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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어둠을 만들고 어둠은 빛을 드러냅니다
이어도의 아침해



새해 아침에는 동해의 일출(日出)을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제주도의 남쪽바다에 있는 '이어도'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낙관보다는 비관으로, 확신보다는 회의로 얼룩진 지난 해의 그림자를 지우고 새해의 빛나는 아침을 시작하겠다는 당신의 결의를 누구보다도 기뻐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산포의 작은 여관에서 어두운 새벽길을 서둘러 일출봉(日出峰)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바다를 짓누르고 있는 먹구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두꺼워질뿐 끝내 바다의 일출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서운한 일이었습니다.
아침 해는 어느 새 먹구름 사이로 붉은 옷자락을 흔들어 보이며 이미 해가 떴다는 소식을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태양은 오늘도 변함없이 떠오르고 있다."
이것이 오늘 아침에 다시 한 번 확인한 지극히 당연한 진리였습니다.
'희망'이란 오늘을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그 앞에 다가서는 창(窓)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힘들어하고 있으며 나는 또 어떠한 환상을 원하고 있는가.
이것이 한 해를 새로이 시작하는 당신과 내가 나누어야할 새해의 이야기입니다.
제주도의 남쪽 바다에는 '이어도'가 있습니다. 제비가 돌아가는 강남길의 남쪽바다 어디쯤에 있는 섬입니다.
그러나 이어도는 실재(實在)하는 섬이 아니라 환상(幻想)의 섬입니다.
피안의 섬이고 가멸진 낙토입니다. 그러나 이어도는 동시에 이승을 떠난 사람들이 머무는 눈물의 섬이며 비극의 섬이기도 합니다.
이어도가 이처럼 낙원의 섬이면서 동시에 나락(奈落)의 섬이라는 사실이 내게는 참으로 귀중한 깨달음으로 다가옵니다.

희망과 절망이 하나의 섬에 가탁(假託)되고 있는 이어도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세상의 어떤 다른 섬보다도 더욱 현실적인 섬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에는 절망으로 응어리진 땅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희망으로 꽃피고 있는 땅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어도가 나락의 섬이면서 동시에 가멸진 낙토인 것처럼 제주도는 섬 전체가 빛과 그림자로 빚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혼의 부부들이 첫발을 딛는 제주공항의 활주로 밑에는 숱한 원혼이 묻혀 있으며, 꽃멀미를 부를 정도로 무연하게 펼쳐져있는 유채꽃밭 위에는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는 농민들의 한숨소리가 바람이 되어 불고 있습니다.
수려한 산과 해안의 절경이 있는가 하면 단 한줄기의 강물도 흐르지 않는 땅입니다.
천혜의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당신의 말처럼 그것은 모두 '육지'의 소유일 따름입니다.

돌하르방이 부릅뜬 눈으로 증언하듯이 제주땅의 역사 또한 저항과 좌절, 승리와 패배로 응어리져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세한도(歲寒圖)를 그려낸 고장이기도 하지만 김옥균(金玉均)의 암살자인 홍종우(洪鐘宇)가 목사(牧使)로 부임한 땅이기도 합니다.
돌담으로 둘린 작은 밭뙈기에는 어김없이 한 두기의 무덤이 자리를 나누어 앉아 있으며 제주땅의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300개가 넘는 '오름'들에는 하나같이 봉화(烽火)와 처형(處刑)의 역사가 묻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현장인 제주도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인 현실이 되어 있습니다.
제주땅의 역사와 현실은 이처럼 우리를 삶의 참모습 앞에 맞세워 놓습니다.
삶의 참모습은 가장 알기 쉬운 교훈입니다.
제주도는 당신도 잘 알다시피 조선시대500년 동안 이곳으로 유배된 사람이 700여명에 이르는 절해고도의 유배지였습니다. 추사 김정희를 비롯하여 이익(李瀷)ㆍ최익현(崔益鉉)ㆍ김윤식(金允植)ㆍ박영효(朴泳孝)ㆍ이승훈(李昇薰) 등 당시 최고의 학문과 사상을 지닌 사람들이 이곳에서 적거(謫居)하였습니다.
제주도민들은 이러한 유배자들로부터 그들의 문화와 사상 그리고 민족적 양심을 제주땅에 접목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지척민빈(地瘠民貧)의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민중적이고 주체적인 문화의 뿌리를 가꾸어 놓았습니다.
이른바 한라산의 드넓은 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주도에서 내가 당신에게 전할 수 있는 소식은 환상(幻想)과 실재(實在), 아픔과 기쁨, 좌절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아픔과 기쁨으로 뜨개질한 의복을 걸치고 저마다의 인생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기쁨과 아픔, 환희(歡喜)와 비탄(悲歎)은 하나의 창문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풍경인지도 모릅니다.
빛과 그림자, 이 둘을 동시에 승인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삶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용기이고 지혜라고 생각됩니다.
빛은 어둠을 만들고 어둠은 빛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기와 지혜는 당신의 말처럼 <결합의 방법>입니다. 선량하나 나약하지 않고 냉철하나 비정하지 않고 치열하나 오만하지 않는 참된 용기와 지혜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끝내 일출을 보지 못하고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당신에게 바다의 일출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다의 일출은 흔치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흔치 않은 것은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일출이 당신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나는 당신이 제주에 오기를 바랍니다.
일출봉에 오르는 대신 차라리 한라산 기슭의 억새꽃속에 서서 한라산의 넉넉한 품속에 안기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의 아픔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의 작은 한조각임을 깨닫음으로써 영원히 '이어도'를 간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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