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론] '자찬 묘지명'을 쓰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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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16-02-11
미디어 광주일보_이덕일

[이덕일의 '역사의 창'] '자찬 묘지명'을 쓰는 마음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에서 마재로 귀향한 지 4년 후에 ‘자찬 묘지명’(自撰 墓誌銘)을 지었다. 순조 22년(1822) 회갑 때였다. 일반적으로 남이 써 주는 묘지명을 스스로 지은 특이한 사례였다. 정약용은 ‘자찬 묘지명’에서 임오년(1762)에 태어난 자신이 다시 임오년(1822)을 만났다면서 “뭐로 보더라도 죄를 회개할 햇수다. 수습하여 결론을 맺고 한평생을 다시 돌이키고자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조의 죽음과 함께 정약용 일가의 운명도 급전직하로 몰락했다. 바로 위의 형 정약종은 천주교도란 이유로 사형당하고 정약용은 맏형 정약전과 함께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이런 세상은 도무지 끝날 기미가 없었다.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은 학문뿐이었다.

그래서 다산은 유배지에서 공부에 몰두했다. 공부는 그에게 단순한 피안의 언덕이 아니었다. 노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현실적으로 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사에서까지 패자가 될 수는 없다는 그의 승부수가 학문이었다. 그에게 집필은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는 그 자신과 시대의 진실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식들에게도 공부를 권했지만 과거 길이 막힌 자식들은 학문을 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실망한 그는 순조 2년(1802) 두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너희들이 마침내 배우지 않고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면 내가 쓴 저술과 편찬한 책들은 장차 누가 거두어 모아서 책으로 엮고 다듬고 교정을 하며 정리하겠느냐”라고 꾸짖었다. 이 꾸짖음이 범상치 않은 것은 “이 일을 이루지 못하면 내 책들은 끝내 세상에 전해지지 않을 것이고,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사헌부(司憲府)의 계문(啓文)과 옥안(獄案)에 기대어 나를 평가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장차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이란 지금으로 치면 검찰의 기소장과 법원의 판결문이란 뜻이다. 자식들이 자신의 학문을 정리해 놓지 않는다면, 즉 자신의 학문을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면 훗날 사람들은 자신을 박해했던 사람들의 시각으로 자신을 볼 것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에게 학문은 미래 세대에게 전하는 한 불우한 지식인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뜻밖에 환갑까지 맞이하자 스스로 ‘자찬묘지명’을 써서 지난 인생을 정리했던 것이다.

고종은 노론에 치우친 군주였지만 남인이었던 다산 정약용만은 높이 평가했다. 갑신정변 이듬해(1885) 고종은 정약용 저서의 필사를 명했다. 그래서 1885∼86년까지 어람본(御覽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만들어진다. 그의 사후 49년 만이다. 그런데 이 ‘여유당전서’에는 어떤 저작들이 의도적으로 누락되어 있다. 중형 정약전의 ‘선중씨(先仲氏) 묘지명’, ‘정헌 이가환 묘지명’ 등 정약용이 쓴 다른 사람들의 묘지명과 자신의 ‘자찬 묘지명’이었다.

사후 50년이 지났지만 그의 후손들은 여전히 묘지명의 내용들이 알려질 것을 두려워했다. 세상은 여전히 그가 자찬 묘지명을 비롯한 여러 ‘묘지명’에서 악당(惡黨)이라고 비판했던 노론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불우했던 지식인이 미래 시대에 걸었던 희망은 큰 성공을 거두어 그의 학문 세계는 ‘다산학’으로 불리는 거산이 되었다. 반면 그를 단죄했던 사헌부의 계문(啓文)과 옥안(獄案)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지난 1월 15일 신영복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성공회대학교의 빈소를 찾았다. 개인적인 인연은 없었지만 신영복 선생이 주관하던 인문학습원에서 강의를 하면서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었던 사이였다. 선생은 늘 온화한 표정 속에 확고한 역사적 관점을 갖고 있었다.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조문 행렬이 건물을 휘감으며 늘어서 있어서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신영복 선생은 ‘자찬 묘지명’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영결식에서 불려진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는 노래가 마치 묘지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비슷한 인생을 산 다산 정약용과 쇠귀 신영복, 지하에서라도 서로 알아보고 손을 맞잡았을 것만 같다.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광주일보  201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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