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 속에서 내일의 일출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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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속에서 내일의 일출을 바라봅니다
하일리의 저녁노을



강화도의 서쪽 끝 하일리(霞日里)는 저녁 노을 때문에 하일리입니다.
저녁노을은 하루의 끝을 알립니다. 그러나 하일리의 저녁노을에서는 하루의 끝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이 적(赤)과 흑(黑)으로 확연히 나누어지는 산마루의 일몰과는 달리 노을로 물든 바다의 일몰에서는 저 해가 내일 아침 다시 동해로 솟아오르리라는 예언을 듣기 때문입니다.
하곡 정제두(霞谷 鄭濟斗) 선생이 당쟁이 격화되던 숙종 말년 표연히 서울을 떠나 진강산 남쪽 기슭인 이 곳 하일리에 자리잡은 까닭을 알 것 같았습니다.
이 곳 하일리에서는  오늘 저녁의 일몰에서 내일아침의 일출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강화까지 걸어서 이틀길이었습니다.
다시는 서울을 찾지 않으려고 하곡은 강화의 서쪽 끝인 이곳 하일리로 들어왔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손돌목의 세찬 물길로 서울로 돌아가는 길을 칼처럼 자르고 떠나온 그의 강한 결의가 지금도 선연히 느껴집니다.
하곡이 정작 자르고 왔던 것은 당시 만연했던 이기론(理氣論)에 관한 공소한 논쟁과 그를 둘러싼 파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곡이 이 곳에 자리잡은 후 그의 사상에 공감하는 많은 인재들이 강화로 찾아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연려실 이긍익(燃藜室 李肯翊), 석천 신작(石泉 申綽),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등 하곡의 맥을 잇는 학자ㆍ문인들이 국학연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룩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시각에서 새로이 연구하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탐구하는 한편 인간존재의 본질을 사색하는 등 다양하고 개방된 학문의 풍토와 정신세계를 이루어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등 조선후기 실학(實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이른바 '강화학'(江華學)의 산설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곤궁을 극한 어려운 생활에도 개의치 않고 25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이러한 실학적 전통을 연면히 지켜 온 고장입니다. 이른바 강화학파의 맥을 이어 온 곳입니다.
강화학이 비록 봉건적 신분질서와 중세의 사회의식을 뛰어 넘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곳이야말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준엄한 지식인의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인간의 문제와 민족의 문제를 가장 실천적으로 고민하였던 학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곤륜산을 타고 흘러내린 차거운 물 사태(沙汰)가 사막 한가운데인 염택(鹽澤)에서 지하로 자취를 감추고 지하로 잠류하기 또 몇 천리, 청해에 이르러 그 모습을 다시 지표로 드러내서 장장 8,800리 황하를 이룬다.

이 이야기는 강화학을 이은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선생이 해방 직후 연희대학에서 가진 백범을 비롯한 임정요인의 환영식에서 소개한 한대(漢代) 장건(張蹇)의 시적 구상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강화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큰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강화로 찾아 든 학자ㆍ문인들이 하일리의 노을을 바라보며 생각하였던 것이 바로 이 황하의 긴 잠류였으며 일몰에서 일출을 읽는 내일에 대한 확신이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황하의 오랜 잠류를 견딜 수 있는 공고한 신념, 그리고 일몰에서 일출을 읽을 수 있는 열린 정신이 바로 지식인의 참된 자세인지도 모릅니다.
강화에는 참된 지식인의 자세를 묻는 준엄한 사표가 곳곳에서 우리를 질타하고 있습니다.
사기 이시원(沙磯 李是遠)이 병인양요를 맞아 자결한 곳도 이 곳이었고,
1910년 나라의 치욕을 통분하여 "지식인이 되기가 참으로 어렵다"(難作人間識字人)는 그 유명한 절명시를 남긴 매천 황현(梅泉 黃玹)이 자결하기 직전에 찾은 곳도 이곳입니다.
가난한 어부들에 대한 애정과 나라의 치욕을 대신 짊어지려는 헌신과 대의로 그 길고 곤궁한 세월을 견디어 내며 박실자연(朴實自然)의 삶을 지향하였던 그들의 고뇌가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 저기 아름다운 러브호텔이 들어서고 수많은 횟집의 유리창이 노을에 빛나는 강화에 이들의 묘소와 유적들은 적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당대의 가장 냉철한 지식이었던 영재 이건창의 묘소에는 어린 염소 한 마리만 애잔한 울음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고 만주로 떠나기 전 이곳을 찾았던 독립투사들의 모습을 더욱 처연히 떠올리게 합니다.
마니산의 도토리나무는 지금도 강화벌판을 내려다보고 풍년이 들면 적게 열리고 흉년이 들면 많이 열린다고 합니다. 아마도 곤궁한 이들의 생계를 걱정하여 그 부족한 것을 여투어주려는 배려였는지도 모릅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서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읽어준 이 간결한 글만큼 지식인의 단호한 자세를 피력한 글을 나는 이제껏 알지 못합니다. 당대의 가장 첨예한 모순을 향하여 서슬 푸르게 깨어 있는 정신이야 말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을 가리는 가장 확실한 지표라고 생각됩니다.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세모가 되면 이 곳 하일리로 찾아오는 당신의 마음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같습니다. 세모의 바닷가에서 새해의 시작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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