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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1998-03-01
미디어 당대비평3호_홍윤기대담

수많은 현재, 미완의 역사.

- 희망의 맥박을 짚으며

당대비평3호 - 1998년 봄호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홍윤기 (이화여대 철학과 강사)

장소: 당대비평 편집실
일시: 1998년 1월 21일



감옥체험과 여행체험: 수많은 현재들의 하나로서의 역사


홍윤기 : 만나서 얘기한다는 것이 상대에 따라서는 굉장히 어렵고 또 위험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처음 선생님을 직접 뵐 수 있으니 시절이 많이 바뀌긴 한 모양입니다. 물론 한 인격을 대면할 여러 가지 방법이 있긴 했습니다. 저도 베를린에서 공부할 때인 1991년 우연찮게『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접한 것이 선생님에 대한 첫 체험이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는 감옥 갈 일이 워낙 많았습니다. 또 거기 갔다 와 털어놓을 가슴 맺힌 얘기도 참 많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런저런 옥중기를 내놓았던 때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람되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옥중기 쓴 분 중의 한 분으로서 신영복 선생님 개인에 대해 다른 분들과 구별되는 별도의 특별한 관심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신영복 : 감옥이 훨씬 가까워졌었죠? 감옥살이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종의 특수체험이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람들의 생활 가까이로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홍윤기 : 예, 그렇죠. (같이 웃음) 어느 면에서 감옥이 일상화되어 있던 시대에서 방금 벗어났는데 또 감옥 얘기구나 하는 느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제가 귀국한 뒤가 됩니다만, 선생님께서는 감옥이라는 나름대로 특수한 체험의 여진에서 훌쩍 벗어나 중앙일보에 연재된 글들을 모은『나무야 나무야』를 통해 그 전과는 전혀 반대되는 사색의 지평을 독자들에게 열어 보이면서 이 시대의 산문가로 성장하시는 면모를 보여주셨습니다. 감옥과 여행이라는 것은 굉장히 상반된 이미지를 주는 배경인데, 제 개인적으로는 그 체험반경의 일대 전환이 새로운 감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물론 선생님의 체험들을 담은 형식, 즉 '엽서'라는 집필형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닫힌 감옥에서 열린 여행으로 집필의 모티브를 옮기면서 선생님이 전달하시는 메시지의 그 절제와 유연함이 방종과 허세에 빈곤해져 있던 우리 독자들을 매혹시켰던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여행이라는 것도 단지 명승지 관람에서 나온 기행문이라기 보다 깊은 한이 서려 있는 비극의 과거를 다시 일깨워 우리가 사는 현재의 삶에 살그머니 거울을 대어 잔잔한 섬뜩함을 스미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 독자들에게 비쳐졌던 이런 면모를 염두에 두시면서, 우선 이런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선생님 자신이 겪었던 내적인 단절감과 연속성의 체험과정을 마음 편하게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신영복 : 홍 선생이 이야기하신 두 글모음집의 배경이나 형식에 대해 독자들에게 어떤 설명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친한 친구들이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자네는 어째서 한 번 감옥에 들어 앉았다 하면 20년이 넘게 앉아 있고, 어디 나섰다 하면 2년동안 줄곧 온 세계를 돌아다니냐고 합니다. 그 역마살을 그동안 어떻게 눌러왔느냐고 합니다. 제가 중앙일보측의 기획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보다 공부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오랫동안 한 곳에 못처럼 박혀 눈감고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신문사 기획팀에서도 아마 그 점에 착안해서 신선한 시각을 기대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결과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미안하지요. 현장은 관념을 검정하고 상당부분 수정해 주는 곳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외국의 경우는 세계화의 실상을 확인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 같이 감옥과 여행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반대의 사고방식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옥중에 앉아서 하는 사색이고 한쪽은 굉장히 먼 거리와 넓은 공간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감옥에서의 글이나 생각은 아주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을 읽어내는 그런 접근이 필요하고, 여행동안의 생각은 너무 많은 정보를 어떻게 하면 압축하는가 하는 정반대의 접근이 필요했습니다. 이 차이가 아마 가장 기본적인 차이로 제가 느낀 것 같았어요. 이러한 경험은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리라 생각됩니다만 특히 최근의 정보화사회의 정보홍수는 그 차이를 더 크게 벌여 놓았습니다. 감옥이 바늘구멍으로 황소를 바라보는 것이었다면, 바깥은 그 많은 정보들을 어떻게 narrow casting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강하죠. 지금은 broad casting의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홍 선생은 '비극'이라고 표현하셨지만, 관점이 요구됩니다. 해외에서 글을 쓸 때에는 항상 글을 줄이느라고 고생하였습니다. 보고 들은 것을 선별해야 하고 어떤 맥락으로 연결해내는 일입니다. 모든 현상이 기본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선별하고 연결지운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혹시나 정보에 매몰되는 경우 매우 위험한 사고의 피동성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현상과 본질이 동일한 것이라면 과학이 설 자리가 없다고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읽는 관점은 감옥이든 여행이든 여전히 견지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작다는 것은 그것이 정말 작은 것일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 큰 것이 다만 작게 나타나고 있을 뿐임을 잊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생환: 생명, 그리고 자유의 최고치로서의 평등

홍윤기 : 좁은 곳에서 큰 것을 보고, 넓은 데 다닐 때는 거기에서 나한테 집중적으로 들어오는 측면을 쭈욱 해석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수많은 현재'라는 얘기를 하셨는데, 제가 볼 때, 이 현재라는 것은 단지 바로 지금의 단일순간이 아니라 복수의 시간, 복수층으로 되어 있는 걸로 인식됩니다. 『나무야 나무야』는 허준의 얼음골 얘기, 세계기행은 콜럼버스부터 시작을 하셨는데, 저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선생님에게는 역사가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주목하신 이 과거의 일들은 아직 흘러간 것이 아니라 그 수많은 현재 중의 하나로서 우리의 새로운 일들에 묻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존속합니다. 또 그것들은 아직도 그 나름의 멧시지를 전하게끔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그 이음매, 죽어지고 잊혀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마치 수맥을 짚는 것처럼 짚어내는 과정에서 어떤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가려내는 기준같은 것은 없으셨는지요. 역사를 생환시킨다는 그런 입장에서 역사의 현장에 대한 얘기를 풀어나가신다고 했을 때, 이 문제는 역사학에 있어서 선택의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선생님이 과거의 사건을 우리의 현재와 접합시킬 때 선생님 나름대로 그런 것들을 casting하는 어떤 의식적인 패러다임이 정립되어 있지 않을까요.

신영복 : 과거는 현재의 주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당연히 과거의 사건을 당대 사회에만 유폐 또는 감금시키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설령 유폐되거나 감금되어 화석화된 과거라 하더라도 그걸 그 유폐에서 이끌어 내어 현재로 생환시키는 것이 역사학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이 현재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참으로 복잡합니다. 과거보다는 일단 수많은 현재를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이해 당사자가 엄연히 현장에 서 있는 조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만 그 수많은 시각들, 이 시각들을 모두 고려한다는 것은 오히려 현재를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현재의 복잡한 관점을 정리할 수 있는 지점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가 미래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과거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에 있어서의 현재. 이것이 저는 가장 중요하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이것들을 왜 관계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일반적 견해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을 연관시키는 관점, 기본적인 시각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전공이 경제학이고 또 오랫동안 사회인식이나 역사인식의 토대를 사회경제적인 관점에 두는데 익숙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회경제적 관점이 과도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감옥체험이라든가 그 이후 1990년대 이후의 변화된 여러 정신영역의 변화에서 느껴지는 것은 좀 다릅니다. 물론 사회경제사적인 물적 토대의 관점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 자체가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지요. 마르크스의 상부구조인 정신문화영역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비중이 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서구 쪽에선 이 방향의 관심들이 두드러집니다. 마르크스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더라면 이 분야의 연구를 했으리라고 하지요. 토대와의 상호작용 체계속에서 이 부문의 위치를 재규정하고, 또 어떤 국면에서는 토대를 주도하기까지 하는 이 부문의 역할을 재검토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발전사관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면서 오히려 모순관계를 중심에 놓는 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부문의 세력과 이해(利害)의 모순을 변화와 운동의 내적 계기로 개념화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자유(自由)라는 개념이 그러한 관점에 근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답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근대시민사회의 정치적 자유라는 일반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손바닥에 직접 쓰면서) 자(自), 그리고 유(由), 자기의 이유, 자기의 이유를 갖는 사회, 그리고 자기의 이유를 갖는 개인의 삶. 이런 관점이 역사해석에도 유용하고 개인의 사상이나 실천에 있어서도 유의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홍윤기 : 선생님이 만약 그런 자유개념에 입각해 역사서를 쓰시면 아마 헤겔과는 또 다른 뉘앙스를 지니면서 평면적인 여행기 이상의 집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실 제가 선생님의 산문을 제 나름의 관점으로 공들여 읽으면서 아주 독특하게 느꼈던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역사에 대해서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계시면서도 거기에 자연과 삶에 대한, 즉 어느 면에서는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이 역사 전체를 조망하는 근거로 계속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에 대한 외경을 근거로 역사들이 흘러간 흔적들, 봉건사회면 봉건사회, 자본주의 사회면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적지 않게는 사회주의의 물화된 측면들에 대해 엄격한 진단을 가하고 있다는 느낌이 많았습니다. 저의 일면적인 느낌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자연과 역사 또는 생명과 역사의 관계라는 입장에서 볼 때 자유와 생명의 문제와도 연관하여 끊임없이 복잡한 현상이 전개되는 역사를 얘기하기에는 어느 면에선 너무 소박하다는 위험감도 느꼈습니다.

신영복 : 대개념이 많은 걸 포괄할 수 있지만, 초점에 대한 집중력이 그만큼 떨어지는 약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그런 자유개념을 물적인 여러 조건, 사회경제적 조건과 연결할 수 있으면서도, 자유개념을 좀 더 압축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고민도 하고 연구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좀 큰 개념이긴 하지만 제가 과거든 현재든 인간의 삶을 자유라는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론으로는 이런 얘기는 할 수 있을 것 같애요. 과연 인간이 어떻게 해야 자유로울 수 있는가. 예를 들면 쉽게 성장론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사회이든 한 개인이든, 얼마만큼 생산하고 또 얼마만큼 소비하고 소유해야 자유로울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안고 세계 여러 현장들을 다녀본 결론이기도 합니다. 경제적 풍요 속에 있으면서도 사실은 자기의 이유, 자유를 갖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궁핍하고 문명 이전의 원시적 삶의 조건에 있으면서도 아주 자족적이고 자유로운, 한마디로 자기의 이유들을 갖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자유라는 문제를 양적인 문제로 접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는, 욕망의 충족도 상당 부분 자유의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만, 자유는 끊임없이 증폭될 수 있기 때문에 상한을 설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적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죠. 오히려 질적으로 접근해야 되겠다는 겁니다. 질적이란 의미를 저는 자유의 최고치는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평등의 개념은 상대소득과 같은 상대적 개념과 일맥 상통한다고 할 수 있지만 조금 전에 이야기한 모순관계 즉 모순의 양측면의 평등성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항(二項)모순이든 삼항모순이든 모순의 대립측면의 평등성이란 의미로 확대되어 이해되었으면 합니다.


자유실현의 현장으로서 시장질서가 지닌 가능성과 한계성, 그리고 유토피아적 사고의 현실적인 역할


홍윤기 : 어느 면에선 얘기가 너무 일찍 결론 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같이 웃음) 이 부분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해명을 가할 필요가 있겠읍니다. 선생님께서 경제학 그것도 사회경제사적인 입장에서 경제학 공부를 하셨던 중요한 이유도 이 자유가 가능한, 또는 인간에게 보다 질적으로 높은 평등을 보장할 수 있는 물적 조건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하셨다고 보입니다. 정운영 선생님과 몇 년 전에 나누신 대담을 보면 선생님의 경제 구상이라고나 할까 우리 삶을 위한 경제적 구상같은 것이 상당히 치열하게 추구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지금 그 내용에 전혀 접근할 수 없지만 선생님은 한국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을 규명하려면 자본의 존립양식보다는 노동력의 존립양식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치 화두처럼 던져진 말이기 때문에 저로서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짐작컨대 여러 가지 변화를 겪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즉 상품의 생산과 교환을 중심으로 한 시장경제에 대해서만큼은 거의 변함없이 큰 거리감을 견지하고 계십니다. 현재 시장경제에 서 직접 뛰는 사람이든 아니면 거기에서 낙후된 사람이든 전세계 경제 세계화의 핵심이 이 시장경제의 보편화에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이 시장체제의 가속도적인 보편화 과정에서 현대 초기에는 봉건제가 무너졌고, 두 번째로는 사회주의가 붕괴되었으며, 이제는 보다 짧은 시간 안에 자본주의의 근간도 큰 동요를 일으키는 상황이 눈 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의아스러워 하는 부분입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전혀 현실을 주목하는 경제학자 답지 않게 이 시장경제의 불가피성이나 그 시장경제가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상품화의 경향에 대해서 만큼은 굉장할 정도의 저항감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볼 때 시장이나 상품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면에서는, 조금 서구적인 의미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 자유의 실현에 그 나름대로 상당한 조건을 제공하는 측면도 있는데, 만약 그런 흐름에 대해 우선은 심리적인, 그리고 나아가 학문적 저항으로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다면, 시장질서에 반하는 선생님 나름의 대안, 또는 시장경제와 상품경제 이 두 부분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신영복 : 제가 역사현장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자유라는 개념을 말씀드렸는데 이 시장도 당연히 자유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경우 시장이 갖는 양면성이 있 다고 생각해요. 소위 시장 또는 시장경제가 보장하는 자유로움, 이건 우리가 존중해야 하고 또 그 자유로움을 존중한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승인한다는 의미도 되지요. 그래서 기본 적으로 시장을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그 자유로운 공간, 그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있는 것 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장은 동시에 모순의 현장입니다. 시장이 교환의 현장임이 사실이듯 이 교환당사자의 모순이 만나는 곳임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모순이 집중되는 구조가 바로 시장입니다. 제가 모순의 양측면에 있어서의 평등성에 대해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특히 이 점과 관련하여 시장이 결코 평등한 공간이 아니라는 데에 그것에 대 한 거부의 이유가 있습니다. 교환 당사자간의 불평등만 시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와 미래의 모순, 개인과 전체의 모순, 인간과 자연의 모순 등 여러 모순관계에 있어서 대립측면 의 평등성을 시장에 기대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중국의 한나라 재상이 후임 재상에게 정사 의 중심은 재판과 시장에 있음을 주지시킵니다. 이유는 선과 악이 모이는 곳이 바로 재판과 시장이라는 것이지요.

홍윤기 : 말을 끊어 죄송합니다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보면, 옛날에는 '시장간다'는 것을 '장 보러간다' 라고 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느 면에서 시장이 단지 상품교환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communication)의 장소이고, 그리고 농촌공동체의 폐쇄성을 넘어 시야를 확대시키는 다목적의 기능을 발휘했음을 상기시키는 부분이었습니다.

신영복 : 서구 역사에서도 도시에서는 자유의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격언마저 등장했었습니다. 그런 시장의 원리, 시장의 기본 패러다임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곧 개인의 개성과 자유, 사회의 다양성과 변화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이죠. 문제는 이 시장에 있어서의 상품가치에 대해서만큼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원래 가치란 것은, 물론 잘 아시겠지만, 상품교환사회 이전에는 없었던 개념입니다. 우리가 흔히 가치있는 삶, 가치있는 일 등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가치란 것은 교환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 경우에는 정확하게 교환가치이지만, 불가능한 개념입니다. 사용가치를 중심에 두는 생활이나 상품교환 시스템이 아닌 분배구조에서는 가격이나 가치란 개념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가치'란 것은 크기 즉 가치량이 동일해야 교환이 성립됩니다. 바로 이 비교평가의 형평성 즉 등가관계가 성립하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되는거죠. 이 부분에 있어서 시장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드렸는데, 기본적으론 자유의 공간이긴 한데, 그것이 가치 교환의 현장으로서 무수한 부등가교환의 복마전으로 전락될 수도 있는 것이죠. 극단적인 경우 합법적인 수탈의 현장이 되고 비정한 공간으로 전락할 수 있는 그런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점 때문에 저는 시장경제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자로 끝까지 남을 수 없습니다. 논의를 좀더 진척시키면, 교환 당사자간의 부등가교환은 그래도 작은 규모의 수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시장이란 공간 그 자체가 어떤 저의를 가진 집단 또는 사회적인 힘이 통제해내고 있다면 최소한으로 우리가 부여했던 시장의 자유공간으로서의 의미도 훨씬 축소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스베가스라는 도시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이미 돈을 잃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게임규칙에 따르게 되어 있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장과 자유를 연결시키는 정서는 반봉건적인 시민사회의 정서에서 유래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시장과 자유는 매우 오래된 패러다임입니다. 소상품 생산이 경제규모의 절대적 포션을 점하고 있었을 당시의 이야기라고 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시장경제 또는 시장메카니즘에 대한 저항감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상품일반에 대한 불신을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죠. 최근의 경제적 위기에 대해서 그것을 '시장의 실패'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시장의 본질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홍윤기 : 지금 여러 가지 경제위기 상황이 전개되고 있긴 합니다만, 좀 비정하게 보면, 인간의 역사, 그 중에서도 현대사는 화폐를 통한 추상적 교환기능이 극대화되고, 이제는 국제금융메카니즘을 통한 부등가교환이 교환의 정상모델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런 정황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착취와 빈곤의 위험을 동반하지 않는 삶의 질서를 수립한다는 것은 인간의 현실 역사에서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적 사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선생님은 치유할 수 없는 유토피안이 아닌가 하는......

신영복 : 저의 경우 이상주의적 경향이 적지 않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상주의에 대하여 경계하는 이유는 이상적인 모델을 미리 상정하고 그 모델로부터 실천을 받아오는 그런 방식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실천의 경우든 개인의 사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적 조건 그리고 그 현실 속의 실천주체가 갖고 있는 정서적인 현주소를 무시하고 있는 관념성과 도식성이 이상주의의 결함이고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이상주의적 사고방식이나 이상주의적 작풍을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에 있어서는 이러한 이상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다면 오히려 유토피안, 이상주의적인 경향이라는 것은 현실의 모순을 장기적인 시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서는 참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도 홍 선생이 얘기하셨듯이,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을 돌이켜 볼 때, 착취와 빈곤의 위험이 없는 삶의 질서, 그런 자유로운 사회가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없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주의적 시각을 부지런히 도입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재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또 매몰되지 않기 때문에 현재 상황의 모순이나 한계를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구분한다면 낙관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비관적인 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의 다채로운 모순들과 종합예술로서의 사회적 실천


홍: 현실의 모순이라는 말씀을 하셔서 제가 여쭤보고픈 점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주 젊은 시절 수감되어 장년기를 다 보내시고, 다른 동년분들은 이제 인생을 정리해 볼까 하는 지금 시기에 다시 왕성하게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재기하시는데 성공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수감되었을 당시의 현실적 모순하고, 가석방이라는 어정쩡한 형식이기는 합니다만, 인신구속이 풀린 상태에서 느끼는 현실적 모순이 모순이라는 하나의 단일개념으로 포착되기에는 그 내용이 상당히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도 그 전의 대담에서 말씀하셨지만, 선생님 학창시절에는 주요모순이 농업부분에서 이루어졌는데, 선생님 인생에서 현실적 모순 자체가 수시로 변하고, 그에 따라서 유토피아적 이상이란 것도 그 내용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됩니다.

신: 제가 출소 후 아마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의 하나가 참 많이 변했죠라는 질문입니다. 처음에는 비교적 가볍게 받아들이다가 언제부터인가 상당히 진지하게 나 자신이 검토해보게 되었죠. 그 다음부터는 그런 질문에 답변하는 방식도 아주 선택적이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변한 부분도 있고 변하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연속성이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만, 문제는 사회성격에 대한 논쟁 역시 내용면에서는 내가 받은 질문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회성격에 관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우리사회의 기본모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식반론, 신식국독자론, 기본모순, 주요모순 등에 관한 논의들이 소모적이라고 해서 지금은 유보하기로 합의해두고 있다고 믿습니다. 저도 물론 사회성격논의를 재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제가 학교를 다니던 60년대초에 비해서 사회성격이 상당히 변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모순 그 자체의 변화라기보다는, 모순의 현상형태가 달라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성격은 모순구조의 변화에 의해서 변화되는 것이며 모순구조의 변화는 새로운 반대물로 전화될 수 있을 정도로 이전 단계의 대립구조가 지양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는 거의 같은 구조를 가지면서도 양적인 변화 또는 조건적이고 상대적인 변화가 현상형태를 달리해서 나타날 수 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의 IMF사태에서도 그러한 성격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는 시각들도 참 복잡한 것이 사실이지만 제 경우는 역사적으로 접근해 보는 쪽이 쉽다고 생각합니다. 해방직후에는 밀가루, 식량을 도입했었죠. 그것이 무상이냐 유상이냐는 문제가 안됩니다. 무상원조가 유상원조의 초기형태이며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밀가루, 식량에 이어 공업화와 함께 플랜트를 사들였죠. 무기도입은 전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음은 물론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금융상품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외국투자, 그것이 플랜트형태든 기술형태든 외국자본이 들어오면 고용창출이 일러나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연관효과도 상당한 크기로 기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반대 현상이 일어납니다. 정리해고와 기업의 도산이 그것입니다. 현상형태의 변화가 성격변화의 결과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선진자본주의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금융자본주의는 성격변화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단계변화로 설명됩니다. 한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만 기본적인 모순이 변화되지 않은 조건에서도 현상적으로는 훨씬 다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변했는가 변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상당히 신중한 검토가 있어야 합니다. 제 경우는 엄청난 변화, 우리가 맞이하는 여러 가지 고통과 위기 상황의 성격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아직도 청산되지 않는 그런 기본적인 모순은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홍윤기 : 약간의 의문을 제기한다면,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그런 느낌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만, 한국 사회에 여러 가지 모순이 있다. 예를 들어 경제성장으로 인한 자본주의적 모순을 일차적으로 들 수 있겠는데, 처음에는 그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불온시 했다가 이제는 그런 모순이 숨길 것 없이 만천하에 드러나니까 이제는 너무나 일상적인 인식이 됐다는 것이 힘빠지게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그리고 직접적으로 선생님 인생에 큰 상처를 남긴 민족모순같은 경우 더 할 얘기도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 대외적으로 국제자본에 대한 종속의 문제가 큰 쟁점이 되면서 그에 대한 수동적인 피해의식이 우리 사회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막론하고 체질화된 측면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당면한 현실적인 모순은 그 내용이 상당히 다채로왔습니다. 이런 정황에서 실천적인 대안을 모색한다고 했을 때, 거기에서 나왔던 얘기들의 일관된 기조는, 그런 모순들 가운데 비중상 가장 중요한 것이 있고, 우리의 내적 역량을 결집해 그 가장 중요한 모순만 해결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 안에서 이런 실천적 역량을 가진 집단을 분석해 낸다던가, 어떻게 길러 낸다던가 하는 그런 쪽으로 얘기들이 많이 집중됐던 것이 90년대 초반까지의 우리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어떤 모순이 가장 중요한가를 둘러싸고 사상투쟁이라는 미명 아래 소모적인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다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정치적 민주화라는 객관적 상황이 도래하자 다들 입을 다무는 한심한 작태가 벌어졌습니다. 논쟁을 그쳤다고 해서 한국 사회의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요새 전개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어쨌든 우리가 지금까지 모순이라고 지적해 왔던 현상들이 그야말로 폭발 직전에 공개되고 만천하에 인지됐습니다. 어떤 모순이 다른 어떤 모순보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할 것 없이 그야말로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순들이 막상 집약적으로 터지고 나니까 상당히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어느 면에서 한국에서 실천적 역량을 결집하겠다고 뛰었던 세력들은 그 동안 대부분 그 나름대로 제도권에 들어온다든가 하여 거의 공론화된 상태입니다. 문제는 현재의 위기를 우리 힘으로 극복하자는 얘기가 굉장히 어색하게 들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경계해 왔던 대외세력들이 우리 사회에서 지금까지 바라고 있던 굉장히 진보적인 요구들, 예를 들어 재벌해체나 군비축소 등의 요구를 내걸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와 반대되는 측면도 지적하시겠고 저도 거기에 동감입니다만, 과거의 실천 패러다임으로 보면, 지금 이런 대외적인 압력의 첫 표적이 되어 있는 우리 재벌, 그동안 매판세력이라고 비난해 왔던 이 재벌을 이제는 민족경제의 수호자로 내세워야 하는 판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주체적인 역량이 있다면, 또 지금보다 이 주체적인 역량이란 것이 절실한 때도 없었습니다만, 이런 역설도 견뎌내면서 실천의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여야 한다고 생각됩니다만.

신영복 : 그렇습니다. 홍선생이 방금 말씀하셨듯이 결국은 우리의 주체적인 역량을 어떻게 묶어 낼 것인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객관적인 조건과 주체적인 역량 이 둘 중에서 주도적인 건 주체적인 역량이죠. 그런데 오늘날 여러 가지 모순,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원인은 내부에서 찾는 입장은 견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문제는 이 모순구조가 참으로 복잡하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국제 금융자본이 종전에 우리가 요구했던 진보적인 요구를 가지고 간섭해 들어온다고 그랬듯이, 자본과 자본, 자본분파간의 모순, 또는 자본과 노동의 모순, 또는 상품과 소비자간의 모순, 또는 민족모순, 이런 아주 무수하고도 복잡한 모순들이 별개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로 또는 계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며 이것이 모든 현실의 일반적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순군에 대해서 위계를 매긴다는 것도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은 대상분석이고 객관적 분석입니다. 당연히 아까 말씀드린 이상주의의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과도 맥락이 닿는 이야기입니다. 원인을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원칙선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실천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적인 역량에 주목하는 것이거든요. 물론 주요모순이란 개념이 주체적 조건도 포용하고 있기는 합니다. 내부에서 찾고 주체적 역량을 중심으로 모순구조를 주체적으로 재편성하여 대응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좀더 자유로운 사고를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기본모순, 주요모순, 주력군, 타격방향 등의 도식적 사고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중요한 포스트가 있고 먼저 착수되어야 할 사업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이런 작업들이 아주 종합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여튼 사회변혁은 최고의 종합예술이라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종전의 그런 협소하고 또 논리적으로 단순화되어 있는 그런 이론적 지침에 따른 주체의 편성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열어놓는 어떤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게 현재의 당면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실직하고, 아마 백만 이백만의 실업이 예상되고, 또 모든 부문에서, 즉 교육, 환경, 교통, 빈민, 농민, 노동 등 수많은 현장에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순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그 중에 어느 것이 유일한 모순의 현장인가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실천적인 관점에선 그리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해요.

홍윤기 : 90년대 초까지는 주체적인 역량을 얘기할 경우, 그것도 역사를 조금은 앞당겨보고자 하는 그런 노력에서 주체적 역량이 모아졌을 경우에, 또는 있을 경우에, 어떤 식으로 그 주체적 역량을 활용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주로 저항에 초점이 집중됐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모을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이라든가 우리 현실의 문제를 파악하는 방식도 보다 입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입니다. 문제들 사이에 기본모순, 주요모순, 부차모순 하는 식으로 위계를 매기는 방식부터 고쳐나가야 하는데, 만약 현재 우리가 주체적 역량을 결집한다고 했을 때 어떤 식으로 모아,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할지에 대해 단초적으로나마 어떤 생각이 있었으면 합니다.

신영복 : 제가 세계기행을 마치면서 제일 마지막으로 공자와 유가에 관한 얘기를 썼었어요. 그 때 저는, 공자를 제 나름대로 읽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공자의 군자의 개념이란 것이 당시의 귀족적 신분사회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새로운 엘리트 집단, 방금 우리가 얘기한 주체적인 그룹을 개념화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그 다음 시대를 열어갈 엘리트 그룸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공자가 제시한 군자로 대표되는 엘리트그룹이 난세의 주요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실패했지만 공자는 특정시대의 특정 엘리트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기보다는 새로운 그룹들에 대한 필요, 이것을 공자가 제시했다는 점에서 역사를 뛰어넘는 사표로서의 의미가 있다면 있지 않겠는가 하는 느낌입니다. 그러한 관점을 꼭 빌리지 않더라도 어떠한 역사적인 시점에서도 당면 과제를 담당할, 그것을 저항이라는 형식으로 이해해도 좋습니다만, 짊어지고 나갈 수 있는 그러한 집단에 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요.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현재 어떤 형식, 어떤 이름으로 그러한 것을 만들어야 되는가. 이건 참 결론을 내리기 이르다고 생각이 되요. 다만 전 이런 가능성만 말씀드리고 싶어요. 특히 90년대 초반 이후 급속하게 그런 변혁의 역량들이 빠져나가면서 많이 약화됐다고 얘기하죠. 하지만 이 문제를 보는 관점은 두가지여야 합니다. 하나는 물론 양적인 관점입니다. 80년대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사회적인 다수성과 운동성을 과시할 수 있는 그런 양적 측면도 중요합니다. 다른 한 가지는 질적 측면인데, 이것은 역량이 조직화되어 있는가 되어있지 않는가 하는 관점입니다. 양적으로 많은가 적은가 보다도 그 역량이 조직역량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 이제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9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양적으로는 상당한 위축을 겪었지만 저로서는 60년대 경험과 비교해 본다면 각 부문운동의 역량들이 대부분 조직화되어 있다고 봅니다. 조직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질적인 발전이라 생각되고, 각 부문운동들이 지금은 상황 자체가 희석되었기 때문에 대개는 부문운동 내부문제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당 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각 부문운동이 가지고 있는 조직적인 역량의 존재형태와 자기 분야의 문제를 과거로나 미래로 조금 확대해서 보는 관점만 갖는다면 그런 부문간의 연대, 수준이 높든 낮든, 연대사업 연대조직을 얼마든지 모색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무분별하고 상투화된 연대운동은 오히려 부문운동의 정체성과 전문성을 낮추어버릴 위험도 없지 않습니다. 최고의 비극현장을 중심으로 연대하는 방법보다는 각 부문에서 그런 역량들을 부지런히 꾸려가면서 일단은 외부로 열어놓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적 종합의 가능성을 높혀 놓는 것이기도 하지요.

홍윤기 : 정운영 선생님과의 대담에선가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걸로 기억합니다만, 차이를 대립이 아니라 다양성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많은 부분 실패했던 경험이 있다는 그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어느 면에선 차이들 사이에 서로 위계질서를 줘서 어떤 차이가 더 중요한 차이냐를 결정하는 데 골몰한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떠한 차이나 문제도 소홀할 문제는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이런 다양성의 문제는 어느 면에서 각 인간들의 인식능력을 넘어서는 복잡함을 안겨주기 마련인데, 이런 다양성들을 연대적으로 엮어낼 원칙이나 방식이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겠습니까?

신영복 : 제가 아까 종합예술이란 말을 했는데 예술이라는 것은 과학과는 구별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학적 접근을 한다면 당연히 각 부문이 갖고 있는 역량분석이라든가 또는 모순과 대치할 위치라든가 하는 것을 밝혀내고, 나아가 어디서부터 어디와 연대하고 어떤 순서를 밟을 것인가 하는 사고를 하게 되지만, 종합예술이라는 관점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요. 직선이 아닌 곡선입니다. 산술사칙(算術四則)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이지요. 굳이 원칙을 하나 제시한다면, 너무 지나치게 단순할진 모르지만, 진보적인 그룹 또는 진보적인 사람과 덜 진보적인 사람이 연대할 때는 반드시 진보적인 사람이나 그룹이 양보해야 된다는 주장에 저는 동의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연대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덜 진보적인 그룹이나 사람은 양보할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학적인 역량의 결집 방식과는 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 자리에서 예술이 단수가 높은 과학이라고 한다면 엉뚱한 선언이 됩니까. 어쨌든 예술과 곡선의 논리가 공감되기를 바랍니다.


산문정신, 그리고 '당신'에 대하여

홍윤기 : 어느 면에서는 이런 대화가 산문을 통해 알려진 선생님의 초연한 모습에 익숙한 독자들한테는 좀 의아할 수도 있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젊은 시절 당시 분위기와 크게 배치되는 급진적인 생각을 하셨으면서도 대중적으로는 아마 크게 호응을 받지 못했는데, 지금 그 당시와는 달리 산문가로서 독자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많은 애정과 호응을 모으고 계십니다. 선생님이 현재 쓰고 계시는 글들은 절대 과학적인 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건 결코 비판이나 비난하는 의미에서 과학적인 글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말씀하신 종합예술이라는 입장에서 듣고 보니 선생님이 산문을 하시는 밑바탕을 좀 이해할 것 같습니다.이 산문들 말고도 선생님께서는 중국 역대 시가를 공동으로 번역하시기도 했는데, 실 때 거기에 여러 말씀을 하신 걸로 기억을 합니다만 이 산문이라는 형식이 가지고 있는 문화사적 위상이라든가, 나아가 산문으로 작업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느낄 수 있었던 가능성, 또는 독자라고 그러면 좀 협소한 개념입니다만, 이 시대의 독자대중들하고 교감하는 방식에서 선생님께서 겪은 어떤 특이한 체험같은 게 있는지요?

신영복 : 물론 저한테 허용되었던 공간이 아주 제한되어 있었고, 제가 짧은 산문만 쓸 수밖에 없었던 객관적인 조건도 있었습니다. 또 주로 제가 독자들과 만나는 곳이 신문지면이었지요, 제가 신문원고를 제가 쓰면서 제일 많이 고생하는 것이 아까 말씀드린, 줄이는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글이 늘 선언적이라는 것입니다. 논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무리할 정도로 논증과정이 생략된 글들이라 과연 전달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을 늘 갖고 있습니다. 다만 한가지 제가 위로를 받는 건 중국의 노신(盧迅)이 중국의 전통 문학사에는 없는 잡감(雜感)이라는 아주 짧은 글, 단문형식으로 자기 문학적 실천을 아주 훌륭하게 해냈던 예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이 당면했던 과제는 그 역사적인 무게도 무게지만 여러 시대가 한데 뒤엉켜 있는 복잡한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신의 주변상황도 매우 불편한 것일 수 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만들어낸 형식이 소위 잡감이라고 하는 형식이라고 합니다. 마치 단도처럼 그때 그때 발 빠르게 대응하면서도 번뜩번뜩 기지를 내보이면서 적절하게 문제제기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았던 그런 경험도 생각이 났습니다. 제 경우는 물론 그것과 같은 형식도 아니고, 그런 수준도 못됩니다. 과학과 산문 사이에는 넘나들 수 없는 현격한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저는 항상 그런 생각을 해요. 잘 제기된 문제는 이미 반 이상의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늘 위로로 삼으면서 썼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사람들의 창조적 공간이 되기를 바래요. 뭔가 결론을 내릴 수도 없는 것이 제자신의 한계이기도 하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결론을 주는 것 보다는 고민의 계기를 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정도로 의미를 한정하고 있습니다. 제도권 일간지라는 매체의 특성도 분명히 있습니다만, 일이라는 것은 내포를 심화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연을 확대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자위도 하고 있습니다.

홍윤기 : 한편 한편이 짧기는 하지만 선생님의 글마다 그 나름의 완결성을 띠게끔 굉장히 노력하신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제 그런 줄임의 고통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은 교도소에서부터 훈련이 되어 있었다는 데 새삼 생각이 미칩니다. 집필의 양이 제한되어 있기도 했겠지만, 사사건건 검열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글자 하나라도 그 표현에 있어서 최대한의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절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아마 그냥 백지를 주고 맘껏 쓰는 것하고는 또 다른 자기훈련을 요구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부터 『새로운 세기를 향하여』까지 아주 중요한 모티브가 변치 않고 이어지는 데 누구나 주목하리라고 봅니다만, 선생님의 엽서들에는 마치 한용운의 님처럼 '당신'이라는 수신자가 항상 등장합니다. 아니 등장은 하면서도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아주 중요한 순간에 선생님은 뒤로 물러 서면서, 당신의 소리를 얘기하고, 거기에서 화두처럼 던지는 말을 가지고 글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이런 서간문체를 두고 고은 선생님은 선생님께서 우리 문학사에서 여성적인 스타일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는 평가도 하고 게십니다만, 단도직입적으로 항상 선생님의 수신자로 등장하는 그 '당신'은 누굽니까?

신영복 : 그런 질문도 제가 받습니다. 우선 당신이 누구냐는 답변보다도, '당신'이 있으니까 글쓰기가 참 편하다는 말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글을 진행하기 참 편했습니다. 저는 사실 명함을 갖고 다니지 않고, 또 연말에 연하장 한 장도 못 부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뒤늦게 세상에 나와 열차를 놓친 사람처럼 초조하게 여기저기 편승하려는 그런 생각이 없기 때문에 혹시라도 그런 느낌을 남에게 줄까봐 그러기도 합니다. 누구를 향해서, 아마 독자일반이 되겠지만 무엇을 얘기한다는 것이 상당히 불편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기 보다는 아직은 세상을 공부해야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특정한 사람, 제 글에서는 '당신'이 그 상대가 되고 있습니다만, 어떤 사람한테 사사롭게 주고받는 이야기를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우연히 듣는 것이라면 부담이 덜할 것 같았습니다. 우리끼리야 무슨 얘기를 하건 상관이 없지요. 여러 사람이 들으라고 한 건 아니니까요. 그런 의도에서 '당신'이란 것을 상정하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예를 들면 제가 아까 우리 사회의 주체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그러한 주체가 자연스럽게 대상으로 상정되는 당신이 있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내 자신의 얘기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라는 식으로 얘기하기에 아주 외람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당신'을 빌려서 제 얘기를 싣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제가 감명 깊게 읽었던 글이라든가 인용하고 싶은 주장들이 있으면 그러한 것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이야기로 쓰기도 했습니다. 당신이라는 설정이 결과적으로는 제 경우에 참 편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 많은 독자들이 자기가 그 당신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더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체성의 문제: 우리가 되어야 할 그 모습에 대하여

홍윤기 : 아까 무수한 현재라고 하셨지만, 이제는 무수한 당신들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조금 일찍 나왔어야 하는 얘기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이 '당신'과의 내밀한 대화 속에서 선생님은 차근차근 자신의 정체(正體. identity)라고나 할까요, 선생님 자신을 포함하여 독자들, 나아가 우리들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동시대인들 전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모색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차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독백이 아니라 나와 너의 만남 속에서, 그리고 거기에서 오가는 진솔한 대화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이 현대 사회철학에서 일관되게 확인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정체성이라는 것이, 제가 조금 사시안으로 보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그것이 어떤 폐쇄적인 친밀공간에서만 이루어질 경우 또 다른 의미에서의 정체(停滯. stagnation)를 조장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대담을 준비하면서 선생님 글을 읽은 몇몇 독자들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들 선생님 글의 품격을 인정하고, 또 좋아하고, 무엇보다도 그 글이 가지는 호소력에 이의가 없으면서도, 의외로 약간 짜증난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선생님이 국내 여행지에서 쓴 상당수의 글들은 그 여행지에 얽힌 역사를 읽어내는 내용인데, 그 역사라는 것이 좀 비극적이고 좀 비관적인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점은 현재 저희 삶의 왜곡된 부분을 상기시키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항상 이래 왔는가 하는 느낌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숨겨진 역사 얘기의 바탕에는 항상 '남'에게 당하고만 살아 기를 펴지 못하는 우리에 대한 한스러움이 풀리지 않은 채 뭉쳐 있어 답답하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불만을 토로한 분들이 흔히 하면 된다는 식의 주술적인 이데올로기를 요구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점은 덧붙여야 하겠습니다. 어느 면에서 당한 자는 항상 옳고, 박해자는 항상 그르다는 양분론적인 판단 안에서 앞으로는 그런 일들을 당하지 말아야 하는 데 필요한 사항들에 대한 적극적인 반성이 차단되는 측면도 있다는 얘기죠.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 세상에 억압적인 지배질서가 존속하는 데는 피압박자의 직무태만에도 일정 정도의 '책임'요인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역사적 부당함이 피압박자에 그 전적인 '원인'이 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신영복 : 여기서 얘기되는 정체성이라는 것이 제 자신의 정체성이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늘 대화의 상대로 삼는 '당신'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또 그게 크게는 우리 사회의 모순이라든가 미래를 짊어지고 갈 새로운 엘리트집단의 정체성하고도 관계됩니다. 이 문제는 사실 더 많은 어떤 분석과 논의를 거쳐야 합니다만, 우리 사회의 문화와 역사적 전통 또 우리 민족의 정서, 이런 것들이 한데 융합된 것이라면 분명히 자본주의적인 서슬 푸른 경쟁논리, 물질적인 성장논리, 이런 것을 넘어설 수 있는 인간론, 인간관계론이 모색될 수 있고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정체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서구쪽에서 오히려 많은 분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이기도 합니다만 복잡계 이론의 영역이 동양적인 공동체 문화전통과 상당히 근접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요. 근대 이후에 나타난 분석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사고를 뛰어 넘고 있는 그런 문화전통이 동양적 사고 속에 있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 경우에도 개별적 존재보다는 그 존재의 고립성을 공동체 속에 담아낼 수 있는 관계론의 전통이 풍부하지 않는가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까 과학적인 경로와는 좀 다른 예술적인 경로로 우리의 엘리트 그룹을 만들어 낼 필요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그것도 이런 점과 모두 유관한 얘기입니다. 그런 정체성들을 지향해 가는 게 필요하고 자본주의와 경제위기, 종속적 세계질서, 그리고 우리사회가 몰두해왔던 물신성, 이런 것들에 대한 반성까지도 담아낼 수 있다면 우리가 동양적 정체(停滯)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추구할 여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 글에서 보다 적극적인 비전이 아쉽다는 독자들이나 홍 선생의 불만에는 저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비극적이고 비관적인 분위기도 그렇습니다. 비록 아프기는 하지만,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기 보다는 일단 직시하고 나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은 어둡고 아팠던 현장들만 찾은 것도 아닙니다. 해돋이라든가 일몰에서도 희망과 사랑을 얘기하려고 했다고 기억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나누어야 할 위로라든가 또 키워야 할 자부심과 역량이라는 것이 이게 무슨 물질적인 역량을 이리저리 조합(combination)하는 것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사회역량이라는 것은 매우 상대적인 것이고 심지어는 비물질적이기까지 합니다. 어떤 국면에서는 증폭되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가 하면, 급작스럽게 추락하기도 하는, 매우 역동적인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고무적인 내부추동력에 주목하면서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을 저도 인정합니다. 그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런 색조를 띌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변명같습니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형식적인 가치, 이를테면 성장론의 이데올로기에 너무나 유폐되어 있었다고 인식하고 이런 것은 오히려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좀 외람된 의도의 소산이기도 합니다.

홍윤기 : 아픔을 직시하는 것이 우선 얘기를 시작하는 순서라고 했을 때, 앞으로는 선생님께서 적극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그 다음일 것이라는 기대를 해보아도 좋겠군요. 선생님께서 세계를 돌아보시면서 나름대로 우리 삶의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많이 가진 흔적이 역력합니다. 저한테 인상적으로 남는 것도 있습니다. 스페인에 가셨을 때 몬드라곤 협동조합 그룹을 방문하셨고 일본에서는 가나자와시를 찾아가 내발적 발전론의 건설적 단초들도 확인하셨습니다. 그런 발자취에서 저는 앞으로 우리 삶이 문화적인 수준으로까지 성숙하지 않으면 그 문화적인 것의 기초인 경제적인 것도 추스르기 힘들다 라는 메시지를 전달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런 사례들에서 저는 우리 나름의 자족적인 공동체를 꾸려나간다는 것이 아주 고립적이고 제한적인 차원에서만 시도될 경우 현재의 여러 추세로 볼 때 굉장히 어려지 않는가 하는 인상도 강하게 전달받았습니다. 역설적으로 선생님께서 찾았던 여행지들 중 상당수는, 리버플에서 쿠스코까지, 나아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히말라야까지, 물론 히말라야쪽은 얘기가 틀립니다만, 한 때 번성했다가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명승지로 화석화된 곳이 많았습니다. 뒤집어 얘기하자면, 이런 곳들은 존립할 당시 사회의 지배구조가 집결된 곳이었는데, 시장질서나 경쟁관계에 가열차게 침입당하면서 자기 모순이 드러나면서 급격하게 붕괴된 곳이기도 합니다.

신영복 : 제가 몬드라곤이나 가나자와 같은 지역 중심의 공동체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느 공동체 내부에서 공동체적 철학과 윤리 또는 문화가 정착된다 하더라도 그 공동체를 감싸고 있는, 그리고 외면할 수 없는 치열한 경쟁논리 때문에 그 공동체가 결과적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없는 한계도 동시에 봐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도가 보편화되지 않고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세계적 정서, 문화로 정착되기는 참 어렵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몬드라곤 기행 끝부분에도 썼습니다만, 가장 보편적인 삶의 형태, 예를 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기업 같은 틀에다 몬드라곤이나 가나자와 같이 자립적이고 수준높은 공동체적 전망을 그 속에 심어나가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 몸 가까이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집단들을 점진적으로 바꾸어내는 노력들이 지속됨으로써, 고립됨으로 인해 겪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변질을 예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최근 우리 나라의 중소기업들도 그런 시도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중소기업들이 건전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도로 파산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 기업내부에 노조가 있다든가 또는 그 기업을 살리려는 종업원들의 의지가 확실한 경우에 생산협동조합(Worker's corporation)형식으로 다시 되살려내는 과제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그 수도 많고 몸 가까이 있는 삶의 형식에서부터 시작하여 낮은 수준이지만, 노력해가는 것이 아주 현실적이지 않는가 합니다.

 




세계화의 현주소와 공동체의 구상

홍윤기 : 국제시장의 경쟁에 무차별 노출되는 것이 어쨌든 바람직하지 않다는 선생님의 견해는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런 경쟁조건을 피할 수 있는 대안이 마땅치 않다는 사실이 많은 이들을 답답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극단적인 세계화를 밀고 나가려고 했던 이들이 세력을 잡아 지난 5년의 개방정책들, 예를 들어 우루과이 라운드 수용, OECD 가입 등을 서둘다가 누구도 기대나 예상도 하지 않은 IMF 체제를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각기 입장은 틀려도 국제 금융자본이 들어오지 않으면 국민경제 전체가 붕괴된다는 논리나 전망에 맞대놓고 달겨드는 이가 하나도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어떤 공동체의 구상도 시장과 경쟁에의 노출을 감안하지 않으면 비현실적인 것으로 되기 십상입니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습니다만,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지금까지 충분히 매판적이라고 비판해 왔던 우리 나라 대기업이나 재벌들이 실상은 외국 자본들이 들어와 활개치지 못할 만큼 배타적이었었다는 역설적이고도 자조적인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 사회는 어느 면에서 자족적인 정체성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상하를 막론하고 외국과의 접촉에 있어서 지나치게 경직되었던 측면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극단적인 배타성과 극단적인 개방을 추구하다 보면 결과는 그 양방향의 부정적인 측면만 모아지는 사태가 앞으로도 계속 벌어지리라고 생각되는데, 차제에 우리와 다른 것들, 또 우리와 남인 사람들에 대한 어떤 건설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이나 태도가 정립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세계 기행 중에 그런 측면에서 관심을 끌었던 일들은 없었는지요.

신영복 : 제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가 세계화의 현주소였어요. 과연 세계는 얼마나 세계화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세계화의 구호에 걸맞을 정도로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세계화라는 것은 세계 일각에서 일어나는 그런 움직임밖에 안 된다는 아주 이율배반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계화되었다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각 지역의 도시와 도시 중산층이었습니다. 그들의 경제철학은 똑같았고, 중산층의 윤리 또는 생활패턴도 거의 세계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로 아프리카나 인도, 네팔, 남아메리카, 그리고 유럽의 경우도, 홍 선생도 오래 계셨으니까 잘 아시겠지만, 시골은 세계화와는 아무 인연도 없이 자기들의 문화를 별로 불편하지 않게, 세계화에 대한 절실한 필요도 느끼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그래서 『새로운 세기를 찾아서』의 에필로그에도 그런 얘기를 썼습니다만, 그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배타적이다, 민족적이다 라는 관점을 떠나 그 사람들이 사는 방식, 그 사람들이 길러온 문화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런 것들은 오랜 세월 그 땅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은 결과 자기들이 가장 지혜롭게 만들어낸 문화이고 삶의 틀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계화란 그러한 문화적 전통, 공동체적 공간을 창 끝으로 찌르고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세계화라는 것에는 하등의 윤리적 동기가 없습니다. 자본의 운동과정이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지적할 필요가 없음은 물론입니다. 자본순환과정에서 오직 뉴프런티어나 시장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런 자족적인 공동체의 틀을 깨뜨리는 세계화를, 일단 주어진 조건으로 승인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세계화를 주도하는 미국이나 독일 같은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조차도, 상당히 많은 일반 서민들의 생활들은 세계화와 무관하게 살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오히려 세계화가 그들에게 어떠한 부담으로 다가가지 않는가 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민족적인 것 또는 배타적인 것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물론 있습니다. 세계화의 걸림돌이며 뉴프런티어로서 개척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세계화와 무관한 삶의 방식 자체가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하나의 정치행위, 정치적 실천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홍윤기: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충분히 세계화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이 IMF 사태가 난 게 어느 면에서 세계화 과정의 하나인데, 온 나라에서 그와 관여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요.

신영복 : 세계화되었다기 보다는 우리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경제의 토대 자체가 이미 세계경제체제에 확실하게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곤경을 치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객관적인 상황이겠죠.

홍윤기 : 세계화의 문제에 대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거칠게 요약하면, 세계화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균등한 과정이라는 그런 얘기가 됩니다만..
신영복 : 그리고 세계화 자체가 그런 구도를 처음부터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볼 수도 없구요. 선진국내에도 국민들의 지위가 단일하지 않지요. 오히려 불균등 정도가 더 심한 주변부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요.


세계화 흐름 속에서의 우리 민족

홍윤기 : 저와 조금은 입장이 다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을 조금 더 안으로 보면 우리가 과연 세계화를 거침없이 추구해도 될 만큼 우리 민족 자체가 충분히 민족화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도 반사적으로 제기되기도 합니다. 어느 면에선 선생님의 아픈 삶을 건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만, 지금 현재 우리가 민족적이라든가 이런 것을 모두 이야기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의 아픔은 계속 남는 것 같습니다. 민족적인 걸 우리가 충분이 얘기한다 하더라도 일단 과연 우리가 얘기하는 민족적이라는 것이 과연 동일하고 종합적이고 단일화된 개념으로 이야기할 수 있느냐. 짐작하셨겠지만 우리 민족이 분단상황이라든가 그리고 또 공교롭게도 어쨌든 남북한 모두 전세계에서 한쪽은 식량, 한쪽은 돈이 모자라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을 만큼 한심한 상황입니다. 지금 선생님의 개인사하고 많은 연관이 되었지만, 당장 우리 민족 내에서도 나름대로 꺼야 할 불이 한 두 가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런 여러 가지를 구상함에 있어서 민족분단이라는 것이 지금 원천적으로 우리의 사유와 행위를 많이 제약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야 제약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감금이라는 뼈아픈 경험도 하였습니다.

신영복 : 비단 민족문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아까 세계화의 현장에서 느꼈던 심정하고도 연결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게 나라든 도시든 또는 하나의 기업이든 또는 한 사람의 개인이든 그 삶의 원리,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남북간의 민족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민족 통일은 지상과제이지만, 공존 또는 공존을 존중하는 평화체제만 수립되면 통일에 이르는 과정 중 90% 이상이 달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짊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분단비용들을 벗을 수 있습니다. 남북의 이질성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세계의 여러 곳을 다녀보니까 남북간의 차이라는 것은 차이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인식만 공유하면 통일은 뜨거운 쟁점이라기 보다는 단계적인 시간의 문제가 됩니다. 남북한이 지금 공히 식량과 자본 때문에 곤경을 당하고 있는데, 저는 이번 외환 수급에서 오는 위기구조를 보면서 적어도 멕시코라든가 필리핀, 인도네시아와 같이 차라리 모라토리움을 선언할 수 있을 정도로 자립성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경우는 그게 불가능하잖아요. 에너지와 식량 부분에서 자립성의 기반이 너무 취약합니다. 비록 경제적으로 앞서 있지는 않았지만 식량을 자급하고 있는 나라는 사람들이 느긋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점이 참 부러웠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정체성이나 민족 공동체 수립도 염두에 두어야 하고, 통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이런 전망을 갖기 위해서도 중장기적인 계획이 지금부터 마련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물적 토대에 있어서의 자립성 없이는 경제정책이나 외교적 선택에 있어서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한파가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기 때문에 굉장히 마음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기회에 우리가 정말 직시할 것이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에게 식량과 에너지의 건전한 토대가 필요하다는 합의가 상당한 정도까지 이루어져 앞으로의 경제개발이라든가 경제 운용방식을 그러한 관점에서 추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사회구성의 변화에 대한 전망

홍윤기 : 물적 토대의 자립성 문제 같은 경우는 80년대에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이라든가, 그와 방향은 틀리지만, 종속이론 등에서 상당히 강도 높게 주장됐던 적이 있습니다만,한국의 대외수지가 현격하게 개선되고 개방화 논리가 거기에 편승하면서 거의 삭으러 들었습니다. 그리고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일관되게 경제에서 자력갱생노선을 추구했던 북한에서 이제는 거의 의심의 여지 없이 국가경제 근간이 붕괴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는 상황에서 물적 토대의 자립성이 어떤 형태를 띨 것이냐 하는 문제는 사실 상당한 숙고를 요합니다. 남북한 공히 그동안의 경제발전 방식에 있어서 국가적인 위기에 봉착했는데, 경제발전의 역사적인 경로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자로서 선생님은 어떤 전망을 하고 계신지요.

신영복 : 우리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을 경제적 정체성(identity)과 관련시켜 말할 문제이군요. 저로서는 남북 공히 앞으로의 경제발전의 방향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선 남한의 경우를 두고 말해 보죠. 우리는 이제 나는 어느 때 행복한가, 또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어느 때 행복할 것인가 라는 시각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뭘 소유하거나 소비하는 경우보다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애정과 신뢰를 받을 때 그때 참 행복하다는 느낌입니다. 그게 비단 제 개인적인 정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른 많은 사람들도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 다들 그런 것들을 내밀하게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사회가 추구할 가치에 대한 새로운 반성 같은 게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동양의 문화적인 특성 중의 하나, 특히 중국철학의 유가와 도가를 대비해 볼 때, 유가는 그 이후에 순자 일파가 계승한 데서 보듯이 이건 성장론입니다. 유가는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찬란한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도가는 오히려 요즘 말하는 생태론(ecology)에서 보는 그런 자연과의 순환 체계를 주목하면서, 오히려 자연 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사회가 지향할 목표로 봅니다. 그런데 이 두 사상이 상당한 균형을 취하고 있었어요. 최근 중국도 홍(紅)과 전(專)이라는 두 개의 카타고리로 이런 사상적 흐름을 그 나름대로 계승하고 있지요. 전이라는 것은 경제적인 전문성, 홍은 도덕성 중심의 개념이죠. 우리 경우는 이러한 내부 균형이 상당히 상실돼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러니까 우리 경제가 세계경제 속에 편입된 위상하고도 관련된 건데, 성장이 끊임없이 가능하리라는 어떤 확신, 성장이 인간의 행복을 결정한다는 이런 상(像), 저는 환상이라고 부르는데 좀 무리가 있었는지 모릅니다만, 이런 것들이 이번 기회에 통째로 반성될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됩니다. 그 결과 지금의 어려움, 남북한 공히 당하고 있는 어려움들을 오히려 원점에서부터 출발시켜 극복할 수 있는 면도 있으면 하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소망입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정보가 신문에 소개되는 정도밖에 없어서 당사자들이 정말 뭘 고민 하고, 또 자기들을 둘러싼 동북아 질서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는지 제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뭐라고 요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 선 북한이 과연 계속 전시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인가를 진지하게 자문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속단할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는 소위 자유라는 개념, 자기의 이유를 갖는 것, 또 그것이 각자의 이유를 존중하는 것이라면, 자유라는 것은 어떤 단일한 개념으로 규정할 수는 없고, 제가 자유의 최고치가 평등이라고 소개했습니다만, 평등개념과 마찬가지로 관계론에서 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북한 사회가 그 나름의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면, 존립이유를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사고하는 개방성과 다양성을 궁극적으로는 지 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역사에서의 발전이라는 일반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제 자신 상당히 유보적인 입장입니다. 나는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론에 대해 최근에 제기되는 회의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마르크스 저작도 중요한 내용은 자본주의 분석이었지 어 떤 대안에 관한 구체적 담론은 없다고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어떤 원칙에 지나치게 매달리 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제 자신부터 역사의 전개과정을 법칙성에 귀납시키는 관 점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홍윤기 : 옛날의 발전관은 특정 문제의식에 대한 해결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그 구도가 짜여진 게 참 많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문제라는 것은 문제로서 수많은 특질과 양을 가진 수많은 문제가 있다는 거지요. 시간 차원에서도 수많은 현재가 있다고 했을 때 어떤 발전의 형태가 하나 있고, 그것이 선단식으로 모든 것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발전들이 복합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 현대사의 특징적 양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발전은 다른 발전을 저해하기도 하고, 또 어떤 발전은 다른 발전을 부추기기도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반드시 진보적인 것이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현재 발전사관의 본고장이었던 유럽에서는 가혹할 정도의 회의나 자기반성이 많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보라의 기본적인 발상은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는 건데, 인간이 뭔가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좋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나쁘기 때문에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없습니다. 어떤 선택이든지 그것이 좋기 때문에 선택을 하는데, 문제는 그런 선택의 내용 중 가장 좋은 것이 하나 있어 그것만 추구하면 된다고 믿었던 것이 계몽주의 이래 현대 발전관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약 400년간 발전이나 진보라는 것을 해놓고 보니까 아까 말씀하신 대로 행복이라든가 도덕성에서 뭔가 나아졌다는 감정을 가지는 데 있어서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는 거죠. 따라서 그 어떤 단일 잣대로 진보와 퇴보를 측정하는 것에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영복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하나의 운동체로 바라보아야 하는 당위성은 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제금융자본의 세계화와 이번 우리 나라의 IMF사태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 발전이란 어떤 집단에게는 '보다 나은 것'이지만 다른 집단에게 보다 못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세계기행에서 느낀 점은 단기적으로는, 또 단기적으로 밖에 볼 수 없기도 하지만, 세계라는 운동체를 주도하는 것은 법칙성에 앞서 강자의 논리라는 점입니다. 양적으로 훨씬 많은 약자들의 논리가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홍윤기 : 저는 대체로 선생님의 그 견해에 동의하지만, 강자와 약자의 행태에도 중대한 변화가 있다고 봅니다. 옛날의 강자는 일종의 싹쓸이식 강자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했던 서구사회에서는 강하다는 것이 참으로 선택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즉 강자들은 자기가 강할 부분에 대해 분명한 한계선을 그어놓고 그 부분에서만 강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한 개인이나 집단이 모든 분야에서 강할 수는 없는 대신 자신들이 강한 부분에서는 확실하게 강세를 유지하겠다는 태도인데, 현대 사회의 전개과정에서 역사적 갈등을 경험하면서 그 나름대로 계몽된 결과입니다. 이 점은 그네들의 강세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를 결정할 때 참으로 중요한 고려요인이 됩니다. 이번 IMF 협약서를 봤을 때도 그 점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합리성 투명성 효율성을 기조로 하는 그들의 협약조건은 확실히 백년 전이라면 군함과 대포를 끌고 와 무력으로 영토를 강탈하던 것과는 다른 방식의 대응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어느 면에서는 강자들의 교활성이 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조금 거시적으로 보면 자신들이 강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상대방이 어느 정도 공존하면서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의도가 분명했습니다. 이번에 IMF 총재 캉드쉬가 왔을 때도 강자이면서도 국내 사회세력의 합의 위에 그 강자의 논리를 관철시키겠다는 의사만큼은 확실히 전달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룰이 변화된 환경에서 우리가 한없이 피해의식에 젖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신영복 : 그게 바로 세계화라고 생각합니다. 모순구조라는 게 그렇죠. 상대방의 존재가 자기의 존재조건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의 존재조건이 되는 상대방에 대한 관리가 역사적으로 변화되어 온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관리방식이 분명히 새로운 형식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한 편으로는 강자들의 발전단계가 변화함에 따라 달라집니다. 노예를 필요로 하거나 영토를 필요로 하는 단계는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자본주의적인 모순관계도 그렇습니다. 중상주의 시대가 다르고 산업혁명기가 다르고 금융자본주의 단계의 그것이 다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상대방의 대응에 따라 전술적으로 방법이 달라지기도 할 것입니다. 변화된 환경은 물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변화의 계기와 변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보다 논리적이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홍윤기 : 우리의 현재 위기는 그 드러난 양상으로만 보면 100년 전과 똑 같습니다. 이 위기가 터진 후 한번 연표를 보았는데 1897년 당시 조선 정부는 현재 세관에 해당되는 해관(海關)에 관련된 일체의 사무를 미국인한테 인도를 합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일본인에게 도 인도하고, 이런 식으로 국가의 돈주머니를 넘겨버렸죠.. 그러면서 왕실이 차관을 갚아나가는 겁니다. 딱 100년 만에 똑같은 일이 일어난 거죠. 진짜 너무 놀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짓을 할 수 없습니다. 패배를 당하더라도 사실 다 같은 패배가 아닙니다. 패배에도 질과 양의 차이가 있고, 쓰러지는 순간에도 이 미세한 차이를 판별해 낼 정도의 분별력을 발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럴 때 힘이 되는 것이 없는 물질이나 자본보다도 우리의 몸에 체화된 정신적 문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글이 그러한 점에서 굉장히 시사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문화적이라는 것은 이제 단지 전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전략적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전술, 전략을 떠나 문화적인 것 그 자체가 추구할만한 가치가 그 안에 있지 않습니까? 행복이라는 것, 애정이라는 것, 신뢰라는 것, 이런 것은 분명히 그 나름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그런 것이 궁극적으로 힘의 원천이라는 것 정도는 현 세계의 강자들이 알 정도는 되었다는 겁니다. 이런 정신적 자산의 축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이 위기의 와중에서 100년 전과는 달리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고비 하나를 성취했습니다. 옛날 같은 경우에 재미있는 게 1897년에 말이죠, 1894년의 동학혁명 이후 1895년 전봉준을 처형하고, 그나마 살려주었던 교주 최시형을 아관파천에서 돌아오면서 대한제국 수립 준비과정에서 처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한제국의 성립이라는 게 조선왕실 나름대로는 굉장히 정치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취한 것이면서 실질적으로는 조선왕실의 민중적 토대를 스스로 잘라냄으로써 자기 권력의 운신 폭을 엄청나게 좁히는 역설 위에서 성립하게 된 것입니다. 100년 뒤인 현재 그때와 똑같이 나라의 돈주머니를 외국에다 맡기는 일이 똑같이 반복되는데, 반복되지 않는 것 하나, 즉 그때는 민중적 역량을 잘라버렸는데 지금은 이 어려운 시기에 민주적인 역량은 비로소 어떤 결실을 바라볼 수 잇는 단계에 왔습니다. 저는 이것을 경제에서 잃은 것을 정치에서 벌충했다고 어디에선가 말했습니다만, 어쨌든 발전이나 세계화가 불균등한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했을 때 그 사이에서 우리의 기회를 포착하고 그것을 극대화시켜 살려내는 고도의 분별력을 보일 때라고 생각합니다.
신영복 : 모든 사람들이 이기려고 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아왔다고 할 수 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에 있어서 절대적인 우열의 격차가 있는 경우에 중요한 것은 잘 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패배의 과정과 자세를 어떻게 관리하는가 하는 것은 다음의 재기와 직결됩니다. 이를테면 승패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관한 담론은 이 자리에서 자세히 논의하기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흔히 국난의 시기에 소위 상(上)과 하(下)가 만났던 역사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나라의 총력을 극대화하여 대응하는 것이지요. 계급모순보다 민족모순을 전진배치하는 형식이지요. 그러나 홍선생께서도 방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나 상과 하의 만남이 한마디로 '긴 이별에 짧은 만남'이었지요. 현재의 경제적인 난국에서도 그러한 구도가 출현할 조건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춘추시대에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잘 아시겠지만, 월나라 왕 구천이가 양자강의 대권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전략을 구사한 사람이 바로 범려인데, 구천으로 하여금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설욕을 하게 한 다음 일등공신인 범려가 구천을 떠납니다. 떠나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주군인 구천을 일컬어 "저 사람은 어려움은 같이 할 수 있는 위인이지만 즐거움은 함께 나누기 어려운 위인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즐거움을 같이하기 보다는 어려움을 같이 하기가 쉬운 것이 보통 사람들의 정서가 아닌가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어려운 시절의 관리 즉 패배의 관리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어려운 시기에 연대와 신뢰를 이끌어 내고 상대방에 대한 신뢰감이 확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어려움 이후의 관리입니다.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모델로 정착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한, 홍선생이 예시한 근현대사의 순환이 다시 되풀이 되지 말란 법이 없지요. 난국이 기회포착이라는 말씀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거품과 함께 때도 빠질 수 있는 것이지요.

홍윤기 : 산문의 고요한 흐름 밑에 이렇게 경제를 비롯해 인간 삶의 다양한 부분에 대한 풍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 대단히 즐겁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글에 대해 상당한 고정 독자층이 형성되었다고 보이는데, 앞으로도 계속 산문활동만 하실는지, 아니면 전공으로 돌아가셔서 보다 과학적인 작업을 선뵈실지 궁금하군요.

신영복 : 우리 학교 어느 교수 분을 통해 제 근황을 묻는 분이 있었대요. 그래서 그 분이 신영복 선생은 아직 수필만 쓰고 있다고 답변하셨다는 군요. 저는 아카데미즘의 수업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우선은 산문형식이 편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정형화되어 있는 논문형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저에게 지금보다 조금 넓어진 공간이 주어진다면, 아까 얘기한 선언적인 화두를 던진다든가 문제제기에 그치는 글이 아닌 문제를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논증할 수 있는 글들도 쓰고 싶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선은 각자의 공간에서 각개약진 하는 방법도 당분간은 의미가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홍윤기 : 어쨌든 문장의 측면에서만 봤을 때 느꼈던 아쉬움을 제 개인적으로는 많이 풀었습니다만은 선생님께서 이렇게 넓은 공간을 확보하셔가지고 좀 새로운 지평으로 지적인 어떤 통로가 많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신영복 : 고맙습니다. 이집트 피라미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 만든 피라미드 벽돌에도 '말세'(末世)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기의 역사소설이든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자기 시대를 다 말세라고 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한 번도 자기의 넓은 공간을 가졌던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본다면 제가 핑계를 삼는 넓은 공간에 대한 아쉬움도 변명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변명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되어야죠. 하여튼 노력하겠습니다. 저도 사실 별 준비 없이 나왔는데, 홍선생님하고 얘기하는 과정에서 아 그렇구나, 그런 논리에서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구나 하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갔던 부분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앞으로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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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인터뷰 모든 변혁운동의 뿌리는 그 사회의 모순구조 속에 있다 - 손잡고더불어.2017.돌베개.수록 1993-01-15 계간지 '이론' 3호_정운영 대담
대담/인터뷰 길이 만난 사람 - 월간 '길' 1993년 5월호 1993-05-01 월간 '길'_윤철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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