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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1998-10-29
미디어 한겨레21 박승화

 

인터넷으로부터의 사색

우리사상 연구자 신영복씨

 

‘더불어 숲’ 새 세상 위해 대화방 개설…“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가야 합니다”

 

그의 이름 석자는 한때 ‘갇혀 있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고픈 편지의 대표 발신자였다. 88년에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93년에 나온 영인본 <엽서>는 20년 긴 세월을 ‘짐승의 시간’에 묶여 지내야 했던 우리 시대 한 양심수의 고백이자 연서로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아직도 놓지 않은 경제학자의 시각

 

“열한가족이 받은 징역이 도합 242년. 지금까지 산 햇수가 140년. 한마디로 징역을 오래 산 무기수와 장기수의 방입니다. 응달쪽과는 내복 한벌 차라는 양지 바른 방이라든가, 창 밖에 벽오동 푸른 잎사귀 사이로 산경이 아름답다는 점도 물론 좋은 점이지만, 나에게는 역경에서 삶을 개간해온 열사람의 역사를 만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가슴 뿌듯한 행운입니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신영복(57·성공회대 교수)씨가 20년 동안 검열의 선을 넘어 가족과 친구들에게 휴지며 엽서에 철필로 또박또박 써 보낸 편지들은 짧은 글이었지만, 큰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이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올린 진솔함으로 긴 감동을 남겼다. 그 감동은,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하는 옥방에서 그 “형벌 중의 형벌”을 이겨내며 자기개조의 나날을 보낸 한 지식인의 진실한 고백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징역 살러 들어가서 맨 먼저 발견한 것이 제 창백한 손이었습니다. 저의 20대를 지배했던 논리적 사고,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사상들을 상징했던 그 인텔리의 손과 결별하고 두껍고 투박한 손으로 가기 위한 성분개조의 시간, 옥살이를 거기에 바치자고 결심했조.”

 

(사진/서울이면서도 서울 밖 어느 먼 시골처럼 느껴지는 성공회대학 교정에서 젊은 교수들과 어울린 신영복씨.)

 

서울대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일하다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형을 받은 그는 옥에서 새로 태어났다. 우리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온 밑바닥 인생들과 부대끼며 그는 자본에 의해 구분되는 계급보다 지식에 의해 구분되는 계급의 골이 더 깊음을 깨우쳤다.

 

“비단 갇혀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튼튼한 연대감이야말로 닫힌 공간을 열고, 저 푸른 하늘을 숨쉬게 하며, 그리하여 긴장과 갈등마저 넉넉히 포용하는 거대한 대륙에 발 딛게 하는 우람한 힘이라 믿고 있습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픔’을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봅니다.”

 

그는 사상범들이 한데 모여 있어 ‘한국의 모스크바’라 불리던 대전교도소에서 자기개조를 이끌어줄 스승들을 만났다. 한학자이자 의병사 연구자인 노촌 이구영 선생이 그들 중 한분이다. 어린시절 할아버지께 배웠던 한학의 기초를 그의 가르침으로 튼튼하게 다졌다. 한글세대로서 서구사회에 대한 패배감에 젖어 있던 어린 생각을 바로잡고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서화반에 들어 글씨도 다시 썼다. ‘동상 예방 주의사항’ 같은 생활글씨를 옥 안 공장에 붙이며 그는 사람들과 함께 가는 민체(民體)를 깨우쳤다. 옛 선비들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듯이 그저 자연스레 함께 하는 것이라 자신을 서예가라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그는 그런 정신으로 글씨를 부탁하는 사람들에겐 두말없이 써준다. 성공회대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그의 글씨는 눈에 쏙 들어올 만큼 서민적이고 건강하다.

 

“88년에 가출옥하니까 사람들이 한결같이 묻는 말이 ‘참 많이 변했지요’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어요. 사람들은 여전히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며 아득바득 살고 있더군요. 우리 시대를 지배하던 속도와 목표와 성장에 대한 신화가 여전히 이 나라를 채찍질하고 있는 겁니다. 비용이 좀 많이 들더라도 인간적인 생산으로 갈 수는 없을까요. 차라리 좀 덜 만들고 덜 쓰더라도 다같이 나누어 사는 길은 없을까요.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쓰라린 경제적 난국은 결국 서구자본주의가 주인처럼 끌고가는 경제구조 밑에서 하인경제를 간신히 꾸려가던 우리의 환상이 깨진 건 아닐까요.”

 

그는 이제 자신을 경제학자라 부를 수는 없지만, 역사를 사회경제적 기반을 놓고 분석하는 시각은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신영복 교수가 학부 1, 2학년들을 대상으로 1학기에 개설했던 한국사상사 강의에 다른 대학 청강생은 물론 교수들과 일반 시민까지 찾아와 강의실을 가득 메웠던 건 아마도 이런 그의 반성적이면서도 넓은 시각이 소중했던 때문일 것이다.

 

“한 언론사의 제의로 머리털 나고 처음 해외여행을 하게 됐을 때, 제가 첫 발을 디딜 곳으로 고른 지점이 스페인의 우엘바 항구였습니다. 500여년 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향해 떠났던 바로 그 점에서 저는 그동안 역사를 지배해온 서구의 존재론, 그 살육과 파괴의 정복욕을 곰곰이 돌아보았습니다. 둥근 달걀을 깨 세운 콜럼버스는 생명을 무자비하게 짓이기는 폭력성의 상징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폭력의 신화를 맹신하던 꿈에서 깨어나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사상, 관계를 맺고 사는 아름다운 정신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서구적 패러다임을 깨는 길

 

신영복씨는 인터넷 홈페이지(www.shinyoungbok.pe.kr)에 대화방을 열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모든 이들과 만난다. 뿔뿔이 흩어져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한데 엮어주기 위해서다. 그는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 서구적 패러다임을 깨고 우리 나름의 생존원리를 찾는 길이라고 말했다.

 

“교도소에서도, 세상에서도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이 소수 악한 조직에 눌려 있어요. 나무가 숲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가오는 21세기엔 한그루 한그루 나무인 우리가 더불어 숲이 되는 새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오랜 세월 강철의 역사, 제국주의의 역사에 짓눌려온 우리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빛이 될 겁니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21 1998년 10월 29일 제2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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