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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시절


반갑습니다. 오늘은 "나의 대학시절"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이야기하겠습니다. 고리끼의 작품 중에 <나의 대학시절>이란 작품이 있죠. 그런데 사실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고리끼는 대학은커녕 학교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볼가강의 뱃사공을 도우는 일을 했지요. 그 배의 쿡크가 마침 책을 읽는 사람이어서 그가 가지고 있던 책을 읽기 시작 한 것이 고리끼의 시작이었습니다. 굳이 그 곳이 학교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인데도 <나의 대학시절>이란 작품을 썼습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서울 안국동의 고서점을 뒤졌어요, 그 책을 찾으려고. 해방직후에 나온 책이 있었어요. 그는 노동자 합숙소의 생활을 자기 인생의 대학시절로 쓰고 있었어요. 매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곳을 자신의 대학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습니다. 그 충격은 상당히 신선하면서도 심각한 기억으로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오늘 제가 나의 대학시절을 여러분들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제가 다녔던 서울대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같이 징역살았던 사람들을 만나면 서로 '동창생'이라고 부릅니다. 전주대학 동창생, 대전대학 동창생 그렇게 부릅니다. 어쩌면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깨달음을 바로 그 대학에서 깨달으며 고뇌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나의 대학시절>은 바로 그 대학시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서론이 길면  안되죠. 제가 글에서도 가끔 소개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모르고 있는 학생들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4.19때 대학교 2학년, 5.16 쿠데타 때 대학교 3학년인 그런 세대거든요. 우리가 대학 1학년 들어갔을 때만 해도 지적 풍토가 상당히 건조했던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나라 전체가 6.25로 인해 지적 공간이 완벽하게 초토화되어 있었습니다. 대학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19, 5.16을 거치는 동안에 더구나 낭만과 꿈이 있는 젊은 청년으로서 참 많은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처음에는 신동엽 시인이 노래했듯이 4.19란 총알이 모자만 뚫고 간 사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이마를 뚫고 간 줄로 착각했습니다. 해방의 기쁨마저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싸늘한 5.16쿠데타를 만나게 됩니다. 겨울공화국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  길고 어려운 시기를 견디는 힘으로서 그래도 4.19와 5.16사이 잠시 푸른 하늘을 봤던 그 4월의 깨달음은 매우 귀중했어요. 돌이켜 보면 그 때의 기억이 20년 이상 자기를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의 학생서클 운동은 지금 생각하면 이론적인 수준에 있어서나 실천적 과정에 있어서나 실천공간의 협소히기도 했지만  많은 편향과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감옥의 조용한 공간과 긴 시간은 그런 점을 반성하게 했습니다. 관념적이고 주관적이기도 했었고 무엇보다도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미리 상정하고 그로부터 실천과제를 받아오는 그런 도치된 구도가 있었어요. 감옥에서 나오니까 후배들이 학생 써클운동의 오리지널 세대라고 했습니다. 오리지널이라는 것이 어떤 원형이기보다는 초기적인 미성숙한 것을 이야기한다면 맞는 말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제가 방금 초기의 미성숙과 편향성에 대하여 반성했다고 했습니다만 그러한 반성은 감옥에서 고독한 사색의 결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감옥현실에서 여지없이 깨어짐으로서 반성이 시작되었던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나의 대학시절>의 초년에 그때까지 가졌던 생각들이 여지없이 깨어집니다. 그 이야기들을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왔습니다.

 

언어의 관념성과 무력함

징역 초년의 일입니다. 교도소에도 좀 편한 자리나, 책을 좀 더 많이 읽을 수 있는 그런 곳이 없진 않습니다. 있었어요. 독방을 고집 한다거나, 또는 그런 것이 가능한 부서도 없지 않습니다. 저는 공장에 출역(出役)해서 작업반대에 소속되었습니다. 군대로 말하자면 말단 소총소대에 배치된 셈이었어요. 나보다 먼저 대전교도소에 내려와 있던 후배가 어렵게 어렵게 전한 이야기가 공장으로 출역하라는 것이었어요. 혹시나 다른 부서로 출역하게 될까봐 걱정을 했었나 봐요. 학교시절에 비록 관념적이기는 하지만 기층 민중들의 정서와 사고, 그 속에 묻혀있는 어떤 힘 이런 것들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여러 가지로 어렵겠지만 말단으로 내려가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때 몇몇 사람들과 서로 그런 의논을 했습니다., 비록 룸펜 프로이긴 하지만 감옥은 민중공간이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노동의욕이라든가 자부심이나 주체의식이 없는 무의식 군중이긴 하지만 그 속에 그래도 교실과 책 속에는 없는 상당한 분량의 민중적 현실이 있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맞닥뜨린 공장의 작업반대에서는 나를 받아주질 않았습니다.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은 냉랭하다는 뜻입니다. 입학을 허가하지 않는 셈이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약 5년 동안 제가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했어요. 시실은 5년 이상 걸렸는지도 몰라요. 세상의 밑바닥에서 모멸 당하면서 살아온 그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들의 분류기준으로서는, 제가 비록 자기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자기들을 억압하고 모멸하던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어요.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인식이었고 내게는 매우 힘든 5년이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실에서, 책을 통해서, 수많은 이론과 논의를 통해서 간추린 지식이 현실의 벽에 부딪칠 때, 이런 경우에는 가장 먼저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언어를 버리는 것입니다. 언어가,  말이 얼마나 무력한 것이라는 것을 재빨리 깨닫는 일입니다. 언어는 현실에 있어서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언어는 현실적으로도 많은 경우에 오히려 진실을 감추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위장하고, 변명하고 은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커튼처럼. 그래서 저는 현실의 벽 앞에서는 언어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검증 받아야 한다는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교실과 책과 이론으로 배운 사람들이 갖는 공통적인 착각의 하나가 바로 언어로서 설득할 수 있다는 환상입니다. 더구나 상대방이 소위 <먹물>이 부족한 사람일 경우에 더욱 그렇습니다.

글을 잘 모르는 노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장 출역이 없는 일요일은 하루종일 감방에서 지내야 되요. 특히 그 노인은 지겨워 죽을 지경이었나 봐요. 일단 책을 하나 잡았어요. 아침부터 시작해서 읽다가, 한잠 주무시다가, 점심 먹고 또 읽다가 주무시다 가를 반복하였어요. 책표지도 떨어져나간 낡은 <현대문학>이었어요. 그 현대문학의 수필 한 편을 하루종일 걸려서 읽었어요, 저는 그분이 주무실 때 얼른 읽었지요. 저녁에 제가 다가가서 독후감을 요청했지요. '독서'라는 말에 무척 미안해했어요. 한사코 사양하다가 딱 한 마디로 독후감을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그 수필을 쓴 사람이 우리 나라의 유명한 여류 수필가였어요. 제가 이름은 여기서 대기가 불편하지요. 그 노인의 독후감은 이렇습니다. "자기(수필가)집 뜰이 좁아서 꽃을 못 심는대나 뭐 그런 걸 썼어!" 였어요. 못마땅하다는 투가 역력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정확하게 핵심을 짚어내었습니다. 여러분들이나 우리같이 먹물 좀 든 사람들은 그 여류 문인이 펼치는 현란한 언어구사에 사로잡히게 마련이죠. 그러나 이 노인에게는 그것들이 무력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무식이 훨씬 더 날카로운 통찰력이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은 총격이었습니다.

 교실과 책을 통해서 습득한 논리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충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학시절>에 경계해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이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큰 대(大), 옳을 의(義)를 이름자로 쓰는 '정대의'라는 젊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참 좋은 이름이지요. 그러나 절도 전과가 벌써 3개나 돼요. 그 친구를 볼 때마다 대의를 위해서 살기를 바라고 대의라고 이름 지었을 그 할아버지가 얼마나 속상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어느 날 제가 이름의 내력을 물어봤어요. 그게 아니었어요. 그는 돌이 채 안된 어린 아기였을 때 버려진 고아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있을 리 없었어요. 자기가 버려진 장소가 광주의 도청 앞 대의동(大義洞) 파출소 옆이었어요. 그래서 '정대의'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날 당직 경찰이었던 정 순경의 성을 따고, 대의동 파출소의 '대의'를 합해서 고아원에 입적시켰던 이름이었습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그 30년이라는 세월이 어떤 아픔과 고뇌로 얼룩졌는지 저로서는 그것을 다 알 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대의'라는 문자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생을 읽으려고 했던 저의 그 창백한 관념성이 굉장히 부끄러웠습니다. 광주에 내려갔을 때 일부러 시간을 내어 대의동 파출소를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서니까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저의 관념성이 더욱 부끄러웠어요. 언어와 마찬가지로 문자와 논리가 만들어내는 지식인의 심볼리즘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이 역시 <나의 대학시절>의 초년에 만난 충격이었습니다.

책에서도 소개되어 있습니다만  나이 많은 옛날 목수의 이야기입니다. 그 분이 무언가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꼬챙이로 집을 그렸는데 저는 집을 다 그릴 때까지 그것이 집인 줄 모르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그리는 순서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집을 그릴 때 지붕을 그리고 그 다음에 기둥 방문 마루, 그리고 나중에 주춧돌의 순서로 그리지요. 그 후에도 제가 유심히 관찰했습니다만 지금도 어린애들이 전부 그런 순서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분은 주춧돌부터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기둥을 세우고, 마루 넣고, 문 달고,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습니다. 집을 짓는 순서대로 그렸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은 집 짓는 순서와 그리는 순서가 같구나 하는 깨달음도 충격이었습니다. 지붕부터 집을 지을 수 있는 기술도 없으면서 참 무책임하게도 지붕부터 지금껏 속 편하게 그려왔구나 하고 반성했어요. 이것은 참 중요한 겁니다,

우리 집에 전기공사하러 온 젊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집에 책이 많으니까 선생이란 직업은 참 좋겠다고 그래요. 그가 선생이 좋다는 이유는 꽤 철학적이었습니다. 이유인 즉 책상에서는 1가지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일해보면 열 가지도 넘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 이론보다 현실이 훨씬 아마 10배쯤 복잡하다는 논리지요. 어째서 10배냐는 나의 질문에 그가 한 대답은 참으로 명쾌했어요. 손은 하나인데 비하여 손가락이 10개라는 것이죠. 머리는 한 개지만 머리카락이 많잖느냐는 나의 농담반론에 그는 머리카락은 복잡하기만 하지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는 것이었어요. 손가락은 구체적 실천이지만 머리카락은 죄다 사념이고 관념이라는 뜻이지요. 물론 그가 그런 언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런 의미로 이야기했어요.

지금도 살아가면서 비슷비슷한 충격을 자주 받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충격에서 깨닫는 것은 결국 일종의 자기발견이었다고 생각이 돼요. 나 자신의 창백한 손과 관념성에 대한 반성이 그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자신에 대한, 우리들의 처지에 대한 정직하고도 정확한 인식,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제 경우에는 교장선생 아들로 태어나 학교 사택에서 그리고 교실과 책 속에서 키워 온 사고와 정서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었어요.

인식대상이 이처럼 단편적인 경우는 그래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더욱 복잡한 경우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사람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입장과 사상이 통일되어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 틀에 이르면 훨씬 더 복잡한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들의 집합인 사회는 당연히 더 복잡할 수밖에 없지요. 대학에서 인문사회과학이 여러 전문분야로 나누어져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이러한 사회의 변화발전과정이기 때문에 더욱 중층적 구조를 내장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선 인간에 대한 것부터 이야기하죠. 그리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갑시다.

 

사실과 진실

교도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먼저 그 사람의 죄명과 형기라는 틀에 넣어서 인식하게 되지요. 이를테면 죄명은 그 사람의 질(質)을, 형기는 그 질의 량(量)을 측정하는 지표가 되고 있지요. 하나의 인식 틀입니다. 좀처럼 변치 않는 완고한 무쇠 틀을 교도소는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저의 경험에 의하면  이러한 도식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그리고 편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징역살이 속에서 부대끼는 동안 인간이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생겨나지요.

저와 같은 감방에 일흔이 넘은 노인 한 분이 계셨어요. 젊은 사람들한테도 별로 대우를 못 받는 노인이었어요. 대우 못 받는 이유는 물론 돈이 없어서 그래요. 돈도 없고, 접견 오는 사람도 없고, 편지도 올 데도 편지 할 데도 없이 구석에 찌그러져 살고 있는 노인이었어요.  반면에 전과는 20개도 넘는 분이었지요. 그런데 이 분이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어요. 신입자가 감방에 들어오면 들어오자마자 자기 옆에 불러 앉히고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일이었어요. 신입자가 들어오면 어김없이 시작하는 일입니다. 그 이야기라는 것이 그 노인의 일대기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정 때 만주시절부터 시작되는 긴 인생사를 시작하지요. 신입자들은 소위 신입식에 대해서 들은 바도 있어서 누구나 처음에는 두려워하고 다소곳하지요. 이것을 틈타서 신입자가 들어오는 그날로 바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이삼일 지나서 이 노인네가 감방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 비중이 보잘것없단 걸 알고 나면 그 긴 스토리를 들어줄 사람이 없거든요. 안 듣거든요. 그게 들통나기 전에 얼른 시작해요. 그래서 그분하고 한 사오 년씩 같은 방에 있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야 하는 것이죠. 때로는 그분이 빠뜨리는 걸 옆에서 우리가 채워주기도 하지요. 그러나 중요한 건 이겁니다. 그 이야기가 거듭되면서 자꾸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이야기를 각색해서 거듭될수록 근사하게 만들어요. 창피한 부분은 줄이고 미담이나

무용담은 한껏 부풀려지는 것이죠. 나중에는 굉장히 근사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있고 이야기하는 표정도 배우처럼 근사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노인네가 구라푼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대개 비슷비슷한 인생을 살아온 감방사람들은 오죽하면 그러랴 하고 그 심정을 이해하지요 또 남한테 피해주는 거짓말도 아닌데 하면서 그렇게 지냈어요. 어느 날 아마 명절이 가까운 어느 날이었어요. 그분이 철창 가에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었어요. 그 뒷모습을 제가 뒤에서 우연히 보게 됐어요. 무척 구슬픈 그런 그림이었어요. 참 처량했어요. 징역살이로만 자기 인생을 땜질 해 온 어느 나이 많은 노인네가 감옥의 철창 가에 서서 갈 수 없는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뒷모습이란 게 얼마나 애처로워요. 저는 문득 저분이 지금 바깥을 내다보면서 자기의 칠십 평생을 돌이켜보고 있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또 한 편으로 만약 저분이 다시 자기인생을 시작한다면 실제로 살았던 사실 그대로의 인생을 또 반복하기보다는 적어도 각색된, 신입자들을 앉혀놓고 들려줬던 각색된 이야기 정도로는 살고 싶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각색된 그의 인생이야기는 그의 가난한 소망이 담긴 이야기이고 동시에 일정한 반성이 담긴 이야기라고 느껴졌어요. 그렇다면 그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실제로 살았던 사실의 주인공으로 우리가 인식할 것인가, 아니면 각색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우리가 그 사람을 판단할 것인가? 저로서는 참 곤혹스러웠어요. 왜냐하면 각색이란 그 속에 상당한 분량의 반성과 그의 가난한 소망이 담긴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각색된 것을 '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색된 이야기가 물론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로 살았던 사실로서의 그의 인생은 도리어 사회가 각색한 것이나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볼 건가. 사실을 중심으로 볼 건가, 진실을 기준으로 해서 봐야 할건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이라고 생각되었어요.

대전에는 유명한 '중동'이라는 창녀촌이 있습니다. 그 창녀촌에는 '노랑머리'라는 굉장히 성질 사나운 여자가 있었어요. 저는 물론 교도소에 앉아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중동에 있는 창녀들의 이름도 많이 알고 있었어요. 그 여러 여자들 중의 한 사람이 '노랑머리'라는 여자인데, 이 여자는 거세기로 소문났지요. 교도소에 앉아 있는 제게도 소문이 들려 올 정도니까요. 골목의 창녀들은 대부분이 기둥서방이라는 골목건달들에게 잡혀 있는 실정이지요. 기둥서방이란 것이 창녀를 보호하는 역할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여자들을 착취하는 그 사회에서는 공인된 조직이나 마찬가집니다. 그 건달들이 여자들을 다 잡고 있었는데 유독 이 '노랑머리'만은 못 잡은 거예요. 여러 사람들이 시도했어요. 그러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였어요. 호락호락하지 않았지요. 뻘겋게 달군 연탄집게로 덤볐어요. 주먹으로 맞고 발길에 걷어차이면서도 죽인다, 죽여라 하면서 버티었어요. 머리채 잡혀 골목을 끌려 다니기도 하고  약먹고 깔창(유리창) 깨트려서 배를 긋고 피 칠갑으로 덤볐어요. 결국 아무도 이 여자를 잡지 못했어요. 그래서 중동 창녀촌에서 유일하게 자주국방체제를 확립하고 있는 그런 여자였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만약 그 노랑머리라는 여자한테 중산층여성의 정숙성을 요구하거나 설교한다면 그 설교야말로 폭력이라는 것이지요. 그 사람이 발딛고 있는 처지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 개인에 대해서, 그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 관여하려는 것은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처지가 바뀌지 않고 그 생각만 바뀐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지만 만약 그 생각을 바꾼다면 단 하루 도 그 여자는 그런 처지에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요구는 그 여인을 돌로 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의 생각은 결국 자기가 겪은 삶의 결론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어느 개인에 대한 이해는 그가 처하고 있는 처지와 그 개인을 함께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관념성을 경계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해방식에 있어서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학교와 교실공간에 충만한 관념적 논리가 <나의 대학시절> 초년에 선명하게 드러난 셈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인식은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상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 그 자체가 기본적 인식평면과 시각을 결정한다는 것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자신에 대한 정직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사실보다는 진실에 주목하고 그 사람과 그 처지를 함께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세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방금 이야기한 관계의 문제입니다. 대상을 대상으로 저만치 떼어놓고 인식한다는 것은 적어도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는 부정확하고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책에서도 썼습니다만 애정의 젖줄로 연결되어 있거나 운명의 핏줄로 연결되어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어요.

 

이 얇은 사람이 느끼는 겨울

제가 <나의 대학시절>초년 약 5년동안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이야기했지요. 함께 징역살이하는 동료들이 그들 속으로 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이를테면 소외된 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이 약 5년이었다고 했지요. 그 5년동안이 아마 제기 방금 이야기한 그런 관념적인 관점을 어느 정도 청산하는 기간이었지 않나 생각돼요. 나 자신에 대한 그리고 동료 수형자들에 대한 이해방식이 바뀌고 나서야 비로소 관계가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되지요.

관계가 성립되고 나면 전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무엇보다 생활 그 자체가 매우 편하게 됩니다. 사람들 속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니까 그런 거지요. 편하다기보다 참으로 튼튼한 느낌을 갖게 되요. 발 밑이 튼튼한 안정감을 갖게 되지요. 일 예를 든다면, 저는 물론 교도소에서 내내 요시찰 대상이었어요. 다른 재소자들에게 좋지 않은 사상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죠. 심지어는 대공분실에서 나와서 저를 2번씩이나 조사를 했어요. 저는 열독 허가증이 붙어 있지 않거나 열독기간이 지난 책은 한 권도 소지할 수 없는 형편이었어요. 수시로 징역보따리를 조사하고 갔어요. 그렇지만 징역살이 10년쯤이 지난 뒤에는 그런 요시찰 속에서도 제가 돌리고 있는 이동문고가 50권정도 되었지요. 저는 단 한 권도 책을 갖고 있지 않지요. 누구한테 무슨 책 빌려주고, 그 다음에 너는 누구한테 주고, 누구한테 받고, 무슨 책 다음에는 무슨 책을 누구한테 받고. . . . 이런 식이지요. 그것이 가능한 것은 동료재소자들이 그런 일들을 전부 다 해주기 때문이지요. 같이 하는 것이지요. 책을 운반하는 것이나 숨겨놓는 일이나 분산하는 일이나 실력들이 대단하지요. 나한테는 아무리 뒤져도 책 한 권도 나올 리가 없지요. 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힘있는 것이구나. 정말 피부로 깨닫는 그런 감동이었어요. 관계는 그런 것이었어요. 그래서 자기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 관계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지요. 반대로 그러한 관계가 자기의 인식과 관념을 변화시켜주고 열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지요.

사람들과의 관계,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서 제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은 사회에 대한 인식,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저는 비록 20년동안 마치 못처럼 한 곳에 못박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20년은 제가 사회에 있었더라면 결코 만날 수 없었던 많은 사람을 만났던 세월이었어요. 사회라는 것은 사람들의 집합이지요. 사회의 본질이 인간관계잖습니까? 물론 계급관계라고 질적 규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여하튼 기본적으로는 '관계'입니다.

저는 그 세월동안 그때까지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많이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생각들을 쌓아올리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2가지로 요약해서 이야기하죠. 그 중의 하나가 사회를 모순구조 속에서 바라보는 그런 관점이라고 생각해요. 교도소에 들어오는 사람이란 대부분이 다 춥고 배고픈 사람이거든요. 이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겪는 사회, 이것이 어쩌면 우리 사회의 실상에 가까운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지요. 옷이 얇은 사람이 느끼는 겨울이 겨울의 실상일 수 있듯이 그 사회의 모순, 그 사회의 중압을 가장 무겁게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인 삶과 사회에 대한 생각들, 이걸 부지런히 읽을 수 있었어요.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서울을 내려다보면서 판단하는 서울, 이건 진짜 서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지존파' '막가파' 사건 때 저는 지존파 막가파를 변호하는 입장이었어요. 다른 의견을 가진 선생들이 물론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똑같이 실연을 했는데도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약을 먹고 자살을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상대를 칼로 찌른다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사람의 차이라고 주장했어요. 이렇게 인성의 문제로, 개인의 문제로 몰고 가는 논리도 있었어요. 그러한 논리에 반대하여 제가 소개한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어요. 일본인이 쓴 '알라스카 이야기'에 있는 이야기였어요. 에스키모의 개가 끄는 썰매 이야기입니다. 많을 땐 15마리가 썰매를 끌고, 적은 건 7마리, 8마리가 끄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썰매를 달리게 하는 방법입니다.  15마리의 개 중에서 가장 병약한 개를 끈을 짧게 매는 거예요. 썰매에 가깝게. 그리고 썰매를 모는 사람은 썰매 위에서 그 개만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지요. 다른 개들은 그 개가 지르는 비명소리 때문에 빨리 달리는 거예요. 짧게 매인 병약한 이 개의 역할은 비명 지르는 일이지요. 얻어맞고 비명 지르는 역할만 해요. 그러다가 죽으면 나머지 중에서 제일 약한 놈이 또 짧은 끈에 매여 가까운 거리로 와요. 저는 막가파가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그래서 빨리 이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썰매를 타고 있는 사람이면 그런 생각을 가져도 된다. 혹시라도 당신이 15마리의 나머지 개들 속에 섞여서 부지런히 썰매를 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어요. 그랬어요. 병약해서 비명만 지르는 역할을 하는 개를 우리는 증오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요. 우린 굉장히 많은 착각들을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나의 대학시절>에 만난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마치 진펄에 무릎걸음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사회를 그 모순구조에서 인식하는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한가지는 제가 아까 '역사의식'이라고 그랬는데, 사회인식에 이어서 역사의식을 새롭게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입학초년이었던 1960년대 말만 하더라도 교도소에서 함께 징역살이하는 사람들 중에 예를 들면 지리산 출신들이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해방 전후공간에서 직접 정치적 활동을 했거나 그 시절을 몸으로 경험했던 사람들도 같이 살았구요. 저는 '모스크바'라고 불리는 대전교도소, 정치사상범이 제일 많은 대전교도소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참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제가 아직 젊기도 하고 야기도 잘 알아들으니까 참 많은 이야기를 저한테 들려줬어요. 제가 출소 당시에는 지리산관련 빨치산 소설들이 많이 나왔어요. 제가 보기에 틀린 곳도 많이 보였어요. 뿐만 아니라 만주 팔로군에서 시작해서 어린 나팔수로 림표부대를 따라 북경 상해 해방전쟁에도 참여하고, 관운장과 장비가 넘었던 산봉우리도 넘으면서 호남성까지 행군한 그런 사람들도 만났지요., 구주 탄광이야기에서부터 한국전쟁 당시의 북한의 실상이나 전후의 국영농장, 대남 공작에 이르기까지 직접 당사자들의 경험을 듣게 되었어요. 책으로 역사를 보는 대신에 당사자들의 삶을 통하여 듣는다는 건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사적 사실에 피가 통하고 숨결이 살아나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복원과 생환, 그런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돌이켜보니까 해방전후라는 게 사실 얼마 안됐는데, 10년 20년밖에 안됐는데, 그렇게 까마득한 역사, 어떤 화석화된 역사로서 우리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이유가 뭔가?  그런 반성을  했습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하지요. 현재의 과제와 연결되어 있는 역사를 정립하는 것이 역사학의 임무라고 믿지요. 수많은 사람들의 만남을 통해서 갖게 되는 생생한 역사의식은 제게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식과 역사의식 이 두 가지에 대한 새로운 반성은 그 시절을 진정한 <나의 대학시절>로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누가 저한테 "교도소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교도소는 한마디로 산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왜?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잘 보이니까. 아주 좋은 OP가 교도소라고 생각하지요. 그리고 기름진 들판에서 살기에는 약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쫓겨 들어가는 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임꺽정이가 강한 사람입니까? 약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 전부 험상궂고, 사나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요. 물론 살인, 강도도 있지만 보통사람보다 훨씬 약한 사람들입니다. 강한 사람들은 교도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강한 사람들은 외형이 아주 공손해요. 아주 세련되고 젠틀합니다. 마치 나치스의 정치장교들이 굉장한 음악적 소양을 가지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여러분들 생각에 절도와 강도 중에 누가 더 험상궂을 것 같아요? 칼들고 있는 강도가 훨씬 더 사나울 것 같죠? 절도가 강도한테 그래요. "야, 너 간도 크다. 칼들고 사람들 위협하고." 그러니까 강도가 절도보고 그래요. "야, 너 간도 크다. 사람이 자고 있는데 조용조용 다니며 일보다니." 약한 사람들의 저항의 형태, 저는 테러리즘의 지지자는 아니지만, 약한 사람들의 저항의 형태와, 강자들의 억압의 형태에 대해서 우리가 그 형식만 가지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도소는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약한 사람들이 쫓겨들어 가는 산이다. 교도소뿐만 아니라 도처에 많은 산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지금도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그런 어떤 전도되어 있는 의식들, 이런 것들이 완고하게 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환상

여러분은 대학시절에 그러한 관념을 깨뜨려야 해요. 왜냐하면 아직도 여러분들은 이해관계와 유착이 안되어 있는 상태잖아요. 이때 자기 사고를 바로 세워놓는 것이 참 필요하다고 봐요. 외신이 어떤 건지, 코소보 사태의 실상이 어떤 건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먼저 해야되는 일이 자기자신과 우리 현실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공부, 즉 그 구조와 본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봐요. IMF상황에서도 결국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해요. IMF가 왜 일어났는지 지금 여기서 제가 설명 안해도 되죠. 여러분 너무 많이 아시죠. 그러나 두 가지 관점은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하나는 현대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1990년대에 도달한 현대자본주의 새로운 단계와 성격에 관해서.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나라의 경제구조가 어떤 본질을 갖고 있는지에 대하여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 나라 경제구조가 세계경제질서의 하위에 매달려 있는 종속구조라는 사실입니다. 큰 톱니바퀴에 물려있는 작은 톱니바퀴입니다. 빨리 돌아야 되죠, 큰 톱니바퀴보다도 더 빨리. 자기 가족 돌볼 새도 없죠. 교통, 환경, 국토의 종합적 이용을 거론할 여유가 없는 거죠. 식량자급률 27%, 어떤 농업경제학자는 23%라고 주장합니다. 그나마 기름으로 짓는 23%입니다. 만약 기름이 없으면 더 줄어들 수밖에 없는 실정이지요. 에너지는 물론입니다. 이런 구조, 다시 말해서 외국의 기술과 원자재와 생산수단 들여와서 수출해야 돌아가는 이런 종속구조는 경제위기가 일차적으로 외환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거죠. 거기에다 70년대 이후 엄청난 자본축적으로 이미 제조업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엄청난 규모의 초국적 금융자본의 신속한 국제적인 이동을 보장하는 세계화, 이런 구조 속에서 우리가 장기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될 것인가. 바로 이것이 지금의 과제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먼저 자본주의 200년사에 대한 환상, 더구나 앞으로의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어떤 환상들을 우리가 청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역사는 풍요의 역사였는가? 과연 풍요라는 게 뭔가? 세계적인 규모에서 봤을 때 과연 풍요로운가. 빈곤, 무지, 환경, 질병, 부패 이런 것들이 과연 200년 동안 효과적으로 해결되어 왔는지 이런 반성들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미 여러분들이 많은 논의들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제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만, 이러한 형태의 자본축적운동이 지속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더구나 이러한 자본주의 200년 역사 동안에 뭘 잃어버리고 뭘 얻었는지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돼요.

자본주의는 거대한 물질적인 낭비구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너무 딱딱한 얘기 같아서 제가 다른 얘기로 대신하지요. 제가 있었던 어느 교도소의 4동 상층은 복도가 길게 있고 방이 10개, 한 방에 15명 내지 20명이 수용되어 있었어요. 복도입구에는 세면장이 있습니다. 세면장은 콘크리트 물탱크가 하나 있고 벽에 수도꼭지가 6개 박혀 있었어요. 그런데 물 많이 쓴다고 수도꼭지의 손잡이를 다 빼버렸어요. 다 빼버리곤 스패너로 단단히 잠가 버렸어요. 손으로는 틀 수가 없게 돼 버렸지요. 그러고는 꼭지 두개만 겨놨어요. 그렇게 두개만 남겨놨는데, 당연히 아우성이죠. 그 많은 사람들이 바쁜 시간에 와서 세수하고, 양말 빨려니까 아우성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러자 남아 있던 2개의 수도꼭지의 손잡이가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여러분들은 손잡이 빼는 방법 모르죠. 드라이브로 윗 나사를 풀면  T자의 꼭대기부분이 쏙 빠져요. 없어진 손잡이를 다시 채워 놓으면 또 없어집니다. 그것만 있으면 저쪽에 잠가 놓은 먹통 수도꼭지에 가서 혼자 여유 있게 물을 쓸 수 있으니까 손잡이를 다시 채워놓기만 하면 없어져요. 그래서 나중에 제도가 바뀌었어요. 물 쓸 사람은 수도꼭지를 교도관에게 받아서 사용한 다음에는 반납하는 형식으로 바뀌었어요. 이렇게 바뀌고 난 다음부터는 다른 곳의 수도꼭지가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공장에 있는 것, 변소에 있는 것, 심지어 직원 식당에 있는 것, 어디든지 있는 수도꼭지는 다 없어지는 거예요. 교도소내의 철공소에서 만든 것도 나돌았어요. 결과적으로 우리 사동에는 참 많은 수도꼭지가 있었어요. 우리 방에만 해도 우리 방 공동으로 쓰는 수도꼭지가 하나 있고, 그 다음에 수검에서 뺏길 때를 대비해서 깊이 숨겨 놓은 비상용이 또 하나 있고, 그뿐만 아니라 우리 방에서 복도에 왔다갔다하는 좀 잘 나가는 친구의 개인용이 하나 있고, 이런 식이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두개, 세개를 가지고 있어서 신세진 사람에게 선물하기도 했어요. 각 방마다 사정이 비슷하다면 아마 한 방에 4개씩 그러니까 사동 전체에는 수도꼭지가 40개 정도가 있다고 계산됩니다. 그래도 물은 부족하고 아우성은 계속돼요. 저는 생각했어요 전체 150명이니까 150개 있으면 해결될 것 같았어요. 비상용으로 하나씩 더 준다면 300개, 300개 있으면 물 문제는 해결될 것 같았어요.

이것은 교도소의 물 얘기가 아니거든요. 수도꼭지 만드는 회사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요. 6개 대신에 300개씩이나 만들어 팔 수 있지요.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저지르고 있는 물질적인 낭비의 작은 예라고 봐요. 자본주의의 거대한 낭비구조 거론하자면 한정이 없습니다. 쏟아지는 신기술 신제품에서부터 수십억 달러가 소요되는 거대한 전략방위시스템(TMD)도 마찬가지고, 더구나 우리의 경우 분단구조가 거대한 낭비구조인 것을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낭비 - 관계의 파괴

그러나 물질적 낭비는 그래도 작은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낭비보다 더 심한 낭비가 바로 인간의 낭비입니다. 인간의 낭비, 쉽게 떠오르는 것이 실업과 최근에 당면 과제가 되고 있는 고용조정입니다. 그러나 부패도 더 심한 인간의 낭비, 인간성의 유린입니다. 자본주의체제가 양산해내는 가장 심각한 낭비는 인간의 낭비, 인간성의 완벽한 유린입니다. 이러한 낭비의 가장 심각한 형태가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입니다. 인간관계 자체가 변질되고 와해된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20년동안 익힌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을 읽는 눈입니다. 물론 농담입니다만 전철에서 자리를 잡을 때 그 실력을 발휘하지요. 징역살이하면서 사람들과 많이 부딪쳐서  눈치가 빨라졌지요. 제가 앉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틀림없이 앉습니다. 제일 가까운 전철역에 내릴 사람 앞에 가서 서 있다가 앉은 사람이 일어나면 앉으면 되거든요. 거의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가서 강의를 해야 되니까 가는 동안 한 20분이라도 졸아야 되겠더라구요. 신도림에 내릴 사람 앞에 자리를 잡고 딱 섰어요.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들고 연습하면 충분히 가능해요. 왜냐하면 서울역에 내릴 사람과 이화여대 앞에 내릴 사람, 아주 쉬운 사람들부터 구별해 보세요. 여러 가지 차이점과 특징을 잘 관찰하면 가능합니다. 신도림역에 내릴 사람 앞에 섰는데, 틀리지 않았어요. 앉았던 사람이 정확히 신도림역에서 일어섰어요. 그러나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났어요. 제가 앉으려는 찰나에 그 사람 옆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가, 학생인 듯 아닌 듯한 젊은 여자가 그 자리로 옮겨앉고 자기 앞에 서있던 친구를 자기자리에 앉혀요. 아 그걸 제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 때 제 주변에는 저하고 경쟁관계에 있을 만한 나이 많은 사람도 없었거든요. 저는 확실한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 두 사람 걸치기도 안하고 정확하게 한사람의 정면에 서있었는데 그런 사건이 일어났어요. 아! 이게 뭔가? . . . . 저는 서서 생각했어요. 그때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 젊은 여자하고 나하고 아무 관계가 없어서 그렇다. 다시 만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못 만났어요. 그의 얼굴은 확실히 기억했는데도 한번도 만나질 못했어요.

맹자 곡속장에 있는 얘기입니다. 제나라 선왕이 제물(祭物)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 벌벌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는 저 소를 양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려요. 임금이 인색하게, 큰 걸 작은 걸로 바꾼 것이라는 해석까지 나왔는데 맹자가 그걸 정리를 하죠. 왜 바꾸라고 그랬냐 하면 소는 직접 보았고, 양은 못 봤기 때문에 바꾸라고 그런 거다. 차마 보고는 죽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보지 않은 양으로 바꾸라 그런 것이다. 제 선왕 자신도 미처 몰랐던 것을 맹자가 지적을 하였지요. 본다는 것, 관계 있다는 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 이것은 엄청난 것이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자행되는 차마 못할 짓들이 대부분이 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서로 관계없기 때문이지요. 자본주의 상품생산구조가 바로 이 인간관계를 단절시키는 구조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됩니다. 화폐가 생산자와 소비자를 단절시킨다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 이 사실이 갖는 엄청난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황폐화 이것은 인간낭비의 최고형태입니다. 다른 물질적 낭비와는 비교될 수 없는 삶 그 자체의 파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재벌회장 선친 묘소의 시신을 훼손한 사건이 일어났지요. 저는 점퍼 뒤집어쓰고 끌려나온 그 도굴자를 보면서 내내 다른 생각에 마음이 아팠어요. 만약 저 사람에게 중학교 다니는 딸이 있다면 그 딸의 심정이 어떨까. 그 생각만 계속 했어요. 고암 이응로 선생이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젊은이에게 자네 이름이 뭔가 하고 물었어요. 그 젊은이의 이름이 응일(應一)이었어요. 그 이름을 듣고 혼잣말처럼 '뉘집 큰아들이 여기에 들어와 있구먼'했다는 거였어요. 간단한 말 한마디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뉘집 큰아들'로 그 젊은이를 본다는 것은 굉장히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을 바깥의 부모와 형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를 본다는 의미입니다. 죄명과 형기로 그를 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시각이지요. 바깥에서 마음 아파할 부모, 형제들 속에서 그를 본다는 것은 별로 대수로운 것같지 않지만 실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문화 속에는 이런 시각이 일반적이었어요. 저는 이응로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보니까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사람을, 사물을 그런 시각으로 보아왔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어요. 우리사회의 문화적 틀로서 이어져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제가 사형 받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정리를 했어요. 저뿐만 아니라 같이 들어간 선후배들과 함께 정리했었지요. '죽음이란 삶의 완성이다.' 생각하면 아주 낭만적인 논리입니다. 유관순 누나가 독립만세 부르다가 감옥에서 죽는 것은 유관순 누나의 삶의 아이덴티티가 아름답게 완성되는 것이다. 충무공의 전사도 마찬가지다.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서 피끓는 젊은이가 포악한 군사정권에 항거하다가 죽는 것도 식민지 청년의 삶의 완성이다. 그랬어요.

그랬는데 어느 날 저희 노부모님이 접견마치고 돌아 나가는 뒷모습을 제가 보게 되었어요. 순간 충격을 받았어요. 사형은 내 삶의 아름다운 완성이라고 하는 것이 공허하기 짝이 없어지는 것이었어요. 나의 죽음이 저 부모님의 심정에 무엇이겠는가. 저 부모님의 가슴에 뻥 구멍 뚫는 일이 아니겠는가. 순간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감방에 돌아와 혼자 생각했어요. 나의 존재라는 것이 과연 나의 개별적 존재로서 완성되는 것인가.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그 사람들의 걱정과 어떤 배려 속에 내가 여기 저기 흩어져서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 내가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내가 받았던 교육들이 그런 서구 근대성의 어떤 특징인 존재론적인 사고로 굳어져 있는 건 아닌지. 관계는 존재라는 말도 생각났어요.

제가 <나의 대학시절>에 확인한 것은 그런 겁니다. 사람과의 관계, 그것을 확대하면 바로 사회의 어떤 본질적인 구조가 되는 것이지만. IMF상황 나아가 자본주의 200년사에서 우리가 청산해야 할 환상은 무엇인가. 상품생산, 상품교환 구조가 양산하고 있는 바로 인간관계 그 자체가 황폐화되고 파괴된다는 사실이 아닌가 합니다. 수많은 수도꼭지를 만들어 내야 되는 물질적인 낭비, 많은 사람들을 삶의 현장으로부터 쫓아내는 인간의 낭비에서부터 결국  인간관계 자체를 황폐화하는 것이 바로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한국자본주의 - 작은 톱니바퀴의 비극

여기서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논의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자본주의체제의 기본적인 구조에 더하여 우리사회가 부가적으로 짐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의 일반적 성격에 더하여 논의해야 할 한국자본주의의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까 큰 톱니바퀴에 물려있는 작은 톱니바퀴가 우리 나라라고 했어요. 작은 톱니바퀴의 위상과 작은 톱니바퀴의 속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는 친구 중 참 양심적인 기업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양심적 기업이라는 게 어차피 한계는 있겠지만, 어쨌든 경제정의상도 받은 기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사업을 안하겠대요. 못 하겠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가전3사의 어떤 부품을 거의 80%를 납품을 하고 있는데 마진이 얄팍하기 짝이 없다는 거예요. 마진이 제법 큰 아이템은 재벌기업이 직접 생산하고, 그보다는 좀 못하지만 상당한 마진이 보장되는 아이템은 로얄 패밀리에게 하청을 주고, 결국 자기 회사가 맡은 것은 사업이 될까 말까하는 하는 정도의 마진밖에 안 나는 것만 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 얇은 마진으로서는 사원복지니 임금인상이니 작업환경개선이니 아무것도 안된다는 거예요. 못 하겠다는 거예요. 저는 그 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한국자본이 세계경제 질서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큰 바퀴에 물린 작은 바퀴입니다. 한국자본의 국제적 위상이 그러니까 다른 방식으로 벌었잖아요, 지금도 그렇지요. 대기업의 재테크란 자기들이 노임으로 분배해준 돈을 부동산투기라는 형식으로 도로 거둬가는 형식이지요. 천민적이고 전근대적인 축적방법이지요. 이러한 구조, 세계경제 질서 속에서 그 위계질서의 하위에 편입되어 있는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 중층적인 수탈구조입니다. 작은 톱니바퀴가 정신없이 돌아야 하는 구조입니다. '서울은 노동자 합숙소다.' 서울에 대해서 누가 저한테 묻는다면 저는 그렇게 답변합니다. 주택 도로 교육 환경 등 어느것 하나 돌 볼 여력이 없습니다. 중하위에 편입된 작은 바퀴가 그 현기증 나는 속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마치 노동자를 합숙소에 집단수용하고 그 비용을 최소화하지 않을 수 없지요. 서울의 교통이 교통문제로만 풀리지 않는 이유이지요. 마진이 높은 하이테크부문을 갖추고 있는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도시와 주거환경은 참으로 우아했어요. 그리고 그들끼리의 관계도 형식적인 면에서는 매우 우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합숙소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 서로 수탈하며, 증오를 키우며 경쟁에 내몰리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열악한 물적 조건 역시 저로서는 가장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열등의식, 콤플렉스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학교 다니던 시절.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은 좌절감, 패배의식이었어요.  서구적인 것, 보다 근대화된 어떤 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그에 못 미치는 자신은 한없는 열등감과 패배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오로지 그 쪽을 향해서 달려갔던 그런 시절이었어요. 이것이 참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들이 안고 있는 콤플렉스. 자기 것,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신감이 없는 상태. 이것은 가장 불행한 상태라고 해야 합니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저는 그 사람의  판단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콤플렉스라고 생각해요, 합리적인 판단을 가장 심하게 왜곡시키는 것이 콤플렉스라고 생각해요. 이 콤플렉스는 평소에 단어 하나 사용하는데도 작용하고, 안경 고르는데도 작용하고, 헤어스타일, 브랜드 고르는 데도 어김없이 끼여듭니다. 3살부터 여든 살까지 계속 끼여들어요. 완고한 무쇠 형틀입니다. 그래서 개인에 있어서는 최소한 자기가 어떤 종류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확실한 자각이 있어야 돼요, 고치지는 못할망정.

이러한 콤플렉스가 사회화되어 있는 경우는 어떻습니까? 사회문화 속에 구조화되어 있는 경우에는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사회는 참으로 불행한 사회입니다. 성장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하더라고 발전은 가망 없는 사회입니다. 저는 뒤늦게 깨달은 거지만 외국에 가보면 한국은 없습니다. 한국이 없다고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화내더라구요. 현대 자동차도 달리고 기아 자동차도 수출하는데 왜 없다고 그러느냐?고 반론을 제기해요. 그러나 생각해봅시다.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가 어떻게 한국 거예요? 한국이 자동차 발명했어요? 한국은 없습니다. 그레이드도 제일 낮습니다. 중동, 아프리카보다 훨씬 낮습니다. 그런데도 서구를 향해서 우리가 키워온 동경과 짝사랑이 무척 허망하고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자기를 흉내내고 뒤따라 오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지요.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허망한 동경들이 자기가 갖고 있는, 우리 사회에 구조화되어 있는 그런 콤플렉스, 열등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걸 극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사고, 판단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한 온당한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위상이 없습니다. 콤플렉스란 대등한 파트너가 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상태입니다. 관계할 수 있는 주체적 입장이 없는 상태지요. 철학적으로 스스로 타자가 된다고 하지요. 이러한 콤플렉스를 청산하는 일이 없이는 우리가 진정한 자유나 해방을 이야기하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바야흐로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논의가 무성합니다. 숱한 논의를 크게 간추려 보면 2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21세기에 대한 전망이고 또 하나는 21세기에 대한 소망입니다. 전망과 소망은 판이한 것입니다. 전망이란 세계는 앞으로 21세기에 이러 이러하게 변화해갈 것이라는 객관적 관점입니다. 그래서 어떠 어떠하게 준비해야 된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소망은 앞으로의 세계는 이러 이러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주관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은 어쩌면 상반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망과 소망에 관련해서 저는 이러한 말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두 부류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자신을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글자 그대로 자기에게 세상을 맞추려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이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에 자신을 맞춘다는 것은 세상과 민첩하게 타협하는 것이고 세상을 추수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행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세상을 자기자신에게 어리석게도 맞추려는 그 우직한 노력이 세상을 보다 인간다운 것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단순히 비교하는 선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전망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그 내면에 자기의 소망을 담고 있다는 것이지요. 전망이라는 객관적 언어로 표현하고는 있지만 그 속에는 자기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려는 자기의 소망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들의 우직한 소망에 대하여 그것을 협소한 것이라고 그 의미를 격하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소위 세계화와 정보화라는 당면의 화두가 어떠한 계층의 어떠한 소망을 그 속에 숨기고 있는가를 간파하는 통찰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자본주의 200년사를 철학적 패러다임으로 정리한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근대성의 바탕이 되고 있는 철학적 사고의 구조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그것은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개별적 존재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러한 개별적 존재들이 다른 존재들과의 경쟁과 충돌 억압과 저항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존재론적 사고가 최근에 반성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사상공간입니다.

작년 말에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어요. 간단한 내용은 그런 겁니다. 물질은 존재가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도 다 알겠지만 소립자라든가 뉴트리노라든가 소위 현대원자물리학의 가설체계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물질의 궁극적 형태가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죠. 세계의 궁극적 실체는 어떤 객관적이고 확실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확률로서 존재한다는 가설입니다. 이러이러한 조건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하는 것, 존재라는 말이 이 경우에는 적절하지 않아서 '존재론'이라는 개념을 '실체론'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해야 된다는 조언을 받고 있습니다만  소위 탈근대이론이나 근대성비판 그리고 성찰적 근대성 논의에서는 존재론을 정치화(精緻化)하는 그런 방식으로 대응해요. 알튀세르의 'Overdetermination' 이론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만.  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일방적이고 직선적인 인과관계로 파악하는 대신에 양 방향의 화살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을 제기합니다. 나아가 양 방향이 아니라 수많은 화살표방향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접근 방식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인 세계상을 일단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다만 그것을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존재론의 틀 내에서 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정치화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존재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제 논문의 요지는 세계의 기본적인 구조는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이라는 것입니다.

세계를 존재들의 집합으로 보지 않고 관계망(關係網)으로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사상적 기반이고 동양적인 패러다임입니다. 이러한 전통이 서구화와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폐기되고 말았습니다만 우리는 삶의 여러 측면에서 이러한 사상적 정서적 전통을 만나게 되지요. 여기서 이러한 논의를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는 불편합니다. 다만 제가 <나의 대학시절>에 동양고전을 부지런히 읽으면서 느낀 점을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저의 동양고전 읽기는 대학시절에 만연했던 그리고 나자신도 깊숙이 물들어 있던 우리 것에 대한 좌절감과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제가 지금 소개하려고 하는 것은 세상의 변화에 대한 동양의 기본적인 인식 틀이라고 할 수 있는 주역(周易)의 이야기입니다. 주역이라면 여러분은 아마 점치는 책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주역은 점치는 책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주역에 대한 해설 즉 십익(十翼)은 철학입니다. 주역에는 64개의 대성괘가 있어요. 우리 나라의 태극기에 있는 것은 소성괘라 해서 효 3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소성괘 두 개를 겹쳐서 6개의 효로 만든 것이 대성괘지요. 여덟 개의 소성괘를 겹치면 8×8 = 64, 64개의 괘가 되지요. 이 64개의 대성괘는 세상의 모든 변화와 운동을 64개로 패턴화한 일종의 카데고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변화를 64개의 카테고리로 구분하는 것은 굉장히 세분화된 구조라고 봐요. 변증법의 카테고리가 10개를 넘지 못하지요. 설명이 좀 복잡하기 때문에 우선 간단한 예를 들어보죠. 여기 컵이 있네요. 이건 '사물(事物)'이지요. 이것을 망치로 딱 때려서 깨트리면 사건이 되지요.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서 사건(事件)이 일어나고, 이런 컵을 여러분들이 전부 다 한 개씩 깨뜨리고 있다면 이 큰 강당에서는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잖아요. 그것을 사태(事態)라고 합시다. 이처럼 사물, 사건, 사태로 세상의 변화를 나눈다면 이 주역의 64괘는 가장 높은 단계인 사태를 카데고리화하고 정형화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역의 64개의 카테고리가 사태의 변화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기보다는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에 일관되고 있는 관계론적 인식 틀입니다. 예를 들어 64괘 중에서 가장 좋다는 괘가 '지천태(地天泰)'괘인데 이 괘의 모양은 땅(地)이 위에 있고 하늘(天)이 아래에 있는 모양입니다. 이 괘가 제일 좋은 괘라고 설명하는 바로 그 이유가 관계론적이라는 것이지요. 땅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오고 하늘의 기운은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위에 있는 것은 내려오고 아래에 있는 것은 올라가기 때문에 '만난다(交)'는 것이지요. 그래서 '형통하다'고 해석합니다. 이는 존재론적 발상과는 전혀 다른 거예요. 어떤 개별적인 사물이 갖고 있는 속성보다도 그것이 맺는 관계를 통해서 발현되는 새로운 성격을 우위에 두는 거죠. 효(爻)도 마찬가지입니다. 음(陰)이니까 유순하고 양(陽)이니까 강건한 것이 아니에요. 그 음이 어느 자리에 있는가에 따라서 그 성격이 달라져요. 어떤 존재와 그 자리(位)의 관계, 또 효와 이 효의 관계, 상괘와 하괘의 관계. 전부 관계입니다.  관계 그 자체가 확실한 존재성을 갖는 것이 동양적인 기본 마인드입니다. 이것이 동양적 사고의 본질이 아닌가 생각해요.

 

붓글씨의 관계론

저는 붓글씨를 쓸 때마다 그런 관계론을 느껴요. 획을 하나 쓱 그었어요. 그었는데 아차 잘못 그었어요. 좀 비뚤어지게 그었어요. 어쨌든 쓰다보면 비뚤어지지 않을 수 없어요, 그 때부터는 비상사태에 들어갑니다. 다시 지우고 쓸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수습하는가 하면 그 다음 획으로 비뚤어진 획을 어떻게든 커버해야 돼요. 반대쪽으로 더 많이 자빠뜨린다거나, 잘못해서 획이 굵어져버렸다면 이걸 커버하기 위해서 다른 획을 좀 더 가늘게 쓴다거나, 윗글자가 좀 잘못됐다면 그 다음 글자로써 그 잘못된 것을 도와서 어떻게든 커버해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한 줄(行)이 비뚤어지면 그 옆에 있는 줄(行)로 바로 잡아야 돼요. 그러니까 글씨를 쓸 때는 굉장한 긴장도가 요구돼요. 저는 두시간 이상 계속해서 글씨를 못 써요. 글씨를 조용히 평정한 마음으로 쓴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제경우는 굉장히 바쁘고 긴장됩니다. 쓰면서 하나 하나의 획을 보랴, 옆의 글자 보랴, 이 줄 보랴, 저 줄 보랴, 여기 쓰면서 저 위의 것 보랴 여간 긴장되고 바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결국 흑과 백의 조화도 봐야 되거든요. 글씨를 쓸 때 제일 중요한 게 흑과 백의 조화입니다. 어느 정도 크기의 종이에 어느 정도의 먹이 들어갔는가 그리고 여백과 글씨의 관계는 어떤가 이러한 것이 서도에서 가장 중요하거든요. 저는 글씨를 쓸 때 까만 것을 보기보다는 하얀 것이 얼마나 남았나를 보면서 써요. 까만 것은 숙달되면 붓을 자기마음대로 운필이 가능하니까 안 봐도 돼요. 하얀 것만 보고 써요. 한 자 한 자의 개별적인 것을 단위로 하여 쓴다기보다 줄곧 다른 것과의 관계를 고민하면서 쓰는 셈이지요. 다 쓴 다음에는 마지막에 방서를 쓰죠. 몇 월 며칟날 무슨 글씨를 어디서 썼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빨간 낙관도 찍습니다. 이 방서와 낙관마저도 전체 균형에 참여하고 있는 글씨를 서도에서 격이 높은 글씨라고 봅니다. 명필들이 쓴 어수룩한 글씨를 보고 저렇게 어수룩한 글씨가 무슨 명필인가 하고 의아해 하기도 하지만 획과 획과의 관계를 고민하면서 그렇게 맞추어내기 위해서 그런 모양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글씨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한자 한자가 반듯하고 질서정연하게 써 내려간 것이 아주 보기 좋다고 하지요. 대개는 해서나 한글 궁체라든가, 고체로 쓴 글씨들이 그렇습니다. 또박또박 옆글자에게 신세질 것도 신세받을 것도 하나 없이 한 자 한 자가 독립해 있는, 그래서 '시민적 질서'(市民的 秩序)가 잘 지켜지고 있는 글씨를 잘 쓴 글씨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글씨로 치지 않습니다. 혹평하기를 사자관(寫字官)글씨라고 하지요. 베끼는 글씨지요. 서도의 높은 경지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파격인데도 멋지게 살려내고 균형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루어지는 겁니다. 엉뚱한 곳에 점이 하나 있는데 그 점을 가리니까 글씨 전체가 확 무너지는 것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서도는 다른 예술장르와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그 글씨와 사람의 관계입니다. 사람이 나쁘고도 글씨가 훌륭할 수 없는 것이 서도입니다. 그래서 서도의 정신과 서도의 미학은 글자와 글자, 획과 획, 흑과 백, 작품과 사람의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느끼는 서도의 관계론입니다.

 

가슴으로 하는 생각

교도소에는 종교집회가 있습니다. 기독교집회, 천주교집회, 불교집회 등 종교집회가 있습니다. 종교집회에는 각 공장마다 명단에 있는 해당 신자만 참석이 허락되죠. 예배와 찬송 그리고 설교가 끝나면 위문품으로 가지고 온 떡도 하나씩 나누어주지요. 종교집회가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어느 교회에서 떡 가지고 위문 온다는 정보가 쫙 돌아요. 그런데 어느 종파교회를 막론하고 모든 떡 있는 교회는 다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을 '떡신자'라고 그러기도 하고 '기천불 종합신자'라고도 하는데 제가 '떡신자'였어요. 사실 떡신자 되기도 어렵지요. 예를 들면 기독교집회에는 명단에 있는 기독교인만 참가가 허락되기 때문이죠. 저는 명단에 없습니다. 종교가 없으니까. 교도관이 그래요. 신선생은 기독교인도 아니면서 왜 가려고 하느냐고 허가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제가 단골메뉴로 사용하는 핑계는 이런 겁니다. 저는 무기징역이어서 아무래도 종교를 하나 가져야 되지 않겠는가? 이런 집회 저런 집회 부지런히 다녀볼려고 그런다는 거지요. 대개는 보내줘요. 종교교회가 있는 날이면 이런 저런 시비가 일어나지요. 교도관이 '너는 천주교신자면서 왜 기독교집회에 갈라 그래?'하면서 허가하지 않으면 대는 이유가 가관인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요즘 천주교에 대해서 회의가 좀 생겨서요.' '신선생은 보내주면서 왜 나는 안 보내주냐!'는 이유를 대는 녀석도 있어요. 그래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고 교회에 와보면 각 공장에서 나온 떡신자들을 만나게 되지요. 아마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어느 떡신자가 나왔나하는 것인지도 몰라요. 어쨌든 얼마나 반가운지, 서로 윙크하고 V싸인도 해 보이죠. 그러다가 기독교 회장한테 꾸지람을 듣기도 하지요. 교인도 아닌 떡신자들이 예배분위기 다 망친다는 것이지요. 사실 떡신자는 예배에는 마음이 없고 떡에만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떡신자들끼리 나누는 이야기 역시 여기 위문 온 여자신도들 중에서 자기는 무슨 색깔의 옷을 입은 여자가 그래도 제일 예쁘다고 생각한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옆에 쌓아둔 박스의 개수로 볼 때 떡이 대충 몇봉지이겠는지, 현재 인원수로 계산해볼 때늦게 받으면 두개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나누는 것이 다반사지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떡신자라는 관계가 매우 아름답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떡신자들끼리는 다른 곳에서 만나도 참 반가워요, 같이 타락한 사람들끼리의 관계 같기도 하고 서로의 치부를 알고 있는 관계 같기도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저는 그런 관계가 참 멋진 관계라고 생각을 해요. 사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떡신자끼리의 관계란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념적인 관계도 아니고 무슨 높은 가치를 위해서 함께 싸우는 동지적인 관계도 아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때묻고 지저분한 관계인데도 바로 그런 인간적인, 때묻어 있는 정서의 교감 같은 것이 삭막한 교도소를  견디게 해줬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서 저는 사람과의 관계, 이것이 오늘날 80년대, 90년대 학생운동의 경향성에서도 많이 지적된 것이지만, 인간관계는 일차적으로 정서에 호소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사상은 쿨 헤드(Cool Head)가 아니라 웜 하트(Warm hearts)라고 생각해요. "가슴에 두손을 얹고 반성해 보라." 그렇게 미련한 표현을 우리 조상들이 해왔다고 그랬었어요. 학교 다닐 때. 인간의 사고가 가슴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머리에서 두뇌에서 이루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과학적인 표현을 하자면 두손을 머리에 얹고 조용히 생각해보라고 해야 맞습니다.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생각하라니.  그러나 지금은 저는 가슴이 생각하는 게 맞다고 봐요. 생각은 머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한다고 생각하지요. 제가 신사복도 만들 수 있고, 양화공 반장도 오래했어요. 목수도 도끼목수 정도는 되구요. 그런데 정말 일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손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마음으로 해요. 왜냐하면 잘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이지요. 지나다가 뭔가 삐뚤어진 게 있으면 바로 만들어 놓고 갑니다. 그냥 놔두면 자기가 불편해서 바로 해요. 그래서 저는 사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옳기 때문에, 이것은 내가 해야 하기 때문에, 또는  사명이기 때문이라는 이성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성적 인 것이라기보다는 하지 않으면 자기가 불편한, 양심의 가책이 되는 그런 정서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상은 웜 하트라고 생각해요. '건축'이라는 단어, 이 단어를 읽거나 생각할 때 사람마다 떠올리는 상념이 다릅니다. 아파트 분양권 생각하는 사람, 아니면 아파트 생각하는 사람, 또 더 나아가서 포크레인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파트분양권을 생각하는 사람과 손때 묻은 망치를 떠올리는 사람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더구나  함께 술 먹었던 목수친구를 생각하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민족'이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자기 머릿속에 떠올리는 연상세계가 사람마다 엄청나게 달라요. 88올림픽 생각하는 사람, 3.1 만세운동 생각하는 사람, 충무공을 생각하는 사람, 장승을 생각하는 사람, 별 사람 다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의 사상은 그가 주장하는 논리 이전에 그 사람의 연상세계, 그 사람의 가슴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떤 연상세계를 그 단어와 함께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봐요.  

 

대학과 상품가치

지금까지 제가 겪었던 <나의 대학시절>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저로서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존재론적인 패러다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과 의식을 뛰어넘는 대안적 관점으로서 '관계론적 패러다임'에 대하여 함께 모색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대학생인 여러분과 오늘 이 시간에 나누고 싶은 것은 '가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대학공간이나 사회적 공간이 안고 있는 숱한 문제의 배후이면서 핵심이 바로 이 가치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잘 팔리는 학문, 돈 되는 학과에 학생들이 몰리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대학이란 것은 여러분들이 지금 몸소 겪고 있는 것이지만, 원래 대학이라는 것은 중세 아카데미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봉건 영주들이나 교회 영주들이 자기들의 지배적인 지위를 세습화하기 위한 자녀들의 교육기관입니다. 일종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생산과 재생산이 목적이었고 이것이 신분세습 공간이 되기도 했어요. 오늘날은 대학은 이미 신분세습, 신분상승의 가교는 아니라고 봐야 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사회의 지배담론과 지배이데올로기를 샤워하기 위한 기관이 아닌가 생각해요. 영남대학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대학도 마찬가지이고 제가 아는 대학들에서는 한결같이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상당한 혼란이 있는 것을 느껴요. 가치란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 함께 한번 따져봅시다.

'가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에 로빈슨 크루소가 절해고도에서 굉장히 큰 진주를 발견했다면 그 가치가 얼마나 돼요? 가치 없습니다. 가치란 기본적으로 교환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환을 전제로 해야지만 가치란 개념이 있을 수 있는 거죠. 오늘날 가치란 말이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원래 가치라는 것은 교환가치입니다. 제가 젊은 사람들에게 제일 불만인 것이 사람을 볼 줄 모른다는 겁니다. 결혼상대를 찾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대개 어떻게 보느냐 하면 제일 한심한 예를 드는 게 미안하기는 한데요. 저 여자는 결혼식장에서 신부 입장할 때 쪽팔리게 생겼다는 거예요. 신부 입장할 때의 그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이보다는 덜한 경우이지만 이 다음에 부부동반해서 나들이 할 때에 그래도 좀 근사하게 보여야지.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드니까 우스운 이야기같이 여겨지지만 이런 관점이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 저런 미인을 아내로 가진 남자는 얼마나 능력이 있을까? 이렇게 보는 세상이지요. 정치경제학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남자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그 아내와의 교환가치로써 그 남자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용가치라는 규정이 다소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인간성, 인격이라고 해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아내의 미모를 통하여 그 남편을 평가한다는 것은 남편을 사용가치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교환할 것도 아니면서 그를 교환가치로 보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런 멋진 남편이랑 사는 여자는, 근사하겠구나! 근사하지 못하면 머리가 굉장히 좋거나, 아니면 친정 집이 되게 부자이거나. . . . 그런 식으로 스스로의 고유한 가치는 없고 타자를 통해서 자기가치를 드러내고 있지요. 자녀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까? 서울대 무슨 어려운 학과에 다니는 아들을 자주 거론하는 엄마는, 자식을 교환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요. 가치의 본질 자체가 그런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가치는 현실적으로 시장가격으로 나타납니다. 대학에서 우리가 찾는 가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역시 교환가치이고 시장가격이라고 봐요. 자본주의 사회가 전면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그런 가치입니다. 그래서 저는 적어도 대학에서는 바로 이런 가치, 더 구체적으로는 시장가격으로부터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대학이 이데올로기의 재생산현장에 그치지 않고 변혁의 현장이라면 그렇습니다. 가치 없는 것, 쓸데 없는 것을 공부해야 된다고 봐요. '잘 팔리는 것을 연구한다'는 그 자체가 대학고유의 가치가 없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잘 팔린다'는 것은 가격이 있다는 것이고, 이를테면 상품가치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본의 논리입니다. 자본의 논리라는 지배담론을 거부할 수 있고 그것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대학의 어떤 고유한 영역을 우리가 지키는 일, 이것이 오늘의 대학이 짐져야 하는 시대적 과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대학 4년 동안은 자본논리 대신에 인간적 논리, 인문학적 논리를 자기 내면적인 것으로 지킬 수는 없을까? 정책과학 응용과학 일변도의 풍토 속에서 대학 4년만이라도 인간적 공간으로 남겨 둘 수는 없는가? 이러한 고민은 크게는 존재론적 지배담론을 변혁하는 논리이면서 작게는 인간적 사회를 지켜가려는 최소한의 인간논리입니다.

 

도로의 문화와 길의 문화

4년이면 대단히 긴 세월이라고 생각합니까? 굳이 경쟁과 속도에 관한 이야기를 이곳에서 재론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저로서는 여러분들이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역이야기입니다만 주역 64괘의 제일 마지막 64번째 괘가 '화수미제(火水未濟)'괘입니다. 미완성을 뜻하는 괘입니다. 제가 한두번 읽을 때 까진 몰랐어요. 마지막 괘가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어요. 효사(爻辭)는 이렇습니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는데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 별로 이로울 바가 없다." 작은 실수로 끝이 납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 '작은 실수'입니다. 꼬리를 물에 적시는 정도니까 큰 실수는 물론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처음 읽었을 때는 나도 늘 그러더라, 끝판에 조심해야지. 끝판에 실수 안 하도록 속도를 늦추면서 조심해야지 하는 경구로 이 구절을 읽었지요. 여러분도 그런 경우가 없지 않지요? 막판에 가서 코 빠뜨리는 경우 많잖아요. 괜히 끝에 가서 빨리 끝내려고 서두르거나 다됐다고 방심하다가 실수하지요. 지금도 막판에 가면 일부러 호흡을 좀 느리게 하고 속도를 더 줄여서 꼬리 안 적셔야지 하는 생각을 해요. 그러나 사실은 실수를 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결정적인 실수를 하면 안되겠지만 '작은 실수'는 반성을 하게 합니다. 실수는 이전의 과정을 돌이켜보게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겁니다. 주역의 제일 마지막에 미완성을 배치한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운동은 반성과 시작, 이것의 반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만물은 무엇을 완성하기 위하여 변화합니까?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운동입니까? 미완성 그 다음에 이어지는 또 다른 미완성의 연속이라는 것이 주역의 철학이고 동양적 사고의 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남는 것은 과정(過程)만 남습니다. 달성(達成)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과정 그 자체가 의미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클활동이든, 학생운동이든 모든 것은 과정 그 자체가 예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4년도, 과정 그 자체가 의미 있어야 돼요. 빨리 도달하려는 속도와 도로(道路)의 문화, 이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이 속도와 경쟁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자본의 회전속도와 인노베이션(Innovation)과 특별잉여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우리 나라의 경우는 그 위에 다시 작은 톱니바퀴의 회전속도가 플러스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자본논리에 맞서 인간논리를 지키는 일은 도로의 문화 대신에 '길의 문화' 길의 정서를 키우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그 속성상 제로(0)가 되는 것이 자기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것입니다. 짧을수록 좋은 것이 도로입니다. 고속일수록 좋은 것이 도로입니다. 오로지 목적지에 이르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길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코스모스를 만나고 또 자기를 남기는 이를테면 삶 그 자체입니다. 성장과 속도의 패러다임 속에서 길의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가치 없는 것, 쓸데없는 것을 공부하고 그것도 천천히 해야 한다고 하는 제 이야기가 여러분들에게 참 비현실적인 얘기로 들릴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안 팔리는 것을 공부하고, 그나마 천천히 하고, 실수하는 것 그 자체에서 의미를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거든요. 그러나 저는 그것이 삶이라고 생각해요.

 

자본의 논리로부터의 자유

교도소에서 본 영화이야기입니다. 영남대 벚꽃 참 좋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옛날 영화에서는 세월이 지나간 것을 보여줄 때 우선 꽃이 가득히 피어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눈이 내리면서 꽃이 지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것을 두 번쯤 보여준 다음 '십년 후'라는 자막이 화면 가득히 나오는 식이지요. '십년 후'라는 자막이 나올 때 재소자들은 대개 한숨을 확 내쉬어요. 한숨의 의미는 내 징역도 저렇게 영화 속에서처럼 빨리 갔으면 하는 거지요. 그래서 한 녀석을 붙잡고 물었어요. 너 내일아침이 십년 후가 되면 좋겠느냐고요.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질문이지요.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다면, 즉 지금 너의 나이가 서른 다섯이니까 내일 아침에 마흔다섯살이 되어 출소하는 것이라도 괜찮겠느냐고 물었어요. 얼른 대답을 못했어요. 좀 생각해봐야 되겠대요. 그 십년이란, 행복한 10년도 아니죠. 콩밥에, 춥고 배고픈 10년이지요. 어딜 가지도, 누굴 만나지도 못하는 그런 10년이지만 그래도 선뜻 버리고 싶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대학 4년을 수단화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대학생활동안에 생각해야 할 것은 참 많습니다.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우리사회에 만연한 콤플렉스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고 작은 톱니바퀴의 종속구조를 생각해야 하고,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여러분들은 대학공간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이 대학에 어떤 학과가 있는지 몰라서 특정학과를 얘기하기가 좀 미안하지만, 없어도 될 학과가 대학에 많이 들어와 있어요. 다른 교육기관에서 2년만 교육하면 될 것을 대학에 넣어서 4년간 교육시키는 것. 이것은 함량미달에다 과대포장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함량미달 상품에 대해서는 욕하고 있지요. 포장만 크게 했다고 불평이지요. 소에게는 물 먹여서 근수 많이 나가게 한다고 욕하면서, 대학은 2년만 가르치면 될 것을 4년씩 등록시켜 돈 받지요. 그것도 미리 현금으로 받고 있지요. 제품이 판매되거나 안되거나 책임도 안 지지요. 대학이 신분상승의 가교도 못되면서 자본논리의 지배하에 놓이는 데 그치지 않고 도리어 자본논리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해봐야 하겠지요. 여러분들의 대학현실이 무척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최후의 수평공간입니다. 수평, 이것이 얼마나 편한 것인가 아마 여러분은 실감이 없을 것입니다. 대학을 나서자마자 수직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대학에서 여러분들은 돈 내고 다니잖아요. 앞으로 취직해서 돈 받고 한번 다녀봐요, 얼마나 힘든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내고 다니는 것과 돈 받고 다니는 게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아직 모르죠?

대학은 최후의 수평공간입니다. 쓸데없는 것, 가치 없는 것들, 더 정확하게 교환가치가 없는 것, 상품가격이 없는 것들을 할 수 있는 기간, 그런 기간이 저는 대학이라고 생각하죠. 수평공간이면서 자유의 공간입니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가 자유(自由)라고 생각해요. 자기의 이유를 갖는 것이 자유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유로 자기가 움직이는 것, 그것은 자기가 동의했건, 또는 충분히 공감을 하건 그건 부자유한 거라고 생각해요.

대학의 교육도 마찬가지로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띄우고 근본적인 것에 생각을 모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자본의 논리로부터 독립하는 시간과 공간을 대학이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지요. 자기의 이유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이것은 일차적으로 지배담론으로 군림하고 있는 자본논리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며 그러한 자본논리를 바꾸는 실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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