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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15-04-20
미디어 예스24 채널예스

‘마지막 강의’ 『담론』 펴낸 신영복 선생

신영복 『담론』 출간 기념 간담회


신영복 선생의 강의가 끝났다. 이에 대해 선생은 “아마 강의 했을 때 느꼈던 강의 특유의 경험들이 그리워서 교실이 아닌 다른 형태의 만남들이나 담론의 장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생각해요.”라고 웃으며 답했다. 아직 아쉬워하긴 이를 것이다.


글ㆍ사진 | 신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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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이후 10년 만이다. 신영복 선생의 ‘마지막 강의’ 『담론』이 출간되었다. 성공회대학 강의 녹취 원고를 저본으로 한 이 책은 선생이 들려주는 ‘관계’에 대한 탈근대적 인식이 깊이 있게 담겨 있는 신영복 선생 사유의 정수를 보여준다. 근대와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존재론’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하고, 스스로 발 딛고 설 수 있도록 손 내밀어 주는 선생의 가르침이 가득하다. 『담론』에서 선생은 동양 고전의 풍부한 사상과 더불어 자신의 기나긴 감옥 생활을 통해 얻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울림 있게 전한다. 인간 그 존재 자체에 대한 성찰,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찰뿐 아니라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이르기까지 폭넓고도 묵직하게 전하는 선생의 가르침은 자본주의 사회에 매몰된, 역사적 관점을 잃은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되기에 충분하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존재 형태가 도시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상품교환 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가 상품교환이라는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인간관계, 만남이 없는 인간관계란 사실 관계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유해 식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우리 시대의 삶은 서로 만나서 선線이 되지 못하고 있는 외딴 점點입니다. 더구나 장場을 이루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110쪽)

 

특히 ‘관계’ 안에서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습관적 사고에 커다란 방향 전환을 일으킨다. 사회 문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대안담론의 핵심’으로써의 ‘관계론’을 말하기 때문이다. 선생의 말은 어떤 큰 목소리보다 잘 들렸고, 선생의 생각은 어떤 젊은이보다 젊었다. 강의실에서 더 만나지 못하는 미안함을 책으로 대신한다는 신영복 선생. 『담론』 출간을 기념해 가진 간담회에서 들려준 소중한 이야기들을 채널예스 독자들에게 전한다.

 

신영복 선생이 말하는 근대사회의 대한 담론 ‘관계론’


‘관계론’에 대해서 말하셨습니다. 관계의 어떤 점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살아오면서 느꼈던 생각들을 최종적으로 종합해서 ‘관계론’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했어요. 감옥에서 공부했던 것이 고전 외에도 사람 공부 같은 것들이 있는데, 공부를 하면서 늘 화두처럼 떠올랐던 것이 있습니다. 근대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에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것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소위 말하는 서양 근대사의 기본적 패러다임인 존재론, 자기 존재를 중심에 두고 존재성을 강화해나가는 이런 패러다임이 근대사회의 기본적인 운동이지 않는가 생각해요. 근대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인데요. 자본주의는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는 사회죠. 자본이라는 것이 자기 증식하는 것이잖아요. 자기를 키우는 것이죠. 자본(資本)의 자(資)자가 그런 의미잖아요. 개인의 존재성을 강화해나가는 논리가 사실은 근대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 크게는 1, 2차 대전에 이르기까지 이런 문제점들을 만들어 낸 게 아닐까 생각해요. 이걸 뛰어넘는 대안적인 새로운 대안담론의 핵심이 ‘관계론’이라는 생각에서 구상하게 되었고요.

 

관계라는 것은 단순한 일반적인 관계는 아니에요. 세계 인식의 기초가 되는 소위 양자역학에서도 어떤 물질이라는 단일한 존재성을 승인하지 않잖아요. 불변의, 배타적인 입자형태의 물질성을 인정하지 않고, 여러 조건에서 복잡한 네트워킹이 만들어내는 어떤 확률 가능성으로서의 물질이 양자역학의 물질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맺고 있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인간적인 관계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어낸다는 논리로,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인간 관계론을 뛰어 넘는 대단히 본질적인 관계론으로 발전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관계 조직’이라는 것을 썼어요. 관계 자체가 존재성을 갖는 건 아니고 부단히 관계를 조직하고, 해체하고, 또다시 조직해야 한다. 유목주의적인 사고가 중요하다 말을 했죠.

 

탈근대적 얘기를 하고 있는데, 소재가 동양 고전이라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동양 고전을 통해 전통적 가치가 아니라 새로운, 탈근대적인 가치를 발견하셨어요.


고전 공부를 실증주의적인 독법으로 하는 것을 나는 반대해요. 과거에 어땠는가 하는 역사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역사에서’ 공부한다고 하잖아요. 그런 관점이라면 역사나 고전에 대한 관심도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사회, 현재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근대사회의 대안 담론으로서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전을 봤어요. 고전 중에 관계론적인 담론이 풍부하게 담겨있는 부분에 주목하게 되고, 그걸 중심으로 고전 독법을 만들게 됐죠. 실증주의적인 사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독법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일 수도 있다고 보지만요, E. H. 카도 그랬지만 나는 역사라는 것은 ‘다시 쓰는 현대사다’라는 입장에 동의해요. 역사뿐 아니라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현재와는 다른 미래를 만들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잖아요. 그런 관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다행히 많아서 그동안 강의를 꾸준히 읽어준 게 아닌가.(웃음) 그런 자위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공부를 많이 하긴 하지만 정보를 얻는 차원 외에 자기 생각을 찾는 공부는 아닌데요. ‘머리-가슴-발’의 순서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 그런 것들이 선생님이 생각하는 공부의 방법인가요?


순서이기도 하고 방법이기도 해요. 서울대학교에서 특강을 했는데, 교수 패널 한 분이 인류 역사는 가슴에서 발, 그리고 머리로 발전해왔는데 선생님은 왜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발로 가야 한다고 반대로 얘기하느냐고 했어요.(웃음) 맞아요. 원시 사회에서는 발로써 세계를 인식했잖아요. 그게 나중에는 추상적인 것까지 진행했다, 아마 그런 과정으로 보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요. 그런데 그게 일방적이잖아요. 나는 세계 운동이라는 것은 overdetermination(중층결정), 이쪽 화살표도 있고, 저쪽 화살표도 있고, 여러 개의 화살표가 여러 방향에서 유효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때문에 반드시 역사가 발에서부터 머리로 왔다고 생각하지 않죠. 중간에 수많은 inter-comunication, overdetermination이 있었다고 보고 있죠.

 

특히 ‘머리-가슴-발’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소위 근대 사회의 주체라는 것이 자기 주체적인 주체가 아니잖아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포섭 기제가 엄청난 힘과 정교성을 갖고 개인을 포획해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머리로부터 탈문맥하는 것이 근대사회를 뛰어 넘는 가장 출발점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존재론과 관계론을 대비 했고요. 제가 대비형식을 많이 써요. 동양적인 사유 형태인데요. 대비라는 것이 관계론의 가장 단순한 형태예요. 대비는 두 가지 내지 세 가지 정도 하잖아요. 관계론은 존재론과 일차적으로 대비고, 그 다음을 뛰어 넘는 새로운 세계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죠. 책도 처음에 양해를 구했어요. 선형적인 논리를 갖고 강의를 진행하지 않는다는 걸 보시면 아실 거예요. 띄엄띄엄, 여기저기, 그렇게 우연의 점들을 찍어 가는데 여러분들이 그 우연의 점들을 서로 연결시켜서 ‘아, 이게 우연이 아니고 인연이구나’ 이렇게 발견하라고 했어요. 우리 사고도 아마 그런 것 같아요. 대비 형식에서 시작하지만 이 대비를 선형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말고 내가 자유롭게 장(場)을 만드는 것, 아장스망(agencement)이라고 하는 장을 만드는 그런 사유 형태로 가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서 책도 대학교 교수들이 하는 강의 형식을 많이 무너뜨렸어요. 처음부터도 일단 계몽주의 프레임을 깨뜨리자 생각했죠. 또한 책 제목이라든가 책 디자인에 대해서도 일체 관여하지 않았고요. 계몽주의라는 것은 낡은 프레임이에요. 노인 권력이다, 그렇게 얘기했죠. 우리가 50년 전의 생각으로 컨트롤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 식의 계몽주의 멘토, 저는 반대입니다. 학생들이 갖고 있는 강의라는 프레임도 깨자는 거였죠. 학생들은 뭔가 정답이 있어야 돼요. 그야말로 논리적이고 선형적인 그런 형태의 지식 외에는 이 사람들이 소화하거나 발견할 줄 몰라요. 그래서 그 부분을 깨고 자유롭게 얘기하자, 그래서 책도 어떤 데는 익숙한 논리적인 형식이 있는가 하면, 어떤 데는 조금 애매한 시(詩)적인 서술 형태도 있고, 아니면 이야기로만 쭉 말하는 부분도 중간에 들어가 있기도 해요. 우리들의 사유를 내가 글로써만 얘기하는 것보다 오히려 책 전체로 이렇게 보여주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어요. 

 

(전략)사실 ‘관계’는 ‘세계’의 본질입니다. ‘세계는 관계입니다.’ 세계는 불변의 객관적 존재가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양자 물리학이 입증하고 있는 세계상입니다. 세계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은 뉴턴 시대의 세계관입니다. 입자와 같은 불변의 궁극적 물질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입자이면서 파동이기도 하고 파동이면서 꿈틀대는 에너지의 끈(string)이기도 합니다. 끈이 아니라 막(membrane)이기도 합니다. 불변의 존재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존재는 확률이고 가능성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세계관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펼치는 ‘접속’도 이러한 세계관에 발 딛고 있습니다.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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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멘토에 반대한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젊은 사람들은 선생님의 말을 더 듣고 싶어 할 것 같습니다. 선생께서 젊은이들에게 어떤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도 궁금해 할 것 같은데요.


갇히지 말라는 것이고, 전혀 필요 없다는 건 아니었어요. 고전 읽어야죠. 고전이라는 것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책은 멀리서 찾아온 벗입니다.’라고 쓰기도 했어요. 멘토에 갇히면 안 되고 거기서부터 다시 뛰어 넘어야 해요. 책에도 썼지만, 저자는 끊임없이 죽고 독자는 부단히 탄생하죠(웃음). 대개는 독자들도 저자들에게 좀 불손해도 돼요. 왜냐하면 독자와 저자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성이 있어요. 예를 들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한 쪽짜리 글이 있잖아요? 그걸 나는 한 달 동안 쓴 거잖아요. 이번 달에는 뭘 써야지 하고 한 달 동안 쭉 생각해서 정리해서 썼는데, 독자는 그걸 한 2, 3분 만에 읽잖아요. 한 달과 2, 3분의 차이가 깔려 있는 거예요. 독자는 ‘이 저자는 굉장한 사유의 영역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고, 반대로 필자는 은근히 그걸 숨기면서 자기의 정신적 우월함, 우월한 지위를 과시하려 할 수 있는데, 그거 하면 안 돼요. 독자도 대단히 불손해도 돼요. 그걸 멘토라든가 이런 계몽적 프레임에 갇히면 안 됩니다. 깨뜨려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서구 사회보다 굉장히 노인 권력이 지배되어 있어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도 그 부분이 훨씬 더 힘들어요.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해서도 말씀하셨고, 지금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도 한 개인이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측면을 계속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주체성을 우리가 먼저 회복해야 돼요. 물론 우리가 사표(師表)가 있으면 좋지요. 사람의 형태로 배우는 게 제일 쉽잖아요. 어린이들도 놀이터에 가 보세요. 금방 어른 손 떠나서 애들끼리 모이죠. 집에서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반려견도 데리고 나오면 얼른 줄만 없으면 강아지들끼리만 놀아요.(웃음) 그런 식으로 사람의 경우는 사람이 가장 학습하기에 좋은 사표긴 해요. 그러나 한 사람에게 전인격적인 게 다 들어있는 경우는 없잖아요. 다 들어있으면 참 좋죠. 책 한 권만 읽으면 다른 거 공부할 필요가 없듯이 말이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없어요. 그런 점에서도 좀 비판적일 필요가 있어요. 특히 늘 주장하지만 당대 사회에는 사표가 없어요. 당대 사회는 없어요. 충무공 이순신? 당시엔 죄인이었잖아요. 다산 정약용? 지금은 우리가 그 시절 다산 정약용이나 연암 박지원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그 시대에 대한 우리의 자부심이고 위로잖아요. 그 시대에는 사표 아니에요. 없어요. 당대 사회는 적대적인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용납되지가 않아요. 그 시대가 지나가서 역사적으로 조망하면 ‘아, 옳았구나’를 알지만 말이죠. 그만큼 우리가 그 시대를 뛰어넘는 게 어렵다는 거죠.

 

개인이 외부와 단절된 상황에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를 해야 하고, 그런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지금 주어진 현실에서 본다면 그나마 다수가 접속할 수 있는 공간이 학교일 텐데 학교라는 공간은 붕괴일로에 있습니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인 공간, 시간, 장소를 확보할 수 있을까요?


그게 과제예요. 대학이 더 이상 교육 현장으로, 특히 대학 본연의 칼 야스퍼스(Karl Jaspers)가 얘기한 정치권력이나 다른 권력이나 현실로부터 독립한 이런 공간이 아니잖아요. 이런 상태에서 학교가 거의 뭐 취업 준비 공간 같이 되어 있죠. 이런 환경에서 젊은 사람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어떻게 그런 공간을 확보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 큰 과제예요. 우리 교실이 그런 역할을 하길 바란다고 하면서 ‘우정은 에피쿠로스의 음모다’ 그랬듯이, 그런 작은, 주류 지배담론에 저항하는 음모의 작은 숲들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붓글씨로 ‘더불어숲’이라고 쓰고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더불어숲이 되어 지키자.’한 거예요. 그 숲이 학교이기도 하고, 숨통 트이는 공간이기도 하겠죠. 뭔가 작은 숲을 만드는, 이런 것들을 여러 형태로 만들어내는 게 필요합니다. 시집에서 시어머니에게 꼼짝 못하던 며느리들이 우물가에서 모여서 아주 참신한 자기들의 공간을 만들어내듯이 그런 억압적인 데 있는 사람들이 그걸 만들어내야 해요. 만드는 노력들을 여러 가지로 해야 해요. 직장 다니면서도 하고, 자기 공간 공동체로써 만들어내기도 하고, 그럴 필요가 있지 않는가 생각해요. 그런 작은 숲들이 서로 열어놓고 만나면 나중에는 상당한 사회적인 역량으로 증폭되기도 해요. 역량이라는 것은 작으니까 가능해요. 어떤 객관적 시기나 조건이 되면 엄청난 역량으로 증폭되죠. 그래서 부지런히 군데군데 숲을 만들자(웃음)고 말해요. 두 사람만 만나도 숨통 트이는 사람 있잖아요. 그렇게 서로 숨통 트여가며 서로 지내야죠.

 

오늘날 인문학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와 현대 사회에 필요한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사회가 200, 300년 동안 근대사회를 그야말로 그림자를 추월해야 할 정도의 어떤 질주를 해왔잖아요. 인문학이란 것이 이 과정에서 아마 생긴 반성이지 않을까 싶어요. 농담이지만, 인문학 강의는 지금 병석에 누워있는 이건희 회장이 가장 많이 시키고 있다고 하기도 하더라고요. 우리가 왜 그렇게 달려왔는지, 톨스토이가 묻듯이 과연 빵은 얼마만큼 필요한지, 우리는 왜 사는지, 이런 대단히 중요한 질문들을 지금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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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서 말하려고 했던 것


원래 책을 안 내려고 했다는데 왜였나요?


(웃음)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요. 자기 생각을 다 담을 수 있는 책을 만든다는 게 참 어려워요. 이번에도 이 책도 쓰면서 내가 자기 검열을 어느 수준까지 해야 되느냐, 그런 고민도 많이 했고요. 자기 책이 전혀 다르게 읽힌다는 이유로 <파인딩 포레스터>라는 영화에서 작가가 절필했잖아요. 그런 이유도 있고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검열을 고려한 글이라고도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책을 본 사람들을 만나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는데 『담론』에서 솔직한 글을 쓰려고 한 것인가요?


이번에 비교적 많이 넣어두었어요. 예화도 그렇고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짧은 엽서 글이 하나 있으면 그 글과 행간에는 숨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어요. 누구를 만나고 생각하고 받았던 충격을 그렇게 정리한 것이었죠. 이번에는 비교적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글을 교재로 해서 쓴 게 대여섯 편정도 돼요. 그 글이 쓰인 배경 같은 걸 많이 얘기를 하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얘기도 소개하고 그랬어요. 2부가 주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나 예전에 썼던 글들에서 다 담지 못했던 여러 이야기나 일화들을 많이 담았어요.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의 심경과 당시 상황들에 대한 것들은 그간 얘기를 많이 하지 않았던 부분들인데 그것들을 많이 포함시켰죠.
 
책에는 쓰지 않았는데요. 교도소에서 한 달에 한 번 영화를 보여주기로 되어 있어요. 하지만 두 달에 한 번 어쩌다 보여주죠. 그것도 옛날 영화만 보여줘요. 징역 10년 살았을 때도 밖에서 봤던 영화를 갖고 와서 보여주고 그랬어요. 교회당에 모아놓고 옛날 영화를 보여주는데, 그때는 영화가 표현하는 방법도 참 유치했어요. 꽃이 확 핀 걸 보여주고, 눈 내리는 장면을 보여주고는 큰 자막으로 ‘10년 후’ 이렇게 해요.(웃음) 그런데 그 ‘10년 후’라는 큰 자막이 나오면 교회당 가득 재소자들이 ‘와!’ 그래요. 내 징역도 영화 속에서처럼 저렇게 10년이 후딱 갔으면, 그런 뜻이지요. 한 번은 옆 사람을 붙들고 ‘내일 아침에 10년 후가 되었으면 좋겠냐?’ 했더니 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해요. 단 조건이 하나 있다, 네가 35살인데 내일 아침에 45살이 돼서 나가는 거다, 그랬더니 언뜻 대답을 못하는 거예요. 인생의 10년을 잘라내는 것에 대해서 아주 머뭇거리는 거예요. 그 10년이라는 게 감옥에서의 10년이잖아요. 그래도 딱 없애기에는 미련이 있는 거죠. 하물며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데 어떻겠어요. 우리는 지금 자본이 주입하는 욕망에 의해 과도하게 뭐가 중요하고 뭐가 감사한지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책만 본 독자들에게 오해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번 책에서 그 오해를 풀고자 했나요?


오해라고 해도 나에게 데미지를 주었던 오해는 아니고요.(웃음) 절제되고, 자기 검열이 철저했던 배경에 대해 많이 이번 책에서 소개를 했습니다. 교도소라는 게 노소(老少), 사람의 성장환경 이런 게 대단히 다양해요. 김애란의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을 보면 아름이라는 주인공이 조로증(早老症)에 걸려 있잖아요. 그 사람 속에 노인도 있고, 어린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한꺼번에 다 있듯이 그렇죠. 마치 지리산이나 백두산에는 정상과 중상간, 평지에 각각 다른 계절의 꽃이 피듯이 교도소가 그렇게 다양해요. 굉장히 많은, 생동하는 이야기들을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 오히려 사람들의 사고를 다이나믹하게 만들어줘요. 교도소의 인간적인 환경이라는 게 아주 다양하고 아주 역동적이죠.

 

글을 쓰는 데 생각을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고도 했고, 생각을 모두 책에 담을 수도 없겠지만, 선생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선생의 생각에 스스로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어렵네요.(웃음) 관계를 대단히 중요시하는 사람, 그건 맞는 것 같아요. 자기를 고정시키는 게 아니라 그때 상황이나 만난 사람에 따라 유연하게 자기를 부단히 재조직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사람의 정체성이란 게 불변의 정체성이 미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조건 속에서 계속해서 조직, 구성되고 있는 거예요. 만나는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강의를 마친 소감, 소회가 듣고 싶습니다.


강의가 사실은 참 중요해요. 영화배우와 연극배우의 차이가 있거든요. 영화배우는 조명, 셋팅, 음향담당들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진을 위해 찍는 거고, 현장성이 훨씬 떨어지잖아요. 연극은 바로 관객들과 그 자리에서 호흡해요. 마찬가지로 글 쓰는 게 영화배우의 정서라면 강의는 연극배우들이 그 ‘없이는 못 사는’ 그런 생동감의 현장 경험이 있는 게 사실이죠. 또 강의를 하는 동안에 일정한 사고의 발전도 있어요. 서로 교감하는 동안 불분명했거나 이런 것들이 구체화되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졸가리가 서기도 하고요. 그래서 강의, 필요해요. 강의를 하지 않으면 강의에 대신할 만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갖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마 강의 했을 때 느꼈던 강의 특유의 경험들이 그리워서 교실이 아닌 다른 형태의 만남들이나 담론의 장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될 수 있으면 안 만들고 쉬려고 하지만요.(웃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강의가 있나요?


주로 준비가 되어 있는 청중, 학생들과만 주로 만나왔어요. 그 외에는 일부러 안 만나기도 하고요. 그래서 비교적 서로 공감의 수준이 상당히 높은 강의를 많이 경험해서 다 좋았죠. 어쩌다가 실패하는, 잘 안 되는 게 있어요. 그러면 강의 이후에 엄청 피곤해요. 서로 공감하는 강의를 하고 나면 그렇게 피곤한 줄도 몰라요.(웃음) 어쩌다가 공개 강연 같은 곳에 가면 엉뚱한 질문을 막 하는 경우가 있는데, 굉장히 힘들죠. 그런 사람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굉장히 언짢아요. 그래도 비교적 준비되어 있는, 원하는 사람들과 주로 많이 만났기 때문에 다행이죠. 별로 안 좋은 강의는 몇 가지 기억이 되지만요.(웃음)

 

‘똘레랑스’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입니다. 최근 프랑스의 샤를리 에브도를 말하면서 기존 서구의 똘레랑스 개념에 대한 문제 제기도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선생님의 책을 보니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했던 똘레랑스가 다른 뜻으로 전용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근대 사회가 기본적으로 ‘존재론’이잖아요. 개인의 존재성을 중심에 둬야 한다는 것이에요. 올라가면 휴머니즘도 마찬가지예요. 인본주의라는 것이 그렇죠. 사람이 우주의 본질이 아니잖아요. ‘환경운동연합’ 나는 그것도 명명이 잘못되었다고 봐요. 왜 자연이 환경이죠? 당신이 나무라면요? 나무가 사람의 환경 밖에 안 되느냐 질문해야 해요. 마찬가지로 존재론이라는 것은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의 존재성을 키우는 거잖아요. 이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사회계약이라든지 또는 똘레랑스, 다른 것과의 다양성을 승인하는 것으로 해결을 도모한다는 거예요. 이게 존재론적인 패러다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 윤리지요. 하지만 그 이상일 수도 없어요.  

 

최근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서 드러나잖아요. 존재론, 강자의 존재론이 똘레랑스라는 것이요. 타자를 바깥에 세워놓는 거예요. 나는 차이, 다양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부분이라고 봐요. 감사한 기회로 받아들이고, 학습의 교본, 변화의 시작이라고 보는 거죠. 그걸 그냥 바깥에 세워놓고 무슨 공존을 말하겠어요. 이건 그런 근대사회의 논리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하려고 했어요. 탈근대나 근대 이후를 사유하는 것은 똘레랑스가 아니라 자기변화(magnetic variation), 탈착(desorption)으로 연결돼서 노마디즘으로 가는 거예요. 똘레랑스에는 그런 게 없죠. 근대화, 근대논리, 그 이상이지 못해요.

 

아는 건 필요해요. 똘레랑스의 실체에 대해서, 그 외의 근대사회 존재론의 구조에 대해서 말이죠. 그걸 당장 그대로 믿는 수많은 사람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아가야 하잖아요. 이 경우에 그럼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이냐, 이건 또 다른 정신 차원에 있거든요. 그 점에서 나는 리더십은 아니에요. 그 전까지는 펠로우십(fellowship), 같이 간다, 그랬는데 요즘은 팔로우십(followship), 뒤따라간다(웃음)고 해요. 먼저 가라 이렇게 말하는데요. 우리 연배들이 뒤따라간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들이 살아갈 사회를 자기들이 만들어가야죠. 

 

우리가 그 시대를 역사적으로 조망하고, 우리를 가두고 있는 여러 가지 역학 구조를 탈착, 뛰어나와야 하지만, 자기 삶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조직해 갈 것인가는 또 다른 패러다임이에요. 거기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고고한, 순교자적인 자세로 발언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그 사회를 그나마 바꿀 수 있는 힘도 거기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쪽으로 발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해요.

 

선생으로부터 듣는 시대의 질문들


역사적인 관점에서 지금 사회를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것도 사실 어렵죠. 역사적인 관점으로 현재를 본다는 게 참 어려워요. 지난 다음에 보면 참 잘 보이는데 말입니다.당대 사회에서 역사적 시선으로 본다는 게 참 어렵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나로서는 특히 어쩌다가 가끔 보게 되는 종편 방송에 나와서 얘기하는 것, 그건 답답하기 짝이 없어요. 저 사람들은 정말 현재를 찰나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언젠가 앞으로 50년, 100년 후에 이 시대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시기 구분할 것인가, 시대 구분할 것인가, 라는 관점이 필요해요. 강만길 선생이 그런 걸 요구하잖아요. 일제 36년, 해방이후 언제까지를 분단시대, 또는 미국 식민지 시대, 이렇게 구분할지도 몰라요.

 

1945년 8월 14일, 일본 천황이 항복 방송하잖아요. 임헌영 선생 얘기를 들으면 소설가 김동인이 13일인가, 총독부 문화국장에게 찾아가서 조선 문인들을 위한 어떤 예산 지원을 호소하러 갔다고 해요. 국장은 지금 내일 항복 선언할 것에 대해 전화 받고 있는데 그렇게 했어요. 시대의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시대에 대해 그렇게 맹목적이었죠.

 

 모르는 거예요. 한 발 앞도 못 내다볼 정도로 그 시대의 포획력이 엄청났다는 거예요. 지식인들이 일본 지배 겨우 36년인데 완벽하게 포획되었던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시대에 어떻게 포획되어 있는지 알아야 해요. 우리가 접하는 외신도 전부 미국 중심의 통신들이 주는 것만 듣잖아요. 리영희 선생이 독자적인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외신들이 주는 것을 구별해내는 세계 정서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우리가 역사를 얘기하고 역사적인 관점으로 현재를 본다는 게 참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 노력은 해야죠. 그러려면 우선 당장 우리가 갇혀있는 문맥에서 탈문맥(脫門脈)해야 해요. 그걸 많이 강조를 했어요.

 

감옥에 오랫동안 계셨기 때문에 수형인(受刑人)으로서의 감각을 생각하게 됩니다. 출소 후에도 그런 감각을 놓치지 않고, 내가 포획되는 지배담론이나 작용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고 살아오신 것 같은데요. 사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살고 있는데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그런 공작들이 교묘해지고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 속에서 젊은 사람들이 그런 구조를 깨닫고 공부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그게 한 번 깨달아서 득도하는 경우는 없어요. 오랜 수형기간 때문에 바깥에 나와서도 자유에 대한 감각이 다른 사람들보다 민감할 수도 있긴 하지만요. 나 아니라도, 감옥 안 간 사람도 그렇게 얘기할 수 있죠. 책에 미셸 푸코 얘기 한 부분이 있죠? 푸코가 말한 감옥에 대한 정의에 나도 깜짝 놀랐어요. 감옥이라는 건 우리가 알기에는 범죄자들을 격리, 구금하는 윤리적인 시설로 주로 개념 규정을 하잖아요. 『감시와 처벌』을 보면 푸코는 감옥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은 갇히지 않았다는 착각을 유도하기 위한 정치적인 공간이라고 말해요. 우리가 자기가 갇히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 대단히 중요해요.

 

항상 깨어있고 주체적이고 싶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것인지 의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동기부여가 되는 것 같아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판단 기준이나 가치는 무엇일까요?


저도 그런 완벽한 자기 정체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봐요. 근대 사회가 자유를 갖게 했지만 그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교회나 특정 신부들보다도 더 엄청난 신(god)이라는 포획기제 속에 자기를 통째로 헌납하잖아요. 그 속에서 안정감을 가져 버리고 귀중한 자유를 오히려 거기에 헌납해버리는, 그런 사람 많잖아요. 과연 내가 나 자신의 자유를 지킬 수 있을까 라는 그런 자신감, 전투성 이런 게 없는 경우에는 자기를 다른 어떤 것에 복속시키게 돼요. 노예의 길로 다시 가게 되는 거죠. 자유로부터 도피해서 말이에요. 반드시 그게 중세적인 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신을 대체하는 여러 형태의 근대 사회 가치들이 많이 있잖아요. 좋은 직장, 패션, 이런 것들이 그렇죠. 이것들과 구별되는 ‘나’에는 과연 무엇이 있고, 있다면 그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회적 가치를 주장할 수 있는가 이런 굉장히 복합적인 의문에 싸이게 될 거예요. 그 점에서 나는 철저하게 사회화할 필요도 없고, 철저하게 개인화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일정하게 자기 정체성을 부단히 만들어나가면서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사회와의 관계를 잘 만들어갈 수 있는 그런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소위 말하는 신이라는 엄청난 대상에 자기를 노예의 길로 복속시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게 있거든요. 그 중간에서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주체화할 것이며 어떻게 그것과의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죠. 그래서 『담론』에서는 ‘관계론’을 말한 거죠. 대개는 가르치듯 자기 철학을 가져야 한다느니, 개성 시대라느니, 그렇게 어중간한, 아주 교조적인 답변 밖에 안 하잖아요. 다른 사람의 얘기를 일방적으로 받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도 없어요. 자기가 어느 정도 고민해야 돼요. 고민하고, 방황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것들을 서서히, 서서히 만들어가는 거죠.

 

어떻게 사는 게 가치 있는 삶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냥 내가 행복하면 좋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인간으로 태어나 살면서 행복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우리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건 아니잖아요.(웃음) 행복이란 것도 생명논리로 들어간다면 DNA가 생존(survival)에 필요하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볼 수 있어요. 일단 생명의 본질은 죽는 건 아니어야 하죠. 계속 살아있는 거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행복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요. 행복한 것이 자기의 생존, 단지 목숨만 살아있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 돼요. 자기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생존만 해서는 안 돼요. 자기희생도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 가야 자기 삶이 행복하잖아요. 행복이란 게 자기 개인의 행복만으로는 행복하지 않잖아요. 다른 사람의 행복이 나의 행복에 필요하잖아요. 그것도 관계가 주는 거죠. 분명히 개체 사이에 단절이 있긴 하지만 그걸 넘어선 굉장히 끈끈한 사회성이 있는 거고 그걸 어떻게 가져갈 것이냐는 고민을 해야겠죠. 결국 용기죠. 어느 정도의 세계를 자기가 껴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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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신영복 저 | 돌베개
저자는 2014년 겨울 학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학 강단에 서지 않는다. 이 책의 부제를 ‘마지막 강의’로 한 이유이다. 선생의 강의실은 늘 따뜻하고 밝은 에너지가 넘쳐난다. 다루는 내용이 한문 고전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문맥을 현재로 끌어내어 우리의 입장에서 읽기 때문이다. ‘공감’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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