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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문화공동체포럼 기조강연]

21세기 동아시아의 새로운 관계지향을 위하여


 1. 논어 자로(子路)편에 있는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합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註釋)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화(和)는 화목(和睦)의 의미로, 그리고 동(同)은 아첨(阿諂)의 뜻으로 해석합니다. 화는 어긋나지 않는 마음(無乖戾之心), 동은 아부하는 뜻(有阿比之意)을 의미하며 군자는 의(義)를 숭상하기 때문에 동하지 않으며 소인은 이(利)를 숭상하기 때문에 화하지 못한다고 하여 화동(和同)을 교우(交友)의 개념으로 해석합니다.(朱子註)

 둘째 화(和)는 서로 다른 것들이 모여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풍요로움이 자라고 만물이 생겨난다. 그러나 서로 같은 것들만 모아 놓는 동(同)은 모두 다 못쓰게 되어버린다고 하고 있습니다.(『國語』<鄭語>)

 셋째 화(和)는 물,불,식초,간장,소금,매실을 넣고 국을 끓이는 것과 같이 오미(五味)와 오음(五音)이 조화를 이룬 것을 의미하며 동(同)은 임금이 “가(可)하다”고 하면 따라서 “가하다”하고 임금이 “불가(不可)하다”고 하면 따라서 “불가하다”고 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마치 물에 물을 타는 것(若以水濟水)과 같고, 금슬(琴瑟) 한가지 소리만 내는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左傳』<昭公二十一年>)
 
 2. 화동(和同)은 개인이 맺는 인간관계의 개념으로서 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가 간에도 적용될 수 있는 관계일반의 원리입니다.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공존의 원리임에 반하여 동(同)은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흡수(吸收)와 합병(合倂)의 논리입니다. 이 동(同)의 논리는 자본주의의 자본축적운동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콜럼부스이래 대외팽창과 제국주의적 전개과정이 보여주고 있는 지배와 억압의 논리이며 패권(覇權)의 논리입니다. 또 한편으로 동(同)의 논리는 모방과 종속의 논리입니다. 서구화를 근대화로 그리고 근대화를 문명의 발전으로 설정하고 근대기획에 열중해 온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아시아 역사가 그러합니다.
 
 3. 20세기는 동(同)의 논리가 관철된 세기였으며 동시에 경이적인 물질적 성장의 세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을 위하여 강제와 억압, 전쟁과 혁명으로 인한 집단적 살육과 대량의 파괴를 대가로 치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시아의 20세기 역시 물질적 성장과 근대화의 세기였습니다만 그 과정은 억압과 종속의 역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비극적인 것은 바로 아시아 내부의 반목과 분열(分裂)의 역사입니다. 조선과 일본, 일본과 중국, 남한과 북한, 중국과 남한 등 동아시아 내부의 반목과 분열입니다. 이러한 내부의 침탈과 분열의 역사는 베트남과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를 포괄하는 경우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4. 이러한 비극의 원인은 근대사회의 원리인 「존재론(存在論)」에서 연유합니다.
 
 근대사회는 세계를 존재들의 집합으로 인식합니다.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들 간의 관계입니다. 존재론적 세계에서는 모든 존재와 존재들 간의 관계가 경쟁적이며 각자의 존재성을 배타적으로 키워가려는 운동을 합니다. 개인(個人), 자유(自由), 인권(人權), 평등(平等)과 같은 사상이 그 범주(範疇)입니다. 이러한 존재론적 구조에서 국가(國家)와 화폐(貨幣)는 조정자(regulator)가 아니라 각자의 보증자(guarantor)입니다. 대내적 독점(獨占)과 대외적 제국주의(帝國主義)와 같이 지배(支配)와 흡수(吸收)가 존재론적 논리의 궁극적 귀착점입니다. 근대사는 강철(鋼鐵)의 역사였으며 현대사회는 국가와 개인 등 모든 단위에 있어서 자기존재를 강화하는 존재론적 운동의 정점(頂点)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존재들의 관계가 일방적이 아닌 상호결정(相互決定, over determination)의 구조임을 승인하는 경우에도 본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5. 이러한 존재론적 논리는 자본축적 과정에서 전형적으로 관철됩니다.
 
 자본과 노동의 대립, 자본과 자본의 대립에서 전형적으로 관철되는 자본논리입니다. 잉여노동시간을 두고 벌이는 시간의 쟁탈이 그러하며, 시장(市場)을 두고 벌이는 공간의 점유가 그렇습니다. 가격경쟁은 결국은 이윤이 소멸하는 지점으로 침하(沈下)하는 논리이며 이윤이 소멸하는 지점에서 다시 신기술, 신상품, 신시장을 만들어낸 후, 다시 동일한 과정을 반복합니다. 자본운동은 자본축적운동이 불가능한 영역으로 진입할 수밖에 없는 모순의 누적(累積)과 그것의 폭발(爆發)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운동입니다. 오늘날의 현대자본주의는 ‘자본의 자본에 대한 수탈’ 즉 흡수 합병이라는 비정상적 방법으로 축적과정이 지속되고 있는 단계입니다. 이는 존재론적 운동이 보여주는 모순의 절정(絶頂)입니다.
 
 6. 세계(世界)는 관계(關係)의 장(場)입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되고 있습니다.
 
 세계의 실상은 존재론적 구조가 아니라 관계론적 구조입니다. 현대물리학이 밝히고 있는 바에 의하면 물질의 궁극적 존재는 입자(粒子)도 아니며 파동(波動)도 아닙니다.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입니다. 확률(確率)로서 존재하고 가능성(可能性)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현대물리학이 입증하고 있는 가설체계입니다. 표준모형(standard model)에 의하면 쿼크(quirk)는 점입자(點粒子)로서 질량과 부피가 없는 점(點)이며 혼자서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이 쿼크와 매개입자(媒介粒子)에 의하여 구성되는 상호작용(相互作用), 즉 힘이 물질을 구성한다는 사실은 존재론의 근거를 결정적으로 부정합니다.
 
 생명 또한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계성(關係性)의 총체(總體)입니다. 생명에 대한 규정이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습니다만 생명의 특징은 신진대사(新陳代謝), 자기복제(自己複製), 진화(進化)입니다. 신진대사는 외부와의 관계입니다. 물질 및 에너지의 교환을 전제로 하는 열린 체계(open system)입니다. 자기복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포분열이나 출산(出産)은 자기(自己)가 비자기(非自己)를 만들어내는 지점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 역시 관계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유전(遺傳)과 변이(變異)를 내용으로 하는 진화(進化) 역시 환경과의 관계개념입니다.

 생명은 나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존재론은 생명론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개념입니다. 생명은 배타적인 존재일 수 없으며 다수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결합된 관계망(關係網)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망은 생태계(生態界) 그리고 생명권(生命권圈)으로 통합됩니다.
 
 10만개의 유전인자(遺傳因子)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유전인자는 3만개인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3만개의 유전인자가 14만 종(種)의 유전정보(遺傳情報)를 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의 인자가 하나의 유전형질(遺傳形質)을 전이(轉移)하는 것으로 예상하고 수립하였던 신약(新藥)개발의 청사진은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유전정보가 유전인자의 고유하고 단독적인 작용이 아니라 여러 인자 나아가 인자와 아미노산 또는 기타 다른 물질과의 결합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생명현상의 하나인 ‘유전(遺傳)’ 역시 관계성의 일환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7. 서구(西歐)에 없는 장르인 서예(書藝)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붓글씨를 쓸 때 어떤 글자의 획(劃)이 실수로 비뚤어졌다면 그 획을 지우고 다시 쓸 수 없기 때문에 그 다음 획으로 그 실수를 커버를 해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字)가 비뚤어졌다면 그 다음 자(字)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다음다음 자(字)로서 그 자를 바로 세워보려고 노력합니다. 한 행(行)의 결함은 다음 행(行)으로 보완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되는 한 폭의 서예작품은 모든 획(劃)과 자(字)와 행(行)이 서로 돕고 도움받는 관계를 맺게 됩니다. 방서(傍書)와 낙관(落款)까지도 전체 균형에 참여하는 그런 한 폭의 글씨가 비로소 격조(格調) 높은 서예(書藝)입니다. 소위 ‘서예의 관계론’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한 자(字) 한 자(字)가 반듯반듯하게 독립된 글자들로 이루어진 서예작품이 있습니다. 다른 획(劃), 다른 자(字), 다른 행(行)으로부터 도움 받거나 도움 줄 일 없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러한 작품은 ‘시민적(市民的) 질서(秩序)’가 잘 갖추어진 글씨이기는 하지만 이는 서예의 본령(本領)이 아닙니다.
 
 8. 동양적 사고(思考)의 바탕은 관계론입니다.
 
 동양적 판단형식의 바탕이 되고 있는 주역(周易)은 세계에 대한 범주적(範疇的) 인식(認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개별적 존재나 개별현상에 대한 존재론적 관점보다는 존재와 존재들이 맺고 있는 관계(關係)에 대한 관점이 기본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효(爻)의 길흉(吉凶)은 그 효가 맺고 있는 관계에 의하여 판단됩니다. 음효(陰爻)가 음효의 자리에 있는 경우를 득위(得位)라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를 실위(失位)라 합니다. 상하(上下)의 효가 이루는 관계를 비(比)라 합니다. 그리고 상괘(上卦)의 효와 하괘(下卦)의 효가 이루어내는 음양상응(陰陽相應)관계를 응(應)이라 합니다. 그리고 대성괘(大成卦)의 성격도 대성괘를 이루는 상하(上下) 두 소성괘(小成卦)의 관계로서 판단합니다. 주역의 판단형식은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들이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64괘의 제일 마지막 괘는 미완성(火水未濟)괘입니다. 이는 세계의 운동은 미완성의 연속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완성(完成)과 목표(目標)란 관념적으로 재구성된 것일 뿐이며 현실은 과정(過程)의 연속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목표와 완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과정일 뿐이며 과정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됩니다. 생산성(生産性)을 제고(提高)하는 것보다 생산과정(生産過程)을 인간적(人間的)인 것으로 만드는 일이 더욱 중요하고 자본축적보다는 자본축적의 과정을 인간적 논리로 관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됩니다.
 
 9. 쿠바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쿠바에서 받은 충격은 세계최강국인 미국의 봉쇄에도 불구하고 쿠바가 독립을 지킬 수 있었던 저력이었습니다. 그것은 쿠바의 저력이라기보다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연대(連帶)였습니다. 그리고 이 연대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역사의 동질성(同質性)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미국의 패권에 저항하고 있는 근현대사의 동질성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라틴 아메리카의 미술과 라틴 아메리카 문학 등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정체성(正體性)이었습니다. 이는 동(同)의 논리에서 해방된 ‘혼혈(混血)의 독립(獨立)’이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동아시아의 역사는 매우 불행합니다. 무엇보다도 아시아 국가에 의한 아시아국가의 침탈과 지배가 아시아의 연대성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두고 있으며, 그리고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 자기 정체성이 없이 동(同)의 논리에 철저히 매몰되고 있는 문화적 식민주의(植民主義)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불행한 것은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적 경쟁에 초연할 수 없는 비자립적 경제구조입니다.
 
 10. 일본은 자본주의 선진국대열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였으며, 중국은 중국고유의 시스템(system)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aufheben)하여 제3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명을 창조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한국은 자본주의 선진국으로 진입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체제(體制)의 대립과 분단(分斷)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발전적으로 지양(止揚)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하여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는 그것이 선진자본주의라 하더라도 근본에 있어서 동(同)의 논리이며 패러다임에 있어서 조금도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제3의 체제실험 역시 또 하나의 동(同)의 창출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비하여 한국이 앞으로의 통일과정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공존(共存)과 평화(平和)의 구조를 만들어낸다면 이는 진정한 화(和)의 원리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족, 종교, 언어, 관습, 전통, 문화, 체제 등의 모든 차이가 다양성으로 승인되고 공존하는 평화구조야말로 비로소 새로운 문명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문화연대가 20세기를 청산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화를 모색한다면 그것은 동의 논리를 청산하고 화의 논리를 창출하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지역연합체와 경제공동체를 만들어 동(同)의 논리를 확장하는 방향과는 반대편을 겨냥하는 새로운 관계형식을 모색하여야 할 것입니다. 각 국가의 정치적 자주성(自主性)과 경제적 자립성(自立性),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正體性)을 서로 도와서 이루게 하는 상생적(相生的) 연대구조를 만들어내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전통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관계론적 구조와 정서를 재조명하는 일이며 동아시아의 문명사적 의의를 재확인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20세기 전반기까지 아시아의 지식인들은 반제(反帝) 반봉건(反封建)이라는 공동의 인식과 연대성을 공유하였습니다. 동아시아 문화연대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경쟁논리에 대응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이 어떠한 실천적 과제를 공유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를 진행시켜야 할 것입니다.

 루카치의 다음 구절로서 끝마치겠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의 정상에 뛰노는 토끼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자기가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아시아문화공동체포럼 기조강연 - 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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