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론]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스승 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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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03-01-01
미디어 돌베개

|신영복 약전|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스승 신영복


- <신영복- 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01> (2003, 돌베개)
기획위원: 김윤태, 채호석, 김경원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양심적 지성으로서의 삶


1987년 6월 항쟁으로 분출한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던 무렵입니다. 1988년 8월 14일, 신영복 선생님은 이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88년 8·15 특별사면 조치로 가석방되어 풀려나신 것입니다. 정확하게 20년 20일 만이었습니다. 27세의 청년은 어느덧 47세의 장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철저한 유폐와 차단 때문에 그 이전에는 이름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에 선생님의 귀환은 가슴 저릿한 감동이었습니다. 특히 석방과 함께 출간된 선생님의 옥중 서한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독서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면서 그 감동은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이 책을 두고 숱한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정양모 신부님은 이 책을 우리 시대의 큰 축복으로 여기셨고, 소설가 이호철 선생은 공자의 『논어』, 파스칼이나 몽테뉴의 수상을 읽는 맛에 비기면서 우리 나라의 수상록이나 수필문학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격찬하였습니다. 어떤 열성 독자는 한국의 루쉰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후 이 책은 서점가의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습니다.
선생님은 출옥 이후 줄곧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등을 가르치고 있는데, 선생님의 강의실은 노동자·교사 등 우리 사회의 여러 현장에서 분투하고 계신 분들로 항상 가득합니다. 얼마 전 실시된 ‘우리 시대의 지성인 베스트 5’ 설문 조사에서 네티즌들은 신영복 선생님을 으뜸으로 선정하였습니다. 몇 해 전에는 서울대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선생님을 꼽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영복 선생님은 출옥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15년 동안 변함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길이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양심적 지성으로서의 삶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서 태어나고 자란 어린 시절


신영복 선생님은 1941년 경남 밀양의 한학에 조예가 깊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향은 경남 밀양이지만 태어나기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경남 의령의 한 초등학교 교장 사택에서였습니다. 아버지는 대구사범학교 출신으로 일본인 교장 배척 운동에 가담하고 한글 연구 비밀 서클에 관계했다는 이유로 한때 해직당하기도 했던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이 다섯 살 되던 해 해방을 맞았는데 해방 당일 겪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동네 청년들은 다섯 살 꼬마이던 선생님에게 밀양 면소재지 초등학교의 교장 사택을 가서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비 오고 바람 부는 밤이었습니다. 꺼질 듯 말 듯한 접싯불 하나 밝혀 놓고 꼬마는 제법 무서운 다다미방을 밤새 혼자 지켰습니다. 밤중에 횃불을 든 동네 청년들이 와서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는 보급품(?)으로 자두 몇 개를 주고 갔답니다. 항일 민족 의식이 투철하셨던 아버지의 친구들로부터 ‘나중에 커서 일본 총독이 되라’는 농담을 들으며 자란 꼬마에게는 참으로 감격적인 해방의 밤이었습니다.
해방에서 6·25에 이르는 해방 공간은 어린 소년이 충분히 이해하기엔 어려웠던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어둠 속에 묻혀 들어와 서둘러 밤참을 해먹고 어디론가 황급히 사라지던 장정들의 두런두런하던 말소리와 발자국 소리, 밀양 남천교의 난간에 매달려 하굣길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빨치산의 머리들……. 뜻 모르고 겪었던 이런 장면들은 나중에 4·19 뒤 현대사를 공부할 때 그 당시를 추체험追體驗하면서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게 됩니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식민지 시절과 해방 공간의 격동에도 불구하고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서 태어나고 자란 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순탄하였습니다.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부산상고로 진학하였습니다. 학생 시절 선생님의 성적은 물론 우수하였으며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응원단장으로 활약, 문학적 재능도 두드러져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학년 말에 통지표를 받아들고 하교하던 중 같은 반의 한 친구가 “너는 교장 아들이기 때문에 담임 선생에게 잘 보여서 1등이 되었지만 사실은 자기가 1등”이라며 따갑게 쏘아붙였습니다. 해방 후 일본에서 귀환한 그 아이는 나이도 두세 살 위였고 여러 면에서 조숙한 편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선생님의 아버지는 다른 학교에 계셨고, 그 아이의 말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함께 있던 아이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의식 강한 소년이었던 선생님에게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그후 그 친구의 집을 방문했을 때 거의 끼니를 거를 만큼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충격은 더욱 커졌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선생님은 학교에서 거의 고의적으로 벌을 자초하는 여러 가지 짓궂은 장난을 저지르게 됩니다. 복도에 꿇어앉아 있는 정도는 보통이고 어떤 때는 전교생이 볼 수 있도록 운동장 한가운데 꿇어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들 덕분(?)에 5학년 때는 일약 응원단장으로 발탁되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응원단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누나들과 형님을 따라 아버지의 장서를 읽으며 비교적 조숙한 독서를 했던 편인 선생님은 각종 백일장에서 빠지지 않고 입상하는 등 두드러진 문학적 재질을 드러내었습니다. 한글날 부산시 주최 백일장에서 시제詩題가 ‘지도’地圖였는데 분단의 아픔을 썼다고 칭찬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실업계인 부산상고에 진학한 것은 둘째까지 서울로 유학 보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시인이던 국어 선생님의 강력한 권유로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 선생님은 4·19 뒤의 교원노조 활동으로 5·16이 나자 구속되기도 하셨던 분으로 각별한 애정을 베풀어 주셨는데, 은행 입사 시험을 치르고 온 신영복 선생님을 불러서 그 이튿날의 면접을 포기하도록 설득하셨다고 합니다.

 

 

4·19를 온몸으로 겪다


선생님께서 대학에 다닌 시기는 1959년에서 1963년까지입니다. 4·19와 5·16을 재학중에 겪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4·19를 잠시 푸른 하늘을 바라본 시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4·19 이전의 상황은 해방 공간의 열기가 6·25를 거치면서 완벽하게 초토화되고 난 이후 매카시적 반공주의의 광풍이 휘몰아쳤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모든 진보적 역량은 완벽하게 봉쇄되어 버렸습니다. 4·19를 계기로 이러한 역량의 일부가 표면으로 분출됩니다. 당시 대학 2학년이었던 선생님은 그 역사의 현장을 온몸으로 겪습니다. 4·19 당일 종암동의 학교에서부터 줄곧 스크럼을 짜고 시위 대열의 선두에 있었던 선생님은 경무대로 향하였습니다. 경무대 앞 효자동 전차 종점 부근에서는 이미 발포가 시작되어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가까운 선배 한 분도 거기에서 숨졌습니다.
4·19는 처음에 부정과 부패에 대한 항거라는 형태로 표출되었지만 그 뒤의 상황 전개는 보다 근본적인 사회 민주화와 통일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상승 발전하였습니다. 4·19 이후 전개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선생님은 당시의 지배 정권이 어떠한 세력이며 또 그 세력이 어떠한 계층을 억압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또한 어린 시절 체험하였던 해방과 분단과 전쟁의 의미를 통틀어 고민하며 재인식하게 한 전기였습니다.
그러나 푸른 하늘에는 다시 먹구름이 드리워졌습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4·19 혁명의 성과를 일거에 짓밟아 버립니다. 정권을 장악한 군부 세력은 친미·반공을 기조로 한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일본과의 국교 재개, 월남 파병 등을 강행하며 독재의 길을 닦습니다.
선생님은 2학년 때부터 학교 연구실에서 거의 기거하다시피 하며 생활했는데 학업에 열중했을 뿐 아니라 『상대평론』의 편집위원, 『상대신문』의 기자로 있으면서 시, 논문을 기고하고 만화를 그리기도 하는 등 다재다능하였습니다. 연구실에 붓과 벼루를 가져다놓고 붓글씨를 썼으며 친구들에게 붓글씨로 편지를 쓰기도 한 다정다감한 청년이었습니다. 4·19 이후인 3학년 때부터는 학회와 써클 활동에 열심이었습니다. 주로 후배들의 세미나 지도를 도맡아 서울대 상과대학만이 아니라 고대, 연대, 이대 등의 세미나 써클에 참여하거나 지도했으며 대학생 종교 단체, 공장 야학 등에도 직·간접으로 관계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남한의 정권은 정통성도 없었고 식민지 경제 구조도 그대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정부패의 만연과 빈부 격차의 확대는 자본주의적 개발 방식의 한계와 모순을 쉽게 느끼게 하였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그 문제를 보다 깊게 천착하게 된 선생님은 마르크스주의를 자본주의의 분석과 극복에서 가장 정합적인 실천 과학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고루 애정을 받았던 선생님은 대학원을 졸업하던 1965년부터 숙명여대에서 강의를 시작하여 1966년부터는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경제학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순탄했던 선생님의 삶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1968년 8월 24일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였습니다. 당면 목표로 “민중민주주의혁명을 수행, 반봉건적 사회 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 제도 수립, 민족 재통일 성취”를 내걸었던 통일혁명당은 4·19 이후 소생한 진보 세력이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위해 시도한 전위정당 건설의 성격을 일정 부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을 “북괴의 무력적화 통일 노선에 따라 결정적 시기를 만들어 민중 봉기와 국가 전복을 꾀한 북괴의 지하당 조직”으로 몰았습니다. 200여 명에 이르는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여기에 연루되어 조사받거나 구속되었습니다.
육사 교관으로 있던 중 구속된 선생님은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두 번의 사형 언도 끝에 최종적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감형은 매우 이례적이었는데 당시 박희범, 이현재 교수 등 선생님을 아끼던 은사들이 법정에 출두하여 증언하는 등의 구명 운동 덕분이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는 통일혁명당 사건에 변호인측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용단이었습니다.

 

 

무기징역,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무기징역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동굴이었습니다. 감옥은 세상의 힘에 밀리고 밀려 쓰러진 인생의 끝동네이자 삶의 밑바닥입니다. 그러나 감옥은 한 사회의 모순 구조를 가장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상의 복판, 역사의 복판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에게 감옥은 그동안 창백한 지식인으로 살아온 삶의 관념성을 뼈아프게 반성케 하는 공간이자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배우고 그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법을 익히는 학교였습니다. 감옥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온몸으로 헤쳐 온 육중한 체험에 부딪히면서 그동안 쌓아온 지식이 참으로 초라하고 가벼운 것임을 깨닫게 되며 인간과 사회와 역사를 새로운 눈으로 읽게 됩니다. 그것은 사고와 인식의 체계를 추상적 개념과 단어들 대신에 구체적인 사람의 얼굴로 채우는 과정이었으며 “바른손 중지中指의 펜에 눌려 생긴 굳은살이 사라지고 이제는 구두칼을 쓰느라 엄지 끝에 제법 단단한 못자리가 잡혀 가는” 자기 개조의 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처럼 치열한 자기 성찰의 결정들을 가족에게 보낸 엽서 편편에 담았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모진 아픔의 세월을 견딘 한 반듯한 인간의 초상을 만날 수 있으며 우리 시대의 고뇌와 양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연꽃이 진흙 속에서 꽃봉오리를 피워 올리듯 선생님은 자기 자신을 가장 낮은 밑바닥에 세우면서 감옥의 벽을 뛰어넘는 견고한 정신의 영역을 일구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스무 해 스무 날이 지나고 드디어 1988년 8월 14일, 굳게 닫혔던 전주교도소의 철문이 열리면서 선생님은 눈부신 햇빛 속으로 걸어 나오셨습니다. 대학 시절 은사였던 변형윤 선생께서는 출옥 후 옥중 서간들을 묶어 낸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판기념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한 뛰어난 경제학자를 잃었지만 그 대신 길이길이 남을 큰 사상을 얻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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