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만은 잃지 마라”- 손잡고더불어. 돌베개.2017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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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16-01-22
미디어 한겨레 '이진순의 열림'

신영복 교수 녹취록 다시 보니…“청년시절만은 잃지 마라”



[토요판] 커버스토리 / 이진순의 열림, 신영복

이진순이 만난 신영복 선생
지난해 5월 못다 쓴 이야기
<한겨레> 토요판은 지난해 4월24일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와 ‘이진순의 열림’ 인터뷰(▶‘담론’ 펴낸 신영복 “소소한 기쁨이 때론 큰 아픔을 견디게 해줘요”)를 진행했다. 당시 인터뷰어였던 이진순(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씨가 녹취록을 뒤져 기사에 못 담았던 이야기를 보내왔다. 그동안 언론 인터뷰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개인적인 바람, 수형생활 동안 가족들이 겪었던 고통, 사회운동과 거리를 두게 된 이유, 진보진영에 보내는 당부 등 시대의 지성을 넘어 인간 신영복의 모습이 담겨 있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과 청년들이 늘 희망의 메타포였던 선생은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일생에서 청년 시절이 갖는 의미는 막강하다. 당장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조언은 못하지만 적어도 청년 시절은 잃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날 선생은 암투병중인 환자답지 않게 안색은 맑았지만 집 밖으로 나가서 사진 촬영을 하는 건 힘겨워했다고 한다. 가난한 아이들과의 우정을 그린 ‘청구회 추억’이라는 글에서 “언젠가 먼 훗날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던 선생은 육신의 고통과 이승의 근심을 벗고 길고 긴 산책을 떠났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진보, 정말 우리부터 잘해야 합니다”

지난해 4월 신영복 선생의 목동 자택을 찾아간 날, 봄볕이 투명하고 따스했다. 물오른 신록의 이파리를 투과한 연둣빛 햇살이 거실 창으로 환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화사한 봄 햇살 때문일까, 선생은 투병중인 환자답지 않게 안색이 맑아 보였다. 피부암이 여러 군데로 전이되어 한차례 혹독한 위기를 겪었는데, 임상실험중인 표적치료제를 투약한 뒤 상당히 진정된 상태라고 했다.

‘힘들면 언제든 인터뷰를 중단하셔도 좋다’고 말씀드렸지만, 선생은 끝까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두 시간 동안 차분하게 내 질문에 응하셨다. 그래서 정말 괜찮으신 줄 알았다. 곧 털고 일어나실 줄 알았다. 암은 파란만장한 그분 생에서 이렇게 지나가는, 또 한 번의 시련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내가 어리석었다.

그분이 떠나신 뒤, 추억의 앨범을 뒤지듯 그날의 인터뷰 녹취록을 꺼내 찬찬히 읽고 또 읽었다. 많은 이들이 우러르는 시대의 지성, 당대의 스승이기에 앞서, 자신의 불민함을 직시하고 자기 안의 틀을 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인간 신영복의 뒷모습이 거기 있었다. 지난 기사에서 못다 한 그분의 이야기를 뒤늦게 옮겨 적는다.

지난해 4월 서울 목동 자택 인근에서 만난 고 신영복 선생의 모습. 선생은 이때만 해도 임상실험중인 신약을 투약한 뒤 병세가 상당히 진정된 상태였다. ‘힘들면 언제든 인터뷰를 중단해도 좋다’고 했지만, 선생은 끝까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차분히 인터뷰에 응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해 4월 서울 목동 자택 인근에서 만난 고 신영복 선생의 모습. 선생은 이때만 해도 임상실험중인 신약을 투약한 뒤 병세가 상당히 진정된 상태였다. ‘힘들면 언제든 인터뷰를 중단해도 좋다’고 했지만, 선생은 끝까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차분히 인터뷰에 응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생각을 정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큰 병에 걸리면 삶을 다시 보게 된다고 하던데요.

“그렇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본인이 겪는 질병이나… 그런 계기가 되는데, 전 그런 경우가 참 많았어요.”

-아! 그렇죠. 사형선고를 받은 게 만 27살이니….

“이번에도 (암 선고 후 투병 과정을) 겪으면서 대단히 익숙한 기시감 같은 게 있었어요. 그래서인가, 주변 분들보다 비교적 담담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호전되신 모습 뵈니 좋습니다. 그간 많이 힘드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그동안 강의 자료들을 정리해서 이런 책(<담론>)도 만든 거죠. 새 약을 복용하고 난 뒤 건강이 훨씬 좋아져서 출판사에 원고를 도로 달라고 해서 교정을 한 번 더 봤습니다.(웃음)”

-처음엔 교정도 못 보고 원고를 넘길 만큼 위급하셨단 얘기군요. 이만하기 정말 다행입니다. 이번에 내신 책 <담론>의 부제가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고 되어 있어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게 정말 마지막 강의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을 때, 마음에 걸리거나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요?

“너무 늦게까지 강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오래 하셨다고요?

“너무 오래 했어요. 전 어려서부터 늘 누군가의 어떤 요구나 심부름을 하고 산다는 느낌이 많았어요. 어릴 땐 할아버지 심부름을 도맡아서 하고, 학생 땐 선생님 심부름… 그러다 우리가 60년대 소위 독서운동(통혁당 사건에 휘말리게 된 학회활동)을 시작할 때 그것도 무슨 심부름 같은, 해야 된다는 주변의 어떤 요구 때문에 한 거였고요. 출소 후에도 그렇고, 학교에서 일정하게 자기 공간 지키고 있을 때마저도요…. 그래서 아, 이제 핑계도 있으니까 강의도 그만하고, 얼마나 더 남았을지 모르지만 좀 편하게 자유롭게 있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강의 말고 주어진 시간 동안 꼭 하고 싶으셨던 건 뭔데요?

“특별히 없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요. 아무것도….”

그는 2006년 정년퇴임을 한 이후에도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대학 강의를 계속하고, 전국을 돌며 토크콘서트를 하고, 독자들과 만나고, 강연을 청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고, 그의 그림과 글씨를 원하는 이들의 요청에 답했다. 그가 암 진단을 받고 몸져눕기 직전인 2014년 가을까지도 그는 대학 강의를 쉬지 않았다.

-원고 교정을 다시 보셨다고 했는데, 애초에 담고 싶었던 얘기는 다 담으셨나요? 시간이 부족해서 못 담은 이야기는 없습니까?

“너무 많죠. 강의에 비해서 이 <담론>에서는 고전의 여러 예시문이나 그 내용들을 많이 취급하지 못했고요. 특히 뒷부분에서는 인간 문제를 다루는 얘기들, 특히 감옥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다 못 했어요. 어떤 분들은 그 시절 이야기를 좀 더 많이 소개해줄 수 없느냐고 요청하기도 합니다. 저도 고민을 좀 해봤는데, 생각을 정리한다는 건 더 많은 정보를 수평적으로 자꾸 플러스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수평적 사유를 자꾸 확장하기보다는 그걸 수직화해서 깊이있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게 필요한 거고, 그건 어차피 독자들 개인이 할 몫이겠죠.”

신영복 선생이 지난해 4월 서울 목동 자택에서 인터뷰어인 이진순(오른쪽)씨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지난 15일 세상을 떠난 선생의 유해는 성공회대 교정에 있는 나무에 뿌려질 예정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신영복 선생이 지난해 4월 서울 목동 자택에서 인터뷰어인 이진순(오른쪽)씨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지난 15일 세상을 떠난 선생의 유해는 성공회대 교정에 있는 나무에 뿌려질 예정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역모와 종북은 마법 같은 정치용어

-이번 책에는 선생님의 인간적 고백이 많이 들어갔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신영복’ 이름 석 자를 견고한 절제와 치열한 사유의 상징으로 떠올린단 말이죠. 그래서 존경하고 숭배하는 대상이긴 하지만 막상 함부로 어깨동무를 하긴 어려운 대상으로….

“허허허… 나를 가까이 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텐데요.”

-그래도 대부분의 독자는 ‘근본적으로 나하곤 노는 물이 다르실 거야’ 생각하지 않을까요? 선생님도 술 먹고 주정 부리거나 여자 때문에 잠 못 이루거나 그런 적 있으세요?

“그런 적 거의 없죠. 술 체질도 아니고요. 대학 다닐 때는 그냥 어울려서 먹기도 했는데, 그 후에 20년간 술을 연습할 기간도 없었고. 이후에도 체질에 잘 안 맞더라고요.”

-아, 좀 실망입니다. 전 선생님이 모범생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환상이길 바랐는데. 지금 보니 모범생 맞는 것 같네요.(웃음)

“아마 20년간 어려운 상황을 견뎠던 그런 내면의 자세 같은 것도 영향이 없지 않겠죠. 20년의 감옥이라는 게… 보통사람들이 들을 때는 좀 섬뜩할 거예요. 사실 내가 오랜 수형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과 만날 때는 저도 좀 당황스러워요. 이걸 내가 미리 얘기를 해야 되나? 안 했다가 나중에 그 사람이 알았을 때는 ‘그런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니!’ 하고 배신감 같은 걸 느끼는 건 아닐까….”

-더구나 선생님은 소위 “간첩사건” 출신이라….

“그렇죠.”

-감옥에 있는 선생님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그건 엄청난 사회적 낙인이었을 텐데요. 가족들이 겪은 고초는 특별히 언급을 안 하신 것 같아요.

“힘들었죠. 감옥에서 편지를 쓸 때 형이나 동생의 이름을 피해서 형수, 계수한테 보냈던 것도 가족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했기 때문이에요. 사실 나를 가장 무거운 형벌에 처할 수 있는 게, 국가보안법 1조 2항인데, ‘반국가단체를 조직하고 그 지도적 임무에 종사했다’는 항목이에요. 내가 노동당 가입한 사람도 아니고, 학생 서클운동을 지도한 것밖에 없는데, 거기에 가장 혐오스러운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간첩’이라는…. 조선시대에도 노론 지배권력이 정치를 딱 한 개 아이템으로 해요. ‘역,모!’ 역모라고 하면 상당히 비판적인 개혁사림들도 잠잠해져요. 지금 우리에게 ‘종북’이 그런 거죠. 대단히 교조적인 사회의 연장선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북’이라고 하면 바로 조용해져요. 더 이상 논의가 진전이 안 돼요. 종북이 뭔지, 뭐가 나쁜지, 빨갱이가 대체 뭘 주장하는지,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가 뭔지, 그런 논의가 절대 없거든요. 그냥 한마디로 끝이에요. 더 이상의 논의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아주 마법 같은 정치용어가 역모, 종북, 이런 거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을 좋아하고 선생님 글을 즐겨 읽는 사람들의 폭은 굉장히 넓은 것 같아요. 워낙 깊이와 넓이, 스케일의 차이가 있어서 그렇겠지만.

“공감하는 좌우의 폭이 넓다고 하지만, 우파의 핵심적인 세력들은 바로 그 점에서 저를 굉장히 경계할 거예요. 자기 세력을 뺏긴다고 느끼기 때문에 더 위험시하고…. 여전히 제가 종북 좌파의 배후 같은 그런 강한 이미지로 보일 수도 있겠지요. 저도 그 부분을 일정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시민운동 하는 젊은 사람들이 좀 참여해 달라고 불러낼 때에도 저로선 굉장히 조심스럽죠.”

-88년 출소하셨을 때부터 일관되게 그런 자세를 유지하셨죠. 사회운동권과 일정 거리를 두고.

“네, 맞습니다.”

-88년 같은 시기는 지금보다 시민운동이나 민중운동이 훨씬 고양되어 있던 때라, 사회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선생님께 다양한 제안을 했을 것 같은데요.

“제가 출소해서 후배들 몇을 만났는데, 같은 공간에서 나하고만 얘기하지, 자기들끼리는 말을 안 해요.”

-아, 그 시절엔 노선 차이 때문에 인간적인 상처까지 주고받는 경우가 많았지요.

“민주화투쟁이 열어놓은 공간이 분명히 있었거든요. 여러 사회운동단체들이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거기서 많은 정파들이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더라고요. ‘무주공산에 자기네가 먼저 깃발 꽂으면 선점할 수 있겠다’ 하는 대단히 기회주의적인 사고로…. 막강한 보수구조에 참담하게 패배했죠. 그래 놓고 패배를 합리화하는 데 난 아주 경악했어요. ‘아직은 시기상조다’ 하면서. 합의해서 역량을 모을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서, 자기들의 기회주의에 대한 통렬한 반성 대신, ‘아직은 시기가 아니다’라니… 이딴 얘기가 어딨어? 근데 그걸 또 비슷한 사람들이 쉽게 동의를 하네. ‘아, 얘들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제가 일찌감치 했어요.”


   “어릴 땐 할아버지 심부름
   학생 땐 선생님 심부름
   60년대엔 소위 독서운동 심부름
   아, 이제 (아프단) 핑계 있으니
   좀 편하게 있는 것도 좋지 않을까”

   “청년시절 꿈과 이상 불태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차이는 엄청나요
   제가 젊은이들에게 당장 역경을
   헤쳐갈 조언을 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건 잃지 마시라”


“우리 집안엔 ‘선생 DNA’가 있어”

-그래서 대학으로 가신 건가요?

“미리 계획해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특별한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단계적으로 시작할 만큼 계획적이지도 않고요. 세상 삶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하다가, 하다가 물처럼 흘러가는 거지.”

-여러가지 길 중에서 교수직을 맡게 되신 이유가 있나요?

“옛날부터(통혁당으로 체포되기 전 육사 교관으로 일할 때부터) 하던 일이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우리 집안에 ‘선생 디엔에이(DNA)’가 있는지도 몰라요.(웃음) 할아버님, 아버님, 다 그런 경향이 있었으니까.”

그의 조부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후학을 가르친 시골 선비였고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다.

-그 유전자가 아드님한테도 이어지나요?

“허허허… 뭔가를 설명하는 걸 아주 잘하는 것 같아요. 공부도 좋아하고.”

-지금 대학원 다니지요? 주변 친구들 얘길 들으니 ‘반듯함의 상징’이라고 하던데요.(웃음) 선생님을 많이 닮았나요?

“내가 워낙 늦게 아들을 둬서(그는 출소 후 48살에 결혼해 49살에 외아들 지용씨를 얻었다) 아이와 오래 함께할 수 없다는 걸 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없어도 독립적으로 잘 살 수 있도록 자라는 동안 최대한 관여를 안 하려고 했죠. 고등학교도 제가 찾아보고 원하는 데로 가고 자기 전공도 그렇게 정했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에겐 아들뿐 아니라 자라나는 모든 아이들, 청년들이 늘 희망의 메타포다. 사형선고를 받고 육군 교도소 좁은 감방에서 죽음 같은 나날을 마주할 때, 서오릉에서 만난 ‘청구회’ 꼬마들과의 동화 같은 추억으로 마음의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요즘 청년세대들이 많이 힘듭니다.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없으세요?

“청년들은 정규직에 취업하더라도 5년을 머물기가 힘들고, 비정규직이 거의 상시화되어 있죠. 그래도 어떻게든 ‘청년시절만은 잃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일생에서 청년시절이 갖는 의미는 막강한 거거든요. 청년시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나요.”

-선생님의 청년시절은요?

“음. 그래도 우리에겐 외부로부터 억압이 없는 자유와 이상을 꿈꿨던 청년시절이 있었죠.”

-사형수가 되고 무기수가 되었는데도요?

“그런 청년시절이 없는 사람이 자수성가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건 실패한 인생이라고 난 생각해요. 내가 누구라고 사람을 거론하긴 어렵지만 그런 사람 많아요. 청년시절이 나중에 인생의 세속적 성공과 연결이 되든 안 되든, 꿈과 이상을 불태운 청년시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난 겁니다. 그래서 난 젊은 사람들에게 당장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조언은 못하지만 적어도 그건 잃지 마시라, 그런 얘기를 합니다.”


“진보의 질 추락했다는 거 인정해요
이명박, 박근혜 욕하면서 자위하고
자기 내부에서 강인한 진보성을
발견하는 건 소홀히 하거든요
정말 우리부터 잘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는 데
그 사람이 세속적 가치에서
뭘 이뤄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인생에 시대가 얼마나
들어와 있는가도 참 중요합니다”

더러는 그의 등 뒤에 침을 뱉고
악담을 퍼부었지만, 그는 담담한
미소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갔다
증오하는 자들의 증오에 물들지
않았느니 영원히 그의 승리다


비수 같은 시대가 삶을 조각낼지라도

-선생님은 <담론>에서, 음과 양, 화(和)와 동(同), 이론과 실천, 좌와 우가 원형 안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맞닿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양 세계는 서로 분절되는 것이 아니고 조화 속에서 서로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요. 근데 저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가장 큰 폐해 중의 하나가 진보의 질을 퇴보시킨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지양하고 조화를 이뤄야 할 파트너가 너무 격이 떨어져요. 이들이랑 조금만 다르면 자신이 진보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거든요.

“진보 자체가 이명박하고 같이 타락했다는 얘기죠? 하하하, 맞습니다. 그런 면이 없지 않아요.”

-선생님 강의나 책에서, 시민운동, 민중운동이 이렇게 개선되면 좋겠다고 꼬집는 부분이 있는데, 제가 볼 때는 너무 살살 꼬집으세요.(웃음) 따끔하게 아픈 맛이 잘 안 느껴집니다.

“저로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적 약자니까. 약자들에 대한 비판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공간에선 안 하는 게 좋아요. 우리끼리 있을 때 해야지. 저도 따로 만나면 여러가지 이야길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세요.

“진보의 질이 많이 추락했다는 거 인정합니다. 이명박, 박근혜 욕하는 걸로 자위하고 자기 내부에서 강인한 진보성을 발견하는 건 소홀히 하고 있거든요. 난 지금이 참 중요한 시기라고 봅니다. 흔히 ‘너나 잘해’ 하는 말이 있는데 정말 우리부터 잘해야 되는 시기거든요.”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요? ‘우리부터 잘하기’ 위해서.

“뭔가 개혁을 하려면 정치권력의 탈취가 가장 빠르다, 과거에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잖아요. 근데 20세기 최고로 가장 강력한 정치권력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나치 권력, 다른 하나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권력. 근데 이 두 개의 막강한 정치권력이 사회변혁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회를 진정으로 변화시키려면, 불가역적으로 그런 사회변화를 탄탄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새롭게 고민해야 합니다. 모든 사회변혁은 사상투쟁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대학이라는 공간공동체가 아니어도, 곳곳에 ‘작은 숲’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해요.”

-작은 숲이란 뭡니까?

“숲은 그냥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합이 아니에요. 작은 나무, 큰 나무, 늘 푸른 나무, 낙엽 지는 나무가 서로 거름도 하고 의지도 하면서 땅을 지키고 바람을 잠재우고 생명을 품어나갑니다. 요즘 ‘이렇게 사는 것도 사는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학이 그런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주지 못하니까 대학 바깥에서 만드는데, 그걸 또 장사꾼들이 금방 상품화해요. 그런 작은 단위를 진지화하고 역량화할 수 있는 아주 자유로운 사고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었다. 선생은 금식을 한 채로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가야 해서 같이 점심을 할 수 없다고 아쉬워하셨다.

-빨리 쾌차하셔서 말씀하신 일들 20년만 더 책임져주세요.(웃음) 끝으로 꼭 덧붙이고 싶은 말씀 있으십니까?

“음…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는 데 여러가지 기준이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이 세속적 가치에서 얼마나 뭘 이뤄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인생에 시대가 얼마나 들어와 있는가도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시대가 들어와 있다’는 게 뭡니까?

“그 시대를 정직하게 호흡하고, 시대의 아픔에 함께하는 삶,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날카로운 시대의 비수가 그의 삶을 조각낼 때에도 그는 시대를 기꺼이 심장에 품었다. 인간의 유한성과 불민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불완전한 것들의 총화가 빚어내는 역동적 조화를 그는 가슴 벅차게 희구했다. 더러는 그의 등 뒤에 침을 뱉고 악담을 퍼부었지만, 그는 담담한 미소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증오하는 자들의 증오에 물들지 않았으니 영원한 그의 승리다. 그의 유해는 화장 후 수목장으로 숲에 묻힐 거라 했다. 그는 여전히 ‘더불어숲’에 우리와 함께 있다.


녹취 함규원

▷▷그는 본디 붉은 경제학자였다

이진순
이진순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27532.html#csidxb6beba4e3b0460ea385b0f98e1cc4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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