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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01-01-04
미디어 중앙일보

아름다운 패배


 

새해를 맞는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꼭 일년 전에 벌였던 화려한 새 천년의 축제를 떠올립니다. 폭죽으로 밤하늘을 수놓았던 밀레니엄 축제가 엊그제 같습니다. 다시 새 해를 맞아 일터로 나서는 당신의 무거운 발걸음을 바라봅니다. 당신의 모습은 어쩌면 새해를 맞는 우리들 모두의 모습입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한 해는 기업 의료 농촌 교육 금융 등 사회의 모든 영역이 자기의 권익을 지키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몸부림으로 얼룩진 한 해였습니다. 일터를 떠나는 사람들이나 남은 사람들에게나 구조조정은 희망이기보다는 불안이었습니다. 어떤 구조를 만들려고 하는지 어떤 방법으로 조정하려고 하는 지에 대한 최소한의 대화나 신뢰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남에게 고통을 떠밀어야 하고, 고통뿐만 아니라 책임까지 떠밀어야 하는 싸움만 앞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새해의 현실입니다. 2000년이 새 천년인지, 2001년이 진짜 새 천년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것 하나 새로울 수 없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망연할 뿐입니다.

당신은 이제 모든 것을 싸움의 승패에 걸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싸움은 시작하면 이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싸움이란 모두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싸움의 비극입니다. 머리띠 두르고 싸움터로 나서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참담한 심정이 되는 까닭은 당신의 싸움이 외로운 싸움이기 때문이며, 외로운 싸움이기 때문에 결국 상처와 패배를 안고 돌아오리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상대는 매우 완강합니다. 자본과 권력과 여론과 보이지 않는 시장과 그리고 초국적자본이라는 겹겹의 벽 속에 당신은 서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차라리 아름다운 패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비록 패배이지만 내일은 승리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패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패배는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승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패배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누구'와 싸울 것인가 보다는 '무엇'을 상대로 싸울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차피 어느 한 사람을 골라서 싸울 수도 없습니다. 기업 공공 노동 금융 등 4대 구조조정의 모든 짐이 오로지 당신의 어깨에 짐 지워지게 되어 있고 겹겹의 포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가를 밝혀야 합니다. 싸움의 이유를 널리 천명해야 합니다.
당신은 기업만 살아야 되는 이유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공기업과 금융기관이 수익을 내야 한다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20:80의 사회에서 20만이라도 살아야 언젠가 80이 살 수 있다는 논리를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은 공적자금이라는 국민부담으로 전가시키면서 그러한 이유 그러한 논리를 펴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는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입니다. 비단 당신과 나뿐만이 아닙니다.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사람들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당신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경제성장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들이 까맣게 잊고 있는 것들을 당신의 싸움은 드러내어야 합니다. 조정이 아니라 진정한 개혁이 아닌 한, 기업의 수익구조가 아니라 국민경제의 토대를 개혁하지 않는 한 어김없이 경제위기는 또 다시 닥쳐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당신의 싸움은 바로 이러한 근본을 천명하는 싸움이어야 합니다.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내는 외롭지 않는 패배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기어코 승리하는 아름다운 패배가 되어야 합니다.
새해의 벽두에 나누는 패배의 이야기가 다시 마음을 참담하게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패배의 이야기가 아닌 승리의 이야기로 읽어주리라 믿습니다.
당신의 새해를 기원합니다. 새해도 모든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새로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작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 새로운 것을 심어야 합니다.
언젠가 당신에게 드린 글을 다시 씁니다.

"처음처럼-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무렵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그리고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문화2001] 중앙일보 새해특집 2001.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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