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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1998-01-23
미디어 중앙일보

어려움은 즐거움보다 함께 하기 쉽습니다


 

"어려움을 함께 하는 일이 쉬운가, 즐거움을 같이 하는 일이 쉬운가."

 

이러한 질문을 받고 우리는 즐거움을 나누는 일이 훨씬 쉽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을 함께 한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고통을 분담할 수밖에 없지만 하 등의 고통분담도 없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양자강 유역에서 오월(吳越)이 패권(覇權)을 다투던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도와 회계산(會稽山)의 치욕을 설욕케 한 범려(范 )의 생각은 이와 반대입니다. 그는 월왕 구천을 평하여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 할 수 없는 사람"이란 말을 남기고 그를 떠납니다. 범려의 이러한 판단은 물론 구천이란 개인을 두고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단 구천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는 평범한 사람들의 성정이 대체로 그러하다는 경험이 없지 않습니다. 일감을 나누기 보다 떡을 나누기가 더 어렵다는 옛말이 그렇습니다.

 

즐거움을 함께 하기 어려운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함께'의 의미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웃고 있는 순간에는 사고(思考)가 정지한다는 연구가 있듯이 즐거움은 다만 즐거움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으로 시종 하는 것입니다, 그 탐닉(眈溺) 속에는 물(物)이 있을 뿐 인간(人間)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만남이 없습니다. '함께'의 의미가 인간적인 만남을 의미한다면 즐거움은 함께 하기가 그만큼 어렵습니다. 마치 장갑을 벗지 않고 나누는 악수처럼 체온의 교감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대체로 즐거움의 부근(附近)입니다. 내 손이 따뜻하면 네 손이 차고, 네 손이 따뜻하면 내 손이 차가운 줄을 알게 하는 맨손의 악수와는 다른 만남일 뿐입니다. 토사구팽(兎死拘烹)이란 성어(成語)도 범려가 떠나면서 남긴 말입니다. 이해(利害)로 맺은 야합(野合)이 팽(烹)을 낳습니다. 탐닉과 거품의 처음과 끝이 그러합니다.

 

설날이란 '낯선 날'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새해를 맞아 스스로 삼가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올해는 참으로 낯선 한 해를 맞고 있습니다. 겨울바람과 함께 몰아치는 경제한파가 낯설기만 합니다. 지금의 고통 뒤에 또 어떤 고통이 뒤따를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생각하면 이러한 경제한파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며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합니다.

 

고통은 대체로 위로(慰勞)를 동반합니다. 이 한파 속에도 한 가닥의 위로가 없지 않습니다. 거품이 빠진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거품이 빠지면서 때도 함께 빠지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은 즐거움 보다 함께 하기 쉽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어려움은 그것을 함께 할 사람을 그리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실상(實相)을 분명하게 직시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반성이고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인년(戊寅年)을 맞아 호랑이의 용맹으로 다시 일어서자는 결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무서운 호랑이이며 그 호랑이가 어디서 다가왔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자는 호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시 거품을 만들자는 구호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거품만 빼고 때를 빼지 말자는 은밀한 책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어려우면 어진 재상을 생각케 하고 집이 어려우면 좋은 아내를 생각케 합니다(國亂思良相 家貧思賢妻). 사람을 깨닫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가장 귀중한 삶의 가치란 바로 사람으로부터 건너오는 것임을 깨닫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입니다. 까마득히 잊었던 사람을 발견하고 그 사람들과 함께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진지(陣地)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참다운 삶의 가치를 지켜주는 따뜻한 진지를 만들어내고, 막강한 국제금융자본의 한파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진지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올해는 우리들로 하여금 근본으로 '돌아가도록'하는 통절한 각성의 한 해로 맞이하여야 할 것입니다. 잊었던 벗을 다시 만나는 해후의 나날로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중앙일보 1998년 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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