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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1990-05-17
미디어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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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논단]

 


 

 물(水)이 흘러 가는(去)는 형상을 본떠서 법(法)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법은 자연스럽기가 흐르는 물과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물이 흘러가는 모양도 결코 한결같지 않다.
어느 때는 가파르고 좁은 계곡을 세차게 달려 가기도 하고
어느 때는 평지를 만나 하늘을 비추고 산천경개를 담으며
유유히 흘러 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물 저 물 모든 물에서 깨닫는 사실은
물은 그 모습이 어떠하든 끊임없이 흐르게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댐을 막아 물을 가둔 경우조차도 물은 기어코 흐르게 마련이며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물은 결국 썩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곧 물의 질서이며 물의 법이다.

우리시대의 물은 어떻게 흘러 가는가.
우리사회의 법과 질서는 어떠한 권위와 도덕성을 지니고 있는가.
5월의 광주를‘폭도’라는 이름으로 매도한 것도 법과 질서라는 논리였으며,
지금도 우리들의 삶의 곳곳에 합법적 탄압과‘불법적’저항이
팽팽히 맞서서
각각 민주와 정의를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

반 에덴의 동화 <어린 요한>에는 버섯들의 이야기가 있다.
자기를 지팡이로 가리키며
“이것은 독버섯이야”라는 말에 깜짝 놀란 독버섯은
“그것은 당신들 인간이 하는 말이야”하고 항의한다.

독버섯이란 사람들이 식용으로 할 수 없는 버섯이란 뜻이다.
그것은 인간의 식탁에서 하는 분류일 뿐이다.
독버섯은 함께 사는 다른 버섯들에게 한번도 해를 끼친 적이 없다.
그가 몸에 지니고 있는‘독’이란
그들을 먹이로 삼는 동물들이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자위의 무기일뿐이다.

정부는 분규와 시위등 모든‘불법적 저항’에 대하여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반민주적인 불법 폭력’이라 이름짓고
사전구속영장으로 강력하게 대처하고 있다.

분규와 시위의 당사자들은 마치 버섯의 대꾸처럼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그것이 불법이란 의식이 없다.
자신을 독버섯으로 규정하는 그 법들을 도리어 불법적이라고 선언한다.

인간과 버섯만큼이나 멀어져 버린 이 아득한 인식의 대립은
과연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가.
합법과 불법을 준별하는‘법’은 과연 무엇인가.

엄청난 투기놀음은 비록 그 내용은 부도덕하더라도
그 형식이 합법적이기 때문에 당근으로 달래는 반면,
민중적 요구는 비록 그 내용은 정당하나
그 형식이 불법적이기 때문에 채찍으로 다스린다.

그 내용은 묻지 않고 그 형식만을 문제삼으며,
그 부조리를 재생산해 내는 토대는 그대로 둔 채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을 문제삼는다.

악법도 법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실언 한마디로
법의 권위와 도덕성이 합리화될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법과 도덕, 질서와 윤리를 구별하기 어려운
실로 난감한 현실에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다.

법이 그 도덕성을 신뢰받지 못할 때
그것은 다만 억압의 도구로 간주될 뿐이다.
이른바‘불법적’인 저항을 받게 마련이다.
합법적인 절차를 아무리 호소하더라도
합법적인 절차 그 자체마저 억압의 한 방법이라고 여길 뿐이다.
실정법은 그 사회의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를 사후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기득권자의 편을 들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은 항상 실패로 역사에 남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보수는 진보보다 더 엄청난 사회적 역량을 파괴하는 것이다.

법은 우상이 아니다.
사람과 세상을 지키는 최소한의 수단일 뿐이다.
사람이 법을 지키기에 앞서 법이 사람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인간관계가 절실하게 갈구될수록
법은 과감하고 신속하게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의 역량을 파괴하지 않는 길이며
사회의 화평을 지키는 길이다.
이것이야 말로 법의 정신에 충실한
진실로 합법적인 법이고
인간적인 법이다.

법은 글자 그대로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어야 한다.
왜곡되고 가파르게 기운 골짜기에서
물은 벼랑을 치고 바위를 굴리며 새로운 물길을 틔우는 반면,
너른 평지를 만나면 맑은 가슴 평화롭게 펼쳐 보인다.

물은 언제나 넓은 바다를 향하여 나아 간다.
푸른 하늘 가슴 가득히 안고
수많은 것들을 싣고
넓은 대륙 안고
생명을 만들고 역사가 된다.

5월의 빛나는 하늘 아래 한점 부끄럼 없는 민주의 바다,
민중의 바다로 향하는 것이다. 

 


한겨레신문 1990.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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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법-한겨레신문 1990.5.17. 1990-05-17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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