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론] 봉우리와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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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16-01-19
미디어 경향신문_송혁기

[송혁기의 책상물림] 봉우리와 바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줄까?”


이렇게 시작하는 김민기님의 ‘봉우리’는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등수에 들지 못해 절망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만든 노래라고 알고 있다. 그저 정상의 기쁨만을 바라보며 힘겹게 올랐지만, 막상 오르고 보면 더 높은 봉우리가 이어진다. 높음과 강함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인생에게 이 노래는, 봉우리가 아니라 바다를 말한다. “거기 부러진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이 노래를 들으며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떠올리곤 한다. 물은 높은 데로 오르려 하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어, 남들이 다 싫어하는 가장 낮은 데로만 흘러간다. 모두를 이롭게 해주면서도 공로를 드러내거나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 막히면 돌아가고 빈 곳은 채우며 흐르는 물, 다투지 않고 그저 담긴 그릇의 모양에 순응하는 물을 통해서 노자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도를 말하고자 했다. 낮은 데로만 흐르고 흐른 물이 결국 이르는 곳은, 바다다. 바다가 바다일 수 있는 이유는 가장 잘 낮추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유독 좋아하고 그렇게 사셨던 신영복 선생이 이 땅을 떠나셨다. 선생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는 이유로, 강자가 지배하는 구도에서 약자는 늘 다수라는 점을 드셨다.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에 단단한 것도 뚫을 수 있고, 다수가 가는 곳에 정의의 길이 생긴다고 여기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낮은 곳에서야말로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다고 하셨다. 낮음이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는 가르침을 새기는 데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바다’다”라는 선생의 말씀은, 가장 낮은 곳에 있을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바다처럼 사신 선생이 가신 곳도 바다일 것만 같다. ‘봉우리’의 노랫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 올 때는,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우리 인생에는, 또 이 세상에는 여전히 더 깊고 많은 아픔들이 닥칠 것이다. 그 아픔이 유난히 저며 올 때마다 바다를, 그리고 선생을 생각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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