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과 성찰 - 신영복, [한국의 명강의](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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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09-08-01
미디어 한국의 명강의_마음의숲_ 2009_ 9~12면.
인식과 성찰

                                                                        신영복

 

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제가 사회인식을 설명하면서 고전 강독을 해 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전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미래에 관한 전망을 하자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근대적 가치에 대한 재조명은 근대사회를 부단히 성찰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성찰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최고의 인식이라 생각합니다.

인식과 성찰을 이야기함에 있어 제가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일화 하나가 이에 맞닿아 있는 것 같아 읊어보겠습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뿐인 감옥에서, 소일거리 삼아 가장 빨리 달리는 20대 청년과 가장 느린 50대 노인의 경주가 열렸습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실험한 게 아니라 청년은 한 발로, 노년은 두 발로 뛰는 승부였습니다. 과연 누가 이겼을까요? 결과는 초라한 50대가 팔팔한 20대를 거뜬히 이겼습니다. 우김질 끝에 장난삼아 해 본 경주라 망정이지, 정말 다리가 하나뿐인 불구자의 패배였다면 그 침통함을 형언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 우스운 경주를 보면서 뜻밖에도 한 발 걸음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나아가 이론과 실천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삶이 바로 한 발 걸음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옥살이에서 느낀 가장 큰 불편함이 바로 실천의 부재였습니다. 노역은 있되 사회적 실천이 배제된 공간에서 아무리 좋은 책을 읽고 많은 이론을 안들 쓸모가 없었습니다. 지식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자각이 든 후 제가 처음 ‘목발’로 삼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즉 ‘과거의 실천’이었습니다. 인식이라는 생다리에 과거의 삶을 목발로 삼은 것이죠. 그 목발을 얻기 위해 그들 속에서 부단히 부딪치며 관계를 쌓아갔습니다.

인간관계란 철저한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 할 말을 다 하게 하는 위치에 앉혀 놓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를 소리없이 사라져가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죽을 때 죽더라도 할 말은 다 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죠.

갇힌 공간에서 저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안에서 저처럼 많은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관계가 싹트고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변화되어 갑니다. 이렇게 타인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관계 맺음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자기발전의 과정이라고 봅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본질이나 사고의 틀이 바뀌려면 엄청난 산고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힘겨운 자기 개조는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관계 없이 자신의 관념으로만 변화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요.

맨 처음 감옥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과 어울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러워지는 데 근 5년이 걸렸죠.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임을 뼈저리게 느꼈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에게 큰 스승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경험을 저의 목발로 삼았을 때 처음에는 뒤뚱거리고 넘어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목발에 손때가 묻으면서 놀랍게도 목발이 생다리를 닮아 가는 게 아니라 생다리가 목발을 닮아 갔습니다. 투박하고 불편해서 제 발 같지 않았던 목발이 오히려 나중에는 삶의 준거가 되었습니다.

관념과 인식의 세계를 뜻하는 ‘생다리’는 언뜻 보기에는 ‘목발’로 상징되는 투박한 실천의 힘보다 우월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아무리 관념의 세계가 깊고 지식이 넓어도, 실천의 힘이 없다면 죽은 지식에 불과합니다.

삶도 마찬가지라 봅니다. 자신의 삶이 바로 이 한 발 걸음임을 인식하고 타인의 삶과 경험으로 두 발 걸음을 완성하는 것이, 자신을 보다 발전시키고 완성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실천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있고, 일거리가 있는 곳엔 어디든 실천의 자리가 있습니다.

자기를 가두는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성 밖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 곧 성찰이며 성장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잊지 말고, 늘 처음처럼 열심히 관계를 맺어 자기 성장의 기회로 삼길 바랍니다.

 

- 신영복 외, [한국의 명강의], 마음의숲, 2009, 9~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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