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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서울 양천구 목동 자택에서 만난 신영복 선생. 선생은 이날 인터뷰에서 “역사의 변화는 쉽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서,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고 자부심 있게,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스물일곱의 신영복(74)은 육군 중위로, 육사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1968년 8월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후, 그는 “간첩”이 되었다. 대학의 독서회와 연합서클 세미나를 지도한 이력이 “반국가 단체 구성죄”로 “구성”되었다.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무기형으로 확정되었다. 그로부터 20년 20일 동안 그는 수인(囚人)이었다. 스물일곱 음력 생일날 잡혀 들어간 그는, 마흔일곱 음력 생일이던 88년 광복절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같은 날, 그가 썼던 옥중서신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다. 고대설화 속의 바리데기 공주가 자신을 버린 부모를 살리려고 저승길에서 생명수를 구해 왔듯이, 신영복은 자신을 유폐한 세상의 메마른 영혼들을 촉촉이 적셔줄 정화수(井華水)를 들고 돌아왔다.

2006년 성공회대에서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석좌교수로 강의를 계속해온 그가 최근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가 붙은 책 <담론>을 펴냈다. 그의 고전 해설을 묶은 <강의>를 펴낸 지 10년 만이다. 오랜만의 신간이 반가우면서도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투병중이라는 소식도 들렸다. 2014년 겨울학기를 끝으로 강단에 서지 않는다는 그를 어떻게든 꼭 만나고 싶었다. 신영복 선생의 서울 목동 자택으로 찾아간 날, 화창한 햇살 아래 철쭉이 눈부셨다. 그는 단정하게 재킷을 갖춰 입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영복을 만든 시간들 (※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됩니다)shin.jpg      


암 선고받고 낸 책 <담론>에 담은 고백

-편찮으시다는 소식 들었는데 안색도 좋으시고 건강해 보이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담당 의사의 말로는, 어떤 경로로 진행될지 아직 자기도 확실하게 얘기할 수 없다고 하거든요. 조심스럽긴 합니다.”

지난해 말 암 진단을 받았다. 몇 군데 전이가 된 상태라고 했다. 다행히 최근에 투약하기 시작한 약이 효과를 발휘해 기력도 회복되고 병세도 많이 호전된 상태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그동안의 강의 자료들을 모아서 이런 책도 만들었죠. 그 약을 복용하고 난 후에 건강이 훨씬 좋아져서 다시 출판사로부터 원고를 돌려받아서 교정을 한 번 더 봤어요.”(웃음)

그렇게 출간된 <담론>은 성공회대학 강의 녹취록을 바탕으로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다. 1부에서는 동양고전을 통해 본 세계 인식, 2부에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다루고 있는데, 사형수 시절의 절망과 막막함, “반목과 불신, 언쟁과 주먹다짐”으로 “하루가 팔만대장경” 같았던 무기수 시절의 이야기 등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진솔한 고백들이 많이 실렸다.

남한산성(육군교도소)에서 만난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함께 생활하던 사형수 중 다섯 명이 사형 집행되었고 한 사람은 그곳에서 타살되었습니다. 나도 물론 사형수였습니다.(210쪽)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기만을 바라던 사형수가 막상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나서 자살하기도 합니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동굴로 들어서는 막막함에 좌절했습니다.(218쪽)

-그간 신영복이라는 어른의 아우라가 너무 커서 ‘이분은 우리 같은 세인들하곤 바탕부터가 다를 거야’ 하는 거리감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 “나의 20년 수형생활은 실수와 방황,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는 대목을 읽으니 왠지 안도가 되던데요.(웃음)

“이 책에서 내 편지글이 그렇게 반듯하게 쓰일 수밖에 없는 사정도 조금 밝혔죠. 본의 아니게 그런(늘 반듯하고 정제된 사람이라는) 선입관을 주게 되어 그간 불편한 점도 없지 않았어요.”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그 긴 징역살이에서 어쩌면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 한 번 없이 반듯할 수 있었냐?’고 의아해하지만, 실제 그의 징역살이가 편지글처럼 차분하고 평화로웠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염려하는 가족들에게 애달프고 괴로운 사정을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편지를 검열하는 교도소나 국가권력 앞에, 좌절하거나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일체의 필기도구가 금지된 상황에서 그나마 글을 적을 수 있는 기회가 한 달에 한 번 엽서를 쓸 때뿐이다 보니, 한 달 내내 머릿속에서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다듬은 글들이었다.

-감옥에서 후회한 적 없으세요? ‘난 통혁당이 뭔지도 모르는데, 이게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괴감이나 회한 같은 건?

“처음엔 혼란스럽고 종잡을 수가 없었어요. 중앙정보부에서 취조받을 때까진 경황이 없더니, 며칠 뒤 서대문구치소에 들어갔는데, 거기 ‘중앙’(사동 가운데 로비)이라고 있어요. 거기서 간수부장 발을, 재소자 하나가 씻기고 있더라구요.”

-(놀라며) 재소자가 교도관 발을요?

“노예지 뭐. 교도소 특유의 그 묵직한 악취, 회색 벽과 나이 많은 간수의 발을 씻기는 젊은 재소자. 그 옆에 내가 쪼그려 앉아 있으면서, ‘역사가 썩는 듯한 교도소 냄새, 이 끔찍한 풍경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나!’ 그런 암담함을 느꼈죠. 그때는 이게 내 ‘대학시절’이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

“계몽주의 노인권력 바탕에 둔 그런 글쓰기는 지양돼야 해요
‘멘토’에 관해서도 부정적입니다
사표나 스승은 당대에 없어요
집단지성 같은 게 필요해요”

“역사의 장기성·굴곡성 생각하면
목표달성에 과도한 의미 부여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고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겁게 만들어야 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나도 어쩔 수 없는 먹물이구나! 참혹한 반성

신영복은 감옥생활 20년을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표현한다. 감옥은 그에게 ‘사회학’과 ‘역사학’과 ‘인간학’을 가르친 교실이라는 것이다. 24시간 모든 것이 공개되는 감옥은 “목욕탕처럼 적나라하게” 서로의 실체가 드러나는 공간이며, “메끼(도금) 벗겨진” 인간의 민낯을 “어항 속 붕어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속에서 첫 5년여간 신영복은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도는 존재였다. 그의 눈에 비친 다른 재소자들은 노동 의욕도 변화 의지도 없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일 뿐. 신영복은 최대한 친절하게 그들을 대했지만 동료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낌새를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도 같이 있는 재소자들이었다. 신영복은 자신만 모르는 ‘왕따’인 채로 5년을 보냈다.

-5년이 지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죠?

“많은 사람들을 감옥에서 만나고 그들 얘기를 들으면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죠. 그 과정이 그렇게 단선적이진 않아요. 방황하고 실패하고 우회도 하고…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때 내 또래, 마흔한 살짜리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친구한테 누가 접견을 왔다는 거예요. 모두 깜짝 놀랐죠. 3~4년간 아무도 온 일이 없었는데.”

-누가 왔는데요?

“누가 왔냐고 물으니, ‘웬 재수없는 녀석이 왔다’고만 하고 말을 안 해요. 나중에 자초지종을 들어보니까 자기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엄마가 자기를 삼촌네 맡겨놓곤 도시로 돈 벌러 나갔대요. 그리고 소식이 끊어졌는데 동네 사람들 얘기론 ‘너희 엄마 시집갔다’고 했다고. 근데 오늘 접견 온 남자가, 재가한 엄마가 키운 (의붓)아들이라고 그러더래요. 기분이 나빠서 ‘근데 여기 왜 왔냐? 남 징역살이하는 거 확인하러 왔냐?’고 고함을 지르니까 ‘당신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로 모시고 오지 않았으면 지금쯤 내가 거기 있고 당신이 밖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죄송해서 왔다’고 하더래요. 아, 감동이잖아요. 그럼 나는 뭔가? 나도 쟤와 같은 부모, 그런 환경에서 컸다면 지금쯤 같은 죄명으로 앉아 있을 수도 있는데. 나 자신에 대한 반성, 아주 참혹한 반성이 들었어요.”

이후 신영복은 교도소 안에서 금지된 내기축구를 하다가 다른 재소자들과 ‘빠따’를 맞았고, 예배 후에 나눠주는 떡 위문품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능청스런 ‘떡신자’가 되었다. 가르치려 드는 인텔리의 완고함에서 벗어나니 도처에 스승이 있고 친구가 있었다. 그는 이 변화를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긴 여행”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가요? 언제나 쉽고 편안한 구어체나 서간체를 즐겨 쓰시는 이유가? 선생님 글은 여느 교수들처럼 딱딱하거나 현학적이지 않고, 동네 할아버지가 느티나무 아래서 들려주는 얘기처럼 물 흐르듯 편안합니다. 그런 문체도 감옥에서 갈고닦은 노력의 산물인가요?


“어려서 대학신문에 글 쓰고 할 때와는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지식인의 글쓰기에 대해서 반성 많이 했지요. 글 쓰는 필자들은 독자를 배려해야 해요. 자기 글을 쉬운 글에 담아서 공유하는 노력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신영복은 낮은 곳으로 다가가 말을 건네고 소통하는 방법을 부단히 고민하고 실험해 왔다. 서화(書畵)는 많은 사람과 깊이있게 교감할 수 있는 효과적인 매체였다. 그의 서화는 책으로도, 달력으로도 나왔고 손수건이나 티셔츠, 우산으로도 만들어졌다. 그가 직접 그린 삽화에 그가 개발한 어깨동무체 혹은 민체(民體)라 불리는 글씨, 그리고 짧고 강렬한 우화와 잠언들은, 심오한 사상이 아름답고 친근한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고 일상의 실용품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원효는 법당에 앉아 경전을 외는 대신, 마을마다 표주박을 두드리고 춤을 추며 불가의 가르침을 담은 노래를 퍼뜨리고 다녔다. 필요한 곳에 서화와 글씨를 헌사하고 토크콘서트로 전국을 돌아다닌 사상가 신영복의 족적도 그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을 따르는 제자는 많지만 선생님처럼 대중과 직접 소통할 줄 아는 제자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본인들이 깨닫고 꾸준히 노력해야겠지요. 앞으로 계몽주의적인 노인 권력이 바탕에 깔린, 그런 글쓰기는 지양될 거라고 난 생각해요.”

-계몽주의가 왜 나쁩니까?

“허허, 그게 잘난 사람들이 하는 거거든요. 계급적 편견이라고 봐야 되죠. 자기 가치를 기준으로 타자(他者)를 끌고 들어가는 거잖아요. 계몽주의 프레임은 허물어야 해요. 그런 면에서 전 ‘멘토’에 대해서 좀 부정적으로 봅니다.”

-왜요? 요즘 멘토와 힐링의 시대라는데요.

“멘토가 계몽주의의 변형이잖아요. 멘토라는 게 대개 연배가 좀 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가치를 전하는 건데, 지금 젊은 사람들이 앞으로 20~30년 후에 살아갈 세계에 대해서 20~30년 전의 경험을 기준으로 제시한다는 거 자체가 오히려 진보를 방해하는 거 아닌가요?”

-많은 이들이 선생님을 ‘이 시대의 대표적 스승, 대표적 멘토’라고 부르는데요.

“거대담론도 사라지고 존경했던 사람들의 추락도 많이 보고 하니까 뭔가 사표(師表)로 삼을 만한 대상을 성급하게 구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사표나 스승이라는 건 당대에는 존립할 수 없는 겁니다. 어떤 개인의 인격 속에 모든 게 다 들어간 사표가 있다면 공부하긴 참 편하겠죠. 그렇지만 그건 낡은 생각이에요. 집단지성 같은 게 필요하고 집단지성을 위한 공간을, 그 진지를 어떻게 만들 건가가 앞으로의 지식인들이 핵심적으로 고민할 과제예요.”

한번도 안 바뀐 노론 권력

-이번 책에서 제시하신 ‘원형 인식모델’은 우리 사유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 같습니다. 토대와 상부구조를 기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음과 양, 화(和)와 동(同), 이상과 현실, 좌와 우를 둥근 원 안의 대칭선상에 놓으셨지요. 대비되는 것들은 서로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것이라고 하셨고요. 그 말씀엔 다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막상 현실을 보면 이게 쉽지가 않아요. 카운터파트가 격이 너무 떨어져요. 어느 정도 격이 맞아야 상호보완이고 뭐고 하지 않겠습니까?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탐욕과 독선이 도를 넘은 지 오랩니다.


“차이라는 건 단순히 공존하는 데서 끝내는 게 아니고, 자기 변화의 시작으로 삼아야 해요. 차이를 자기 변화의 학습교본으로 삼고 실천하는 것, 그게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에 이은 ‘가슴에서 발(실천)로의 긴 여행’이지요. 근데 우리 현실에서 좌-우, 남-북, 진보-보수, 이런 대비 관계가 과연 상생적인 대비 관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냐? 너무나 비대칭적이어서 도대체 지양(止揚)을 할 수 있는 상생의 파트너가 아니지 않으냐? 그럴 수 있어요. 근데 어느 나라 역사에도 그렇게 이상적인, 완벽한 평형을 유지하는 대비 관계는 극히 드뭅니다. 우리만 하더라도 분단과 외세, 그리고 임란 이후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노론 권력의 오래된 지배구조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해 왔잖아요.”

-노론 권력이라고요?

“예, 임란 이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몰아내고 나서 지금까지 우리나라 지배권력은 한 번도 안 바뀌었어요. 노론 세력이 한일합방 때도 총독부에서 합방 은사금을 제일 많이 받았지요. 노론이 56, 소론이 6명, 대북이 한 사람. 압도적인 노론이 한일합방의 주축이거든요.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때도 행정부만 일부 바뀐 거지, 통치권력이 바뀐 적은 없습니다. 외세를 등에 업고 그렇게 해왔지요. 대학, 대학교수, 각종 재단, 무슨 시스템 이런 것들 쫙 다 소위 말하는 보수진영이 장악하고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어쩌겠어요? 그렇게 비대칭적으로 자기를 강화하고 군림하는 집단은 다 자기 이유가 있는데. 그런데 그런 중심부 집단은 그게 또 약점이 돼요. 중심부는 변방의 자유로움과 창조성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인류문명의 중심은 부단히 변방에서 변방으로 옮겨왔잖아요. 그런데 이런 역사적 변화는 그렇게 쉽게 진행되는 게 아니에요.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작은 숲(공동체)을 많이 만들어서 서로 위로도 하고, 작은 약속도 하고, 그 ‘인간적인 과정’을 잘 관리하면서 가는 것!”

-그 말씀 들으니 조금 위로가 되네요.(웃음)

“저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아마 이 선생보다 더 속상할걸요, 속으로는.(웃음) 근데 엄청난 아픔이나 비극도 꼭 그만한 크기의 기쁨에 의해서만 극복되는 건 아니거든요. 작은 기쁨에 의해서도 충분히 견뎌져요. 사람의 정서라는 게 참 묘해서, 그렇게 살게 돼 있는 거지요.”

큰 아픔을 같이 짊어지고, 소소한 기쁨을 같이 나눌 이웃 만들기, 그게 신영복이 주장해온 ‘더불어숲’의 정신이다. 그 숲 속, 그의 너른 나무그늘 안에 우리 모두 오래오래 머물 수 있기를!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