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 루쉰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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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1995-12-20
미디어 우리교육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


이 책을 추천하며





루쉰의 작품집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는 그 분량은 많지 않지만 루쉰이 밝힌 바와 같이 13년에 걸쳐서 쓴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 실린 8편의 작품 가운데 5편은 그의 최후의 작품들이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지금까지의 루쉰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일면을 발견하고 잠시 당황하게 되기도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루쉰의 치열한 대결 정신과는 일견 상반되는 듯한 해학적 필치를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루쉰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협소한 것이었음을 반성하게 된다.

북경대학교의 첸리췬(錢理群) 교수는 루쉰 작품의 이러한 면모를 루쉰예술의 '초월적 경지'이며, 진정한 의미의 '성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루쉰의 글에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朝花夕拾)'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책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원제 고사신편 故事新編)』는 이를테면 옛날에 떨어진 꽃을 오늘 줍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옛날에 떨어져 이미 시들어 버린 꽃,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줍지 않는 꽃을 루쉰은 먼 과거의 망각으로부터 그 꽃들을 다시 불러내어 오늘의 현실 속으로 살려내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단순한 복원이 아니다. 루쉰의 말처럼 이미 죽은 것들을 향하여 던지는 칼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서 중국 민중의 뇌리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해악(害惡)에 대한 가차없는 칼질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망각 속에 잊혀져 가는 귀중한 꽃들에게 새로이 생명을 불어넣는 생환(生還)의 작업이다.


루쉰은 그의 생애를 통해 엄청난 작업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작품들을 통하여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루쉰 당시의 중국 현실은 암담하고 냉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참으로 절망적이었던 것은 한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민족의 존망이 위급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중국 민중들은 아큐처럼 어둡고 깊은 잠에서 깨어날 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루쉰의 글을 읽어야 할 독자였다는 점에 바로 루쉰의 절망과 고독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루쉰은 옛날에 떨어져 이미 자취마저 사라진 옛사람과 옛일들을 통하여 현재의 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루쉰 자신의 말처럼 옛날 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는 현대인을 대할 때처럼 그렇게 정성스럽고 공경한 것이 못되고 수시로 장난기가 발동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풍자와 해학의 필치로 묘사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루쉰의 해학적 필치는 그 대상을 매우 신중하게 구별하고 있다.


천하가 물에 잠긴 재난을 당하여 백성들이 죽는 것은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문화를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학자들만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식 관료들, 입만 열면 선왕의 도를 이야기하면서도 인간의 본원적 욕망을 억압하고 있는 백이와 숙제의 위선, 비현실적인 행동과 엄숙한 강연으로 대중을 우민화하는 노자, 극도의 상대주의 이론과 무시비관(無是非觀)으로 급박한 당면 문제를 호도하고 있는 장자 등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해학과 풍자로 응수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루쉰이 애정어린 필치로 그리고 있는 인물들도 있다.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한 평범한 인간으로 전락한 천하의 명궁 예( ), 홍수를 막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천하를 돌아다니느라 얼굴이 검게 타고 발이 소 발바닥처럼 굳은 우(禹)임금,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하는 어린 미간척(眉間尺)을 위하여 목숨을 던져 대신 복수해 주는 연지오자, 전쟁을 막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가고 달려오는 묵자(墨子), 이와 같이 민중의 편에 서서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하여 묵묵히 실천한 사람들에 대하여는 더없이 따뜻한 필치로 그들을 묘사하고 있다.


북양군벌과 국민당의 무서운 백색 공포 아래에서 한치의 타협도 없이 일관되게 견지한 루쉰의 강력하고도 분명한 애증(愛憎)을 읽을 수 있다. 그러한 애증이 곧 우임금을 통하여, 묵자를 통하여 그리고 연지오자를 통하여 맥맥히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옛날의 꽃들을 다시 주워서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루쉰의 고뇌였고 '전술'이었다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소설들을 통하여 당시의 민중들에게서 느끼는 허무와 비애가 루쉰의 영혼을 얼마나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는가를 읽을 수 있으며, 동시에 루쉰이 얼마나 이들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이들에게 걸고 있는 희망과 기대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루쉰의 정신세계는 때와 곳을 달리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서도 도처에서 확인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루쉰의 이 책이 우리들 앞에 다가오게 된 것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특히 루쉰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누구보다도 깊은 유세종 선생이 이 책의 번역을 맡았다는 것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작품마다 북경대학교의 첸리췬 교수의 격조 높은 해설을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을 정도로 편집의 배려 또한 다른 책과는 월등한 차이를 보인다. 많은 독자들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1995년 12월 10일

신영복   





(주)우리교육 1995.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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