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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실크로드 불교 그리고 21세기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

신 영 복 (성공회대학교 교수)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

천년의 도시 경주는 천년을 단위로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게 하는 일 입니다. 다가올 새 천년에 관한 국제학술회의가 경주에서 열린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현재는 20세기를 돌이켜보는 동시에 과거 천년을 돌이켜보는 거시적 시각이 요청됩니다.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는 지혜는 먼 곳에 착목하는 것입니다. 먼 곳을 착목하는 법이 없이 넓고 깊! 게 바라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천년의 고도 경주는 그런 점에서 훌륭한 전망대입니다. 그리고 한국은 20세기가 가장 완고하게 남아 있는 곳입니다. 20세기의 하부구조인 냉전구조가 청산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현대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이 집중되고 있는 현장입니다. 동(東)과 서(西), 고(古)와 금(今)이 공존하고 있는 경주와 현대자본주의의 실상을 그 어느곳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는 한국의 현실은 21세기와 새로운 천년을 전망할 수 있는 시공(時空)입니다.

 

오늘의 당면과제는 새 천년의 방향을 전망하고, 21세기를 창조하는 일입니다. 과거 천년의 억압과 지배의 역사를 청산하는 일이며, 20세기를 일관해온 열전과 냉전의 100년을 청산하는 일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물론이며 인류가 창조해 온 모든 가치와 경험을 발전적으로 지양(Aufheben)하는 일입니다. 현실적으로는 1극중심의 패권주의적 세계질서를 청산하는 일과 현대자본주의의 파괴적인 구조를 청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새 천년의 미소는 바로 이러한 실천적 과제를 옳게 이루어 낼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미래입니다.

 

저는 작년 1년동안 세계여행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고민할 수 있는 세계의 50여 유적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느낀 소감을 책으로 출간하면서 그 제목을 '더불어 숲'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새 천년의 역사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나누어야 할 약속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돌! 이켜보면 인류의 장구한 역사에 있어서 언제나 간절하게 소망하였지만 단 한 번도 이룩되지 못한 소망이 바로 숲이 되지 못한 수많은 나무들의 좌절이라고 할 것입니다.

 

선량하고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억압과 모멸의 희생을 치러 온 것이 지난 역사의 실상입니다. 소수의 조직화된 집단에 의하여 그 본성과 자유를 구속당해온 역사였습! 니다. 개인의 경우든 도시의 경우든 지역의 경우든 국가의 경우든 우리는 그러한 역사를 살아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리엔털리즘을 넘어서

붓글씨를 쓸 때 만약 글자의 한 획(劃)이 비뚤어졌다면, 그 획을 지우고 다시 쓸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다음 획으로 그 비뚤어진 획을 교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한 글자가 비뚤어졌다면 그 글자를 다시 고쳐 쓸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다음 글자로 그 글자를 바로 세워보려 노력하게 됩니다. 한 행(行)의 잘못은 그 옆에 있는 행으로써 바로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한 장의 서도 작품은 획과 획, 글자와 글자, 행과 행이 서로 도우고 있습니다. 획과 글자와 행의 관계를 통하여 잘못이 극복되고 있는 작품이 됩니다.

 한 자 한 자가 반듯반듯하게 독립된 글자들로 이루어진 작품보다 부분은 균형을 잃고 있지만 전체는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작품을 더욱 격조 높은 것으로 평가합니다. 이것은 서도(書道)이상의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이것은 글씨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문명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한국의 미학이며 철학이며 마음입니다.

 삶이 영위되고 완성되는 곳도 인간관계속에서이며 사후에 남아 있는 곳도 인간관계속이라는 '관계론'이 한국의 마음입니다.

 주역(周易)은 세상의 수많은 현상들을 64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전형화(典型化)하고 있습니다. 이 64개의 카테고리를 해석하는 방법은 괘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64개의 괘 가운데서 지천태(地天泰 )를 가장 이상적인 괘라고 합니다. 이 괘가 가장 이상적인 이유는 지괘(地卦)와 천괘(天卦)가 서로 만나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뜻하는 천괘( )가 아래에 있고 땅을 뜻하는 지괘( )가 위에 있습니다. 도치(倒置)된 형태입니다. 그렇지만 하늘의 기운은 위를 향하고 땅의 기운은 아래를 향하기 때문에 이 괘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형태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이 이 괘를 가장 이상적인 괘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주역의 철학은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국의 가장 기본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 는 관계론입니다.

 

인도대륙을 종단하고 있는 갠지스강은 물의 흐름만을 보여주는 단순한 강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란 전생(前生)으로부터 흘러와서 이승에 머물다가 다시 저승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류하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며 나(Atman)와 우주(Brahman)를 일치시키는 무한한 윤회(輪廻)와 연기(緣起)를 생각하게 합니다. 갠지스강은 빛의 흐름이며 시간의 긴 띠입니다. 갠지스강은 나와 우주, 이승과 저승 그리고 삼라만상을 하나로 융화시키는 관계론입니다.

 생명은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계성의 총체입니다. 생명의 본질인 신진대사(新陳代謝)는 생명이 독립된 완결구조가 아니라 외부의 물질 및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는 열려있는 체계임을 보여줍니다. 자기복제(自己複製)도 마 찬가지입니다. 자기(自己)가 자기 아닌 비자기(非自

己)를 만들어내는 지점에 생명이 있습니다. 진화(進化) 역시 생명과 환경의 열려 있는 관계입니다. 생명은 곧 관계성의 총체입니다.

 

20세기이래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은 지금까지의 물질관과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전자(電子) 광자(光子) 중성미자(中性微子) 소립자(素粒子) 등의 미시세계는 물질의 근본적인 실체를 개체가 아닌 관계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물질성 그 자체가 물질적인 존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상태는 정신적인 상태를 변화시키는 운동을 하고 반대로 정신적인 상태는 물리적인 상태를 변화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대상과 주체의 관계를 통하여 물질세계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음을 승인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 일체의 존재를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고 관계 속으로부터 존재를 이끌어내려는 가설체계가 현대원자물리학의 첨단을 점하고 있습니다.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있는 현재의 시점은 근대사회 이후에 세계의 다양한 사고와 정서를 단색적으로 도장해온 '존재론'에 관한 근본적인 반성의 시점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반성을 기초로 한 관계론에 대한 각성의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론은 분(分)과 석(析)을 세계인식의 방법론으로 하고 있습니다. 분과 석에 의하여 이끌어낸 개별적 실체를 세계의 절대적 실존으로 규정합니다. 자유와 인권과 진보마저도 개별성과 독자성의 범주속으로 환원시킵니다. 과거 천년동안의 철학은 이러한 존재론의 역사였습니다. 개인, 회사, 국가 등 모든 단위의 운동원리는 기본적으로 존재론이었습니다. 경쟁력 있는 존재, 강철처럼 무겁고 강한 존재로 키워가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존재론이 대자본주의 제도의 기본적인 철학적 패러다임이며 동시에 현대자본주의의 기본적인 모순입니다.

 

21세기와 새로운 천년의 과제는 존재론을 관계론으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이러한 작업에는 관계함 자체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관계하는 주체간에 공유되어야 할 최소한의 조건을 합의하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최소한의 기본적인 조건은 관계주체들간의 관계가 대등(對等)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사자간의 관계가 불평등할 경우에는 관계 그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관계의 변질과 파괴는 불평등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불평등한 관계는 궁극적으로 흡수입니다. 불평등을 승인하는 것은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패권주의입니다. 그런 점에서 관계에 있어서 최소한의 조건은 평등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개별적 존재란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이며 평등개념에 담긴 존재론적 관점을 반성하는 일입니다.

 

존재론과 자본주의

한국은 현재 IMF관리를 받는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경제가 동일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비단 아시아지역이나 제3세계의 경제뿐만 아니라 유럽경제 역시 실업문제라는 현상형태로 나타나고 있을 뿐 경제적 위기는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유일한 패권국인 미국의 경제 역시 이러한 위기가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세계경제의 위기는 자본주의경제 그 자체의 구조적 문제입니다. 이러한 경제현상은 역사적으로 자본주의경제에서만 나타난 자본주의 고유의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구조적 실상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서양의학의 대증요법(對症療法)처럼 개별적 증상에 매달리는 노력의 낭비를 거듭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엽적이고 단편적인 관! 심을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 바꾸는 사고의 전환을 하지 않는 한 거대한 인적 물적 파괴를 반복해 온 지금까지의 자본주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경제의 위기는 현대자본주의의 모순에서 그 원인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순의 핵심은 자본축적운동의 원리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부단히 강화하려는 자기증식의 존재론적 원리입니다. 경쟁하고 승부 하는 관계, 다른 것들의 희생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신장해 가는 존재론적인 구조와 운동원리입니다.

 자본주의의 존재론이 야기하는 모순 가운데에서 경제문제는 오히려 작은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모순은 인간관계의 파괴에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파괴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격리의 구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격리의 구조는 '상품'과 최고의 상품으로서의 '화폐'에 의하여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상품생산과 화폐제도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인간관계가 상품과 상품의 관계로 대치되는 물신성(物神性)이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입니다. 인간관계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구조이며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존재론적 구조입니다.

 

관계론의 전제

존재론적 삶의 구조를 청산하고 관계론적 삶의 틀을 전망하고 모색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환상의 청산입니다. 자본주의의 역사가 풍요의 역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필요합니다. 자본주의의 풍요는 특정 대륙, 특정 국가, 특정 기업, 특정 계층의 풍요입니다. 부분(部分)의 성격입니다. 풍요에 대한 시각자체가 존재론적인 것입니다. 세계체제라면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등 수많은 변방의 빈곤까지 당연히 포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미국의 기아인구가 3천만이라는 사실도 기억을 해야 합니다. 인류가 공적(公敵)으로 삼아 온 '빅 5(Big five)' 즉 빈곤, 질병, 무지, 오염, 부패(범죄)가 더욱 심화되어 왔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우려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자본주의와 풍요에 대한 지금까지의 환상을 청산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로, '도로(道路)'와 '길'에 대한 생각입니다. '도로'를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의미로 규정하고 반대로 '길'은 과정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개념으로 구별한다면 도로는 그 길이가 제로가 되는 것이 그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길의 경우는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그것이 짧을수록 좋은 것은 아닙니다. 대개 빠른 성장은 빠른 몰락을 가져옵니다. 꽃이건 나무건 동물이건 세상에 가장 흔한 이치가 바로 '빠른 성장과 빠른 몰락'입니다. 암세포가 세포 중 가장 빠르게 성장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까지 ! 우리가 살았던 여러 가지 사회체제 중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빨리 성장한 체제입니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200년이 채 못됩니다. '빠른 성장과 빠른 몰락'이라는 자연계의 흔한 이치가 사회제도의 경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효율성과 전문성에 대한 우리시대의 우상도 사실은 인간의 논리가 아닌 자본의 논리라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과 생명의 논리가 아닌 비정한 자본의 존재론이라는 사실이 아울러 반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속도에 대한 반성은 곧 존재론에 대한 반성입니다.

 세 번째로 미완성(未完成)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이해입니다. 주역 64괘의 맨 마지막 괘는 미완성 괘입니다. 미완성이 모든 사물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형태라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경험의 결론입니다. 미완성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며 지금까지의 과정을 반성하는 지점입니다. 미완성은 끊임없는 계속입니다. 그러므로 목표에 빨리 도달하려는 의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없다면 남는 것은 과정의 연속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상(思想)은 따뜻한 가슴(Warm Heart)'이라는 명제에 대한 이해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사상은 냉철한 이성(Cool Head)이라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상은 따뜻한 가슴이라는 주장은 서구의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적 견해와는 반대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에 담긴 존재론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내가 만난 훌륭한 일의 명인(名人)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마음(Heart)이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손(Hand)의 소유자라기보다는 훌륭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입니다. 그 분들은 자기의 옆에 무엇이든 비뚤어져 있거나 덜 된 일이 있으면 우선 마음이 불편해 합니다. 이 불편해 하는 마음은 대상을 대상화(對象化)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망(關係網 )속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존재론적인 문화를 극복하는 관계론적 철학은 바로 따뜻한 가슴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1세기의 실크로드

생명과 물질의 본질이 존재가 아닌 관계인 것과 마찬가지로 문명의 내용도 존재론적인 형태로 존재할 때 이미 반문명적인 것으로 전락합니다. 로마제국의 역사가 그러하며 통일국가 진(秦)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하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생명, 물질, 개인, 집단, 국가, 문명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체가 서로 관계하는 방식에 따라 그것의 본질이 규정되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어떠한 통로로 연결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통(疏通)하는 '길'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이스탄불은 동서무역로(東西貿易路)인 실크로드의 종착지입니다. 나는 이스탄불에서 다음과 같은 엽서를 띄웠습니다. "우리들은 저마다 자기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기에게 없는 것, 자기와 다른 것들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이 곳 이스탄불에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다만 이러한 내면의 애정이 관용(寬容)과 화해(和諧)로 개화할 수 없었던 까닭은

지금까지의 인류사가 달려온 험난한 도정(道程)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물론 자기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도 없이 가파른 도정(道程)을 숨가쁘게 달려왔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동과 서를 연결하였던 실크로드의 역사는 지금도 터키에 매우 유연한 문화를 남겨놓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소외와 환경파괴 등 급속한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의 어두운 전철을 밟! 지 않기 위하여 '인간중심의 경제건설'이라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실크로드의 역사를 이어받아 이제는 새로운 동과 서, 즉 정신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연결하려는 21세기의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실크로드는 소통의 길에 대한 매우 귀중한 교훈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실크로드는 이름 그대로 비단길(Silk Road)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소통의 길은 그 바닥이 비단(Silk)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강철(Steel)의 길이 아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전차(戰車)가 달리고 창칼이 달리는 침략과 방어의 포도(Paved Road)가 아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실크로드는 일방로(一方路)가 아니라 양방로(兩方路)였다는 사실입니다. 일방로는 모방의 길이며 단색(單色)의 길입니다. 창조의 공간이 아니며 결국 종속의 길로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는 실크로드는 문(文)과 물(物)이 함께 교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의 교류보다는 문의 교류가 중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국제적 불평등은 주로 경제교류에 의하여 구조화된 것입니다. 경제교류는 항상 손익(損益)을 가운데 두고 벌이는 물질적 가치의 교환을 속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오늘날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금융자본의 교류 속에는 단 한 줌의 문(文)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강철의 도로를 비단길로 바꾸는 것은 관계론적 소통구조(疏通構造)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에 대한 애정에 솔직하고 상대방을 배우려는 관용에 충실할 때 이 강철의 길이 진정한 비단의 길로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하여 교류되는 것은 모름지기 상품의 형태를 띠지 않는 문화교류이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경제교류의 첨병(尖兵)이 아닌 순수한 문화의 교류이어야 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경주의 얼굴

20세기를 달려온 기차가 바야흐로 21세기를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기존의 레일 위를 그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관사도 열차에 타고 있는 승객들도 아무도 다른 길을 주장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상당기간 무심한 낭비를 계속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6촌장이 임금을 추대하는 건국의 설화가 그렇고, 화백제도가 비록 귀족연합의 좁은 테두리내의 합의제라는 한계는 있지만 그러한 제도의 민주적인 의사수렴과정에서도 관계론적 구조를 충분히 확인하게 합니다. 천년의 역사를 통하여 세습왕조가 아닌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이 고루 임금이 되었으며 더구나 3명의 여왕이 있었다는 사실도 같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유(儒) 불佛) 도(道) 3교를 포용하고 있는 사상의 폭(幅)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은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가 관계론적인 토대 위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러한 동안에 신라는 통일의 과업과 찬란한 문화적 성취를 이룩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통일신라가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의 존재론을 포용하지 못할 때, 골품제가 사회적 관계를 조화하는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즉 관계론적 구조로부터 존재론적인 구조로 전락됨과 함께 신라사회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신라하대 150년이 보여준 족당(族黨)과 지방호족(地方豪族)들의 등장이 그것을 단적으로 입증합니다. 족당과 지방호족들이 토지를 겸병하여 농장을 확대하고 군진(軍鎭! )을 설치하여 각각의 존재를 강화하는 과정의 끝에서 신라는 멸망합니다. 경주에서 돌이켜보는 신라의 역사는 이처럼 많은 시사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관계론의 사회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동안에는 그 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었던 반면 존재론적인 분열이 결국 나라의 멸망으로 귀착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경주는 실로 관계론의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도시에서는 결코 쉽게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사찰, 궁궐, 능묘, 일반가옥 등이 한 도시내에 흔연히 어우러져 있습니다. 통일신라의 경주의 역사는 우리에게 관계론과 존재론을 반성케하는 수많은 역사와 유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찬란한 불교문화는 이승과 저승, 생과 사를 시각과 청각을 통하여 동시에 확인하게 하는 문화를 담고 있습니다. 경주는 관계론의 문화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주의 천년 문화는 존재론과 관계론의 사례를 눈앞에 선명하게 대비시켜주고 있습니다.

 첫째 남산의 관계론과 왕릉의 존재론이 보여주는 대비(對比)입니다. 남산은 수많은 계곡들마다 기암괴석들과 탑과 미륵불이 혼연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민중적 관계론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정연한 질서와 규격으로 존엄을 과시하는 왕릉은 존재론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다보탑의 관계론과 석가탑의 존재론입니다. 다보탑은 수많은 단(壇)과 주(柱), 방(方)과 원(圓)), 직(直)과 곡(曲), 매란국죽(梅蘭菊竹)등 변화와 조화로 일체가 된 관계론의 미학임에 반하여 석가탑은 단 한 개의 조각 없이 직선의 조립에 의한 엄숙함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존재론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주는 이 모든 메시지를 은은한 종소리로 만들어 우리의 가슴속에 주입(注入)합니다. 인드라! 천(天)의 구슬처럼 모든 구슬이 모든 구슬을 비추고 있다는 자각에 허심탄회하게 합니다.

이러한 자각은 우리가 지금까지 달려온 천년의 역사를 돌이켜 보게 하고 앞으로 맞이할 천년을 바라보게 합니다.

 

존재론의 역사를 관계론의 역사로 바꾸는 일. 이것은 인류사 수천년래의 숙제입니다. 뿔뿔이 흩어진 나무들이 더불어 숲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 마음이 선량하고 그 수가 절대적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숲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연약할 수밖에 없고 연약하기 때문에 억압과 종속의 역사를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수천년래의 숙제입니다.

나무와 나무들이 더불어 숲이 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과거의 역사가 이를 증거 합니다. 그러나 감히 강한 존재들이 추구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희망입니다. 그것이 경주가 보여주는 새 천년의 미소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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