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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07-03-01
미디어 레이디경향_김성욱기자
‘처음처럼’ 늘 푸른 선생님, 우리 선생님 신영복 교수
“선생의 입장도 바다처럼 낮은 곳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난 2월 7일,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 교수가 동료 교수들과 함께 미뤄두었던 시화전을 열었다. 어려운 말을 쉽게 하며 늘 낮은 곳에 머물러 있는 우리 시대의 스승 신영복 교수를 만났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처음처럼

선생님, 선생님께서 강단을 떠나신 지 벌써 반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고작 반 년 가지고 뭘 그리 호들갑을 떠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그 넉넉한 품에 안겨본 사람은 압니다. 선생님의 떠난 빈자리의 허전함을요. 그러던 차에 반가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애초 정년퇴임식과 함께 진행하려 했던 시화전이 2월에 열린다고 하더군요. 올 초 신문에서 시화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한 달여 동안 목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님을 만나는 것처럼 더디게 흘러갔습니다. 시화전이 열리는 첫날인 지난 2월 7일, 저는 선생님이 계시는 인사동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3년 전부터 스무 명 정도의 교수님들과 붓글씨를 함께 썼어요. 당시에 동료 교수님들 사이에서 ‘신 선생 퇴임하기 전에 붓글씨 배우자’는 얘기가 오갔던 모양이에요. 원래는 작년 퇴임식 때 학내에서 간단하게 전시회를 열 계획을 했는데,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좀 미뤄졌지요.”

아담한 전시장 한편에 앉아 계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여전하십니다. 선생님의 글씨와 그림은 말할 것도 없고 제자 교수님의 글씨와 그림 또한 선생님의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할아버지에게 처음 붓글씨를 배우시고 감옥에서 지금의 글씨체를 완성하셨다지요. 저희 같은 사람은 언뜻 이해가 안 됩니다. 캄캄한 감옥 안에서 글씨를 쓴다는 게 말이죠.

“어렸을 때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에게 처음 붓글씨를 배웠어요. 그리고 4.19 이후에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을 때 다시 글씨에 대해 관심을 가졌지요. 지금과 같은 글씨체를 완성한 것은 감옥에 있을 때입니다. 감옥에서 낮에는 공장 일을 하고 밤에는 개인적인 시간을 갖게 해주었어요. 당시에 기독교 방, 불교 방, 동양화 방 같이 특별활동이 있었지요. 저는 운이 좋게도 거기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날 우스갯소리로 “제자 교수님 중에 누가 제일 낫더냐?”고 여쭈었더니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 황희 정승께서 소가 들을까 봐 귀에 대고 작게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요. 누가 제일 낫다, 못한다는 얘기는 하는 게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다 자질이 뛰어나신 분들이세요. 모두 바쁘신 분들이라 시간을 많이 낼 수 없었던 게 아쉬울 뿐이죠.”

최근 2~3년 전부터 출판 영역에서 갤리그래피가 대중화되고 있습니다. 전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따금 손글씨로 책 제목을 쓰거나 습작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합니다. 캘리그래퍼들에게 자극을 준 것이 바로 선생님이라고 하더군요. 선생님께서 출옥 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부터 최근 작 「처음처럼」까지 모두 자신의 서예 작품을 표지에 올리는 것을 캘리그래피의 대중화 시점으로 보는 분도 많습니다. 때문에 선생님의 글씨에 많은 캘리그래퍼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캘리그래피요?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물론 제 글씨를 임서하시는 분이 몇 분 계십니다. 하지만 전문적으로 그런 일을 업으로 삼으시는 분들은 아닙니다. 본의 아니게 제자가 많아졌는데, 저로서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뛰어난 기교는 마치 어리석은 듯합니다. / 대교약졸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서도입니다. / 서도의 격조는 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 졸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 졸 그 자체가 기가 되고 향이 됩니다. / 어린아이로 되돌아가는 환동을 서도의 으뜸으로 칩니다. / 어수룩함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도 그렇게 쓸 수 있겠다는 / 자신감을 갖게 하고 격려합니다. /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최고의 예술입니다.
- 대교약졸

많은 사람들이 쉬운 말을 어렵게 하며 높은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한데 선생님은 늘 어려운 말을 쉽게 하며 낮은 곳에 머물러 계십니다. 늦은 저녁 선생님의 쉬운 말들이 담겨 있는 책을 읽고 있으면 달이 지고 해가 뜨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그러다가 문득 어리석은 질문을 떠올려봅니다. 선생님도 여느 글쟁이처럼 글을 쓰는 동안 고통을 느끼실까? 무지한 저는 선생님께서 글을 너무 쉽게 쓰실 것 같습니다. 하루 일을 마감하고 저녁에 일기를 쓰듯이 말입니다.

“쉽게 읽혔다면 다행인데, 저도 글을 쓰는 게 쉽지 않아요. 나름 많은 공력을 들여서 쓰고 있습니다. 단어 하나부터 독자 호흡까지 생각하면서 글을 다듬습니다. 글씨는 아주 허술하면서도 그 속에 농밀한 무게와 내용을 담아내는 것을 으뜸으로 칩니다. 저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만 아직 그렇게 되지는 못한 게 사실입니다.”

선생님의 글씨를 보고 있으면 너무나 부럽습니다. 하여 선생님께 물었지요. 어떻게 하면 글씨를 잘 쓸 수 있느냐고. 그러자 선생님께서 글씨를 잘 쓰는 것은 인생을 잘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글씨는, 쓰는 사람이 살아오면서 키워온 정서와 삶의 철학이 담겨 있어요. 사람과 전혀 다른 글씨가 나오기는 힘들죠.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으면 글씨 속에 많은 경험과 무르익은 생각들이 알게 모르게 배어 나옵니다. 그래서 글씨는 나이가 지긋하게 된 후에 배우는 게 좋아요. 잘 쓰는 비결도 그래요. 자기 인생을 잘 사는 것과 다르지 않죠. 글이나 그림, 글씨에는 성품이 묻어나죠. 마음속에 있는 것을 종이 위로 내놓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선생님께서 글 쓰는 게 어렵다고 하시니까 한편으로는 ‘엄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꼭 글을 쓰는 것 말고도 세상 일이 다 어려울 거예요.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글, 글씨, 그림을 만들어낸 당사자들은 상당히 오랜 시간 고통과 불멸의 밤을 보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성품은 글씨 속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런 선생님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 쉬운 말을 어렵게 하며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분들입니다.

“허허허, 그런가요? 바다를 배우는 까닭은 바다가 시내보다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죠. 저는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도 낮은 곳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쉬운 언어로 쉬운 담론들을 제시하는 것이 시내를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진정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노인 목수가 그리는 집 그림은 충격이었습니다. /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반대였습니다. /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습니다. /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목수의 집 그림

보통 사람들은 집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립니다. 한데 선생님께서는 주춧돌부터 그리십니다. 물론 선생님께서 처음부터 주춧돌을 먼저 그리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도 처음에는 지붕부터 그리셨다지요. 노인 목수을 만나기 전까지는요.

“감옥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제 자신이 갖고 있는 정서라든가 사고방식이 대단히 관념적이란 걸 깨달았어요. 감옥에 있는 동안에 목수의 집 그림이라던가 이러저러한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나 자신을 반성하고 새롭게 바꿔가는 노력을 하게 됐죠. 20년 동안 상당히 많은 부분 자기성찰도 하고 바꿔가기도 했어요. 그래서 가끔은 감옥에 있던 20년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 이름 붙이기도 합니다. 대학 시절이란 것은 나 자신을 새롭게 성찰하고 재조명하는 기간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요즘은 선생님이 보고 싶은 마음에 일주일에 한 번은 친구를 만나 술을 한 잔씩 합니다. 그곳에 선생님이 계시니까요.

“소주 브랜드 회사 대표와는 잘 아는 친구 같은 동생이에요. ‘처음처럼’을 소주 브랜드로 하고 싶다는 얘기를 듣고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익을 장학금으로 기증했죠. 그런데도 한동안 ‘처음처럼’이 상업적으로 사용된다는 게 약간 어색했어요. 요즘에는 민체(民體)인 제 글씨가 가장 서민적인 술, 소주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운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탄생 배경이 있어서인지 아무튼 소주가 굉장한 히트를 쳤습니다.
“술이 맛있어서 그렇겠지요. ‘처음처럼’이라는 화두와 글씨가 주는 이미지가 한몫을 했다면 감사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서민 곁으로 보다 가까이 갔다는 생각에 상당히 흐뭇합니다.”

선생님은 어린 시절 노트의 첫 장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뜯어내고 다시 쓰기 일쑤였다고 들었습니다.
“그 시절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분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제가 비교적 심한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첫 장은 잘 쓰는데, 그러한 정성으로 두 쪽 세 쪽 정리를 하지 못하니까 드러내기 일쑤였죠. 그런데 징역살이를 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어서 그런지 이제는 안 그래요.

잘 못 쓴 노트도 그 속에 나름 담겨 있는 추억과 실패도 애정을 갖고 끌어 안지요.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가짐이 한결같기가 참 어렵습니다.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난관에도 부딪히게 되고 장애도 넘어야 합니다. 제가 ‘처음처럼’이란 화두를 던진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처음과 같은 마음을 간직하기가 그만큼 어려운 게 우리네 삶이까요. 저는 제가 던지는 많은 글들이 자기 삶을 한 번쯤 돌이켜 보는 성찰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여행은 떠남과 만남입니다. / 떠난다는 것은 자기의 성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며, /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대상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여행은 떠나는 것도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 여행은 돌아옴입니다. / 자기 자신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 우리의 아픈 상처로 돌아오는 것일 뿐입니다. -여행

선생님께서 17년 정든 캠퍼스를 떠나시던 날, 성공회대 야외무대 ‘1만광장’은 환호성으로 뒤덮였습니다. 그날 광장을 가득 매운 청중은 선생님의 아름다운 퇴장에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더 숲 트리오’ 소속 동료 교수님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상록수’를 부르며 박수에 화답하셨죠. 한데 선생님께서는 ‘축하’란 말이 서운하셨다구요?

“우리사회에서는 비교적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가는 경우가 드물죠.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고맙게도 제자들과 주위 교수님들께서 퇴임식을 참 다채롭게 꾸며주셨습니다. 한데, 저는 ‘축하한다’는 말이 처음에는 서운했습니다. 속으로 ‘빨리 나가기를 바랐나?’란 생각이 들더라구요(웃음).”

사진은 지난 시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선생님은 사진이 많지 않으십니다. 스무 해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선생에게는 저서에 넣을 작은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으십니다. 정년퇴임을 얼마 남겨두고, 선생님께서는 “다 털어버리고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퇴임하고도 바빠서 아직 제대로 된 여행은 다녀오지 못했어요. 사실 갇혀 있는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입고 먹는 것보다 어딘가에 가고 싶은 것입니다. 다행히 저는 그동안 신문사에서 진행하는 국내 기행, 해외 기행 등을 통해 여행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일을 가지고 떠나는 것 말고 부담 없이 떠나는 여행을 하고 싶었어요. 정년퇴임하면, 그동안 감옥에 있노라고 어디 못 가고 출소하고 바로 교단에 서서 또 미뤄놓은 여행을 떠나고 싶었어요. 차를 몰고 어디론가 시원하게 떠나야지. 나 혼자만 떠나야지 했는데, 세상살이가 마음처럼 그렇게 쉽지 않더라구요. 여행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으로 조금 더 뒤로 미뤄놨어요.”

선생님께서는 퇴임 후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작은 정자가 있는 곳에 살고 싶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도 몇 년 후로 미뤄질 것 같습니다.

“학교 측 요구도 있고 후배 교수도 좀더 학교에 같이 있어달라고 해서. 정년퇴임 후에도 한 강좌를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교를 떠난다는 아쉬움이 조금 덜 합니다. 그동안은 사회과학계론, 정치, 경제, 고전강독을 강의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이론을 소개하기보다는 내가 잘할 수 있는 내 글과 내 이야기를 학생들과 공유하려고 합니다. 곧 ‘신영복 함께 읽기’라는 강좌가 개설됩니다. 신영복의 글들을 선별적으로 모아서 교재로 만들고, 신영복의 글을 신영복과 함께 읽는 강좌입니다. 그 글을 쓸 때 동기라던가 그 글에는 담지 못했지만 생각에 묻어뒀던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박형주

편집후기
인터뷰를 끝내고 사진을 찍을 때, 신영복 교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사진작가가 이러저러한 주문을 해도 역시나 같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쑥스러운 사진 찍기가 계속되자 신영복 교수는 참다못해 손을 저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날 함께 자리한 동료 교수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할 때, 그제야 긴 시간 동안 기다리던 웃음을 볼 수 있었다.

Profile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신영복 교수는 1968년 육군사관학교 경제학 강사로 있던 중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 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해 17년간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 정년퇴임 후 이 대학에 석좌교수로 재직.

[레이디경향/2007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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