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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16-01-22
미디어 한겨레신문서해성_

[크리틱] 별의 동쪽, 신영복 / 서해성


마지막 선비가 죽었다. 스물일곱 해를 보통사람으로 살았고, 스무 해 스무 날을 귀양살이로, 다시 스물일곱 해를 글과 글씨와 그림으로 산 사람. 종이를 반으로 접은 양 잰 듯이 들어맞는 삶. 무력하다고 패배가 아님을 낮은 목소리로 일깨우곤 했던 무릎 휜 자들의 스승. 한 생애를 붓글씨 쓰듯 정갈하게 매무새 지어 먹물 묻지 않게 개어놓고 자리를 뜬 조선 마지막 유배 선비.


그가 떠났고 별의 동쪽 일대가 쓸쓸하게 비었다. 단 한 사람의 부재로 인간의 대지가 이토록 깊게 적요한 적은 없었다. 죽음마저 화선지에서 먹이 마르듯 하였다. 문득 길을 잃은 사람들은 그 말과 글씨와 그림 사이로 비틀거리면서 찾아와 침묵으로 울었다. 이것이 백성 민 민장이다.


저승길을 불러오기 위하여 스스로 열흘 곡기를 끊는 동안 그가 되뇐 세상 끝은 필시 처음을 돌아보는 일과 같았을 것이니. 처음처럼. 1월 열닷새 저녁, 이 땅에 희미하게 켜져 있던 그 성찰의 등불이 꺼졌다. 신영복. 무기수 신영복.


석과불식. 평소에 입초시에 자주 올렸듯, 씨 과일은 먹지 않는다. 씨앗 같은 말과 글씨와 그림을 남기고 홀연히 가버려서 나머지들은 이제 그의 부재를 끌어안고 여지없이 무기수가 되었다. 기한 없이 그를 그리워하고 또 씨앗을 틔우기 위해 그를 앓아야 하는 까닭이다.


분단을 사유물로 훔친 무도한 권력에 고통받는 자의 절제된 품위로 그는 오래도록 양심과 시대의 표상이었다. 그 기록이 스무 해 동안 옥담 너머로 부친 엽서 ‘사색’이다. 그날 이후 그 사색은 대중의 사색이 되었고, 그를 읽는 자는 기꺼이 가슴 제자를 마다하지 않았다.


읽는 자는 읽어서 죄인이었고 읽지 않은 자는 읽지 않아서 죄인이었다. 쉬운 글, 짧은 문장, 봉함엽서 한 장 종이에 뜻을 다 담는 엽서체는 문체이자 형식이었다. 이 서간체 유배문학은 그의 죽음과 함께 마지막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한글은 그를 만나 시각언어로서 거룩해졌다. 백성 민 자 민체는 휴먼 스타일보다는 피플 스타일이라고 불러야 옳으리라. 그는 옥에서 만난 잡범 개털들을 스승으로 얻어 지붕보다 먼저 기둥을, 기둥보다 먼저 주춧돌을 그려야 함을 깨친다. 민체는 거기서 발아하여 이윽고 두루 향기를 품게 되었다. 홍명희와 정인보에게서 배운 이구영과 우연히 옥방 동료가 된 건 글씨의 내력과 깊이를 아로새기게 했다.
그림은 글을 닮고 글씨가 사람을 배우고 내용이 그림을 좇도록 그는 시대의 어둠을 먹으로 갈아내 시서화 일체를 이루어냈으니 유배예술의 푸른 먹빛이었다. 엽서체, 민체가 익어가는 동안 세월은 그의 육신을 화선지로 삼았던 것일까. 살갗 안쪽으로 하필 검게 파고드는 흑색종이 침윤하였거늘 햇빛을 오래 못 받으면 걸리는 괴질이었다. 그 또한 유배의 고통과 또 망각과 화해하면서 남긴 기록들이었으리라.


말도 문을 닫아걸어야 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 있다. 귀로 눈물이 흘러나오는 날이 있다. 그런 날 슬픔이란 결코 언어의 외부로 누설되지 못한다. 그는 가고 유배지에는 젖은 귀만 남았다.


글자 이전에 점 하나로도 삶과 우주와 역사를 기리고자 했던 신영복. 죽어, 그는 서쪽이 아니라 별의 동쪽 끝으로 가서 새벽이 되었으리니. 머리맡에 깨어 있는 자로 모국어의 심지에 불을 올린 채. 행여 저승에도 이 유배 선비의 말과 글씨 획에 취하고자 하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한 줄 조사를 읊조리건대, 먹으로 붓으로 쓴 모든 글자들이 무릎 꿇어 당신과 여읩니다.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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