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2009-0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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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한울 |
[느티아래 강의실]
나의 대학시절, 그리고 성공회대학교
신영복 저 |
나의 경우 7년의 유년시절을 제외하면 감옥이전 20년, 감옥 20년 그리고 감옥이후 20년이 곧 나의 지나온 삶이 된다. 이 중에서 감옥이후 20년은 성공회대학교이다. 나는 자주 이 3개의 20년 하나하나가 모두 <대학>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글제가 “나의 대학시절 그리고 성공회대학교”라고 생각한다.
출옥과 함께 감옥 20년은 이제 추억의 시작이라고 내심 결별했었지만 감옥이후의 삶은 매우 낯설고 불편하다는 점에서 별로 다르지 않았다. 마치 낯 선 땅에 나무를 옮겨 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한 그루 나무로 설 수 있게 따뜻하게 품어준 곳이 곧 성공회대학교이다. 그 따뜻함의 내용이 곧 세 번째 <나의 대학>이 되는 셈이다.
1988년 8월에 출소하고 그 이듬해 89년 1학기부터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당시 성공회대학교는 성공회신학교로서 매우 작은 학교였다. 20년간의 엄청난 변화 앞에서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던 내게 작다는 것은 매우 편안한 것이었다. 협소했던 감방처럼 대단히 친근한 것이었다. 신학과와 사회복지학과 2개 학과밖에 없었고 학과 정원이 25명이었다.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이 금방 익숙해질 정도였다. 성공회대학은 지금도 여전히 작은 대학이며 지리적으로도 서울 변두리이고 주류담론에서 보면 더욱 먼 곳에 위치한 주변부임에 틀림없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주변부의 작은 공간이 오히려 안온한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좌파가 명품으로 평가되는 운동공간은 결코 아니었지만 주류사회의 환상이나 냉전논리로부터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인간적인 공간이었다. 신학과 사회복지학 자체가 인간실존에 대한 진지한 고뇌를 바탕에 깔고 있기도 하였다. 그 당시 성공회대학에는 제법 나이가 든 학생들도 많았었고 더구나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진 학생들이었다. 고3에서 바로 대학으로 진학한 사람은 오히려 소수였다. 수업시간의 질문도 삶과 인간에 대한 고민이 배어있는 것들이 많았다. 당시에는 학기말이 되면 학교 뒷산을 함께 넘어 순두부 집까지 가서 종강파티(?)를 하는 것이 어느 과목이든 거의 관행처럼 행해졌었다. 종강파티의 후반부가 되면 학생들이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나는 부를 노래가 마땅치 않아서 한동안 <시냇물>이란 노래를 불렀다. <시냇물>이란 노래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이 노래는 감옥에서 만기출소자를 보내는 출소파티(?)에서 마지못해 부르던 나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출소파티라 하지만 같은 감방 사람들이 벽기대고 둘러앉아 오복건빵 한 봉지씩 나누어 먹으며 덕담을 나누는 초라한 파티이다. 때로는 교도관의 눈치를 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곁들여지기도 한다. 내 차례가 되면 언제나 <시냇물>을 불렀다. 감방 동료들이 어린이 노래를 못마땅해 하다가도 “넒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는 대목에 이르면 다들 눈빛이 숙연해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내가 학생들과 순두부집 종강파티에서 이 <시냇물>을 부르면서 깜짝 놀라게 된다. 감옥동료들과 같은 눈빛을 학생들의 얼굴에서 다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는 대목에서 학생들도 같은 눈빛이 되었다. 바깥 사회에 사는 사람들도 역시 갇혀 있다는 아픔을 갖고 있구나 하는 뭉클한 공감이었다. 미셸 푸코에 의하면 감옥이란 물론 죄인을 구금하는 물리적 공간이지만 실상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은 갇히지 않았다는 착각을 주기 위한 정치적 공간이라고 한다. 당시 성공회대학의 학생들이 가지고 있었던 삶의 정서는 이러한 아픔에 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나로서는 매우 친숙하고 대단히 인간적인 공감이었다. 나의 세 번째의 대학인 성공회대학의 분위기가 매우 인간적이고 따뜻했던 까닭이 바로 이러한 성찰적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적 분위기는 내가 감옥의 면벽명상에서 참으로 오랫동안 대면했던 정서이기도 하지만 나는 지금도 우리가 잃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이라면 바로 이러한 성찰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찰성을 키워가는 것이야말로 교육에 있어서 핵심적 과제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당시 성공회대는 물론 신학교였고 신학대학이었지만 성공회 교회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다른 교단의 예를 잘 모르긴 하지만 적어도 나는 성공회 교회에 나오라는 권유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나는 비교적 유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교도소에 가장 많은 책이 성경책이고 종교중심의 교화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종교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도 많았다. 그러나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구사해온 나의 모든 개념을 다시 재정립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벽돌을 전부 바꾸고 집을 다시 지어야 하는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를 떠나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종교에 대한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학교나 성공회 교회는 대단히 관용적이었고 그것이 나 개인에게 있어서뿐만 아니라 성공회대학의 교육이념을 새롭게 정립해나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을 보장해준 셈이다. 이 점이 또 매우 마음 편하였다.
더구나 내가 성공회대학 강단에 서게 된 계기는 당시 이 재정 신부와 김성수 주교와의 자연스러운 만남 때문이었다. 출소 직후 나는 성공회 대성당에 있었던 마당 세실극장에서 극장 간판을 그렸던 적이 있었다. 친구가 경영하는 극장이어서 소일삼아 간판을 그렸었는데 김성수 주교와 이재정 신부를 만난 곳이 바로 그 극장이었다. 그 친구의 추천으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은 두 분이 나를 성공회대에 강사로 초청한 것이다. 오랜 수형생활 직후여서 강단에 서기에는 여러 가지로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사로 초청한 것은 학문이나 사상보다는 인간과 삶의 고뇌에 무게를 두는 매우 인간적인 배려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재정 학장은 이후 자주 밝히는 바와 같이 그가 감옥이전에 서 있던 자리에 다시 서도록 하는 것이 바깥에 있었던 사람들의 도리이며 군사정권의 청산이라는 것이었다. 성공회 대학은 비 기독교인이면서 좌파로 규정되고 있는 내게 그런 점에서 매우 인간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 후 성공회신학대학이 성공회대학교로 규모가 빠른 속도로 커지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인간적이고 성찰적인 대학특성은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특성은 대학이 우리사회의 숲이 되어야 한다는 성공회 대학 특유의 <더불어숲> 교육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성공회대학교가 성장하면서 새로운 학과가 창설되고, 새로운 교수들을 맞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적이고 성찰적인 숲으로서의 이미지가 실천적 과제와 일정하게 결합하게 된다. <성공회대 학파>라는 사회적 평가가 나오기도 하였다. 그것은 87체제로부터 97체제 그리고 이제 2007체제라 할 수 있는 몇 개의 단계를 거쳐 오면서 드러나고 있는 우리사회의 모순구조와도 무관하지 않다. 87년 우리사회는 일정한 절차적 민주성을 회복하였다고는 하나 정치권과 재계는 물론이고 언론, 사법, 사회문화 등 사회의 전 부문에서 변함없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완강한 보수권력 앞에서 민주성과 개혁성이 왜곡되고 저지된다. 이 과정은 민주화 운동의 최 일선에서 투신하였던 민중부분들이 철저하게 주변화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특히 97년 IMF관리 체제하에서 나타난 국제금융자본의 전면적 등장은 우리사회의 보이지 않는 지배구조 즉 정치, 자본의 지배구조에 더하여 외세라는 또 하나의 지배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내게 된다. 물론 97체제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시대의 식민지 개발론에서부터 군사정권기간의 산업화가 누적해온 모순의 필연적인 결과이면서 냉전기간 동안에 유보된 패권국가의 뒤늦은 수탈이기도 할 것이다. 이 글에서 이러한 분석을 장황하게 전개할 의도가 전혀 없다. 다만 성공회대학에 새롭게 포진한 여러 신진교수들이 전개한 비판담론이 공유하고 있는 기본적 관점이 이러한 담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와 같은 비판담론이 <더불어숲>의 성찰적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사회의 민주화가 더디기는 하나 꾸준히 진전되고 있고 더욱이 한 반도의 냉전구조와 민족문제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오래된 지배구조로 퇴행할 가능성이 훨씬 더 분명해지고 있는 시점에서는 성찰성이 실천성을 얻어야 하는 현실적 요청마저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성공회대학교는 학생과 교직원 등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생각과 지향하는 바가 한결같을 수는 없고 당연히 현실적 실천방식에 있어서나 비판담론의 수위에 있어서는 상당한 이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대학본연의 위상에 대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공감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더불어숲>으로 상징되는 숲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숲은 수많은 나무들을 안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존재이며 더구나 발 딛고 있는 땅을 생각하여야 하기 때문에 실천적 과제를 외면할 수 없기도 하다.
내가 <더불어숲>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까닭은 그것을 마음속의 그림으로 간직하기 시작했던 곳이 삭막한 감옥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독방에서 가끔 혼자서 읊조리던 <엘 콘도르파사>의 노래가 계기가 되었다고 기억된다. 나뭇가지 끝을 떠나지 못하는 달팽이보다는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참새가 되고 싶고, 못보다는 망치가 되고 싶다는 첫 구절은 당시 갇혀 있던 나로서는 매우 가슴에 와 닿는 시구였다. 당시의 심정이 가지 끝을 떠나지 못하는 달팽이와 같았고 한 점에 박혀 있는 못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 구절의 “길보다는 숲이 되고 싶다.”는 반전이 감동적이었다. 길은 참새처럼 훨훨 떠나는 이미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한 곳을 지키고 있는 숲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숲이 되어 발밑의 땅을 생각하겠다는 것이었다. 갇혀 있던 나로서는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비록 떠날 수는 없지만 숲은 만들 수 있겠다는 위로였고 감옥의 가능성이기도 하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발밑의 땅을 생각하며 숲을 키우는 것. 이것은 비단 나만의 감상이 아니라 우리시대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숲의 그림을 어떻게 그려가야 할 것인가는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지만 나로서는 두 번째의 대학 20년 동안 다만 노래로 읊조리기만 했을 뿐 결코 일구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출소 후 세 번째의 대학인 성공회대학교에서 비로소 만나고 있다는 감회가 없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숲은 성공회대학에서 시작하여 우리사회의 곳곳으로 번져나가야 한다는 소망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숲이란 키 큰 나무 키 작은 나무, 굵은 나무 가는 나무, 상록수와 활엽수, 일년생 다년생 등 모든 나무들이 함께 살아가는 다양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새로운 싹을 키워내고 수많은 생명들을 지키는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속도에 쫓기고 경쟁에 내몰리며 화폐가치라는 유일한 잣대로 재단되는 오늘의 삶에서,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성찰하는 공간으로서의 숲, 그리고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문학적 가치를 키우는 공간으로서의 숲은 한 대학의 교육이념을 넘어선 시대적 과제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세 번 째의 대학인 성공회 대학에서 만나는 <더불어숲>은 나의 첫 번째 대학과 두 번째 대학의 완성이라고 하는 개인사적 의미를 넘어 우리시대의 절실한 과제이기까지 하다.
나의 첫 번째 대학 20년을 언젠가 심부름 같은 것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자아형성기였다고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경우와 다르지 않게 나 역시 길들여졌던 기간이었다. 주류이데올로기를 학습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그 주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얻기는 하였지만 역시 크게 보아 철학과 방법론에서 주류담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갇힌 시절이었다. 그에 비하면 제2의 감옥 20년은 객관적으로는 감옥에 갇힌 시기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주류담론의 범주로부터 걸어 나오는 시기였다. 철저하게 단절된 영역이 오히려 자유공간이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비극적 추락의 형태로 받아들여졌지만 곧 그것을 견디는 자위의 영토를 만들고 그곳을 자유공간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감옥 20년을 자주 <나의 대학시절>로 부르기도 하지만 나는 그 시절 참으로 귀중한 사색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으로 하여금 냉정하게 성찰하게 하는 숱한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인생을 만나게 된다. 내가 만난 사람과 인생들은 나의 사회학이 되고 나의 역사학이 되었다. 그리고 통틀어 나의 인간학이 되었다.
비교적 징역 초년부터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먼저 학교와 교실에서 키워온 나 자신의 관념적 성향과 정서를 충격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관념적 사고와 정서를 과감하게 버리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수많은 일반 수형자들의 사건과 인생은 그 패배와 좌절의 침통함으로 하여 우리사회의 실상을 직시하게 하는 사회학이었다. 빨치산을 포함한 좌익사상범 남파공작원 해방 전후 그리고 한국전쟁기간의 정치사범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는 현대사에 점철된 개인의 삶을 생생하게 생환해주기도 하였다. 지나간 역사라고 치부했던 우리의 현대사에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듯한 감동을 안겨주는 나의 역사학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 와서 그 시절의 나 자신을 다시 돌이켜보면 2가지의 고뇌에 힘겨워했던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는 책에도 썼듯이 한 발 보행이라는 외로움이었다. 우리는 이론과 실천이라는 두 개의 다리로 살아간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책은 읽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실천의 장은 어디에도 없다. 두 개의 다리 중에서 실천의 다리가 없다는 좌절감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서게 한다. 단지 멈추어 서게 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관념적으로 만들어 간다. 학교와 교실에서 키워온 관념성을 과감하게 버리기로 한 결심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의 고뇌였다면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땅에 발 딛고 서려고 하는 고뇌이다. 교도소는 뿌리를 내리기에는 너무나 각박한 땅이었다. 땅이란 물론 교도소의 흙이기보다는 그 속에서 해후한 사람들이기는 하다. 그래도 그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더 힘든 조건이기도 하였다. 교도소는 결국 15척 벽돌담으로 만든 한 개의 화분일 뿐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땅이 없는 곳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숲을 이루거나 만날 수는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 번째의 대학인 성공회대학이 내게 각별한 감회를 안겨주는 것은 나의 힘겨운 여정의 바로 이 지점에 성공회대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성공회대학은 비록 작은 대학이기는 하지만 땅이 있고 숲이 있는 곳이었다. 그만큼 나로서는 그 때까지의 고뇌를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던 제3의 대학이었다. 이 점에서는 성공회대학의 많은 구성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학교공간이 실천적 공간으로서는 왜소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은 나무가 나무를 만나서 숲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의 땅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당시 내가 처음 성공회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된 시기는 사회운동과정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객관적 상황은 87년 체제의 한계가 노정되는 시점이면서 동시에 87이후의 과제를 고민하는 국면이었다. 특히 그 이후의 과정에서 노출되는 여러 가지의 문제들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성공회 대학은 물론 주변부의 작은 공간이란 점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았지만 작다는 것이 그러한 과제에 대하여 전향적인 담론을 구성하기에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하였다. 그런 점에서 성공회대학교는 내가 내내 이루지 못했던 <더불어숲>이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성공회대학교의 교육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더불어숲>은 나의 개인적 편력의 위상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의 실천적 과제와도 튼튼히 연결되고 또 나아가서 21세기의 문명사적 과제와도 맥락이 닿아 있는 소중한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한 그루 한 그루의 튼튼한 나무를 길러내는 학습의 장(場)이면서 개별적인 나무중심의 사고를 뛰어넘어 영토를 지키고 땅을 가꾸는 장구한 미래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숲이 미래공간이라는 사실과 함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대학의 독립성(獨立性)이다. 대학이 지키고 대학이 지향해야할 가치는 당장의 소용이나 오늘의 가치가 아니다. 비판성을 갖추되 미래지향적인 전망성으로 열려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대학은 오늘로부터 독립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교육이 백년대계인 이유가 바로 이‘오늘로부터의 독립’에서 연유하는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비판성이나 실천성보다 오히려 더 우위에 두어야 하는 것이 바로 대학의 미래지향적 독립성이라고 할 것이다. 더구나 대학이 본연의 독립성을 스스로 반납하고 자본의 하위공간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대학이 없고, 스승이 없는 세월을 우리는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유(韓愈)는 그의 『사설(師說)』에서 스승이란 도(道)를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도란 글자 그대로‘길’이며 길을 가리키는 사람이 스승이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리키는’ 것이 스승의 도리이다. 그러나 아무도‘길’을 묻는 사람이 없는 것이 오늘의 교육현실이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다투어 그 곳으로 달려가는 목표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묻는 것은 다만 그 곳으로 가는 방법에 관한 것일 뿐이다. <더 이상의 길>은 없고, 스승이 없고 대학이 없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연암(燕巖)은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의 거리를 들어 보이며 그곳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인격적 모범이 바로 스승이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이 달려가고 있는 길이 아니라 우리가 <가야할 길>, 그것이 진정한 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오늘의 사회적 수요에 응한 현실적 가치를 지향(指向)하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비판적으로 지양(止揚)하는 창조적 공간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무엇보다도 <오늘로부터 독립>해 있어야 한다. <오늘로부터의 독립>은 물론 다양한 의미로 읽어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화폐가치로부터의 독립이다. 경쟁과 효율과 속도라는 신자유주의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물론 학생과 학부모의 현실적 요구를 일정하게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궁극적 가치는 어떠한 경우에도 성찰성을 높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하지 못한다. 진정한 역량은 자기 정체성에 뿌리내린 성찰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성찰은 성(省) 자가 보여주듯이 젊은(少) 눈(目)이다. 때 묻지 않은 눈이며 먼 곳에 착목(着目)하는 눈이다. 그것은 현실의 건너편을 바라보는 대안적 관점이어야 하며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닫힌 벽을 열고 새로운 것으로 향하는 해방적 관점, 창조적 관점이기도 하다.
나는 성공회대학이 인간적 가치를 지키는 인간적인 숲으로 남기를 바란다. 성찰성을 드높이는 성찰의 숲으로 남기를 바란다. 아픈 상처를 품어주는 따뜻한 숲으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큰 숲으로 자라나서 땅을 지키고 산을 지키고 우리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의 타는 목마름을 달랠 수 있는 긴 강물 한 줄기 품고 있는 살아있는 숲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의 개인적 소망이기도 하지만 나의 길고 긴 대학여정의 아름다운 종착지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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