것은 삶의 교훈이면서 동시에 오래 된 과학입니다. 여러분은 장대 숲으로 자라기 위해서 짧고 많은 마디를 만들어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직면하게 될 숱한 어려움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먼저 마디마디 옹이진 죽순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아름다운 시작을 축하드리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둘러 그릇을 채우기 보다는 그릇 그 자체를 키우는 공부를 해야 하고,
지붕부터 그리던 창백한 관념성을 청산하고 주춧돌부터 집을 그리는 튼튼한 사고를 길러야 하며,
자기를 뛰어넘음으로써 오히려 자기를 달성하는 사랑의 비약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찬란한 꽃의 계절로 맞이할 것이 아니라 땅속에 씨앗을 묻는 긴 여정의 출발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리고 앞으로 직면하게 될 숱한 과제들과 당당히 맞설 수 있기 위하여 짧고 많은 마디로 강고한 밑둥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지혜로운 사람과 반대로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는 우직한 사람이 그것입니다. 역설적인 것은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에 의해서 세상이 조금씩 발전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대학은 우리의 역사를 가장 멀리 돌이켜보는 곳이기도 하고, 또 우리시대를 가장 넓게 바라보는 곳이기도 합니다. 대학은 기존의 지배이데올로기의 재생산 현장이기도 하지만 비판담론과 대안담론의 창조적 산실이기도 합니다.
최근 급속한 세계화와 치열한 경쟁논리로 말미암아 이러한 대학 본연의 사명이 방기되고 대학고유의 인문학적 가치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인간적 성장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며, 우리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대학은 어떠한 경우라도 그 사회의 정신을 지키는 창조적 공간으로 건재해야 합니다. 특히 여러분은 그러한 사명의 최전선에서 힘 있는 전위로 굳건히 서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4년 동안 겪게 될 방황과 고뇌와 사랑의 모든 것이 남김없이 여러분의 빛나는 달성의 자양분이 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여러분의 건투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시작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축하합니다.


20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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