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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17-01-09
미디어 경향신문

혼돈의 시대, 다시 새기는 신영복의 말

1주기 앞두고 학자 3명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


[경향신문]  2017.01.09 정원식 기자


고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1941~2016)는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그 시대가 가장 결핍하고 있는 것의 핵심에 도달한 사상가였다.


그는 20대 후반부터 20년간 좁은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시대의 어둠에 함락되지 않고 정갈한 성찰의 언어를 길어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소비와 자본, 기술이라는 물신을 숭배할 때 그는 인간의 가치를 역설했고, 각자도생이 생존의 매뉴얼로 자리 잡은 시대에 개인이라는 나무가 더불어 함께 무성한 숲을 이루는 세상을 꿈꿨다. 삶의 좌표를 찾는 이들이 그에게서 지혜와 위로를 구했다. 경향신문은 오는 15일 고인의 1주기를 앞두고 고인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거나 그의 사상을 깊이 사숙한 세 지식인들의 글을 싣는다. 권력자들의 무능과 추문이 일으킨 혼란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민들의 요구가 터져 나오는 지금, 신영복의 말과 글은 여전히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성공회대는 1주기 당일인 15일 오후 3시 교내 성당에서 추도식을 엄수한다. 이에 앞서 10일부터 19일까지 서울 인사동 동산방화랑에서는 추모전시회가 열린다. 19일 오후 8시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는 추모콘서트가 열릴 예정이다.



■광장 촛불, 희망의 ‘씨과실’ 새롭게 거름하고 가꿔가야


김창남 | 성공회대 교수·(사)더불어숲 이사장

동서고금의 지혜를 두루 섭렵한 신영복 선생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희망의 언어로 ‘석과불식(碩果不食)’을 꼽았다. <주역>의 효사(爻辭)에 나오는 이 말의 뜻은 ‘씨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토의 절망 속에서 마지막 남은 씨과실을 먹지 않고 땅에 심음으로써 새싹을 키우고 마침내 나무와 숲을 이루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다.


선생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좀 더 적극적인 해석을 제안하기도 한다. 고난과 비극 속에서 씨과실을 끝내 지켜내는, 그래서 희망의 씨앗을 새롭게 심고야 마는 의지를 강조하는 해석이다.


선생은, 씨과실이 희망의 숲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무가 잎사귀를 떨어뜨리듯 모든 거품을 걷어내고(엽락·葉落), 마지막 남은 뼈대를 직시하며(체로·體露), 뿌리를 거름하는(분본·糞本)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 희망이 존재하는지 회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탐욕스러운 데다 무지하기까지 한 권력자들의 거침없는 역주행을 멈출 세력도 방법도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몇 주에 걸쳐 국면은 극적으로 변했다. 적어도 아직 희망은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희망의 씨과실은 다름 아닌 광장의 촛불이었다. 한겨울의 삭풍에 굴하지 않고 모여든 시민들은 끝내 빼앗기지 않은 씨과실을 땅에 심었다. 물론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지금까지 우리를 사로잡았던 환상의 거품을 걷어내고 이 사회의 근본을 직시하며, 다시 새롭게 거름하고 가꾸어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길을 잃은 자는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하는 법이다. 광장에 모인 촛불 시민들은 그렇게 다시 ‘먼 길을 함께 갈 아름다운 동행’의 길동무들이다. 마치 오늘의 현실을 예감이라도 한 듯, 신영복 선생은 2013년 5월에 쓴 한 편의 글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정치란 무엇인가. 평화와 소통과 변화의 길이다. 광화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길이다.”



■생전에 역설한 휴머니즘은 약한 사람들과의 연대가 핵심

오길영 | 충남대 영문과 교수·문학평론가

국정농단과 헌정 훼손의 혼란을 보면서 새삼 느낀 것은 지식인의 나약함이다. 교수, 법률기술자, 한때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당장의 물질적 이익(권력, 돈, 명예 등)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양식, 소신 등)를 저버렸다. 선택의 결과는 추한 몰락이다. 신영복 선생 1주기를 앞두고 유고집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와 대담집 <손잡고 더불어>를 읽었다. “더 깊은 인생”과 “우리 사회가 추구할 가치에 대한 새로운 반성”(<손잡고>)의 휴머니즘을 생각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이 성가를 높이는 때다. 휴머니즘은 ‘죽은 개’로 여겨진다. 그러나 선생이 남긴 글은 “인간과 삶의 고뇌에 무게를 두는”(<냇물아>) 휴머니즘의 가치를 증언한다. 그 뿌리는 두 책에서 되풀이 언급되듯이, 관계론의 인간학이다. “서구적인 존재론과는 다른 관계론적 패러다임”이고, “강철의 논리”가 아닌 배려와 “연대의 패러다임”이다. “관계론의 실천적 개념이 바로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대의 가장 상징적인 가시물이 물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물이 가장 큰 바다가 될 수 있는 원리가 바로 하방연대에 있는 것이지요.”(<손잡고>) 물신의 시대에 새겨야 할 덕목이다.


지성의 터전인 대학에서조차 “잘 팔리는 것을 연구”하고 “경쟁과 효율과 속도”만이 인정받는다. “복잡하고 어려운 사고를 기피”한다. 결과는 대학과 사회의 속물화다. “잘 팔리는” (법률)지식으로 무장했으나, 그 알량한 ‘실용’지식으로 권세와 재물만을 추구하면서, 시민적 양식과 성찰은 전혀 없는 국정농단의 ‘엘리트 괴물’들. 그들의 작태가 좋은 예다. 선생의 말대로 “우리가 잃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바로 이러한 성찰성이라고 생각한다.” 휴머니스트로서 앎과 실천의 자리를 성찰하는 선생의 글이 지닌 힘이다. 1년 전 쓴 추모사. “육체의 죽음을 겪은 신영복은 우리 곁에 없지만, 선생의 글은 우리의 기억 속에 앞으로도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유고집과 대담집을 읽으며, 남겨진 글의 현재성을 다시 확인한다.



■촛불 한 자루가 불꽃의 파도…더불어 숲 이루는 세상 시작

김명인 |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

신영복 선생이 기세하신 지 1년이 되었다.


아쉽다. 1년만 더 사셔서 광화문에서 또 전국 각지의 광장에서 주말마다 100만 시민이 구름같이 모여 벌이는 이 아름다운 난장에 함께할 수 있었더라면 과연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궁금해진다. 아마 많이 좋아하셨을 것이다.


비록 그 시작은 국가수반을 둘러싼 추문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 주말의 난장은 국가와 사회의 운명이 저들 소수 지배자의 손에서 농락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시민들의 손에서 결정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주권재민, 민주공화의 살아있는 교육장이 되어 가고 있다. 내가 안 나가면 모처럼 모인 힘이 다시 약해질까 두려워 나서던 비장한 걸음이 어느덧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신들의 힘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즐거운 걸음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진정한 인간의 길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다시 가슴에서 발로 나아가는 긴 여행길이라고 했다. 의식과 관념이 의지와 정념이 되고 그것이 다시 행동과 실천으로 구체화되는 먼 길이다. 그런데 지금 주말의 광장에서 벌써 연 1000만명의 사람들이 머리(관념)에서 가슴(정념)으로, 가슴에서 다시 발(실천)로 이행하며 어쩌면 화석이 되어버린 민주주의를 다시 소생시키는 놀라운 기적을 연출하고 있다. 또한 한 자루의 촛불이 거대한 불꽃의 파도가 되는 기적은, 작지만 단단한 혼자의 힘들이 모여 커다란 우리가 된다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되어 모든 것을 다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곧 선생이 거듭거듭 말한바 ‘더불어 숲’의 힘이기도 하다. 어쩌면 모두가 각자 한 그루의 뿌리 깊은 나무가 되고, 다시 그 나무들이 따로 또 같이 모여 숲을 이루는 세상, 선생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그 대동의 세상이 이 겨울의 광장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어 저 세상에서 신영복 선생이 흐뭇하게 미소 짓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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