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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1996-05-01
미디어 참여와 연대 격월간지 '참여사회'

 

"풀잎처럼 어깨 동무해 살고픈,

우리시대 선비 신영복"



- 참여와 연대 격월간지 '참여사회' 1996년 5.6월호        글 : 오숙희(여성학자, 방송인)

 

쏜살같이 지나는시간속에서의 '쉼표같은 만남' 기계처럼 사는 사람들에게

정말 인간다운 삶은 어떤 것인지 그 좌표를 일러주는 신영복 선생과 만났다.

누구를 만나도 낯설지 않게 포근하게 감싸는, 강물같은 사랑을 품고 사는

그의 삶과 서도, 철학을 들었다.

 

'한솥밥' 우리집 한 가운데 걸린 액자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오는 손님마다 신기한 듯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이게 가훈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답대신 어머니 얼굴을 바라본다. 피난 시절 가난한 집안의 장남에게 시집 온 우리 어머니는 그 손에서 밥 한그릇 안 얻어먹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재작년에 여성단체연합에서는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참신한 여성들의 정치참여를 위한 기금마련 행사를 열었다. 예술공연과 아울러 기증 작품 전시 판매도 있었는데, 신영복 선생이 쓰신 '한솥밥' 앞에서 어머니는 눈을 떼지 못하셨다. 급기야 택시 미터기 올라가는 소리에도 가슴이 철렁하는 우리 어머니가 100만원의 장벽을 훌쩍 뛰어 넘으셨다.

당시에 우리는 친구네와 공동주택으로 살고 있던 터라 '한솥밥'은 우리집의 성격을 드러내는 간판 구실을 톡톡히 했다. 아파트에 이사와서는 보기드문 식구 여섯 명의 집인지라 딸아이의 친구가 놀러올 때 따라온 그 엄마가 민망해서 '그렇잖아도 복잡한 집에 ......' 라고 말꼬리를 흐린다. 그럴 때 우리는 말없이 벽에 걸린 '한솥밥'을 가리킨다.

'열린 대문 너른 마당 두레상 한솥밥'

한솥밥 밑에 채송화처럼 피어있는 작은 글씨들과 누런 종이에 반듯하지 않고 어깨춤을 추는 편안하게 씰그러진 글씨체는 우리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었다.

'한솥밥'의 주인공이 우리집 가까이에 살고 있다는 소식은 가족들을 흥분시켰다.내가 신영복 선생을 직접 본 것은 기독교 방송국 노조에서 마련한 초청강연에서였다.

 

"남을 대할 땐 봄바람처럼"

 

"감옥의 겨울밤은 아주 깁니다. 오후 다섯시에 저녁을 먹으니 자려고 누우면 먹을게 생각나지요. 그런데 밤에 혼자 건빵을 몰래 먹는 사람들이 있었어요.네 개까지는 침에 잘 축여서 소리 안 나게 먹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안되요.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내 소맷부리를 잡으며 젊은 친구가 말합니다. '선생님 어제 밤에 그이가 건빵 스물아홉게 먹었어요.' 한 번은 그이가 옆사람 발을 슬쩍 밟았는데 싸움이 크게 번졌어요. 그간 쌓인 감정이 얹혀져 폭발한 거지요. 감옥이란 그런 댑니다."

눈물나는 얘기를 아주 편하고 따뜻하게 사랑방의 옛날 얘기처럼 해주는 소탈한 선생의 말투와 목소리와 몸짓과 그 웃음이 초면인데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신영복이란 이름에 자연스레 들어있는 것들처럼 여겨졌다.

 

오:지난 호에 리영희 선생 편에서 신 선생님을 언급한 것은 오늘의 만남을 위한 사전 포석이었는데 혹시 보셨나요?

신:우리학교 선생님 중에 '참여사회'구독하시는 분이 가져왔더군요. 내 얘기가 실렸다고.

오:어머 딱 한 줄이었는데...

신:두 줄이었던데요. 훌륭한 사람인지는 모르겠는데 '사람이 익어야 따수워지지'라는 말은 맞다고들 합디다. 나를 부드럽게 보거든요.

오:사실 부드러우시잖아요?

신:형식만 부드럽지 사실은 부드럽지 못합니다. 특히 나 자신에게는 편협하고 비타협적이에요. 대인춘풍지기추상(待人春風持己秋霜) 곧 남을 대할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고 자기를 갖기는 가을서리처럼 매섭게 하라는 말이 신조입니다. 드러내진 않지만 타인에 대한 평가도 추상적이지요.

 

신영복 선생이 결코 근엄하거나 냉정한 분이 아님에도 여러 번 만날수록 내가 그토록 조심스러웠던 이유가 이런 데 있었던 듯하다. 요즘 하시는 일부터 여쭤보았다.

 

신: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하는 일이지요. 일 학년 교양과목으로 한국사상사, 2,3학년 선택 정치경제학, '88년 8.15에 출소해서 '89년 1학기부터니 벌써 햇수로 8년이나 되었네요.

오:이십년 감옥살고 나오셔서 상당히 빨리 취업되셨네요?

신:이재정 총장과 김성수 주교가 제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타학교 학생보다 고민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신학교에 유익한 강의가 되리라 기대하셨나 봐요.

오:이를테면 사상범이었는데 임용에 따른 외압은 없었나요.

신:총장부터 교수들 중에 나 같은 경험을 가진 이가 많아요. 햇수로 따지면 내가 제일 오래지만. 참 우리학교의 보일러 기사가 나보다 1년 더 오래 산 사람이에요.그 소대장이 월북했다고 해서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인데 21년 옥살이한 거지요. 성실해서 내가 소개해 오게 되었는데 아직도 총각이에요. 그런 억울한 사람이 많습니다.

 

신영복 선생도 아직은 가석방 상태이다. 단군 이래 최대의 사면복권이라는 때에도 신영복 선생과 같은 사상조직 사건은 항상 배제되었다. '지금은 문민이 아니라 군민 정부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단언하는 신영복 선생.

신영복 선생은 요즘 '중앙일보'에 엽서라는 칼럼을 연재중이다.수채화 같은 글로 벌써 부터 잔잔한 화제가 되고 있다.

 

신:두해 전부터 요청이 있었는데 못했어요.매주 하다가 개강 이후에는 격주 일요일에 실려요.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주제를 정하고 나서 장소 정합니다. 남보기에는 일박이일 여행이 즐거워 보이지만 사진 찍고 그림 그리는 부담을 안고 가니까 별로 여행답지 못하지요. 감옥에서 검열을 전제로 쓰는 편지와 비슷한 느낌도 듭니다.

 

신영복 선생을 세상에 처음 드러내 준 것은 선생이 교도소에서 제수씨에께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다. 지금껏 스테디셀러로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책의 글을 놓고 선생은 다시쓰고 싶다고 한다.

 

신:가끔 그 책을 읽어보면 다른 독자들이 못읽는 행간의 글월이 내겐 더 많지요.검열을 예상하고, 가족들의 걱정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 쓰고 싶은 것을 다 못써서, 다시 보면 다시 쓰고 싶어요.제목도 내가 정한다면 '다시 쓰고 싶은 편지'라고 하겠어요.

 

"감옥에서 인연맺은 붓글씨 스승"

 

신영복 선생에 대해서는 나부터도 참 신비한 분이라는 생각이 있었다.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대략 세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로, 경제학을 전공하신 분이 서예가로 더 유명한 것이었다.선생의 붓글씨 인연은 깊었다. 할아버님의 슬하에서 처음 재롱삼아 붓글씨를 익혔고 대학 2학년 때는 공고문이나 학교 행사 아치의 글을 맡아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이 있기까지는 전적으로 감옥에서 훌륭한 스승들을 만난 덕이라고 한다. 작년 봄 개인전을 열면서 선생은 이렇게 밝혔다.

"나는 나의 붓글씨와 함께 잊을 수 없는 두 분의 선생님을 역설적이게도 옥중에서 모시게 된다. 처음 서도 선생님으로 교도소 당국에서 초빙한 선생님은 만당 성주표(晩堂 成周杓)선생님이다. 속리산 법주사, 동래 범어사 등 전국의 사찰에 많은 편액이 걸려 있고 당시에는 임경업 장군 사당의 현판을 쓰시기도 하였다. 도와 풍류를 함께 갖추신 분으로 기억된다. 또 한 분의 선생님은 정향 조병호(靜香 趙炳鎬)선생님이시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분 가운데 중국 고궁박물관 역사박물관에 글씨가 소장된 유일한 분이지만 당신은 막상 서예가라는 말은 매우 싫어하시고 언제나 학자라고 잘라 말씀하시는 분이다. 특히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과분한 애정과 엄한 지도를 받았다..."

 

오:선생의 그 독특한 한글 필체는 어떻게 창조된 건지요?

신:한문은 상형문자인데 비해 한글은 기호라서 삭막한 기호에 내용성을 갖게 하기가 어려워요. 한글은 궁체가 기본이었는데, 민중시를 궁체로 쓰면 내용과 형식이 괴리됨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된장찌개를 유리그릇에 담는 것처럼요. 그래서 민중시를 담을 글씨체 모색의 결과, 지금도 과정에 있긴 하지만, 그런 체가 나온 것인데 사람들이 협동체, 연대체, 민체(귀족적 글씨체인 궁체의 반대), 어깨동무채라고 부르더군요.

 

서예가 조형미를 기본으로 한다는 말씀 끝에 서울 정도 600년에 초대되어 만든 작품을 도록에서 보여주셨다. 서울이라는 글씨였는데 그 옆에 작은 크기의 한자로 북악무심오천년 한수유정칠백리(北岳無心五千年 漢水有情七百里)라고 씌여 있었다. 북악은 왕조를, 한수는 민초의 애환을 상징한다는 설명을 들으며 보니 '서'자는 산 모양으로 '울'자는 ㄹ을 강물처럼 흘려 쓴지라 갑자기 한글이 상형문자인 듯 여겨졌다. 퍼뜩 내가 그 댁에 들어갔을 때 신영복 선생님이 컴퓨터 그래픽을 하고 계셨던 게 생각났다. '중앙일보'칼럼에 곁들여내는 그림을 직접 컴퓨터로 그래픽하는 중이라고 하셨다. 선생는 원래 그림에도 적잖이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오:우리사회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고들 하는데 20년의 시차를 가지고 보실 때 정말 많이 변했지요?

신:외모는 많이 변했어요. 빌딩,진열장... 그러나 사회의 질적인 구조를 인식하면 별로 변한 게 없었습니다. 다들 내게 '많이 변했죠?'라고 묻는데 나는 보통 '문화충격이 크다'고 해왔어요. 그들이 그런 답을 이미 갖고 있으므로 그들에게 충격을 안 주려고요. 적응에 따른 큰 충격도 없었습니다. 늦게 나와서 빨리 뒤쫓아 가야지 하는 생각 안 했어요. 마치 안구 수술한 사람이 한꺼번에 붕대 풀면 시력 잃듯이. 또 감옥이 그리 닫힌 공간이 아닙니다. 신입이 계속 들어오니까 최소한의 정보는 접합니다. 정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지요. 대상인식이나 상황을 읽는데 정보중심의 사고는 위험합니다. 바늘구멍으로 황소를 봐야 하니까요. 정보중심의 인식은 반대정보로 쉬 허물어집니다.정보의 양에 의존하는 평면적인 것보다는 입체적 사고를 해야 합니다.

 

정보의 홍수시대에, 그래서 선생은 브로드캐스팅을 안하고 내로우캐스팅을 한다. 자신이 가진 문제의식과 가치관을 기준으로 정보의 선택적 흡수를 하는 것이다. 선생의 호가 쇠귀인 것이 단순히 우이동에 살았던 데서만 연유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수풀속의 풀이 잘 안 넘어지듯"

 

선생에 대한 신비화의 요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무래도 감옥이라는 조개에서 인간적 성숙의 진주를 잉태한 것일 게다.

 

신:감옥이 갖는 위험성이 분명히 있지요. 사람을 위축시키거나 아주 감정을 첨예하게 벼뤄낸다든가.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지요. 인간관계, 훨씬 깊이 있는 인간 관계를 형성할 수 있어요. 십년, 이십년 같이 살아야 하니까.인간관계 속에 자기를 깊숙히 세우면 감옥이라는 벽의 위험을 이길 수 있어요. 마치 수많은 풀들 속에 서 있는 풀이 잘 안 넘어지는 것처럼.

오:열쇠는 풀에 있었군요. 우뚝 솟은 나무가 아니고 키 작은 풀로 어울려 사는 거요.

신:저는 영웅전이나 개인의 신비화에는 반대예요. 자기 주변에 있는 평범한 많은 사람들의 역량을 평가하지 못하게 하니까요. 사람들이 보통 집을 그리면 지붕부터 그리잖아요. 그런데 내가 감옥에서 만난 목수는 집을 그릴 때 집을 짓는 순서대로 지붕을 제일 마지막에 그리는 거예요. 굉장한 충격이었지요. 또 하루종일 수필 한 편을 읽는 노인이 있었어요. 내가 그 할아버지께 독후감을 청했어요. '자기 집 뜰이 좁아서 꽃을 못 심는다는 얘기를 썼어' 하시는데 현란한 문장에 현혹되지 않고 그 본질을 정확히 짚어내더라구요. 무식이 오히려 더 날카로운 통찰력이 되는 걸 봤지요. 창백한 인텔리적 관념성과 결별하고 구체성을 획득하게 된 것인데 이게 바로 대학교육인거지요.

 

신선생은 고리끼의 '나의 대학시절'이 노동자 합숙소 시절을 뜻하듯이, 자신에게 감옥은 대학이었고, 인텔리의 관념성을 더 통렬히 반성케 해주는 많은 사람이 곧 스승이었다고 한다. 함께 복역했던 사람들을 전주대학 동창, 대전대학 동창으로 부르는 것도 결코 우스갯 소리만은 아니다.

 

신:내가 정말 대학으로 생각하는 것은 1968년 후반기부터 교도소 생활인데, 지리산 제주도 대구 등 해방 전후 격동기 활동가들 구빨치, 신빨치 심지어 만주 팔로군을 따라 관운장이 넘던 산맥을 넘어갔던 사람들도 만났어요. 그때 내 나이 스물일곱이니까 그들의 사랑을 받았지요. 그 사람들과의 삶의 결론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대해, 15년 사이인데도 우리는 청기만큼 아마득한 느낌을 갖는데 그들을 만나니까 화석화돼 있던 역사가 피가 들고 숨결이 느껴지는 역사로 복원되더군요. 6.25라는 초토화 벨트가 의식을 단절시킨 탓이었는데 그보다 더 훌륭한 역사 선생님이 어디 있겠어요.

오:그런 경험을 두고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하는 거 아닌가요.

신:운명적이죠. 어떤 부지런한 친구가, 내가 20년 20일만에 출소했다고 계산해냈는데 우리 어머니가 정확하게 20년이라고 하시더군요.제가 생일에 잡혀가서 생일에 나왔답니다.그걸 두고도 운명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나는 개인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이 별개가 아니라고 봅니다. 자기 인생의 작은 사건도 천착해 들어가면 누구나 운명적 만남이 됩니다. 큰 사건이 작게 나타날 뿐이거든요.

 

다음 학기부터 선생은 동양 철학을 강의하신다. 스스로 '경제학과 출신이 어울리지 않게'라고 말씀하시만 이미 시경에서 현대시에 이르는 중국역대시가선집(총4권,기세춘 공동편역,돌베게,94년)을 내신 바 있다. 선생이 동양고전에 능통하게 된 것 또한 감옥의 선물이었다고 한다. 교도소에서 동양고전을 섭렵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받았고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이라는 훌륭한 선생을 만났던 것이다.

 

오:이야기를 듣다보니 선생님의 감옥경험이 오히려 부러워지는데요.

신:어디 감옥뿐이겠습니까.다른 현실도 다 비장의 진실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극은,자기상황을 알게 해주고 인식시키는 데는 행복함보다 뛰어나죠. 우선 깨어있게 하니까.편안함은 모든 것을 닫게 하는데 비극과 불편함은 활짝 열어놓죠.

 

이게 바로 정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일 것이다. 더구나 요즘 세상에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는가. 이 지면을 쓰면서 내가 독자와 함께 나누고 싶은 기쁨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신:내가 독자 만나기를 피하는 것은 도대체 불편해서입니다. 도사를 만난 듯 대하면서 그런 이미지를 강요하니 농담도 못하고, 심지어 우리집에 와서 아파트 살지 말고 시골 한옥에 살라는 사람도 있어요. 교도소에 앉아 있으면 더 도사 같을 거라고 농담도 합니다만.

오:그런 신비화를 막으려면 자신의 모습을 밖으로 자주 드러내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신:여기저기서 인터뷰 청탁이 많이 오지만 안하는 편입니다. 사회적인 관계를 원만히 하면서 자기를 지키기는 어렵죠. 특히 현대사회같이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래요. 사람도 마찬가지로 일회용 소모품처럼 취급하거든요. 이런 사회에서는 자기 방어를 해야 하고 그게 안되면 집단적으로 해야 합니다. 완곡히 거절하면서 설득하는데 상당히 시간이 많이 걸려요. 일종의 이론투쟁도 해야 하구요. 그런 일을 겪으면서 뭔가 이루어내는 사람들이 괴팍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이해하게 되더군요. 다만 붓글씨 한 점을 청해오는 사회단체의 벗들에 대해서는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을 메울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겨지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처럼 느껴지는 남자

 

신영복 선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었다. 독신설과 대학생 딸이 있다는 설, 아주 호호 할아버지라는 설 등등. 선생이 출옥했을 때 부모님이 다 생존해 계셨지만 작고하시고 지금은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 지용이와 세 식구이다.

 

신:만나보면 실제로 젊다고들 해요. 나는 20년 빼야 하니 젊을 수밖에 없고, 냉동고기가 꺼내 놓으면 쉬 상하듯 곳 상할거라는 농담을 합니다만. 서도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아직 젊어요. 서예는 핸들링의 문제가 아니라 눈의 문제, 사람과 세상에 대한 완숙한 생각이 익어야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명문장은 요절해도 명필은 장수합니다.

결혼할 마음은 없었어요. 혼자 독신으로 훨훨 날아다니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남산에서 고문받을 때 나를 고문한 사람이 자기 아들 감기약 챙기는 것을 보면서 '가족이 뭔가' 충격을 받았어요. 남의 자식에 대해선 잔혹하면서 자기자식은 저렇게 챙기는 가족이기주의가 싫었어요. 그러나 부모님의 뜻이 완고했어요. 주변에서 나를 생각해온 분들이 봐놓은 사람이 있어서. 내가 뭘 아나요? 알려면 감옥에 6개월은 갈이 있어야 제대로 아는데... 저쪽에서는 나를 알고 있었어요. 음악 PD인데, 한 번 보고 '결혼하겠다'고 했어요.

오:요즘 우리 것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있고 선생님 작품 갖고픈 사람도 많은데 어떻게 돈을 좀 벌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혹시 선비는 돈을 멀리해야 한다고 피하시는지요.

신:피할 정도로 돈이 다가온 적도 없어요. 또 돈벌이가 그렇게 절실한 상황도 아니고, 역시 배도 좀 고파야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차야 생각이 깊어지는 건 사실이죠.

오:아이가 지금 어리잖아요.

신:나이를 계산해보니 쟤가 대학 다닐 13년후, 내가 69세예요. 부모없이 세상에서 고생한 젊은이를 많이 봐서 쟤는 그런 아이들에 비하면 좋은 조건이다 싶어요.아이의 성장에는 왕도가 없다고 보는데 크게 보면 결국은 그 사회 다중의 운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거지요.

 

요즘 사회에서 관심사라고 여겨지는 질문들이 부질없는 사람, 어쩐지 아버지보다 어머니에 가깝게 느껴지는 남자, 내가 만난 신영복 선생은 그런 분이었다.

 


<참여와 연대 격월간지 '참여사회' 96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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