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론] 신영복의 서론(書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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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07-11-30
미디어 김수천

신영복의 서론(書論)

 

김수천(원광대학교 서예과 교수)

 


  신영복은 서예가라기보다는 글을 잘 쓰는 문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20여 년간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자신을 부지런히 도야하는 삶을 살았고, 교수와 학자들 못지않게 공부와 깊은 사색을 하여 동시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삶의 지혜와 양식을 제공해주었다.


  그는 대전 교도소에 있을 때부터 서예를 하기 시작한다. 정향 선생을 모시고 오랫동안 글씨를 배웠는데도, 그의 필치에서는 정향의 냄새도 어느 특정 법첩의 냄새도 아닌 뚜렷한 신영복 자신의 맛을 담고 있다.


  그의 휘호는 다듬어지지 않은 면들이 많아 서예인들로부터 粗野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의외로 그의 글씨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특히 대중들에게 있어서의 신영복은 어느 서예가보다도 더 많이 알려져 있다.  


  書論에 “寧醜毋媚”라는 말이 있다. “차라리 미울지언정 꾸미지 말라”는 뜻이다.” 선생의 글씨는 “寧醜毋媚”과 연관지을 수 있다. 그의 글씨는 구본답습에서 일구어진 성과라기보다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기도야와 자기발견에 소홀함이 없었던 堅實한 삶 속에서 발아된 것으로 보인다. 기법보다는 정신과 생활을 중시하기에 선생의 글씨에는 미를 탐한 흔적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예술의 體化, 이것은 오늘날 서가들의 열악한 부분이다. 명필은 글씨만을 열심히 쓴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법첩만 보고 습작하는 서예가 진정한 서의 법문으로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은 역대 서예가들의 체험에서 입증되는 바이다. 


  역대의 명필들은 글씨만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서예인이기 이전에 文人이었고 너른 교양과 內涵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며, 인생에 대한 사색과 삶의 체험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글들이 선생의 문장 여기저기에 보석같이 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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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의 고수가 흔히 완매(頑昧)한 보수가 되거나 파시즘의 장식물이 되던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만, 가장 보수적인 것이 가장 전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시기도 있을 뿐 아니라, 농촌이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도 그 지역적 특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이 가장 적게 무너진 곳이며, 西風에 맞바람 칠 東風의 뿌리가 박혀 있는 곳이라는 데서 찾아야 된다는 사실도 귀중한 교훈으로 간직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씨란 타고나는 것이며 필재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명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필재가 있는 사람의 글씨는 대체로 그 재능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견 빼어나긴 하되 재능이 도리어 함정이 되어 손끝의 巧를 벗어나기 어려운 데 비하여 필재가 없는 사람의 글씨는 손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쓰기 때문에 그 속에 혼신의 힘과 정성이 배어 ‘단련의 미’가 쟁쟁히 빛나게 됩니다.


 만일 필재가 뛰어난 사람이 그 위에 혼신의 노력으로 꾸준히 쓴다면 이는 흡사 여의봉을 휘두르는 손오공처럼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런 경우는 관념적으로나 상정될 수 있을 뿐, 필재가 있는 사람은 역시 오리 새끼 물로 가듯이 손재주에 탐닉하기 마련이라 하겠습니다.

 

  결국 서도는 그 성격상 토끼의 재능보다는 거북이의 끈기를 연마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글씨의 훌륭함이란 글자의 자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먹 속에 갈아 넣은 정성의 양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평가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리라 생각됩니다.


  사람의 아름다움도 이와 같아서 타고난 얼굴의 조형미보다는 은은히 배어나는 아름다움이 더욱 높은 것임과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을 보는 시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ale습니다. 첩경과 행운에 연연해하지 않고, 역경에서 오히려 정직하면 기존과 權富에 몸 낮추지 않고, 진리와 사랑에 허심 탄회한 ---- 그리하여 스스로 선택한 ‘우직함’이야말로 인생의 무게를 육중하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려 하기에 앞서, 붓을 잡는 자세를 성실히 함으로써 먼저 뜻과 품성을 닦는, 오히려 ‘먼 길’을 걸으려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뜻과 품성이 비로소 훌륭한 글씨와 그림을 가능케 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人道는 藝道의 長葉을 뻗는 深根인 것을, 藝道는 人道의 大河로 향하는 시내인 것을, 그리하여 최고의 예술 작품은 결국 ‘훌륭한 인간’ ‘훌륭한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괸 물, 정돈된 물, 그러나 썩기 쉬운 물.”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져 버린 채,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물론 지우거나 개칠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字’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獨尊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합니다. 마찬가지고 한 ‘字’가 잘못될 때는 그 다음 자 또는 그 다음 자로써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또 한 ‘行’의 잘못은 다른 행의 배려로써, 한 ‘聯’의 실수는 다른 연의 구성으로써 감싸려 합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잘못과 실수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실패와 보상과 결함의 사과와 노력들이 점철된, 그러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폭의 글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얻은 한 폭의 글은 劃, 字, 行, 聯들이 대소, 강약, 太細, 지속, 농담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양보하며 실수와 결함을 감싸주며 간신히 이룩한 성취입니다. 그 중 한 자, 한 획이라도 그 생김생김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와르르 얼개가 전부 무너질 뻔한, 심지어 낙관까지도 전체 속에 융화되어 균형에 한몫 참여하고 있을 정도의, 그 피가 통할 듯 농밀한 ‘상호연계’와 ‘통일’속에는 이윽고 묵과 여백, 흑과 백이 이루는 대립과 조화 그 대립과 조화 그것의 통일이 창출해내는 드높은 質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규칙화된 자, 자의 단순한 양적 집합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남남끼리의 그저 냉랭한 群棲일 뿐 거기 어디 악수하고 싶은 얼굴 하나 있겠습니까. 유리창을 깨뜨린 잘못이 유리 한 장으로 보상될 수 있다는 생각을, 사람의 수고가 인정이 배제된 일정액의 화폐로 代償될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쓸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획과 획 간의 자와 자 간에 붓을 세우듯이, 저는 묵을 갈 적마다 人과 人간의 뜨거운 ‘연계’위에 서고자 합니다.“


  저는 주로 붓으로 글씨를 쓰고 있습니다. 가끔 매직펜으로 줄을 긋거나 글씨를 쓸 일이 생깁니다. 이 매직펜은 매직잉크가 든 작은 병을 병째 펜처럼 들고 사용하도록 만든 편리한 문방구입니다. 이것은 붓글씨와 달라 특별한 숙련이 요구되지 않으므로 초심자가 따로 없습니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아무나 눌러도 정해진 음이 울리듯, 매직펜은 누가 긋더라도 정해진 너비대로 줄을 칠 수 있습니다. 먹을 갈거나 붓끝을 가누는 수고가 없어도 좋고, 筆法의 수련 같은 귀찮은 노력은 더구나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휘발성이 높아 건조를 기다릴 것까지 없고 보면 가히 인스턴트 시대의 종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모든 편의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종이 위를 지날 때 내는 날카로운 마찰음, 기계와 기계의 틈새에 끼인 문명의 비명 같은 소리가 좋지 않습니다. 달려들 듯 다가오는 그 자극성의 냄새가 좋지 않습니다.


  붓은 결코 소리 내지 않습니다. 어머님의 약손같이 부드러운 감촉이, 수줍은 듯 은근한 그 墨香이, 묵의 깊이가 좋습니다. 秋毫처럼 가늘은 획에서 筆管보다 굵은 글자에 이르기까지 흡사 피리 소리처럼 이어지는 그 폭과 유연성이 좋습니다. 붓은 그 사용자에게 상당한 양의 노력과 수련을 요구하지만 그러기에 그만큼의 애착과 사랑을 갖게 해줍니다.  붓은 좀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은 매운 지조의 선비 같습니다.


  매직펜이 실용과 편의라는 서양적 사고의 산물이라면 붓은 동양의 정신을 담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의 벼룻집 속에는 이 둘이 공존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소위 ‘東道西器’라는 절충의 논리를 수긍하는 뜻이 아닙니다.


  절충이나 종합은 흔히 은폐와 糊塗의 다른 이름일 뿐,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는 그 사회, 그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객관적 제 조건에 비추어, 비록 상당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주장이라 하더라도 그 輕重, 先後를 峻別하고 하나를 다른 하나에 종속시키는 실천적 파당성이 도리어 時中의 眞意이며 中庸의 本道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역시 붓을 선호하는 쪽입니다. 주로 도시에서 교육을 받아온 저에게 있어서 붓은 단순한 취미나 餘技라는 공연한 사치로 이해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란 바깥 형식에 의해서라기보다 속 내용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규정되는 법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서도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자획의 모양보다는 字句에 담긴 뜻이 좋아야 함은 물론, 특히 그 사람이 훌륭해야 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작품과 인간이 강하게 연대되고 있는 서도가 단지 작품만으로 평가되는 인간 부재의 다른 분야보다 마음에 듭니다. 좋은 글씨를 남기기 위하여 결국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상식이 마음 흐뭇합니다.


  인간의 품성을 높이는 데 복무하는 ‘예술’과 예술적 가치로 轉化되는 ‘인간의 품성’과의 통일이‘ 이 통일이 서도에만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近墨者의 자위이겠습니까. 


 지난달의 어머님 하서, 그리고 7일에 부치신 아버님 하서 모두 잘 받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물론 연로하신 탓이라 믿습니다만 좋은 스승인 아버님을 곁에 두시고도 글씨가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머님의 서투른 글씨와 옛 받침이 좋습니다. 요즈음의 한글 서도는 대체로 궁중에서 쓰던 소위 ‘궁체’를 본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저는 궁정인들의 고급한 雅趣보다는, 천자문의 절반인 ‘지게 戶’, ‘봉할 封’까지만 외시는 어머님께서 목청 가다듬고 두루마리 祭文을 읽으실 때, 옆에 둘러앉아서 공감하시던 숙모님들, 먼 친척 아주머니들처럼 순박한 농부와 陋巷의 체취가 배인, 그런 글씨를 써보고 싶습니다. 누구든지 친근감을 느낄 수 있고 나도 쓰면 쓰겠다는 자신감을 주는 수수한 글씨를 쓰고 싶습니다.


 무리하게 변화를 시도하면 자칫 巧로 흘러 아류가 되기 쉽고, 반대로 방만한 반복은 자칫 固가 되어 답보하기 쉽다고 생각됩니다.

  巧는 그 속에 인성이 담기지 않은 껍데기이며, 固는 제가 저를 기준 삼는 我執에 불과한 것이고 보면 ‘允執厥中’, 역시 그 中을 잡음이 요체라 하겠습니다만, 서체란 어느덧 그 ‘사람’의 성정이나 사상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결국은 그 ‘사람’과 함께 변화 발전해 감이 틀림없음을 알겠습니다.


 어머님께서 전에 써 보내 주시던 모필 서간문의 서체는 지금도 제가 쓰고 있는 한글 서체의 母法이 되어, 궁체와는 사뭇 다른 서민들의 훈훈한 체취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붓글씨에 있어서도 저의 스승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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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書論은 어떤 문헌상의 서예이론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생활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서예와 관련짓고 있다. 對人, 對事, 對物을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고 깊은 관조로 일구어낸 선생의 서론은 기법이나 조형미에 편중된 오늘날의 서예를 크게 반성하게 한다.  


* 10년쯤 되나 봅니다. 신영복 선생이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보고 거기에 나오는 서론을 모두 발췌하여 수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펴보니 여전히 흥미롭고, 저 혼자 보기에는 아까운 글이라 생각하여 다시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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