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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12-02-07
미디어 21세기북스

신영복의 벼루

 

김정운 저 |

 

* 본 글은 신영복 선생님의 저서에 실린 글이 아니기에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미래가 없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더 이상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계획할 수 없을 때의 그 좌절의 크기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난 그를 만나기 전부터 도대체 그 어떤 힘으로 그 고통을 버텨 낼 수 있었는가를 묻고 싶었다. 보통의 경우, 신앙의 힘으로, 혹은 이념에 대한 헌신으로 사람들은 그 좌절을 견뎌낸다. 무기수 신영복에게는 신앙도, 이념도 아닌 듯 했다.

 

신영복의 대표적 저서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어보면, 무기수 신영복은 그렇게 맑은 사람일 수가 없다. 어머님, 아버님, 형수님, 계수님, 조카에게로 이어지는 짧은 편지들이 가족들에게 쓰는 편지라기에는 너무 정갈하다. 세상을 보는 그의 따뜻한 시선에 끝없는 감동을 받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사형언도를 받고, 무기수로 20년을 복역하면서 그렇게 맑고 깨끗한 마음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는지, 너무 궁금했다. 득도의 경지에 오르지 않고서야 감옥에 앉아서 어찌 그리 좋은 생각만 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신영복을 마주하고 앉자마자 물었다. 도대체 그 내면의 분노, 좌절은 어딜 가고 그렇게 아름답고 고귀한 생각만 할 수 있었느냐고.

 

“그래요. 그거 잘되었네요. 이런 기회에 설명을 좀 해야 하는데... 다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통해 저를 알게 되고, 그런 시각으로 보는데... 그 책은 가족에게 보낸 옥중 서간집이죠. 결과적으로, 그 편지의 최종 수신자가 가족, 그러니까 저를 걱정하는 가족들이에요. 그래서 그 가족들한테 괴로운 이야기, 뭐 그런 걸 쓴다는 게 이렇게 감옥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불효막심한데 ... 그래서 가능하면 반듯하게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좋겠다... 하는 게 일차적인 거고, 또 하나는 그 편지가 교도소 당국의 검열을 반드시 거치니까, 검열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그런 고집도 있고. 그래서 자기 검열을 아주 엄격하게 했어요. 결과적으로 아주 불만도 없고, 분노도 별로 없고, 아주 반듯한, 대단히 사색적인 그런 글로만 되어 있어서, 그런 인상을 주지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그토록 좋은 글들만 썼던 거였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그런 생각들이 가능한 것일까? 도대체 그 수많은 편지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그 자기절제는 어떻게 가능했고, 그 생각의 조각들을 어떻게 그렇게 깔끔하게 잡아낼 수 있었을까? 실제 그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들을 그대로 모은 영인본을 보면, 그의 모든 편지 한 장, 한 장에 글씨하나 틀린 것 없다. 마치 수십 번 연습 한 후에 쓴 것처럼 글씨 모양도 똑바르다. 너무 예쁘게 썼다. 마치 모든 편지가 하나의 서화작품 같다. 실제 편지 사이사이로 직접 그린 그림도 많이 있다. 고등학교 여학생들의 연애편지처럼 예쁘다.

 

“하하하... 그건 한 달 내내 모두 다 수정해서, 거의 원고를 암기한 수준에서 쓰는 거니까. 그때는 또 이십대, 삼십대 초반이니까 머리도 좋아서, 다 암기하고, 하하하... 그래서 이번 달에는 이 문제에 대해 쓰자, 다음 달에는 무엇에 대해 쓰자, 하고 한 달 내내 생각을 쭉 정리해요. 굉장히 충격적인 생각에 부딪치기도 하고... 그런데 이걸 어디다 기록하지 않으면 그냥 강물같이 흘러갈 것 같아서, 전혀 집필이 허용되는 상황이 아니니까. 뭐 그래서 가족들에게 보내는 서간에 다 쓴 거지요.”

 

신영복에겐 오직 편지 쓰는 것, 이외에는 자신의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삶에 빠질 수없이 중요한 물건도 쓰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벼루다.

 

1. 신영복의 ‘벼루’는 ‘세계(世繼)’다.

 

성공회대학교는 아주 작은 대학교다. 그러나 특별한 교수들이 많아 아주 유명하다. 주로 진보진영의 교수들이다. 신영복도 그 곳의 교수였다. 감옥에서 나온 후, 줄곧 성공회대 교수로 있다가 2006년 정년퇴임했다. 지금은 석좌교수로 일주일에 한, 두 번씩 강의하고 있다. 그의 연구실 옆에는 후배교수들, 학생들에게 붓글씨를 가르치는 공간이 있다. 신영복은 그 탁자위에 자신의 아버지가 쓰시던 벼루를 올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글에서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 아주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인상이었다. 불필요하게 상대방을 긴장하게 만드는 진보주의자들의 경직된 표정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의 진보주의는 자신만의 독특한 ‘고통의 인본주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마치 벼루를 갈 듯, 자신의 고통을 견뎌낸 자만이 가지는 평화로움이 어설픈 관념의 긴장을 녹여주는 듯했다.

 

왜 벼루일까? 한국의 근대사는 단절의 역사다. 식민지를 겪으며 강요된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전통과의 단절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영복은 벼루를 통해 할아버지, 아버지의 세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실제 그는 벼루는 ‘세계(世繼)’, 즉 ‘세대를 잇는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의 방에서 붓글씨를 배웠다.

 

장남과는 달리, 차남이었던 그는 할아버지의 말동무였다. 할아버지는 늘 어린 신영복을 자신의 사랑방으로 불러들였다. 소일삼아 어린 손자에게 명심보감, 천자문도 가르쳤다. 이렇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신영복은 할아버지 방에서 잔심부름도 하고, 먹을 갈며 붓글씨도 배웠다. 그래서 그에게는 유난히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많다. 특히 봄날에 할아버지를 따라갔던 ‘답청(踏靑)’의 기억은 아주 특별하다.

 

봄날이 되면, 옛날 점잖은 노인들은 ‘봄의 파란 풀을 밟고 거닌다’는 의미의 답청을 하곤 했단다. 할아버지가 친구들과 답청을 나갈 때면 어린 신영복도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들의 답청은 좀 특별했다. 그의 고향 밀양의 남천강 하류에는 아주 고운 백사장이 있었다. 그 백사장에 마당 쓰는 비와 비슷한 ‘죽필’을 가지고 맨발로 보행서를 써나가는 아주 독특하고, 우아한 놀이였다. 할아버지는 손자 신영복을 위해 작은 대나무 붓을 만들어 주고, 뒤따라오게 했다.

 

신영복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꿈을 꾼다. 할아버지 뒤를 쫓아 백사장에 글씨를 정신없이 써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혼자이고, 혼자인 게 너무 무서워 눈을 떠 둘러보면 감옥인 거다. 고향의 푸른 잔디위에 뛰어 행복하게 놀다가 눈을 떠보면, 사방이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 안이라는 톰 존스의 ‘green, green grass of home’과 똑 같다.

 

할아버지와 함께 한 글쓰기 놀이는 발달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문화학습(cultural learning)’의 전형적인 형태다. 어릴 때의 문화적 경험은 향후 아이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 경험이 다양한 상징을 통해 내면화되어, 개인의 행동방식, 사고패턴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 같은 달력이라도 ‘명화 달력‘을 보고 자란 아이와, 선데이서울식의 ’비키니 달력‘을 보고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문화적 관심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결국, 죄다 보고 들으며 자란 대로 행동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어린 신영복에게 할아버지를 통한 문화학습은 그의 평생 삶을 규정하는 아주 결정적인 체험이 된다. 그래서 그는 집안에 이어져 내려오는 벼루를 ’세계를 잇는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신영복은 감옥에서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붓글씨를 제대로 다시 시작하게 된다. 죄수라고 해서 교도소 안에 그저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정해진 일과에 따라 노동도 하고, 다양한 교화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한다. 그 중 하나로 만들어진 서도반에 신영복은 들어간다. 감옥에서도 글씨 잘 쓰는 사람이 필요하다. 동상예방 주의사항도 써야 하고, 재소자 준수사항도 이왕이면 폼 나는 붓글씨로 써야 한다. 신영복은 그 잡다한 붓글씨 노역을 하다가, 한국 서예계의 전설인 정향선생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아니다. 우연이 아니다. 운명이었다.

 

정향선생은 추사의 전통을 잇는 분이었다. 그 당시, 생존자로는 유일하게 중국 고궁박물관에 그의 글씨가 들어가 있는 분이었다. 새로 온 교도소장이 글씨를 받을 욕심으로 정향선생을 교도소에 청했다가, 아주 특이한 재소자 한명을 그에게 소개한 것이다. 정향선생은 신영복을 옛날의 선비가 귀향 온 것처럼 여겼다. 처음 몇 번을 와서 글씨를 가르쳐주다가는, 그 후로는 아주 매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신영복의 붓글씨를 지도했다. 그 인연은 신영복이 대전교도소에서 전주교도소로 이송되기까지 7년 동안 지속되었다. 할아버지 이후로 제대로 된 붓글씨 하드트레이닝을 받게 된 것이다.

 

2. 신영복의 한글서체는 강요된 ‘근대성’에 대한 반성이다.
대전교도소에서 신영복은 정향선생을 통해 전, 예, 해, 행, 초의 한문서체를 체계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러던 중, 그는 새로운 문제의식에 부딪히게 된다. 그렇게 폼 나는 한문서체에 비해 한글서체는 너무 빈약한 게 아니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 것이다. 특히 현재의 한글서체가 일반 민중들의 삶의 표현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인 형태를 띠고 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처음에는 한글은 다른 사람들처럼 궁체와 고체, (고체는 훈민정음 판본체를 말하는 겁니다.) 그 외에 언간체라는 체도 있습니다만... 이런 걸 체본으로 썼었어요. 그런데 박노해시라든가, 신동엽의 시, 신경림의 시 같은 것을 궁체로 쓰니까, 시의 내용과 글자라는 형식이 서로 잘 안 맞아요. 궁체를 잘 보면 굉장히 귀족적인 뉘앙스가 있어요. 궁체는 궁녀들이 쓰던 체에요. 당시 궁녀는 당대 사회의 최고 문화향유자들이거든요. 글씨체도 그래서 아주 가늘면서, 하체가 약하고. 그런 궁체로 민중시를 써자니 전혀 안 맞는 거에요. 마치 된장찌개를 크리스털 그릇에 담는 것 같은 내용과 형식이 차질을 빚어요.”

 

신영복은 이때부터 새로운 한글서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어머니가 보내준 편지를 주목하게 된다. 신영복의 어머니도 당시 지체가 있는 지주 집 외동딸이었다. 독선생을 붙여 글공부를 한 분이었다. 시집올 때, 판소리 춘향가, 적벽부, 그런 두루마리를 가져와 자기 동서들이나 시댁의 식구들을 문화적으로 압도했다고 한다. 신영복은  어머니가 편지를 무릎에 놓고 붓으로 써 보낸 모필서한을 기본으로, 자신만의 다이나믹한 필법을 도입해 특별한 한글서체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상형문자인 한자에 비해,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키기 어려운 한글이지만, 신영복은 한글과 그 한글이 지시하는 대상과의 관계가 분명히 드러나는 글씨를 쓰려고 시도했다. 예를 들어, ‘서울’의 글씨를 ‘서’자는 북악산 같이 쓰고, ‘울’자는 한강처럼 쓰는 방식이다. (사진?) 감옥에서 개발한 신영복식 한글서체는 출소 후 세상의 빛을 보게 되고, 마침내는 ‘처음처럼’이라는 소주 브랜드의 서체로 쓰이게 된다. (두산소주는 ‘처음처럼’을 로고로 쓰는 대신 학교에 1억 원의 장학금을 제공했다.) 신영복은 자신의 글씨가 상업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이 다소 부담이지만 한 편 가장 서민적인 술자리에 함께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신영복의 한글서체는 현재 성공회대학교 디지털콘텐츠학과와 직지소프트가 함께 컴퓨터 폰트로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신영복의 옥중서한의 펜글씨도 이미 컴퓨터폰트로 개발되어 공개된 지 꽤 되었다. ‘엽서체’다. 국민대학교의 김민 교수가 그의 정갈한 엽서글씨를 보고 ‘엽서체‘라는 아름다운 폰트를 만들어 공개했다.

 

신영복은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감이 있는 듯했다. 자신의 삶도 그랬고, 자신의 서체마저도 현실과 괴리되는 것을 못 마땅해 한 것이다. 궁체와 고체와 같은 귀족적인 서체를 거부하는 이유도, 그 글씨체는 민중들의 삶의 현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까닭에서다. 한국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불일치의 기원을 신영복은 서구에서 강제로 유입된 ‘근대성’에서 찾는다. 특히 지식인은 바로 이 ‘근대성’의 문법을 정확히 이해하고, 형식이 내용을 정확히 담을 수 있는 ‘탈근대’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 근대성의 핵심은 ‘주체’, ‘자아’의 구성에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주체와 자아가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신영복은 지적한다. 인간의 상호관계에서는 서로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서구의 근대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타자화의 과정을 거치며 상호 이해의 부재, 공감부재의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관계와 맥락으로부터 고립된 주체는 필연적으로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를 겪게 된다. 그는 감옥에서 ‘근대 지식인‘이 경험한 타자화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제가 근대적인 교육을 받았잖아요. 타자화하고, 대상화하고, 분석하고, 이런 거죠. 그래서 감옥에 가서도 처음에는 저 사람의 죄명이 항상 궁금하고, 형기가 얼만지, 가정은 결손가정이었던가, 또 학력은 어느 정도인가, 부단히 분석했어요. 그게 아주 근대적인 사고로 굳어져 있었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하고 긴긴 겨울밤,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들으면서, 아, 나도 저 사람과 같은 부모를 만나서, 저런 인생 역정을 겪었으면 똑같은 죄명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겠구나 하는 그런 공감을 갖게 되요. 아마 한 5,6년 걸렸지 않았나. 그때쯤 제가 왕따를 면하게 되요. 처음에는 왕따인 줄도 몰랐지. 아주 친절하고, 부지런하고, 다른 사람 잘 도와주고, 이러니까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다들 내게 일정하게 거리를 뒀더라고. ... 그 시점에 내가 아주 흐뭇했던 것은 ‘내가 발전했다!’ 그런 느낌을 가졌어요. 드디어 머리에서 가슴까지,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을 마쳤다. 그렇게 생각했죠.”

 

서구 근대성의 필연적으로 끌고 들어온 내용과 형식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신영복의 일차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이었다. 대상화, 타자화, 분석에서 이해, 공감으로의 변화다. 그런데 그것만큼이나 더 먼 여행이 또 신영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이차여행이었다.

 

“제가 목공장에서 목수일을 배울 때인데, 나이 많은 목수 한분이 나한테 집짓는 설명하면서 꼬챙이로 집을 그리는데, 순서가 완전히 반대인거에요. 먼저 주춧돌을 그리고,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은 제일 나중에 그리는 거에요. 우리는 지붕부터 그리는데, 이분은 주춧돌부터 실제 집짓는 순서와 그리는 순서가 같은 거지요. 제가 사실은 교장선생님 아들이거든요. 학교 사택에서 태어나죠. 학교, 책, 교실, 이런데서 인식을 키워온 사람의 관념성을 통절하게 깨닫게 된 거에요. 그래서 이해, 공감도 참 중요하지만, 여기서 자기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엉터리다. 공부라는 게 그냥 다가가는 게 아니라 자기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거죠.”

 

이해와 공감이라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일차여행이 변화와 발전이라는 ‘가슴에서 발‘까지의 이차여행으로 이어지기 까지는 또 수년이 지났다. 그 변화와 발전은 결국 인간관계 속에 가능하다는 것을 신영복은 강조한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충분히 설 수 있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변화와 발전이란 결국 이 성숙한 인간관계의 내면화에 다름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관계의 내면화의 결과가 바로 신영복에게서는 한글서체라는 구체적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3. 붓으로 쓰는 행위만큼이나 벼루에 먹을 가는 행위자체도 중요하다.

 

신영복에게 정말 궁금했던 것이 있다. 자신의 옥중서간문을 도대체 누가 본다고, 그토록 정성스럽게, 자신의 생각에 집중해서 썼느냐는 거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라면 한번 읽고 버리는 것인데, 그의 편지는 마치 먼 훗날의 독자들을 미리 예상하고 쓴 글처럼 보인다. 무기수라면 미래가 없는 사람이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동기로 20년을 한결같이 그런 편지를 쓸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충분히 그런 질문이 가능한데요. 유기징역, 소위 말하는 2.3년 후에 출소하는 단기수들하고 무기수들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어요. 단기수들에게 징역이란 빨리 끝나면 좋을 기간이죠. 아무 의미를 담지 않고, 오로지 출소만 생각해요. 반면 무기수는 출소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뭔가 살아갈 의미가 있어야 해요. 결과적으로 인생이란 게 그런 게 아닌가 해요. 삶 자체가 과정이 아름다워야 하고, 뭔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깨달음도 있어야 하고... 그래서 아마 무기수라는 어쩌면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이 인생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열어주기도 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신영복은 ‘과정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다. 삶이란 목적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사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목적이 중요하다. 그러나 목적에 의해 과정이 생략된 삶을 사는 것처럼 불행한 삶이 없다. 군대 간 이들은 제대날짜만 생각한다. 유학 떠난 이들은 학위 따는 날만 기다린다. 언젠가는 제대하고, 언젠가는 학위를 딴다. 그러나 제대날짜를 기다리고, 학위 따는 날을 기다리며 지나간 내 젊은 날은 과연 내 삶이 아니란 이야긴가? 그렇게 제대하면 뭐하고, 그렇게 학위를 따면 뭐하는가. 그 사이에 ‘우리 기쁜 젊은 날’은 맥없이 사라져 버렸는데.

 

유기수에게는 출소라는 정해진 목적이 있다. 따라서 교도소의 삶이란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무기수는 출소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저 교도소에서 버틸 수 있는 한 버텨야 한다. 즉 그곳이 무기수의 삶의 전부인 것이다. 어찌 충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 현재’를 사는 거다.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니라는 통찰이다.

 

벼루에 먹을 갈 때도 마찬가지다. 먹을 가는 그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으면 먹을 제대로 갈 수 없다. 신영복에게 할아버지는 ‘먹은 앓는 사람이 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가르쳤다. 먹은 힘 있게 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빨리 갈아, 빨리 글씨를 써야지 하는 마음으로는 먹이 제대로 갈리지 않는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먹을 푼다!‘고 했다. 분말이 고와야하고, 벼루의 연순(硯脣)에 먹이 튀어 묻으면 안 된다. 벼루도 ’인수(忍水)‘를 잘해야 한다. 물을 잘 참아야 한다는 뜻이다. 벼루가 물을 먹지 않고, 뚜껑을 닫아 놓으면 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묵을 갈면 발묵(潑墨)이 잘 되어야 한다. 벼루 바닥이 거칠어서 세게 갈려도 안 된다. 미끈미끈하지도 않고, 고운 분말이 아주 잘 나와야 한다. 묵을 가는 사람의 마음도 아주 차분해야 한다.

 

신영복의 할아버지는 숙묵(宿墨)을 썼다. 먹을 갈아, 호리병에 넣어 하루정도 묵히는 것이다. 하루 쯤 지나면 먹 알갱이 분말이 퍼져, 먹이 훨씬 고와진다. 무기수 신영복은 묵을 갈아 숙묵을 만들 듯, 과정을 사는 자신만의 독특한 명상법을 개발한다. ‘추체험(追體驗)’이라고 했다. 과거 내가 겪었던 일을 하나하나 반추해서 되돌리는 방법이다.

 

과거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을 한사람, 한사람 다시 기억에서 불러내, 그 사람이 내게 어떤 존재였는가,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하나하나 짚어보는 방식이다. 사람관계뿐만이 아니다. 과거의 아주 사소한 행위도 기억에서 불러내, 의미를 찾아낸다. 소주병에 붙어 자신의 한글서체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처음처럼’이라는 글씨도 바로 이 추체험에서 찾아냈다. 어릴 적, 글씨연습을 노트에 할 때를 반추하면서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어렸을 때, 노트를 쓰다가 글씨가 마음에 안 들면 그 장을 뜯어내고, 또 새로 쓰지만 몇 장 못가서 노트가 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뜯어내고, 앞장을 뜯어내면, 뒷쪽의 멀쩡한 노트가 떨어져나가요. 그래서 ‘처음처럼’이라는 게 뜯어내는 게 아니고, 뭔가 그 다음 장을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쓰는 것, 그래서 글씨가 좀 잘못되었더라도 뜯어내지 않고 다시 시작함으로써 결국 두꺼운 노트를 갖게 되는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 산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것은 결코 뜯어낼 수 없는 거다. 늘 이제 다시 시작하는 마음처럼,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추운 겨울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뭐 이런 뜻으로 시작된 거 에요.”

 

인터뷰 내내 신영복은 어린 아이처럼 즐겁게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본인이 생각하는 인간적 약점이 뭐냐고 물었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좀 위로를 받고 싶어서였다. 좀 많이 생각하는 편이라 결정이 느리다고 했다. 이것저것 배려하는 게 많아서 그렇다는 거다. 나는 그건 장점이지 단점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보다 구체적으로, 부인이 불평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그 신중하기 그지없는 신영복은 ‘가까운 사람은 배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참 좋은 사람이라 하겠지만, 자신의 부인은 절대 아니라고 할 것이라고 수줍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감옥에 있을 때도 꼭 미운 사람이 하나는 있어요. 꼭, 하여튼. 그래서 그 친구 만기날짜만 기다리는 거죠. 그러다가 자기 징역이 다 간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 사람이 출소하잖아요? 나가면 그날 저녁은 참 행복해요. 하여튼 앓던 이 빠진 듯이 시원하다, 그런 마음이에요. 그런데 며칠 있으면 또 그런 사람이 생겨나요.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 나가기를 또 기다리고... 그러면서 깨달았지요. 그 사람에게 물론 결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이 환경이 그러한 대상을 필요로 하는구나, 라구요.”

 

신영복 자신에게 아내가 미운 사람인건지, 아내에게 자신이 미운 사람인건지는 분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부일처제라는 환경이 아내는 남편의 약점을, 남편은 아내의 약점을 찾아내게 하는구나, 뭐 그런 식으로 나 편하게 이해했다. 아내에게 끊임없이 약점을 지적당하는 나로서는 참 많이 위로가 되는 이야기였다. 내친김에 이번 책의 제호도 신영복체로 폼 나게 써 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기꺼이 그러겠노라 했다.

 

일주일 지난 후, 아주 멋진 ‘남자의 물건’ 제호가 내 사무실로 도착했다. 세로로 쓰니, 아래로 축 늘어진 게, 참 ‘남자의 물건’스러워 보였다. 이 책의 앞에 있는 바로 그 글씨다. 아주, 내용과 형식이 일치된 느낌이다.

 

 

남자의물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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