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스스로 부과한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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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18-08-28
미디어 중앙일보 김기협
 
매주 신영복 선생의 글 한 구절씩 번역하는 것이 퇴각로에 접어들어 하게 된 일의 하나다. 신 선생의 가르침을 받드는 사람들의 모임 '더불어숲'에서 매주 발송하는 소식지에 한 구절씩 뽑아 보내는데, 그것을 번역하는 것이다. 작년 봄 시작해서 한참 혼자 하고 있다가, 한 번 모임에 찾아가 그 사실을 알리니 여러분이 반가워하며 함께 일할 것을 청했다. 뽑은 글을 미리 내게 보내주고 내가 번역을 해 보내면 소식지에 번역도 함께 붙여 발송하게 되었다.  
 
학문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능력과 업적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기 쉽다. 뭐든 의심하고 비판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생겨난 일종의 직업병이다. 나도 천성이 그리 오만한 사람은 아닌데, 학문을 직업으로 하다 보니 훌륭한 상대를 마주쳐도 쉽게 승복하기 힘든 병폐를 갖게 되었다.
 
그런 병폐를 가진 사람이 신 선생 글에서 가르침을 얻으려고 열심히 읽는 데 그치지 않고 돈 안 되는 번역까지 하고 있게 된 것은 공교로운 인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오랫동안 좋아 하면서도 그 가치에 큰 신뢰를 두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다 그 장례식에 갔을 때 어느 장면에서 그의 성실성에 새로운 차원의 믿음을 일으키게 되었다.
 
2014년 5월 어느 날 유시민 선생을 파주출판도시의 서재로 찾아갔다가 점심 후 커피 마시러 돌베개 카페에 갔다. 피차 돌베개 단골 필자인데 마침 그 날이 카페 개점일이었다. 어느 신사 분을 모시고 앉아 있는 한철희 사장과 마주쳐 인사를 나누고 옆의 빈자리에 앉았는데, 유 선생은 신사 분과도 아는 사이인 듯 그 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곧 건너오려니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시 후 유 선생이 내게 건너오라고 부른다. 그리고는 신사 분께 인사를 시키며 “신영복 선생님과 면식이 없으셨던가요?” 한다.
 
그러고 보니 10여 년 전 중앙일보에서 문화전문위원 할 때 '엽서' 연재를 앞두고 이근성 문화에디터와 함께 만났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본 듯한 얼굴이었구나. 신 선생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더러 김 선생 글 보면서도 만난 일 있는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유 선생과 볼일도 따로 없었으므로 그냥 함께 앉아서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이야기 중에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신 선생의 한 마디가 있었다. “우리 집사람이 김 선생 글을 무척 좋아합니다.” 이게 뭐야? 부인만 좋아하고 당신은 안 좋아한다는 거야?
 
그리고는 다시 마주치는 일 없이 지내다가 타계 소식에 접했다. 애도하는 마음이 일어나도 문상하러 몸을 움직이는 일이 좀체 없는데, 이 또한 공교롭게 마침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내게 찾아왔다가 신 선생 빈소 가는 길이라고 하기에 함께 갈 마음이 일어났다.
 
영정 앞에 꽃을 올리고 우향우, 유족들 앞으로 나아가는데 부인이 아드님에게 일러주는 나직한 말씀이 들렸다.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님이시다.” 나오면서 2년 전의 신 선생 말씀이 생각났다. 부인이 내 글을 무척 좋아한다고 하더니 빈 말씀이 아니었구나. 면식 없는 사람 알아보는 걸 보면.
 
그 일을 계기로 신 선생 글을 다시 읽어볼 마음이 들었다. 전에 읽을 때는 취향에 많이 공감하면서도 주관과 비약 때문에 편안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목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초면의 사람에게 인사치레로 건네는 한 마디조차 빈 말씀을 못하는 분 아니었던가. 이렇게까지 빈 말씀을 못하는 분이라면 자기 생각을 적는 데도 스스로 믿음 없는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늘어놓는 일이 없었으리라고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렇게 신 선생 글을 다시 보기 시작할 무렵이 마침 퇴각로에 접어들 때였다. 교수직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정년 퇴직을 할 시점에서 ‘공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신 선생 글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 글도 생각나는 대로 다시 찾아 새로운 자세로 읽어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해온 번역이란 일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돈벌이로서 번역을 대학생 때 시작해서 50년이 된다. 특히 교수직을 떠난 후 번역을 많이 했다. 내게는 썩 쉬운 일이고 내 글 쓰기보다 수입이 안정적이다. 그리고 문명교섭사를 공부하는 내게는 ‘교섭’의 뜻을 되새기는 의미도 있는 일이다.
 
10년 전 본격적 저술 활동을 시작하면서 번역 일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자세의 글 읽기를 시작하면서 한국의 글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이 생각났다. 옛날 학인(學人)들은 주석(註釋) 작업을 통해 ‘깊이 읽기’를 했는데, 오늘의 학인에게는 번역이 그런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번역이란 외국어에서 모국어로 옮기는 편이 반대 방향보다 효과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글 중 옮길 가치 있는 것을 고르는 일은 외국인이 하기 어렵다. 마침 한강 작가의 작품이 해외에서 주목을 끄는 소식을 들으며, 한국의 글 중 번역 대상이 문학 작품에 치우쳐 온 사실이 생각났다. 논설이나 교양서 중 가치 있는 글을 골라 외국어로 옮기는 작업 같으면 내가 보람을 느낄 만한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여러 필자의 글을 놓고 번역 가능성을 가늠해 봤다. 그런데 내가 읽기에 좋은 글이라도 꼭 번역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 많은 글의 주제가 한국 사회의 맥락에 너무 깊이 파묻혀 있어 외국 독자에게 권하기 어렵게 보였다. 신영복 선생의 글이 비교적 옮김직해 보이는 것은 어느 외국 독자라도 관심을 가질 보편적 주제를 많이 다뤘기 때문이다. 생각을 한창 키워낼 세월 20년 동안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조차 배제된 위치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보편적 주제를 많이 떠올리며 살아오게 된 것 아닐지.
 
신 선생 글을 옮길 생각을 하고 제일 먼저 떠올린 책은 『강의』(2004, 돌베개)와 『담론』(2015, 돌베개)이었다. 중국 고전과 사상을 다룬 그 책들이 나 같은 번역자에게 적합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번역을 시도하려니 그게 아니었다. 신 선생 자신의 생각이 가득 들어있고, 그중에는 내게 소화되지 않는 것이 많았다. 나 혼자 읽으며 생각을 굴려볼 수는 있어도, 어떤 언어로든 다른 독자들에게 내가 상을 차려줄 수는 없었다.

 
이 양반 글을 번역하려면 문자만 바꿔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공부와 생각을 통째로 파악한 뒤에 그가 내놓고자 한 뜻을 내 언어로 표출해야 한다. 옮기는 글이 아니라 내가 대신 써주는 글이 되어야 한다.
 
그러다 '더불어숲' 소식지의 발췌문에 눈길이 갔다. 짧은 글에 담긴 뜻을 파악해서 내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가능할지 해보고 싶었다. 해보니 생각보다는 괜찮게 되기에 18개월째 매주 숙제처럼 해오고 있다.
 
퇴각로에서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전처럼 무슨 일에서든 ‘성과’를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책 한 권 만들 전망이 세워지지 않는 작업에 이렇게 매달려 있을 수 없다. 내 손으로 뭐든 이뤄내려는 집착 없이, 내 최선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역량과 의지를 가진 다른 학인들에게 자극을 주고 발판을 마련해준다는 것이 퇴각의 자세다.
 
매주 초 좋은 번역문을 뽑아내려고 애쓰는 몇 시간이 일상 속에 자리 잡았다. 내 생각에만 매달리지 않고 다른 이와 공유하는 생각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마음의 균형을 잡는 작업이다. 앞으로 차츰 다른 필자의 글도 모시며 늘리고 싶은 시간이다. 이번 주 제출한 숙제를 이곳 독자들에게도 보여드린다.
 
I read in many passages of 〈Meng-zi〉the personality of the author. One of my favorite passages is: "One who has seen the ocean cannot talk easily about water."[觀於海者難爲水] It means that, when a man holds the big picture in sight, he cannot take in any of the details in a casual way. Both the depth and style of Meng-zi's thoughts can be perceived from these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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