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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16-01-18
미디어 경향신문- 정윤수

[정윤수의 오프사이드]

신영복 선생과 ‘더불어 축구’의 추억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은 처참하면서도 웅혼한 기록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출신 좋은 사람이 갑자기 외부적인 상황에 의해 특권을 상실하고 민중들과 더불어 생활을 하는 변화가 주어졌을 때에만 ‘완벽히’ 지각할 수 있다.”


무엇을 깨닫는단 말인가? 삶에 대하여, 고통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말이다. 지식인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인의 모습’으로 우호적으로 지낼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는 합치될 수 없는데, 다만 ‘더불어’ 생활하는 길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나는 책이나 사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것을 확신했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쓴다. 
.
다름 아닌 시베리아 유형지라는 ‘현실’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날카로운 통찰과 비범한 유머로 ‘죽음의 집’의 일상을 통해 삶의 본질을 들여다본다. 작은 새나 염소에 대한 죄수들의 감정들 또는 돌멩이라도 몇 개 모아 억지로 유희를 벌이는 장면에서 나는 삶의 엄숙함을 읽는다. 그 유형지에 축구공이 있었더라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마 당장 공을 찼을 것이다.


넬슨 만델라는 실제로 ‘죽음의 섬’에서 공을 찼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남단 케이프타운에서 12㎞쯤 떨어진 수용소 로벤섬. 이곳에서 만델라를 비롯한 죄수들은 축구를 했다. 간수들 몰래 옷가지를 뭉쳐 공으로 삼아 찼다. 폐쇄된 곳에서 희망 없는 낯빛으로 때로는 정치 노선에 따라 싸움박질하던 수감자들은 공 하나로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그 유명한 마카나 리그다. 1966년 마카나축구협회가 ‘창설’됐는데, 수감자가 무려 1400명이나 되었으므로 3개 리그까지 구성해 매주 정규 리그를 운영할 수 있었다. 1991년 감옥이 폐쇄될 때까지 FIFA의 리그 운영 규정을 지켜가며 20년 넘게 계속됐다. 만델라를 비롯한 정치범들과 죄수들은 말한다. “모든 것이 무뎌져도 우리에겐 축구가 있다.”


여기 또 하나의 기록이 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그리고 <담론>. 신영복 선생님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다.


<담론>에서 말씀하시기를, 그곳의 처음 생활은 ‘수많은 실패와 방황’이었다. 책 읽은 자의 몸에 배인 습성이 좀처럼 벗겨지지 못했다. “협소한 공간에서 몸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는 반목과 불신, 언쟁과 주먹다짐에 이르기까지 하루가 팔만대장경”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였던가. 그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서책 몇 권을 끼고 앉는 대신 선생님은 욕설과 악취가 뒤섞인 곳으로 스며들어갔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책이나 사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겪어내는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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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축구를 했다. ‘공부는 잘 못해도 운동이나 싸움은 잘하는’ 거칠게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 끼어 공을 찼고, 어느덧 잘 차게 되어서 미드필더가 되어 공수의 완급을 조절하고 정확하게 패스를 하는 선수가 되었다. 선생님은 교도소 리그의 ‘플레이메이커’로 경기 조율뿐만 아니라 점수 관리도 해야만 했다. 연거푸 패하게 되면 금세 운동장이 험악한 싸움터로 변하기 때문에 “세 번에 한 번 정도는 져 주기도 해야” 하는 리그였다.


어떤 형태의 내기도 금지된 곳이라서 공을 차다가 매를 맞거나 벌방에 갇히는 일도 많았다.


하루는 규정을 어겼다가 ‘빳다’를 맞게 되었다. 어린 죄수의 선의로 선생님은 가혹한 매질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는데 순간 그렇게 빠져나가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매를 자청하게 된다.


어린 죄수가 괜히 맞지 말고 들어가시라, 했으나 선생님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중에 물어봐라. 내가 매 얼마나 멋지게 잘 맞는지. 이래봬도 내가 남산을 거쳐서 온 몸이야.”


이윽고 매질이 시작되었는데, 첫 번째로 나선 이가 따로 있었다. 자청하여 나선 죄수는 ‘영웅적으로 투쟁’했다. 구구절절 변명도 늘어놓고 한 대 맞으면 바닥으로 데굴데굴 구르면서 어떻게든 간수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는 ‘빳다 10대’를 석 대로 줄이고는 장렬하게 쓰러졌다. 남은 사람들은 줄줄이 석 대씩 맞고 벌방으로 들어갔다.


이후, 선생님을 대하는 죄수들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이를 선생님은 <담론>에서 “노력이라기보다는 각성”이라고 썼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완벽한 지각”이다. 어떤 이는 이런 책에서 자신은 배운 게 없다고 했는데, 아마도 문자의 행렬만 읽었을 뿐, ‘더불어 생활’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거나 경멸해왔기 때문이리라. 말의 의미에 천착하고 그 뉘앙스에 민감했다고 나름 자부하는 문필가인데, 스스로 요설의 감옥을 만들어 자신을 가두었으니, 그 안에서라도 책 대신 공을 차면 한결 나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성공회대에서 매주 수요일 강의를 했다. 강의는 그 자체로 별개의 엄숙하고도 긴장된 시간이지만, 왜 하필 수요일이냐 하면, 3시부터 어김없이 공을 차기 때문이다. 덕분에 선생님과도 서너 해 공을 찼다. 정확한 지점으로 달려가서 가슴으로 공을 받아 발바닥으로 살며시 진정시키고 나서 정확한 지점으로 떠나보내던 모습이 생각난다.


듣기에 연말연시의 삭풍 탓인지 지난 두어 주 동안 운동장은 텅 비었다고 한다. 혹서기나 혹한기에도 공을 찼는데 드문 일이다. 한편, 선생님은 스스로 곡기를 끊는 용단으로 기품있게 이 세상과 작별하셨다.


한동안 그 작은 운동장은 텅 비어 너무도 황량하게 넓어 보일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노래패 ‘우리나라’의 강상구씨도 한때는 공을 찼다. 벌써 10년도 넘은 기억인데, 어느 날 공을 차다가 지쳐서 나오는데, ‘힘들지요?’ 하며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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