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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1993-01-15
미디어 계간지 '이론'

계간지‘이론’편집위원장 정운영 교수와의 대담


1. 성장의 환경이 뒷날의 삶에 미친 영향으로 어떤 것이.

―지금 선생님이 받고 있는 법적 처분은 어떤 것입니까?

두 가지 처분을 받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석방 처분입니다. 가석방자가 가석방 기간중에 이런 일을 하면, 가석방 처분이 취소되고 즉시 잔형이 집행됩니다. 예를 들면 감호경찰서장의 허가를 받지 않고 주거지를 이전하거나 10일 이상 여행을 한 때,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집회나 시위 기타 파괴활동에 참가하거나 이를 지지·성원하는 따위의 법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한 때 등 10여 가지입니다. 제 경우 가석방 기간은 2000년 5월 5일까지 입니다.

―세기가 바뀐다는 말이군요.

그 동안 무슨 감형이나 사면 조치가 없다면 그렇게 되는 셈입니다. 둘째는 보안관찰 처분입니다. 보안관찰법에 관하여는 최근 그 내용의 일부가 알려졌습니다만 3개월마다 주요활동 사항, 통신·회합한 다른 보안 관찰처분 대상자의 인적 상항과 그 일시 장소 및 내용, 그리고 여행에 관한 사항도 파출소장을 거쳐 관할 경찰서장에게 신고하여야 합니다.

―오늘 이대담이 그 '주요활동'의 하나가 된다면 신고의 대상이 되겠군요. 선생님이 아직은 아무말이나 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정을 감안하여, 이 대담은 그 가석방 조건에 저촉되지 않는 아주 '부드러운'내용으로 한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습니다. 하하.

―출생 당시의 집안 환경부터 좀 들려 주시지요.

아버님은 자작농의 맏이로 일제 때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교사였고 어머님은 봉건지주의 막내 외동딸이었습니다. 저는 1940년 10월 태어서 1941년 8월에 났습니다. 고향은 경남 밀양입니다만 아버님의 임지인 경남 의령군 유곡국민학교의 교장 사택에서 태어났습니다. 위로 누님 두 분과 형님, 그리고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출생 배경이나 성장의 환경이 뒷날의 삶에 미친 어떤 영향 같은 것이 있습니까?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장 사택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 졸업까지 거의 전기간을 계속 사택에서 생활했습니다. 학교 사택에서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성장하였다는 사실이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저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됩니다. 대학 및 대학원 시절도 대부분 학교 연구실에서 살았고, 그 후 대학 강단에 섰다가 20년 동안 감옥이라는 '인생 대학'에서 살게 되었으니까요. 성장 환경이 주로 학교였습니다만 그 '학교'가 차츰 넓어져, 결국은 인생 대학이라는 굉장히 넓은 학교로 진학한 셈이지요.

―청소년기에 학교는 어디서 다녔습니까?

국민학교와 중학교는 고향인 밀양에서 마쳤습니다. 고등학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이 학교를 1959년에 졸업했습니다.

―그 시절의 사건으로 특히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습니까?

기억에 남는 일보다는 저의 정서와 성격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는 일을 이야기하라는 질문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도 그 당시에는 물론 느끼지 못했고 훨씬 후에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선 해방 당일의, 그러니까 1945년 8월 15일 밤이라고 생각됩니다. 밀양의 면소재지 국민학교의 일본인 교장 사택을 제가 점령했습니다.

―점령이요?

예, 그렇습니다. 아버님은 일제 때 일본인 교장배척운동에 가담하고 한글연구 비밀서클에 관계했다는 이유로 해직당했기 때문에-얼마뒤 복직이 되기는 했습니다만-해방 당일 마을의 젊은이들이 자연스럽게 우리집에 모였고, 그 젊은이들로부터 교장이 도망가고 비어있는 집을 가서 지키고 있으라는‘명령’을 받았습니다. 비오고 바람부는 그 밤을 꺼질듯 까무라치는 접시불 하나를 밝혀놓고, 제법 무서운 다다미 방을 지킨 것입니다. 제가 41년생이니까 다섯살 때의 일이지요. 밤중에 횃불을 든 동네 청년들이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는 보급품(?)으로 자두 몇 개를 주고 갔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아버님의 친구들께 그분들이 시키는대로, 물론 아이들 상대의 농담이지만, 나중에 커서는‘일본 총독’이 되겠다는 대답을 곧이 곧대로 하고 있었던 터라 그날 밤이 어린 저로서는 굉장히 감격적이었습니다.

―점령군 사령관에서 주일본한국총독에 이르기까지 어려서부터‘의식화 교육’을 단단히 받은 셈이군요. 해방에 이어 6·25가 선생님의 소년기를 지배하게 되는데요.

그렇지요. 해방과 6·25를 뜻도 모르고 겪었지요. 저에게 자주 팽이도 깎아주고 개천이나 들에서 곧잘 동무해주던 청년이 있었어요. 며칠전까지만해도 마을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그 청년이 당당하게 횃불을 들고 마을을 돌았는데, 그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습니다. 해방 당시의 일이었지요. 그러나 얼마후로는 그를 영영 볼 수 없었는데, 주변의 누구로부터도 분명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국민학교 4학년때 6·25를 맞았습니다. 하루는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하교길에 참으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남천교의 난간 양쪽으로 사람의 머리를 잘라서 달아놓았는데, 하도 무서워서 그 다리를 건널 수가 없었어요. 아마 10개가 넘었다고 기억됩니다.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은 남천교를 건너지 못한 채 울고 서 있었습니다. 양쪽 귀를 관통해서 철사로 꿰어 달아놓은 머리도 있고, 아래에서 올려다 보면 잘린 목통 속이 보이는 것도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은 형편없이 헝클어져 얼굴을 덮고 있었는데, 하나 같이 핏기가 가셔서 종이장처럼 새하얀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나마 덜 무서웠습니다. 그 달아놓은 머리의 뺨을 때리며 욕하는 노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우는 가족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끔찍한 일이 있은 후부터 저는 무슨 뚜렷한 이유도 없이 해방 당시의 그 청년의 머리가 그 속에 있었다는 확신에 가까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청준의 어느 작품으로 기억되는데, 그런 연상심리가 삶의 중요한 고비고비에 하나의 강박관념으로 작용하곤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강박관념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그 후 현대사와 관련된 문제를 독서하거나 토론할 때, 자주 그에 대한 추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만 한 가지만 더 하겠습니다. 이것도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하교 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3학년 말 성적표, 당시에는 통지표라고 했습니다만, 그 성적표를 받아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같은 반의 이선동이란 친구가 길을 막고 제게 따갑게 쏘아 부쳤습니다. 사실은 자기가 1등이라는 것이었지요. 너는 교장 아들이기 때문에 담임선생에게 잘 보여서 1등이 되었지만 사실은 자기가 1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들보다 두세살 나이가 많은 귀환동포로서, 해방후 일본에서 귀환했는데, 우리 또래보다는 여러 면으로 조숙한 편이었습니다. 당시 아버님은 우리학교의 교장이 아니셨고, 나 자신은 물론이고 함께 그 말을 들은 친구들도 그 아이의 말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아버님은 우리학교의 교장이 아니셨고, 나 자신은 물론이고 함께 그 말을 들은 친구들도 그 아이의 말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그후 그 친구의 집에 자주가게 되었는데 집이랄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길가로 달아낸 방 한칸과 먼지 자욱한 좁은 툇마루가 전부일 만큼 무척 가난했습니다. 한번도 그의 부모를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거의 굶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것은 처음보다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일이지만 무척 당황하셨겠습니다.

예,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고, 난 이후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학교에서 거의 고의적으로 일을 저질러 벌을 자초하는 여러가지 개구진 장난을 줄곧하게 되었습니다. 복도에 꿇어 앉아있는 정도는 가장 경미한 벌에 속하고 어떤 때는 전교생이 볼 수 있도록 운동장 한가운데 꿇어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아침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이 훈시하고 있는 동안 운동장을 뛰어 돌아야하는 벌을 받았는데, 조회 분위기가 산만해지자 교장선생님이 훈시를 잠시 멈추고 벌을 중지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소행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5학년때부터 일약 응원단장으로 발탁되었지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계속 응원단장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응원단장만 계속했더라면 편안히 살 수 있었을 텐데, 괜히 선수로 나섰다가 그만…….

글쎄, 선수랄 수도 없습니다만……. 다 팔자지요. 공교롭게도 제게는 저보다 공부는 잘하면서도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는 친구가 꼭 한 두명씩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생에는 서울상대 경제학과에 함께 합격하고도 입학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은행본점의 부장으로 있습니다. 중학교시절의 친구는 제가 대학 다닐때 고향에서 이발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방학때 고향에 가면 저는 일부러라도 그 친구의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했습니다. 국민학교 적의 친구는 영영 소식을 모릅니다.

―청소년기의 자화상을 그린다면 한 마디로 어떤 분위기를 띠리라고 생각하십니까?

3형제중 둘째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집에서보다는 바깥에서 더 인기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형과 다투면 동생이 형한테 대든다고 야단맞고, 동생과 다투면 동생하나 거두지 못한다고 야단맞는게 둘째입니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별로 주목 받지 못하고 바깥에 친구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의 장서를 읽는 누님들과 형님을 따라 그 뜻도 모르면서 비교적 조숙한 독서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버님의 장서와 그‘조숙한 독서’의 내용을 좀 공개하시지요.

박계주의『순애보』, 이광수의『흙』이나『유정』같은 소설을 국민학교때 읽었습니다. 아버님 서가에는 유학(儒學)관계 서적이나 동양고전이 많았습니다만, 이시첸코의『철학사전』, 보차로프의『세계사 교정』, 전석담·허동 등이 번역한『자본』1권도 있었습니다.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 특별한 이유나 동기가 있습니까?

실업계인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저의 자형이 그 학교의 교사로 있었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모님께서 둘째까지 서울 보내서 유학시킬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어가 되고 싶다거나 무슨 일을 하겠다는 특별한 포부는 없었습니다. 주산과 부기과목에 도무지 흥미를 느낄 수 없었고, 좀 더 본질적인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생각했던‘본질적인 공부’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렇게 물으니 제가‘본질적’이란 말을 잘못 사용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청소년기에 느끼는 본질이란 것이 뭐 대단한 것일 수는 없지만, 당시에는 사르트르의 책을 학교에 가지고 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청소년이 그렇듯이, 저도 막연한 희망이지만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요.

―벌써 문학적 재질이 상당했던 듯한데, 혹시 백일장 같은 데 참가하여 입상한 경력이나 작품 내용에 관하여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까?

장원은 한번도 못했습니다만 입상은 빠지지 않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의 백일장에서 느낀 점인데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상당히 두툼한 시작(詩作) 노트를 한권씩 들고와서는, 출제된 시제와 비슷한 것들을 골라서 그것을 다듬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문예반도 아니었을 뿐더러 시작 노트 따위가 있을 리 없었지요. 입상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시상식때까지 남아 있던 친구들이 상장과 상품을 받아서 학교에 갖다주었습니다. 한글날 부산시 백일장에서 출제된 시제가‘지도(地圖)’였는데 제가 장원은 못했지만 분단의 아픔을 썼다고 칭찬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는데, 그에 관해 들려줄 얘기가 있습니까?

고교시절에는 시인이던 국어선생님의 영향이 상당히 컸던 것 같습니다. 그 선생님은 4·19 뒤의 교원노조 활동으로 인해 5·16이 나자 구속되기도 하신 분입니다. 생각하면 그 선생님의 과분한 애정을 받았습니다. 친구분들의 술자리에 끼어 앉히기도 해주시고, 선생님이 관여하던 주간 신문의 일을 돕게도 해주시고, 문예반 소속이 아닌데도 저를 부산 마산 진주 등 문화제 행사의 백일장에 출전시키기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경제학과 진학을 강력하게 주장하신 분입니다.‘강력하게’라는 표현을 쓰는 까닭은 고등학교 졸업 후 은행 입행시험을 치르고 온 저를 불러서 이튿날의 면접을 포기하도록 저를 설득하셨기 때문입니다.

―배치고사 성적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학과를 지정하는 요즘의 진학 지도와는 달리 당시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지도는, 특히 그 분이 인생이나 사회에 대한 넓고 깊은 안목을 틔워준‘존경하는’선생님일 경우에는, 학생들의 장래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필 경제학과를 권유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그 선생님은 설명이 많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그냥‘가라’는 것이었어요. 경제학은 돈 벌어서 자기 혼자 잘 살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미국이 경제원조와 군사원조가 사실은 원조가 아니라는 거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주로 경제적 빈곤의 문제에 관하여 말씀하셨고, 경제제도나 체제의 문제에 대한 말씀은 없었습니다. 저의 자형이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이었는데, 그 쪽의 영향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2. 대학시절사회의 전반적 분위기.

―60년대라면 전쟁과 기아의 연대인 50년대와, 본격적 개발의 연대인 70년대를 이어주는 가교가 되는 시기입니다. 물질적인 빈곤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무척 황폐한 시대였지요. 혁명은 군부쿠데타로 좌절되었고, 반공과 북진통일 틈바구니에서 자유로운 사고는 숨쉴 틈이 없었고, 일본과의 국교 재개 및 월남 파병 등으로 국내외가 무척 소란했습니다. 대학 시절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대학에 다닌 시기가 1959년에서 1963년까지입니다. 4·19와 5·16을 재학 중에 겪었습니다. 저희들의 대학 시절은 한마디로‘혁명과 반혁명’시절이었습니다. 해방 정국의 열기가 6·25전쟁 기간 동안 완벽하게 초토화되고, 이후 매카시적 반공 이데올로기의 중압밑에 모든 진보적 역량이 봉쇄되어 버린 상황이었습니다. 4·19를 계기로 이러한 역량의 일부가 표면으로 분출됩니다. 4·19는 부정과 부패에 대한 항거라는 형태로 표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4·19뒤 상황의 진전을 통하여 우리는 당시의 지배정권이 어떠한 세력이었으며 또 그 세력이 어떠한 계층을 억압하고 있었던가를 깨닫게 되었지요. 다시 말하면 지배-피지배라는 사회의 계급적 구조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 부문 운동들은 해방직후 좌절의 경험이 아직도 극복되지 못한 상태였고, 더구나 전쟁 동안의 초토화로 말미암아 그런 좌절을 극복할 토대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좀전에 “역량의 일부가 표면화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만, 이 점은 5·16이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5·16은 4·19를 계기로 진전된 일정한 혁명적 성과를 궤멸시키면서, 그 좌절의 분위기를 신속하게 친미·반공을 기조로 한‘조국 근대화’의 이데올로기로 포섭해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저희들의 대학시절은 이를테면‘미완의’혁명과‘미완의’좌절을 함께 겪은 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회 상황에서 대학의 교과내용이나 연구 풍토는 어떠했습니까?

경제학과의 경우는 케인즈로 대표되는 근대경제학 중심으로 커리큘럼이 짜여져 있었습니다. 자본축적론과 같이 마르크스 모형에 의해서 축적구조를 설명하는 강의도 일부 있었지만, 전반적인 풍토는 근대 경제학적 관점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성장론 완전고용정책 화폐금융론 등이 기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서클 중심의 학회에서는 슘페터, 돕, 로빈슨, 후버만 등의 이론들이 논의되었습니다. 4·19직후에는 한동안『자본』원강이 선택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하고, 세미나 서클에서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들이 교재로 등장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연구 분위기는 방금 말씀드린 대로 근대경제학 일생이었습니다. 마르크스-레닌 관련 서적은 도서관의 분류카드에도 없었지요. 한마디로 당시 대학의 연구 풍토는 기존의 지배이념을 비판하고 대항하기 위한 변혁이론의 산실로서는 여러 면에서 부족했다고 생각됩니다.

―당시로는 그 이론들이 그래도 가장‘급진적’이었을텐데요. 모리스 돕 조차도 처방이 약하다고 해서 학생들이 외면했던 80년대 중후반의 상황과 비교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없지 않습니다. 계급이나 민족의 문제에 대해 당시의 학생들 사이에서 첨예하게 논의된 관심사가 있다면, 그 주제와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당시는 1차 산업의 비중이 인구 구성에 있어서나 국민총생산 구성에 있어서 가장 높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농업문제, 농민문제에 관한 논의가 상당히 활발하였습니다. 4·19이후 민족문제를 통일운동의 형태로 학생운동의 장으로 이끌어내기는 했습니다만, 5·16이후 거의 일상화되다시피한 극우적인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뛰어넘기가 어려웠습니다.

―비록 농민문제가 중심이 되었던 초보적인 수준이나마 그 계급적인 관점과 민족적인 관점이 서로 대립했던 계기나, 혹은 그들을 통일시키려는 시도 같은 것은 없습니까?

대립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만, 반제통일과 반파쇼민주의 대립구도는 물론 있었습니다. 쟁점 자체는 지금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문제를 놓고 열띤 논의들을 했었지요. 이러한 대립구도를 지양하기 위해서 사회계급 분석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대개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그래서 해방 전후의 사회변동 과정을 계급의 관점에서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4·19 당시에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당시 저는 대학 2학년이었습니다. 4·19데모는 주로 문리대 쪽에서 조직했고, 상과대학에서는 사전 조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저는 저학년인데다 아르바이트 하느라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시위에는 물론 참가했지요.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지금은 청와대로 이름을 고쳤지만 당시의 경무대 앞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는 이미 발포가 시작되어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고등학생 한명이 달려와서 피묻은 러닝셔츠를 펼쳐보이며 울면서 외쳤습니다. 텅빈 국회의사당 앞에 앉아서 뭘 하느냐는 거였어요.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서는 경무대로 밀고 가자느니, 가서 개죽음 당할 필요가 없다느니 설왕설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저게(피묻은 셔츠) 어째서 개죽음이냐”는 고함소리가 났어요. 돌아다 보았더니 의외에도 가까운 친구였어요. 그래서 더욱 충격이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경무대 쪽으로 달려갔어요. 저도 종암동의 학교에서부터 줄곧 저와 함께 스크럼을 짜고 시위에 참가했던 친구를 따라 경무대로 향했습니다. 그때 그의 애인이 달려와서 그의 팔을 잡고 매달렸습니다. 저는 붙잡는 애인이 없어서 그냥 경무대로 갔었어요. 저희 선배 한 분이 그 곳에서 숨졌습니다.

―붙잡는 애인이 없었다는 것은 유감입니다만, 아마 붙잡는 애인이 있었어도 경무대로 달려갔으리란 생각이 드는데요. 학과 공부 이외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서클운동에 열심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서클에서 논의한 주제들은 분단문제, 미국의 한반도 전략과 신식민지지배, 매판자본 등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에서부터 제3세계, 세계사, 한국근대사 등 잡다할 정도로 광범한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전위운동에 필요한 의식을 공유하려는 노력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당시의 은사들 가운데 특별히 기억하는 분이 있습니까?

저는 특별한 한 사람의 영향을 집중적으로 받았다기보다는 여러 선생님들의 영향와 애정을 고루 받았습니다. 후에 서울대 총장이 되신 최문환 선생님, 충남대 총장을 역임한 이현재 선생님, 나중에 기업으로 나가신 홍성유 교수님, 사회대 학장을 지낸 임종철 교수님 등 여러분입니다. 그리고 강사로 철학을 가르친 권세원 교수님도 책을 많이 주셨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줄곧 느끼는 일입니다만 인간적인면에서 늘 과분한 애정을 받아 항상 빚진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연구실을 사용하기도 하고, 선생님 댁에서 밥도 먹고 심지어 잠도 잤습니다. 지금의 학생들로서는 누리기 어려운 일들이지요. 그러나 당시 제가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사람은 선생님들보다는 오히려 선배들과 후배들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연구실을 이웃해 있던 안병직 선배와 신용하 선배, 신문편집을 맡았던 장종록 선배, 그리고 연구실과 세미나 서클을 통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던 후배들이었습니다. 부담없는 토론은 그 과정을 통하여 문제를 논리적으로 정리해주고 사고의 폭도 넓혀준다고 믿습니다.

―은사나 선후배 이외에 달리 기억할 만한 분은 없습니까?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한 분 계시는데, 학교의 수위인 유씨 아저씨입니다. 제가 대학3~4학년과 대학원 2년을 줄곧 학교 연구실에서 기거하다시피 생활했기 때문에 매우 가까워진 분입니다. 밤중에 유씨 아저씨대신 수위 모자를 쓰고 손전등을 들고, 교정에 들어와 있는 아베크족(주로 후배들이지만)을 쫓아내는 장난을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유씨 아저씨는 고상(高商) 시절인 일제 때부터 학교에 계신 분으로 국대안 반대운동이나 6·25당시의 학교 이야기도 들여주시고, 당시 교수들의 이야기며 심지어는 그 교수들의 학생 시절의 면모까지 소상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 가운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옛날에는 대단한 학생들이 참많았는데, 그런 학생들은 거의가 죽거나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지금도 학생들을 보면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 알 수 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예언했습니까?

저의 장래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학회, 연구회, 과외활동 등 선생님이 참여했던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들려주시지요. 말씀을 드리고 보니 어째 말투가 꼭 조서받는 식이 되어버렸는데, 이거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요. 하도 많이 당해봐서……. 상과대학 내에서는 경우회 회원이었고, 교지인 『상대평론』의 편집위원, 그리고 단과대학 신문인 『상대신문』의 기자였습니다. 당시 대학의 분위기는 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느 정도의 이념성을 가진 학회 및 학생활동은 4·19이후인 3학년 때부터 학회와 서클활동에 참여했는데, 자연히 후배들의 세미나를 지도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상과대학 이외에는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의 세미나 서클에 참여하거나 그를 지도했으며 농촌학원, 대학생 종교단체, 공장 야학에도 직접·간접으로 관계하였습니다.

―말씀 마지막 부분의 공장야학이란 무엇입니까?

제가 관여하고 있던 기독교학생 서클에서 공장야학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중소 섬유업체였는데 노동야학은 아니고 학원야학의 성격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생활과 정서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시도에 불과했습니다. 70년대의 노동현장에 투신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징역속에서 들었는데, 매우 부럽고 반가웠습니다.

―후일 문제가 되기도 했던 경우회에 대해 설명해 주시지요.

경우회는 상과대학 경제학과의 비교적 진보적 성향의 학생서클입니다. 회원 상호간의 토론과 연구는 물론, 총회 및 연구발표회를 통해 선배들과 연계되고 또 그 지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경우회에 가입한 것은 3학년 때였습니다. 저는 4기 회원이었습니다만 당시 4기 회원의 모임은 거의 없었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1~2학년의 세미나를 지도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제가 1961년에 입회하여 1968년 구속될 당시까지 관여하였기 때문에 저의 구속과 함께 연루되어 구속된 회원도 있었고, 다른 많은 회원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의 학번 계산방식으로 하면 제가 59학번인데, 언젠가 89~90학번의 경제학과 학생들이 집으로 놀러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의‘경제학과 노래’가 그때의 경우회회가(會歌)입니다. 1기 회원의 음대 출신 부인이 곡을 붙이고 노랫말은 제가 지은 것입니다.

―그 작사 솜씨를 한번 공개하시지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아마‘찬 이성’과‘더운 가슴’이란 말이 들어 있었을 겁니다. 경제학자 마샬의 한 구절을 번역한 것이지요. 기회가 닿으면 저도 그 가사를 한번 다시 보고 싶습니다만, 지금 그 가사를 대하면 무척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수준이 그랬습니다. 자기의 글이나 글씨는 그 장점보다는 결함이 먼저 눈에 뜨이는 법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좋은 노래가 얼마나 많습니까?

―60년대의 서울상대 출신 가운데 지금‘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여럿입니다. 혹시 김근태나 장명국에 대해 기억에 남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김근태와 장명국은 65학번으로 동기였다고 기억됩니다. 장명국은 1~2학년 때부터 자신의 이념적 입장을 비교적 분명하게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구속되면서 조사를 받는 등 고생도 하고, 그후로도 그 일때문에 여러가지 애로가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김근태는 제가 가지고 있는 책들을 빌려 읽을 정도로 매우 학구적이었고,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는 능력이 돋보였지요. 제가 세미나를 지도하던 당시는 두 사람 모두 1~2학년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활동을 개시하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때의 세미나는 근대경제사, 즉 자본주의 성립사를 주제로 하였습니다만 토론과정에서는 헤겔을 비롯하여 고리끼에서부터 쇼스타코비치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대담자인 정운영 교수도 학번은 다르지만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고 생각되는데요.

―저는 경우회 회원이 아니었고, 그제나 이제나 철이 안들어서……. 아무튼 선생님이 중심이 되었던 당시의 그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제법 출세를 했을 텐데요.

하하, 이걸 어쩌지요. 이제와서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나 그건 나 때문이 아니라 각자의 팔자 때문입니다. 개인의 팔자만이 아니라 민족의 팔자도 그 속에 들어있기는 하지만…….

―60년대 후반에는 한국사회연구회를 중심으로 김승호나 김병곤 같은 출중한 후배들이 나왔습니다. 한 캠퍼스에서 책상을 나란히 놓고 공부한 이들이 지금은 상당히 다른 정치적 견해를 지니고 있는 현실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변혁운동에 헌신한 후배들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는 이를테면 서울상대 출신전체의 사회적 입장이나 견해 차이에 비하면 거의 문제가 안될 정도라고 보아야겠지요. 물론 변혁운동에 뛰어든 경제학과 출신들의 자세가 동년배의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다소 비타협적인 면도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차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방법상의 문제이고 전술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으로‘차이’가‘다양성’이라는 형태로 유연하게 연대되지 못하는 것은 변혁운동의 전체 역량이 미숙하고 취약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말하자면 그 운동의 현상형태에 불과한 것이지요. 정파 중심의 단계는 다른 나라의 운동사에도 나타났었습니다. 어쨌든 변혁 역량이 확실한 지도구심을 구축할 수 있을 정도로 장성하지 못하고 있는데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그 단일한 본질에도 불구하고 현상적으로는 다양한 측면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견해나 입장 차이는 그것이 적대적인 것이 아닌 한, 길게 보아서 그것이 오히려 풍부하고 유연한 대응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차이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러한 차이들간의 관계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그런‘희망사항’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갈등은 상당히 심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하는지 원칙이나 자세에 대한 충고를 한마디 해주시지요.

방금 말씀드렸듯이‘관계설정’을 해야지요. 여러 가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관계만이라도 유보해두어야 합니다. 인간적 관계마저 상처내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이것은 논의를 조기에 종결시키거나 논의를 밖으로 갖고 나가기 때문입니다. 논의를 조기에 종결시킨다는 것은 관계설정을 하지 않은 채 끝낸다는 의미이고, 바깥으로 갖고나간다는 것은 그 갈등을 대중적으로 확대한다는 뜻이지요. 통전 전술에서 이른바 “주도권을 장악하라. 그렇지 못 할 경우에는 독자성을 견지하라”는 원칙이 있는데, 이것은 자칫 잘못 해석될 수 있는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부연하시겠습니까?

이를테면 가장‘과학적’인 등산 코스가 이론적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과학적’이란 용어에 담긴 교조성입니다. 오늘 등산의 목적과 성격이라든가, 함께 산을 오르는 일행의 성별 연령 체력 등에 따라 그 과학성이 얼마든지 재규정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좀 부드러운 얘기로, 대학 시절의 로맨스가 있으면 있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범위 내에서 한번 공개하십시요.

징역사는 동안 연애라도 했었더라면 하는 후회를 한 적도 없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진전될 수 있었던 몇몇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함께 옥살이하는 사람 가운데는 젊은 아내를 바깥에 둔 사람도 있고, 약혼녀나 애인이 접견오고 편지 보내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부러울 때도 있었습니다만, 막상 그 사람들이 애태우는 심정은 옆에서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럴 상대가 없어서 서운하기는 해도 차라리 홀가분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학교 다닐때는 친구들도 그렇고 선후배들도 어쩐 일인지 저한테 애인이 있는 것으로 지레짐작들을 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학교의 유씨 아저씨와 가끔 극장구경을 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공교롭게도 애인과 함께 구경온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극장에 갈때면 으레 또 누구아는 학생이 오지 않았나 하고 목을 뽑고 두리번거리며 찾아내는 버릇이 생겼는데, 정작 발각(?)된 학생들은 매우 부끄러워하고 어색해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 걸 보고, 저렇게 부끄럽고 어색한 일을 내가 쉽사리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이왕 내친 김에 선생님의 여성관을 한번 들려주시지요.

계수로 표현하는 것이 무리이긴 합니다만 저는‘여성관’이라고 할 때, 물론‘남성관’이라고 할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관’의 대상이 되는 부분은 10%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 90%는 남성과 여성에 공통되는 인격 일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조시대에는 물론 그 비율이 지금과는 달랐겠지요. 이 10%에 대한‘관’이 흡사 전체에 대한 것으로 오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무리인 줄 알면서도 편의상 10%라고 밝혀두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성관이라고 할 때 지금까지는 그 바탕에 전근대적 사회관, 전통적 여성관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제되어 있고 그것을 기준으로 여성관을 펴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90년대의 소위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전통적 가치기준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남아선호 경향만 하더라도 지금은 전혀 다른 동기에서 추구됩니다. 여아에 비하여 남아가 이윤율이 높은 투자 대상이라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미라고 할 경우 물론 그것이 전인격의 10%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것의 실체가 사용가치와 미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와 미의 결합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교환가치와 미의 관계는 전자가 후자를 규정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남성보다는 여성의 경우에 더 신속하고, 나이 많은 사람보다는 젊은 사람의 경우가 더 신속합니다.

― 아주 재미있고 중요한 지적입니다.

사회변혁을 소위 이미지의 변화로써 대체해버리는, 그래서 사회의 모순을 은폐해가는 상품생산사회의 당연한 귀결입니다. 노동력의 경우는 남자 쪽의 상품화률이 높지만, 인격적인 면에서는 여자 쪽의 상품화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상이 인격을 대체하지요. 이야기의 방향이 질문의 의도와 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러한 물신성, 상품성에 대한 비판이 여성관의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대학원에 진학한 특별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대학 시절의 얘기는 이쯤으로 끝내고, 다시 딱딱한 얘기로 돌리겠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한 어떤 특별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대학원 진학은 제게 상당히 중요한 기로였습니다. 저의 동기들은 현재 대개 기업, 은행, 관공서 등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습니다. 졸업 후 사회에 나간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대체로 그러한 코스를 밟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길을 걷게 되면 아무래도 양심의 문제에 걸릴 것 같았어요. 대학에 진학하고 난 후 물론 국민학교 시절의 자의식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처지였습니다. 역전된 처지는 제게 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나 자신이 살아가야 할 진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에서의 위치 설정에 대하여 상당히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대학원 진학의 또 한가지의 이유는 읽고 싶은 책이 많이 밀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청년학생운동과 기층민중운동과의 관계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었는데, 그 논의에 대한 나 자신의 결론에 의하더라도 학교에 남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원 재학 시절에는 주로 어떤 공부를 어떻게 했습니까?

경제사, 이론경제, 경제정책의 순서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책은 주로 선생님들 한테서 갖다 보았습니다만 학교도서관의 서고에 있는 마르크스-레닌 전집류와 고려대학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장서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석사학위 논문으로는 어떤 주제를 잡았습니까?

제목은『봉건제 사회의 해체에 관한 연구』입니다만,‘노동력의 사회적 존재양식을 중심으로’라는 부제가 딸려 있습니다. 처음에는 『노동력의 사회적 존재양식에 관한 연구:봉건제 사회의 해체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제출했습니다만, 지도교수인 최문환 학장이 난색을 표해서 제목도 바꾸고, 내용도 일부 삭제하고, 주(註)도 다시 정리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지도교수도 박희범 교수로 바뀌었습니다. 주를 다시 정리한 것은 제가 간접 인용한 부분도 있고, 당시로서는 출처를 표시하기가 곤란한 책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봉건제는 분석하지 못하고 서양경제사를 중심으로 주로 스위지, 돕, 다카하시, 스즈끼 등의 연구논문들을 기초로 하여 봉건제의 해체과정을 노동력의 사회적 존재양식이라는 시각에서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할 때, 그 논문이 함축하는 결론 가운데 혹시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에 적용되거나 접맥될 만한 부분이 있습니까?

별로 없을 듯합니다. 이건 본문과 관계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잘아다시피 소위 사회성격 논쟁에서 주된 시각이‘자본의 성격’에 촛점이 마추어져 진행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물론 자본의 성격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이나 봉건제 사회의 성격과 그 해체과정이 유럽과 판이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노동력이라는 관점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의 성격, 노동력의 사회적 존재양식이라는 시각은 자본주의를 역사적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게 해 줄 뿐만아니라 사회의 분석이 경제주의에 빠지는 것도 막아주리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이나 대학원 시절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진보적 이론을 접하게 된 어떤 인연이나 계기가 있었습니까?

당시 마르크스-레닌 이론에 관한 연구는 철저히 터부였고 책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6·25로부터 당시에 이르는 광범한 사상의 초토화지대가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보다는 해방 전후의 상황과 시간적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마르크스-레닌 이론에 대한 관심 자체는 여러가지 형태로 산재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제3세계의 사회주의적 개발방식과 계획경제의 성과가 진보지향적인 학생들의 의식을 과잉규정했던 면도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치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분단문제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사회주의 이론을 망라하게 됩니다. 해방이후 정권의 정통성도 없었고, 식민지 경제구조도 그대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부정 부패의 만연, 그리고 광범한 빈곤의 축척은 자본주의적 개발방식의 한계와 모순을 쉽게 느끼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소위 후진국개발 이론은 선진국에서 국제경제론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치·경제적인 동기 이외에도, 마르크스-레닌중의 이론에서는 정치경제학을 비롯하여 철학적 논리, 역사적 관점, 인간의 소외문제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지적 광맥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위에서 사회주의가‘과잉규정’한 면이 있다고 자계의 말씀을 하셨는데, 당시 마르크스주의를 대했던 선생님의 자세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방금 말씀드린 바와같이 마르크스주의를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서 가장 체계적인 이론으로, 가장 정합적인 실천과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때까지 독서에서 항상 문제점으로 느꼈던 철학의 빈곤, 이론의 관념성, 가치의 물신성 등에 관하여 뛰어난 통찰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대상으로 했던 19세기의 서구 자본주의와 우리나라의 자본주의는 그 성격과 지위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창조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베트남의 민족해방이론, 중소간의 이념논쟁, 마오이즘 등 당시에 벌써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회주의 이론이 전개되기도 했으니까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책으로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때는 금서이거나 구할 수 없었던 책들이 지금은 거의 대부분 번역·출판되어 있습니다. 광화문 네거리의 고서점에서 일어판『자본』을 구입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마침 가진 돈이 없어서 서점주인 할아버지에게 돈을 가지고 올 때까지 그 책을 서가에서 내려놓아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할아버지의 대답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책을 내놓은 지 벌써 2주가 지났는데도 찾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고 하더군요. 과거에 무슨 사연이 있는 듯한 분위기를 그분에게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리끼의 『어머니』는 제가 옥중에 있을 때인 1985년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는데, 아버님께서 영치시켜 주셨습니다. 그 책이 교도소의 검열을 거쳐 열독허가증까지 붙어서 저한테 전달되었습니다. 옛날 생각이 나더군요. 당시 우리는 그 책을 영문판으로 읽었고, 후배중의 한 사람이 그것을 대학노트 네권에다 깨알같은 글씨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 노트에는 번역자가 눈물을 떨어뜨려 군데군데 번진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다가 역자가 눈물을 흘린 곳이라는 표시를 했지요. 그 노트를 돌려가며 읽었습니다. 당시에는 안국동이나 동대문 헌책방에서 해방직후에 발간된 책들을 더러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책을 지식으로 읽거나 지식을 위해 읽어서는 결국 작은 소득밖에 얻을 수 없는 법입니다.

―저도 나중에 그 책을 보았는데 착찹한 심경이 들더군요. 그 책은 장명국씨가 경영하는 석탑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문득 그것이 선생님에게 보내는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어머니』는 당시 서울상대 학생들의‘의식화 교본’의 하나였으며, 장형도 의식화 교육을 받고 또 베풀었을테니까 말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저도 그 책을 손에 들고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 위경이란 아호를 쓴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에 대한 사연을 좀 들려주시지요.

최문환 학장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제 이름이 너무 흔하고 운치가 없다고 하시면서 필명으로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공소장에는‘가명’이라고 기재되어 있지요. 저희 선조 할아버지 가운데 외자로 위(緯)자를 쓰는 분이 있는데 호를 자하(紫霞)라 하지요. 선생님 말씀이 위(緯)보다는 경(經)이 더 높은 자니까 외자 이름으로 경(經)자를 쓰라고 하셨어요. 그려면 결국 신경(申經)이 되는데,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갈대 위(葦)자를 한자 더 넣어주시면서 파스칼이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잖느냐고 하셨습니다. 신위경(申葦經)으로 발표된 글도 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강사 시절에는 어디서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대학원을 졸업하던 1965년부터 숙명여자대학에서 원서강독으로 후진국개발론을 강의했고, 66년부터 68년까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원론과 근대경제사를 강의했습니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게 된 사정을 들려주십시요.

육군사관학교에서 서울대학교로 교수부 강사요원의 추천을 의로해왔습니다. 중위로 임관시켜 3년간의 군복무를 교수부에서 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저는 제1보충역으로 병역의무가 면제된 상태였습니다만, 회문환 학장의 권유와 추천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임관 되었습니다.

―민족의 장래에 대해 당시 육사생도들의 생각과 일반 대학생들의 인식에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민족의 장래에 대한 인식이라기보다는 국가사회관에 있어서는 사관생도 쪽이 훨씬 진지하고 투철하였습니다. 민족주의적 경향, 부정 부패에 대한 결연한 태도, 조국의 정치·경제발전에 대한 의지는 일반 대학의 개인주의적 성향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일 정도였습니다. 다만 사관학교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부 생도들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사회의식이나 비판적 관점을 수용하기가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생도들 가운데는 지금 장성으로 진급한 사람도 있을 텐데, 혹시 기억에 남는 일이나 사람이 있으면 그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시지요.

경제원론은 3학년의 필수교과였고, 제가 66년부터 68년까지 강의했기 때문에 기수로 따져서 육사24, 25, 26기생은 모두 강의를 받은 셈이지요. 물론 현재 장성으로 진급한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간 일체 내왕이나 소식이 없어 전혀 사정을 모릅니다. 고수부에 함께 강의하던 육사출신 교수중에는 장관으로 입각한 사람도 있고, 행벙부나 정치권에서 그 이름을 볼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4. 통일혁명당 사건에 관여한 사정을 말씀해주시지요.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은 그 내용이나 규모로 보아 당시 지식인 사회, 아니 사회 전체의 지축을 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일에 관여한 사정을 말씀해주시지요.

『청맥』지의 편집을 맡고 있던 김질락 선배를 통해서입니다. 박희범 교수 댁에서 원고 청탁차 방문한 『청맥』지의 편집진과 인사를 나눈 것이 최초의 인연이었다고 기억됩니다. 그리고『청맥』지의 집필진(pool)인 새문화연구회에 참여하게 되었지요. 새문화연구회는 젊은 강사 2~30명 정도가 회원으로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 학생 서클운동에 열심이었는데, 인원이 늘어나면서 기관지나 교재 편집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청맥』지의 편집에 관여하여, 그것을 서클의 교재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청맥』지에 글을 쓴 적은 없지만, 자연히 이 잡지의 내용과 방향에 대해서 김질락 선배와 논의를 많이 한 편입니다. 그 과정에서 법률적 용어로 말하자면 포섭당하게된 셈이지요.

―당시 중앙정보부가 그린 도표에 따르면, 통혁의 전위조직으로 조국해방전선과 민족해방전선이란 두 기구가 존재했습니다. 선생님이 지도한 기구로 알려진 민족해방전선의 실체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민족해방전선을 잘 아시다시피 당 수준보다는 낮은 강령과 규약을 기초로 하여, 다양한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소위 통일전선체를 건설하기 위한 전위조직으로서 구상된 것입니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 근거한 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적 지도의 필요성은 어떠한 상황이나 어떠한 단계에서도 그 의의를 부정할 수 없지만, 당시의 주체적 역량이나 객관적 조건에 비추어 볼때 전선체 이상의 조직 역량을 없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통혁 사건의 전모 가운데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부분도 있습니까?

지하당의 조직원칙 가운데 하나는 상부선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통혁당 서울시당의 창당그룹이 그러한 조직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이러한 문제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통일혁명당 조직을 전위당 건설의 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일혁명당을 두고 북한과의 연계성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고 남한내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는데, 선생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통일혁명당은 조선노동당과는 무관한 조직입니다. 이 점은 이미 여러 논의에서 많이 언급된 문제입니다. 통혁당의 건설 논의 자체가 기본적으로는 남북간에 서로 다른 체제와 독자적인 정치·경제적 토대가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통일과 혁명을 서로 돕는 관계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남과 북을 양 당사자로 하는 통일 문제를 민족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속에 사고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혁명의 문제는 기존의 정치·경제적 토대에 그야말로 토대를 두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수입되거나 수출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원칙이 견지되지 않은면이 없지 않습니다만, 원칙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논의를 하였고 합의도 했습니다.

―이른바 주체사상에 대해 통혁 내에서는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당시는 주체상이 체계적인 철학적 윈리로서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주체상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었습니다만 그것이 주체상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북한의 통일노선과 혁명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습니까?

당시 우리의 통일역량이나 혁명역량이 그 조직역량에 있어서 매우 낮은 수준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혁명에서의 남한 주체성은 원칙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조금 전의 답변으로 대신한 것으로 하지요.

―통일혁명당과는 다른 갈래의 조직이었던 인민혁명당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이를테면 통혁은 북한과 일정한 연계를 가지고 있는데, 인혁은 남한내의 독자적인 조직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인혁에 대해 선생님이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다는 일부 인사의 기술은 정확합니까?

저는 그런‘기술’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견해는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소위 독자노선에 대해 비판적 주장을 내놓은 적이 없습니다. 한국사회의 변혁운동은 남한이라는 지역적 범주가 아닌, 전민족적 범주에서 사고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그러한 오해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민족적 범주와 독자노선은 서로 상충되지 않습니다.

―대담이 아니라 심문처럼 되어갑니다만, 이른바 PS(from paper to steel) 무장투쟁 계획을 선생님이 기초했다는 얘기는 사실입니까?

문제를 제기한 정도라고 해야겠지요. 수사 과정에서 과대포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혁명에 있어서 무장력의 준비는 원칙문제입니다. 1968년에 볼리비아 전추에서 체게바라가 전사했지요. 당시 베트남과 라틴아메리카의 중요한 투쟁형태가 무장력을 기초로 한 것이었습니다. 중국의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PS계획이란 문건은 없습니다. 저는 다만 무장력을 혁명의 원칙문제로 제기했을 뿐입니다. 게바라의『게릴라 전투』(Guerrilla Warfare)란 책, 그리고 모택동의『항일유격전쟁에 있어서의 전략문제』와『항일통일전선 전술의 현재적 문제』라는 논문이 저한테서 압수된것으로 기억되는데, 저는 다만 유격전쟁의 조건을 베트남의 정글, 라틴아메리카의 농촌 배후지, 중국의 정강상(井崗山)과 같은 자연적 조건에 국한해서 사고하는 것이 온당한거라는 정도의 문제제기를 하는 데 그쳤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몇사람의‘동요’가 있었다고 들리는데, 혹시 그 문제에 관해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저의 질문은 물론 그런 동요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부분이 과장되어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계기로 이용될 수도 있으니 사실을 사실만큼 밝히자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히 아는 바가 없습니다. 더구나 저 자신도 수사 과정에서‘떳떳한’자세를 취했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재판과정 그리고 기나 긴 수형 생활 동안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참 많이 생각하고 선후배들과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이상과 현실이라고 대비하기에는 너무 상투적이고 낭만적인 도식입니다. 현실의 소설화와 소설의 현실화라는 알레고리를 사용한 친구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들과의 사업에는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풍부한 이해가 전면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맞으면 아픔을 느끼는 사람에게 맞아도 아프지 않은 천사를 기대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현역 육군장교가 그런 사건에 연루되어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은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기적에 가까운데, 어떻게 그런‘기적’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본래 제가 사형으로 분류된 것이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저는 사형이 선고되었는데, 대법원의 사고심에서 원심이 파기되었습니다. 고등군법회의에서 기각되고 군법회의 설치장관이 확정판결을 내린 사안이 파기된다는 것은 선례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주위의 설명이었습니다. 파기 이유는 형사소송법 위반이라는 극히 형식적인 것이었습니다. 공소장에는 반국가단체 구성음모죄로 기소되었는데, 판결문에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판결이 내려졌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기소하지 않은 사항을 판결했다는 것이지요. 변론을 담당한 강신옥 변호사의 변론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형을 면한 이유에 대해 들을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은사님들의 구명운동 결과라고 믿습니다.

―선생님의 구명에 나선 인사들 가운데 특별히 기억해야 할 부분은 누구입니까?

박희범 선생님과 이현재 선생님께서 재판정에 출두하셔서 증언해 주셨습니다. 생전 처음 법정에 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는 통혁당 사건에 변호인측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한다는 것 자체만도 대단한 용단이었습니다.

―형장에서 사라진 사람도 있고 아직 옥고를 치르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에게서 느낀‘인간’이 있다면 가령 어떤 것이겠습니까?

양심이나 사상에 대한 단죄, 더구나 사형은 실정법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실정법이 있는 나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에는 바로 이러한 법에 의하여 수많은 목숨이 처형되고 옥고를 치르고 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쓴 초만영어(草滿囹圄)란 붓글씨가 제게 있습니다. 그 글씨를 쓸 때의 심정은 옥중에 사람은 없고 풀만 그득한 세월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이나 평생 옥고를 치르고 있는 사람들도 당자 스스로는 그 비극을 귀중하게 정리하고 승화시키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한 마다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그러한 비극을 승화시키고 있다고 하여 그것이 객관적으로 용인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 그 사건에 연루되어 고통을 함께 한 동지로서 가깝게 지내는 몇몇 분의 근황을 들려주시지요.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거나 와병중입니다. 검도나 무예를 지도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신학을 공부하거나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와 가깝게 지낸다는 사실이 어느 날 갑자기 공포로 변하고, 그것 때문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세상에서 그 가까움이란 마음뿐이지요.

― 통혁의 뿌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소문과 추리’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모든 변혁운동의 뿌리는 그 사회의 모순구조 속에 있습니다. 답변이 됩니까?

― 그 말씀을 들으니, 마르크스주의를 배태한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는 사르트르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통혁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서 가장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어디입니까?

통혁에 대해서는 공안사건 기록에서부터 단행본 소설까지 출판되어 있으며, 최근에는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세간의 평가는 물론이고 역사적 평가까지도 부단히 다시 쓰여지는 것이고 또한 다시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 선생님 자신은 그 사건이 역사에서 어떻게 기록되기를 바랍니까?

사건의 역사는 커녕 하물며 자기의 이름 석자도 자기가 바라는 대로 기록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바라는 바가 없습니다. 화가들이 어떤 모습을 그리든 상관없이 남산은 남산의 온당한 모습으로 남게 되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뼈만 남는 법입니다. 그리고 뼈가 더 정확합니다.

― 한껏 욕심을 부려 인생을 80이라고 해도, 앞의 20년은 부모의 덕으로 살고 뒤의 20년은 자식의 덕으로 지냅니다. 결국 가운데 도막 40년이 자기 자신의 인생일 텐데, 선생님은 그중의 절반을 형옥에서 보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선생님 자신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어떻게 정리하시겠습니까?

가장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자리에서 잃은 것과 얻은 것의 변증법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저는 우리시대의 가장 첨예한 모순의 한 복판을 몸으로 체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체험은 체험 그 자체보다는, 그것으로부터 이끌어내야 할 반성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20여 년의 수형 생활을 통하여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배운 바가 많습니다. 첫째는 해방 전후의 역사를 역사로서 이해해오던 관념성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해방 전후의 격동 속에서 살아온 많은 분들과 함께 징역을 살면서 그 시대를 보다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구빨찌 신빨찌에서부터 만주땅 함경도 제주도에 이르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야말로 피가 통하고 숨결이 배어 있는 역사 그 자체였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과 나눈 인간적 이해와 공감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를 그 모순구조 속에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확실한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이해, 이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5. 출감 이후의 생활은?

―출감 이후의 가족관계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여든다섯이신 아버님과 이제 두 돐이 안된 아들과 그리고 직장에 나가는 처, 이렇게 네식구입니다. 어머님은 출소 이듬해인 89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의 사정으로 보아 결혼에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듯하고, 더구나 선생님을 반려로 맞은 사모님께는 한층 더 대단한 각오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결혼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요.

출소 후 집안사정으로 봐서 결혼을 안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저와 저의 처지를 잘 이해하는 몇분이 소개를 했습니다. 한번 만나고 나서 즉시 결정을 했습니다. 결혼 문제를 어떻게 그처럼 쉽게 결정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더러 받습니다. 그럴 때는 성질이 고약한 사람과 교도소에서 한방에서 사이좋게 살았다고 대답하지요. 사실 중매하는 사람이 중립인 경우는 없거든요. 저는 그분들이 제편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결정했습니다. 현재는 각자가 자기 분야를 갖고 있는 셈이어서 서로 덜 기대는 편입니다.

―27년 전에 시작한 직업인 대학 강사로 다시 돌아갔는데, 어디서 무엇을 가르칩니까?

성공회 신학대학에서 경제원론과 한국사상사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두 강좌 모두 교양과정의 1~2학년 학생들이 수강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싯귀가 생각납니다만, 저는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입니다. 오히려 제가 더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한국사상의 강의 내용을 듣고 싶은데요.

교양과정의 강의이기도 하고 또 저의 전공분야도 아니기 때문에 전문적이거나 체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는 못합니다. 다만 한국사상을 지배계층의 사상과 민중사상으로 대별하고, 가능한 한 그것을 사회경제적 토대와 연관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불교사상을 철학으로서의 불교, 호국사상으로서의 불교, 민중사상으로서의 미륵불 신앙으로 대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풍수사상의 경우에도 그것이 기본적으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형식이지만 지기쇠왕성(地氣衰往說)과 같이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 개벽사상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 그리고 현재의 생태주의 운동과 관련시켜보는 방법 등입니다.

―선생님은 위에서 가르치는 일의 의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만, 가르치는 사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한 사회의 지배계층은 생산수단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부구조도 함께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관념을 반성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고의 틀, 사고방식에 대한 반성은 더욱 중요하지요. 가르친다는 것은 이러한 고정관념, 개념, 사고방식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의문을 계속 제기하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호박을 손에 쥐어주기보다는 넝쿨을 더듬게 해야 합니다. 결국 가르치는 사람의 자세는 한 마디로 기다리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시, 서, 화에 모두 능숙한데, 그 재능은 어떻게 익힌 것입니까?

붓글씨는 지금도 쓰고 있고 더러 부탁을 받기도 합니다만, 다른 것은 어릴 적의 치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관심이 분산되기 쉬운 소위 정보 사회에서는 브로드 캐스팅(broad casting)보다는 내로우 캐스팅(narrow casting)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열성 독자는 선생님을 한국의 루쉰(魯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선생님 자신도 루쉰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그 연유를 들려주시지요.

사회의 변혁은 아시는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물적 토대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그 실천운동의 시작과 끝은 상부구조의 사상·문화운동에 의해 조직되고 마무리됩니다. 더구나 정보화시대라고 일컬어질 만큼 상부의 규정력이 강화된 현실을 고려할 때, 중국 민중을 향한 루쉰의 양심과 호소는 비록 때와 장소를 격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중국현대사 전문가들에 의하면 우리의 현실에 있어서 루쉰이 갖는 의미는 역시 한정적일 수밖에 없고, 되도록이면 빨리 추진(秋槿)이나 딩링(丁玲) 등 루쉰 이후로 넘어와야 한다고 합니다. 루쉰과 저의 비교는 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처럼 치열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더구나 문학인도 아닙니다.

―중국의 문화혁명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번역했고, 그 작가의 작품이 요즘 한창 유행을 타고 있는데, 선생님은 문혁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중국의 문화혁명에 대한 논의와 평가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논의와 평가가 발을 딛고 있는 철학적·역사적 입장의 차이에까지 소급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다양합니다. 문혁은 계속혁명(continued revolution)론에 입각한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계급투쟁으로 착취계급의 소멸과 계급투쟁 그 자체를 구별해야 한다는 긍정적 입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문혁은 본질적으로 탈권투쟁이며 몇억 개의 두뇌를 파괴한 무원칙한 파괴 행위 그 자체라는 입장으로 양극화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중간에 각각 편차를 보이는 평가들도 있습니다. 저는 원칙에 있어서 문화혁명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혹시 반대 측면에서의 문제점, 이를테면 유토피아적 이상과 구체적 현실 사이의 괴리 같은 문제는 문혁에서 발견되지 않습니까?

문혁에 대해 현재와 같은 경제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평가는 어차피 한시적이고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가 그 발전 과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과제, 즉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모순, 그리고 새로운 지배계급의 형성과 이로 인한 비민주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여러 형태의 주관주의 경향에 대하여 문화혁명은 원칙의 면에서 나타난 현실사회주의의 문제입니다. 문혁에 대한 논의에는 이러한 것들이 혼재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회변혁의 각 단계는 그때 그때의 문화혁명에 의하여 마무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회주의적 인간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어떤 모양이 겠습니까?

물론 사회주의적 인간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것을 미리‘규정하고’싶지는 않습니다. 사회제도든 인간상이든 그것을 미리 규정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상주의적 발상입니다. 이상주의적 사고는 실천 그 자체를 도식화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현재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급한 좌절’과‘앞선 반성’이 대부분 이러한 이상주의적인 사고의 관습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굳이 최소한의 실루엣만이라도 그려야 한다면, 아마‘자본’에 의하여 대상화되거나 소외되지 않은 인간관계, 그 인간관계의 켄버스 어디 쯤에 그려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과거의 인간상도 부단히 새로 그려야 합니다. 미래의 인간상을 그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기는 하지만 크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견마난 귀매이(犬馬難 鬼魅易)란 말이 있습니다. 개나 말은 그리기가 어렵고 도깨비는 그리기가 쉽다는 뜻이지요.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 이래 현저해진 이른바‘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실 그 문제를 차근히 생각하고 정리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순전히 인상적으로만 얘기하자면 인간에 앞선 제도, 혹은 인간의 자발적인 참여가 결여된 제도의 구축에 현실사회주의의 문제가 있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역사에서 이념의 위기는 항상 발생했고,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또한 거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부르주아혁명의 경우도 16세기 초에 일어났으나 일단 좌절되었다가, 다시 1789년과 1848년에 제2, 제3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쿠친스키의 주장이 그렇지요. 마르크스주의가 그 위기를 극복하느냐 못하느냐의 여부는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결단과 각오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마르크스를‘실천적 휴머니스트’라고 규정한 적이 있는데, 이‘실천’과‘휴머니스트’에 대해 부연 설명을 달아주시지요.

사회적 존재,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마르크스만큼 분명하게 이해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와 계급과 인간을 물론 등치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사회와 계급을 사상해버린 인간, 즉 부르주아 휴머니즘의 한계와 허구를 뛰어넘은 실천적인 인간 이해는 마르크스에 의해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인류사를 인간의 자기소외 과정, 그리고 자기회복의 관점으로 파악하는 것이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적 관점이고 그의 휴머니즘입니다. 그래서‘실천적 휴머니스트’라는 표현을 썼던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의 삶과 사상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고투이자 그 결정(結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천성의 문제는 그 사상의 실천적 성격에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인간에 대한 강조가 낳을 부작용, 이를테면 구조의 경시 같은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개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인간 이해이고, 그것이 바로 근대경제학의 인간입니다. 인간의 존재조건이 사회적이기 때문에 그걸 떠나서 이야기 할 수야 없지요.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사회구조를 별개의 카테고리로 구분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느 경유든 그것을 통일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과제는 계속 남습니다. 더욱이 인간문제, 양심문제를 수세적 국면에서 도덕적 가치를 지키려는 방어적 대응이라는 소극적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동시에 만연한 부패 구조를 들어내고, 공감을 이끌어 내는 효과적이고 적극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 실천의 일선에 참여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특별히 무엇을 당부하고 싶습니까?

이전에도 그랬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사실 저는 후배들한테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결코 겸양의 말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은 선배한테서가 아니라 후배들한테서 배우는 법입니다. 배우는 사람도 물론 이야기할 수 있겠기에 한 가지만 말씀드린다면, 사회의 변혁 과정은 최고의 예술창작 과정이라는 점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유연한 예술성과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는 말이지요. 다소 관념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객관적 조건은 물론이고 주체적인 역량까지 합하여 그것을‘물적 조건’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입니다.‘물적’이란‘물질적’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물질적이란 곧 객관적이란 뜻입니다. 실천이라든가 주체성이라는 개념은 단독개념이나 정지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과정의 총화로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너무 딱딱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만, 어느 분의 이런 유언 “낯선 거리의 임자없는 시체가 되지 말고, 더불어 이기는 강한 승리자가 되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거두절미해서‘낯선 거리’도 안되고‘혼자’도 안된다는 거지요.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하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 가석방이 석방으로 바뀌어 선생님의 활동이 완전히 자유롭게 될때는 무슨 일을 하고 싶습니까?

이건 고마운 질문 같기도 하고, 곤란한 질문 같기도 한데……. 제게는 항상 그래왔듯이 좋은 선배들과 후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좋다는 것은 훌륭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저 자신과 저의 처지를 잘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분들이‘시키는 대로’하겠다고 대답하면 되겠습니까? 저는 이 대답이 매우 적절한 대답이라고 생각하는데…….

― 끝으로 저희「이론」지에 조언과 충고의 말씀을 들려주시지요.

확실한 영역을 지키는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좋은 자매지에도 같은 권고를 하고 싶습니다. 전문성의 요구는 다른 활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즉 전문성의 훼손이라는 점에서 이 대담은 게재하지 않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 그런 걱정은 저희에게 맡기십시요. 부디 이 대담이 서두에서 말씀하신 그‘주요 활동’의 하나가 되지않기를 바랍니다.

신영복 저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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