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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1990-12-02
미디어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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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日報)



20년의 옥살이를 끝내고
세상의 첫밤을 맞은 곳은 놀랍게도 그 때 그 곳이었다.
1988년 8월 14일 내가 돌아 온 곳은 남산기슭의
중앙대학교 부속병원에 있는 아버님의 병실이었는데
병실창밖으로 그 때의 중앙정보부 자리가 바로 지척이었다.
20년후의 남산은 더욱 깊은 숲을 이루어
그 때의 아픔과 좌절을
8월의 여름 숲속에 말없이 묻어 놓고 있었다.

병실 창문에 서서 어둠에 묻혀 가는 <남산>을 바라보며
이제 나의 20년은 추억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숱한 사연들은 이제 사진첩 속에 간직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감상적인 생각이었다.
세상에 끊어진 길은 없는 법이다.
끊어진 혈관이 없듯이 모든 길은 모든 길과 연결되어 있는 법이다.
더구나 28살에서 48살까지의 20년은 나의 인생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감동과 변혁의 심장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1968년 여름 <남산>에서 알몸으로 벗기워
지금까지의 나의 모든 생각과 행위가
삭막한 법률용어로 번역되어 조서용지위에 기록될 때
나는 그 낯선 외국어에 한동안 당황하였다.
나는 나의 양심이 걸레처럼 천대당하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냉엄한 현실, 엄청난 힘의 벽앞에 여지없이 무너져내리는
나의 우정과 사랑을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지천명의 나이로 또 하나의 길 앞에 서 있다.

내가 걸어 온 길은 감옥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나누어 진다.
1941년 고읍인 밀양을 고향으로 나는 국민학교의 교장사택에서 태어 났다.
학교의 사택과 교실 그리고 학교운동장에서 시작된 나의 어린 시절은
당시의 가난하고 어려웠던 식민지의 시절과 해방전후의 격동으로 부터
일정하게 보호된 환경이었다.
이러한 환경은 대체로 4.19를 맞았던 대학 2학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의 나의 길은 내가 걸어 온 나의 길이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서 닦여진 길이었으며,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진 책과 교실이었다.
생각하면 이것은 나의 선택은 아니었다.
심부름같은 길이었다.

4.19는 잠시 푸른 하늘을 바라 본 시절이었다.
부정선거나 장기집권의 문제라기 보다는
누가 누구를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하는 계기였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해방과 전쟁과 분단의 의미를
통털어 고민하게 하는 전기였다.

한글 연구써클과 일본인교장 배척운동으로
한 때 교직에서 쫓겨났던 아버님과 아버님의 친구들,
어둠속에 묻혀 들어와 서둘러 밤참을 해먹고 어디론가 사라지던
장정들의 두런두런하던 말소리와 발자욱소리,
남천교의 난간에 매달려 하교길을 공포에 떨게 했던 빨찌산들의 머리들…….
나는 4.19때에야 뒤늦게 그 당시를 추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학교와 교실이라는 제3의 입장은
바로 그 순수한 열정때문에,
때로는 과학적 이론때문에,
때로는 실천의 협소한 지반때문에
우리는 관념적일 수 밖에 없었다.
사회 경제적 모순구조 속에 온 몸이 놓여 있는
민중들의 삶 그 자체와는 엄연히 구분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60년대의 학생운동은 대중운동공간이 줄곧 초토화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첫번째의 길은 1968년 여름 <남산>에서 끝났다.
만신창이가 된 알몸으로 끝났다.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고 그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국가보안법 1조 2항이 통일혁명당 사건에서
내게 2번의 사형을 언도하고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한 법적 근거였다.
법의 본질은 무엇이며 정치의 생리는 어떤 것인가.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의 이러한 고민은
참으로 사치스럽고도 순진한 것이었다.

두번 째의 길은 무기징역형이었다.
무기징역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동굴이었다.
동굴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나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사한 관념의 의상이 갈기갈기 찢어져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생각되었다.
감추어진 칼을 미리 볼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첫번 째의 길이 밝고 양지바른 길에서부터 시작되었음에 비하여
두번 째의 길은 어둡고 긴 동굴의 입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엄한 규율과 강제, 끊임없는 냉소와 모멸 속에서,
살벌한 사건과 유린된 인간성의 장기망태기 속에서
나의 이론과 사랑이 의지할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이 인생의 끝동네에서 부대끼고 방황하는 동안
최초로 갖게 된 감정은 아마 부끄러움이었다고 생각된다.
세상을 객지처럼, 감옥을 자기의 인생처럼
묵묵히 살아 가고 있는 수많은 재소자들보다 더 괴로워 해야 할 권리가
내게는 없었다.
아마 이 부끄러움을 알고 난 이후라고 생각된다.
나는 서서히 사람을 만나게 된다.
거죽의 사람이 아닌 속 사람의 발견이었다.
이마에 낙인처럼 그를 규정하고 있는 죄명과는 한 점 상관도 없는
속사람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충격으로
다음에는 경이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점에서 그것은 구원이었다.

대학병원에서 피를 팔 때마다 새벽 수도꼭지에서 양껏 물을 마셨다는 친구.
물탄 피를 팔았다는 양심의 가책때문에 괴로워 했다는 그의 이야기는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지금도 <양심>이란 글자를 만날 때면 내게는 어김없이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느 지루한 일요일 온 종일 겨우 수필 한편을 읽고 난 노인이 내뱉듯이 들려준 말은
“자기집 뜰이 좁아서 꽃을 못심는데나 뭐 그런 걸 썼어”라는 확실한 한마디였다.
화려한 단어 유려한 문장에 결코 현혹되지 않는 그의 통찰은 그의 무식에서 온 것이다.
무식이 그처럼 날카로운 지성이 되고 있는 변증법은 나의 지식을 질타하였다.
지금도 <독서>라는 글자를 만날 때마다 내게는 그 노인의 얼굴과
그가 말아 쥐고 읽던 헌 월간지가 어김없이 떠오른다.

<건축>이라는 단어에서 빌딩을 연상하는 사람과
목수의 얼굴을 연상하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상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일제 때 그를 체포하였던 그 때 그 형사에게 해방후에도 다시 체포당한 노인에서 부터,
비누로 양치질을 할망정 거저로는 치약 한개라도 받지 않던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나에게 경이를 안겨 준 사람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자기의 인생에서 온몸으로 파낸 체험의 육중한 덩어리에 부딪히고 보면
나의 창백한 몇권의 책은 참으로 초라하고 가벼운 것이었다.
나는 나의 모든 개념 모든 단어를 사람들의 얼굴로 채우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 자신을 변혁하고 싶었다.

내가 만난 것은 물론 개개인의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들의 총화에서 또 하나의 만남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회와의 만남이고 역사와의 만남이었다고 생각된다.

세상의 힘에 밀리고 밀려 쓰러진 자리 그곳이 바로 교도소이다.
사회의 모순구조가 가장 첨예하게 밀집된 곳이다.
그것이 교도소의 사회적 위상이다.
해방정국의 격동을 그 한복판에서 바람맞았고
전란의 여름과 지리산의 겨울을 빈 손 맨 발로 걸어 온 사람들의 삶은
폐허처럼 초토화되어 있던 천구백년의 4·50년대의 역사를
생생하게 되살려 놓기도 하였다.
감옥은 복판이었다.
세상의 복판 역사의 복판이었다.

생각하면 나의 이 기간은 남들 처럼 길을 걸어 간 세월은 아니다.
신발 한켤레의 토지에 서서
다만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걸어 온 길을 만났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이루어 내는 우리시대의 에스프리가 숨쉬고 있었다.

나의 설합 속에는 교도소의 흙 한 조각이 간직되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좌절과 고통이 응어리진 그 흙에서
나는 수시로 우리 시대 우리 역사의 한 조각을 읽는다.

그리고 대학의 강의실에서
나는 높은 이상과 낮은 사랑의 젊음을 읽는다.
20년전의 과거이면서 동시에 미래이기도 한 젊음을 읽는다.

그리고 어제는 사진기자와 함께 찾아 간 서대문 구치소에서
벽돌 한 장을 들고 왔다.
허물어진 벽돌담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아직도 그 속에 남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송구스러웠다.
그리고 아직도 그 속에 남아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이제 세번째의 길도 첫번째나 두번째의 길과 마찬가지로
내가 선택하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이 어떠한 길이든
나는 우리시대의 가장 정직한 사람들과
그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다.

물이 흘러서 강이 되고 사람이 걸어서 길이 된다.
마라톤의 주자가 뒤를 돌아보는 행위는
기실 불안한 몸짓일 뿐이다.

그러나 한나절의 북한산 등반을 끝마치고 내려와서
하늘에 걸려 있는 봉우리들을 되돌아 볼 때의 감개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제 발로 넘은 우람한 봉우리들을 바라볼 때의 대견함은 귀중한 것이다.
몇시간의 등산도 그렇거든 하물며 우리가 살아 온 길임에랴.
우리가 걸어 온 길을 저 산봉우리처럼 선명하게 하늘에 걸어 놓고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 대견함에서 얻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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