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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시비 등지고 새 시대 예비한 고뇌
가야산의 최치원



가야산 해인사 입구의 그리 높지 않은 석벽에는 다음과 같은 고운(孤雲) 최치원의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첩첩이 쌓인 바위계곡을 굽이치며 온 산을 뒤흔드는 물소리 때문에
지척에서도 사람들의 말을 분간하기 어렵다
나는 항시 어지러운 시비가 두려워
흐르는 물길로 산을 완전히 에워싸놓고 있노라
狂賁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이 석벽을 ‘제시석'(題詩石)이라 부르고 또 이 시를 쓴 다음 우화등선(羽化登仙)하였다는 전설 때문에 사람들은 이 시를 등선시(登仙詩)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선경(仙境)을 묘사한 듯한 이 시에서 나는 오히려 선경(仙境)의 반대편에 서 있는 고운의 고뇌를 읽게 됩니다. 부패와 정쟁(狂賁疊石)으로 어지러운 신라사회에서 그의 개혁의지(人語)가 벽(是非)에 부딪쳐 좌절당한 한 지식인의 고독(籠山)과 고뇌(恐)가 배어 있었습니다. 거침없는 필세(筆勢)에서 지금도 그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이 석벽에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ㆍ점필제 김종직(占畢齋 金宗直) 등 당대의 대유(大儒)들이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고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ㆍ만해 한용운도(萬海 韓龍雲)도 이 석벽을 찾은 기록이 있습니다. 역대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고운의 뜻을 이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해인사 진입로가 홍류동 계곡을 아스팔트로 갈라 놓고 있지만 이곳에는 제시석과 독서당, 농산정 그리고 갓과 신발만을 남기고 사라진 곳에 서있는 둔세비(遯世碑)가 천년을 격한 지금도 고운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가 고운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당나라에서 그의 문명(文名)을 드날린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에서였다고 기억됩니다. 그 격문이 비록 적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명문이라 하더라도 황소가 당나라의 학정에 견디지 못하여 궐기한 농민장수인 한 그것은 고운의 반농민적인 입장을 증거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말했습니다. 그 격문은 이를테면 60년대의 미국유학생이 미국일간지에 기고하여 성가를 얻은 베트남 북폭지지 칼럼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문화적 식민성이 당나라의 벼슬과 문명(文名)을 과대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극단적 언어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홍류동 물가의 농산정에 앉아 고운을 다시 돌이켜 보며 그 때의 작은 자(尺)를 반성합니다. 사람을 읽는 자는 적어도 그 사람의 일생보다는 길어야 하고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와 역사만큼 넓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간 고운에게는 당시 세계최고의 문명인 당문명(唐文明)에 대한 심취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농민반란이 그러한 문명의 파괴자로 이해되는 것이 적어도 고운에게는 무리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역만리에서 몸소 겪어야 했던 중상 모략 유배, 그리고 당나라 고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내린 귀국의 결단은 우리의 협소한 시각을 부끄럽게 합니다. 더욱이 고국의 현실 속에서 쏟았던 그의 개혁의지에 생각이 미치면 그의 아픔과 진실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신라는 하대(下代) 155년간 왕의 평균 재위기간이 8년을 넘지 못할 정도로 정권쟁탈과 하극상이 극에 달했던 병(兵)과 흉(凶)의 혼란기였습니다. 고질적인 골품제와 귀족들의 전횡과 부패, 그리고 수탈과 기근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의 광범한 반란의 시대였습니다.
그는 개혁정책(時務十余策)을 건의하여 구국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수구.기득권층의 완강한 반대와 모함으로 변방의 외직으로 밀려납니다. 그러나 그는 지방고을에서도 그는 개혁노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은 그가 함양태수로 내려와 조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그리고 최대규모의 방풍 방재림으로서 마을의 오랜 숙원사업이기도 하였습니다. 상림에는 지금도 2만여그루의 정정한 나무들이 우람한 숲을 이루어 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운의 이상은 거듭되는 현실의 벽앞에서 서서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좌절해 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좌절의 과정에서 보게 되는 그의 인식의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부패한 귀족들을 미인의 탈을 쓴 여우로 매도하고 선비의 탈을 쓴 살쾡이들을 증오하였으며 종일토록 비단을 짜면서도 한 번도 비단옷을 걸쳐보지 못하는 일하는 여자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토황소격문의 성토대상이었던 농민세력의 실상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됩니다. 세계주의에서 민족적 입장으로, 그리고 문화주의에서 인간주의로 옮아가는 그 사상의 변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해운대가 고운의 또 다른 호를 딴 지명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운은 실의와 좌절을 달래기 위하여 많은 곳을 유람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예비해 나갑니다.
고운은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겪은 엄청난 좌절에도 불구하고 유(儒)ㆍ불(佛)ㆍ노장(老莊)사상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와 국중(國中)의 현묘지도(玄妙之道)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사상을 종합하여 다가올 중세사상의 지평을 열어나갔던 것입니다.
고운이 가야산으로 입산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그가 왕건에게 보낸 글중에 있는 계림황엽(鷄林黃葉) 곡령청송(鵠嶺靑松)이란 구절 때문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경주는 이미 기울었고 개성은 푸른 솔이라하여 그는 왕건에게 다음시대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이 구절이 신라왕의 노여움을 사게되자 급히 가족들을 대리고 이곳 가야산으로 피신해 들어온 것입니다. 고운이 이 홍류동 계곡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그의 자살설을 뒷받침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지금도 변함없이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는 격동기에 처한 지식인의 이상과 현실이 어떻게 조우하는가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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