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의 기차이야기 - 레일로드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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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00-09-01
미디어 레일로드
 

내 기억 속의 기차이야기


소리로만 기억되는 기차가 있었다. 20년간 갇혀있으면서 그중 15년을 대전교도소에서 보냈다. 대전교도소는 호남선 철길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가장 가슴아프게 하는 것이 밤마다 들려오는 열차소리였다. 갇혀있는 처지에서 듣는 기차소리는 가슴저미는 아픔과 그리움이었다. '차창에 불 밝힌 저 기차는 저마다의 고향으로 사람들을 싣고 가고 있구나'하는 상념에 젖게 한다. 특히 명절이 가까워 올 때면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해져 바깥세상을 향한 그리움을 앓게 된다. 근 20년 기차소리는 그렇게, 바깥으로 향하는, 가족들 혹은 그리운 이들에게 돌아가는 귀환의 의미로, 어쩌면 시적인 정서로 내 마음에 자리잡았다.

출옥을 한 이후 번거롭기는 하지만 가능하면 기차를 이용하는 것도 그 기억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특히 대전쯤을 지날 때면 '예전에 소리로만 듣던 기차에 내가 앉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감회가 남다르다.

최근 남북간에 끊어진 열차가 이어진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또 다른 감개에 젖게 된다. 가슴에 담고 있던 감상적인 정서와는 사뭇 다른 정서-'엄청난 세계가 열리는구나'하는 생각에  그동안 내가 너무 개인적인 정서에 칩거해있지 않았나 하는 반성하게 된다.

97년 1년간 중앙일보사에서 기획한 세계기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제일 첫 여행지로 찾아간 곳이 스페인이었는데 비행기로 무려 16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곳이었다. '만약 서울-평양간 철길이 열리고 중국을, 러시아를 거쳐서 스페인에 도착했더라면 그 길이 얼마나 풍부한 여행의 정서로 가득 찼겠는가'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바로 그 철길이 지금 열리려고 하고 있다.

끊어진 철길의 복구는 당연히 우리들에게 통일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민족의 통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길은 우리의 역사가 일본과 미국을 통한 세계와의 관계형식이라는 그런 좁은 틀을 벗어버리고 대륙과 세계로 바로 나아갈 수 있는 역사의 큰 길이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끊어진 철길의 복구가 아니라 끊어진 세계와의 관계를 복구하고 새롭게 정립하는 범상치 않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역사적인 변화의 물결 속에서, 감옥시절에 간직했던 기차에 대한 감상을 떠올린다는 것은 부끄러운 추억이다. 그러나 또 한 편 생각해보면 그러한 감상적 추억이 지워버려야 할 하찮은 추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최근에 상영된 일본영화 '철도원'은 궁벽한 시골의 작은 간이역에 얽힌 인간의 삶과 그 시절의 진솔한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근대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일방 궤도를 숨가쁘게 달려온 우리의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진솔한 인간적 공간이 그 설자리를 잃었거나 아득한 주변으로 밀려나버린 아픔을 안겨준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간이역의 키작은 코스모스와 먼 곳으로 이어진 철길을 바라보며 키우는 그리움이야말로 어떠한 물질적 풍요나 속도라 하더라도 결코 가져다 줄 수 없는 인간적 진실이다.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삶의 내용이며 꿈이 아닐 수 없다.

뉴밀레니엄의 새로운 문명의 모색과정에서도, 그리고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는 통일의 도정에서도 이러한 인간적 진실이 온당하게 평가받고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망각되고 주변화된 인간적 진실, 인간적 논리를 다시 세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 세기를 향하여 달리는 새로운 열차에는 우리의 인간적 소망이 가득히 실리기 바랄뿐이다.


레일로드 200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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