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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1988-09-18
미디어 주간조선_ 우태영 조선뉴스프레스 인터넷뉴스부장

고(故) 신영복 교수 1988년 가석방 출옥 직후 인터뷰 


조선pub  201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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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1월15일 별세했다. 고인은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20년 간 징역을 살다가 1988년 8월14일 가석방돼 출소했다. 고인은 당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서간집을 출판하고 1988년 9월18일 자 주간조선과 최초의 인터뷰를 가졌다. 당시의 인터뷰전문을 전재한다. 


글 | 우태영 조선뉴스프레스 인터넷뉴스부장



대법원서 원심파기 무기징역으로 감형
 
申榮福씨가 교도소에 수감된 뒤 얼마동안은 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고 또 편지를 쓸 수도 없었다.

申씨에게 내려진 형벌이 워낙 무거운 것이었고 당시의 내외사정도 또한 申씨에게 손톱만한 변명의 여지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申씨는 자신의 인생에 닥친 사태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볼 시간도 여유도 없이 오로지 절망의 늪을 허우적 거리며 빠져들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 교도소의 독방에 수용되고 철문이 시멘트벽에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닫힐 때 申씨는 차라리 어떤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통혁당이라는 사건 자체의 엄청남에 함몰이 돼 있어서 다만 얼마동안이라도 혼자 있을 수 있는 교도소 안이 훨씬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과 친구, 사회와 격리된다는 데 대한 불안보다는 사건 자체의 충격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잠시의 편안함이 지나간 뒤 그에게 닥쳐온 것은 독방 안에서 흘러나온 심한 악취였다. 공중변소에서 나오는 썩은 오물냄새와 땀냄새가 범벅이 된 독방 내부의 공기는 사건 자체의 충격으로 암흑의 개펄을 뒹굴던 申씨의 머리에 이 사회와 시대에 대한 고뇌가 다시금 밀물처럼 밀려오게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십년에 걸쳐서 비탄과 고통을 쏟아놓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변소냄새 같은 것이 흡사 역사가 썩는 냄새인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申씨에게는 편지를 쓸 수 있는 자유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申씨는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중죄인이었기 때문. 편지는 물론 운동도 할 수 없었고 책도 볼 수 없었다. 일체의 사식 차입도 금지됐었고, 외부인과의 만남도 극히 제한된 상태였다.

申씨는 이곳에서 자신에게 닥쳐올 죽음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처음 나는 나 자신이 사형을 받아야 할만큼의 큰 죄를 저질렀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건의 사형수 7명이 차례로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사형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었고 곧 나에게 닥칠 것이었습니다. 내가 사형당할 때까지 나는 당시까지 내가 살아 온 27년이라는 짧은 인생에 대해서 심정적으로라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申씨는 자신이 이때까지 살아왔던 27년 간의 행로를 더듬었다고 한다.

『격동의 한국근대사 속에서 살아온 한 개인으로서의 자기 위상을 정리해야겠다는 것이지요. 외부의 정치상황과 분단에 대한 생각을 다시한번 하게 됐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어떤 미련이나 쓸쓸함이 있었습니다.』

申씨가 사형집행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고 마무리를 지어갈 무렵,대법원에서 申씨에 대해 원심파기 결정이 났고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그러나 27세의 젊은 인텔리에게 남은 인생을 통째로 교도소 내의 좁은 방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다른 형태의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암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의 완화된 사형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고요. 끝이 없는 긴 터널을 앞에 두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들었습니다.』

申씨는 그러나 앞서 사형집행에 대비해서 마음의 정리를 해야 했듯이 무기징역 을 받고서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기징역이란 것이 엄청나게 긴 기간입니다. 남들처럼 출소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니고 새로운 사회생활을 준비해야 하는 예비단계도 아닙니다. 그 자체가 내가 살아야 하는 인생이고 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라는 사실, 이것은 나에게 밀어닥친 냉정한 현실이었으며 이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안됐습니다.』
 
교도관 보좌역 대신 工場서 굳은살 박혀
 
申씨는 앞으로 자기 인생의 가장 긴 기간인 무기징역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申씨는 안양교도소를 거쳐 71년 2월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다.

대전교도소는 1919년 5월 일제가 주로 사상범을 가두어넣기 위해서 지어놓은 것이었다. 즉 3*1 독립만세의 함성 속에 지어진 이 교도소의 첫 주인은 3.1만세운동의 주인공들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어렵지 않았다. 일제가 이 사상범 교도소를 대전에 지은 것은 충청도가 역사적으로도 민란이 가장 적었고 양반지주 세력이 매우 강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申씨는 대전교도소에 가서 비로소 독방에서 풀려나 일반 죄수들과 함께 수용될 수 있었다. 똑같은 제약된 생활이었지만 일반죄수들과 함께 있으면 독방에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시멘트벽에서부터 밀어 닥치는 한기를 인간들의 체온으로 차단할 수 있었다. 또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있어서 좋았다. 申씨는 이제 어떻게 징역을 살 것인가에 대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인텔리들의 경우 보람찬 징역계획을 짭니다. 즉 영어를 하겠다, 불어를 하겠다, 아니면 무슨무슨 학문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보겠다, 이런 식이죠. 다시말해 자신의 지식을 넓히겠다고 하는,인텔리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징역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달리했습니다. 무엇을 얻느냐 보다도 무엇을 버리느냐에 중심을 두기로 했습니다. 내 몸 속에 있는 관념적인 부분 을 과감하게 버려낼 수 있도록 생활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사막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은 모래에 대해서 연구해야 하고 극지방에서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은 얼음에 대해 보다 잘 알아야 한다. 극지방에서 사는 사람이 수영을 하려고 하고 사막에서 사는 사람이 얼음공부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라고 申씨는 말했다.

申씨는 이 교도소라는 곳을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의 축도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추려서 보내지는 곳이 교도소라면 이들의 인생을 통해서 스스로가 가졌던 공허한 관념적인 부분을, 또 인텔리적인 오만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라 는 생각이었다.

처음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申씨는 군대의 대기병 생활처럼 미지정 생활을 하며 이른바「공장출역」을 기다렸다.

공장출역이 란 노역을 뜻하는 것으로 징역을 하면서 일을 하는 교도작업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申씨는 일단「관용부」가 아닌, 공장으로 출역하기로 마음 먹었다. 관용부란 공장의 작업이 아니고 교도관을 보좌하는 일을 하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교무과의 잡무에서부터 교도소 내의 세탁이나 청소를 하는 일 둥이 관용부에 출역되어 하는 일들이었다. 즉 공장에 비해서 육체적으로 부담이 적은 곳이 바로 관용부라는 것이다.

申씨는 처음 염색공장으로 출역됐다. 이어 그는 양재•양화공장을 거쳐서 다시 양재공장으로 이어지는 공장 생활을 거쳤다. 염색공장은 광목을 짜서 죄수복 등을 만들 때 푸른색깔을 물들이는 곳이었고 양화공장에서는 직원들의 구두나 사회에 서 주문온 구두 등을 만들었다. 또 양재공장에서도 죄수복이나 주문온 옷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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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榮福씨가 옥중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와 연하장들.

연고 없이 죽은 70대죄수 묘비명 써주고 구내 合葬
 
공장생활이 어느 정도 계속되자 그의 손은 굳은살이 박혔다. 사회에서 굳은살이 박힌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해보겠다고 했던 인텔리 申씨가 교도소에 들어와 비로소 그들처럼 손에 굳은살이 박히게 된 것이다. 申씨는 이에 대해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펜을 잡았을 때에 생긴 굳은살은 없어지고 공장에서 새로운 굳은살이 박혔습니다. 비로소 나의 관념적인 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 같습니다.』

이처럼 공장생활에 열중하게 된 申씨에 게 대전교도소는 다른 일반죄수들과의 대화가 있어서 더욱 다행이었다. 세상과 철저하게 차단된 교도소였지만, 그는 이곳에서도 죄수들의 입을 통해,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 그들의 본심을 이해할 수 있었고, 이것은 申씨에게 이 사회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출 수 있도록 했다.

申씨는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인텔리의 안경」을 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딛고 있는 그 생각의「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어느 도시률 여행했을 때 그 도시를 알기 위해서 박물관이나 상가의 진열장, 또는 한밤 번화가의 네온사인을 먼저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도시의 갈등구조를 파악하고 그 도시의 본질을 보려는 사람은 그 도시의 밑바닥 인생들의 삶을 관찰하려 할 것이다.

『교도소 자체가 하나의 사회입니다. 또 그 사회의 구성요소라 여겨지는 죄수들이 란 것이 바깥사회에 있어서의 갖가지 모순의 분비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관찰함으로써 그 사회의 갈등구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즉 교도소 자체가 사회에 대 한 훌륭한 조망대라고나 할까요.』

申씨는 이곳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일반죄수 한 명의 묘비명을 쓴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나이가 70 가까이 된 그 죄수의 별명은 「호주기」였다. 자신의 전과회수도 모를 정도로 교도소를 제집처럼 드나든 그에게 붙여진 이 별명은 6«25때 산넘어 간 듯싶으면 다시 나타나는 쌕쌕이 비행기 「호주기」를 연상해서 붙여진 것. 다시말해 교도소에서 나간 듯하면 또다시 들어와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 「호주기」가 교도소 내에서 목욕을 하다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고 화상을 입은 지 얼마 후 죽었는데 아무 연고가 없으니 그 시신을 찾아갈 사람도 없었다. 이럴 경우 3년이 지나도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교도소부지에 있는 큰 무덤에 같은 처지의 다른 인골들과 합장을 하고 묘비를 세워주는데 申씨가 그 때 알게 된 「호주기」의 이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김철수」 였다는 것.
 
감옥서 쓴 편지 모아 책 출간
10월 중순에 서예 전시회도
 
申씨는 교도소 내에서 한국현대사의 고통에 대한 많은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사상범이 많이 있는 이 교도소의 특성 때문에 申씨는 한국분단의 비극에 대한 생생한 삶들과 부대낄 수도 있었다. 민족의 분단문제로 고민해 온 申씨에게는 갖가지 이유로 들어온 잘라진 삶들의 증언은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아침 7시에 출역된 후 공장에서 일하다 저녁 5시에 다시 입방하면 독서를 하거나 이들 일반죄수들과의 대화를 나누는 생활이었다.

申씨가 편지를 쓰게 된 것은 이러한 이야기 와 충격을 어느정도 소화하고 자신의 생활도 나름대로 중심을 잡고 이어나 갈 수 있게 된 뒤부터였다. 편지는 주로 집 에서 소포나 영치금을 보내온데 대한 답장의 형식으로 부모 형수 계수 등에게 썼다.

『편지가 검열을 통해 나가니까 미리 그 검열을 예상해서 써야 합니다. 또 편지를 편안한 자세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정해진 장소에서 한 장의 봉함엽서에다 쓰는 것이니만큼 비상한 정신력의 집중이 필요합니다.』

그는 편지를 쓸 때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鍾)이 부러웠다. 18년의 유배생활 동안 5백여권의 책을 써낼 수 있었던 茶山은 얼마나 행복한 그 시대의 이단아였단 말인가. 때문에 그의 편지는 함축과 응축으로 가득해 있다고 한다.

『징역살이에서 내가 느끼는 나 자신의 감성을 정리해서 언젠가는 내가 징역살이를 돌이켜볼 때의 단서로서 썼읍니다. 그래서 나는 편지의 단어 하나에서 책 한권 을 연상할 수 있읍니다.』이번에 출판된 편지 모음집의 제목은「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지만 申씨가 이름「다시 쓰고 싶은 편지」로 바꾸고 싶어하는 것은 이 때문 이다.

申씨는 또 교도소 내에서 서예를 익힐 수 있었다. 원래 한학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느 징도 서예에 대한 소 양은 갖고 있었던 데에다 교도소에 들이 온 후 서예반에서, 은거한 서예의 대가 정향 조병호( 靜香 趙炳鎬)선생, 만당 성주표(晩堂 成周杓)선생으로부터 홀륭한 지도를 받았다. 申씨는 처음에는 民本的인 내용의 글을 썼지만 뒤에는 어머님이 쓰던 한글 궁체를 변형한 이른바 民體를 개발했다. 申씨의 서예솜씨는 교도소 바깥에도 널리 알려졌는데 일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주위의 평가이다. 申씨는 주로「너른 마당」「젊은 사월」「한겨레 한나라」「아침 햇빛」등을 액자체로 썼는데 10월 중순에 진시회를 가질 예정이다. 

申씨는 출옥되기 이틀 전에야 비로소 석방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특벌한 감회는 없었읍니다. 실감이 나지 않았읍니다. 20년 징역살이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도 했읍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데에 대한 無知가 걱정되기도 했읍니다.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 사회가 달만큼 멀어 보였읍니다.』

申씨는 20년 20일만인 지난 8월14일 전 주교도소에서 출감했다. 나올 때 申씨는 19만9백50원의 근로보수를 받았다. 하루 20원꼴로 계산된 징역살이와 공장생활의 대가. 申씨는 교도관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나왔다.

『가두는 사람들과 갇힌 사람들 사이에도 끈끈한 인간적인 교감이 있읍니다. 이것이 암울한 징역살이를 살아가게 해주는 힘이 되기도 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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