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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지하철에서
후지 산 자락에 일군 키 작은 풀들의 나라
내가 도쿄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출근 시간에 맞춰 전철을 타 는 일이었습니다. 아사쿠사에서 우에노를 거져 도쿄역에 이르는 멀지 않은 거리였습니다만 복잡하고 바쁘기는 서울의 출근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도쿄 순환 노선인 야마노테(山手) 선에는 아예 의자를 접고 모든 승객이 콩나물처럼 서서 가는 전철도 운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출근 풍경과 다른 것은 그처럼 복잡하고 바쁜 출근길이 참으로 조용하고 정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0년, 20년의 훈련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고도의 질서와 정숙함이었습니다. 일본의 특징인 '와비사비(肅寂)' 의 문화를 실감했습니다.

 

비록 짧은 여정이었지만 이처럼 조용하고 정연한 문화는 도처에서 만나게 됩니다. 주 46시간의 장시간 노동과 살인적인 고물가에 움츠리고 있으면서도 도로, 주택 등 어느 것 하나 자상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일본 경제가 지속해온 고도 성장의 비밀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있지만 나는 일본인들이 몸에 익히고 있는 바로 이러한 근검과 인내가 일본 자본주의의 특징이며 고도 성장의 저력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일본 자본주의는 서구 자본주의가 걸어온 과정을 충실히 밟아온, 서구 자본주의 일개 수용 양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서구 자본주의의 외곽에서 희비를 겪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본 자본주의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이러한 삶의 자세는 경제의 희비와는 상관없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가치이며 저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출근길의 시발역이었던 '아사쿠사(淺草)'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사쿠사는 '키 작은 풀'이라는 뜻입니다. 아사쿠사를 시발역으로 잡은 것도 우연이었지만 나는 이 말 만큼 일본을 잘 나타내는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키 작은 풀들이 사는 나라. 작은 주택과 낡은 가구들을 곱게 간수하며 살아가는 검소하고 겸손한 삶은 당신의 말처럼 무사(武士)들의 지배 아래에서 오랜 전국(戰國)의 역사를 살아온 백성들의 문화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곧 일본 자본주의의 특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종 관계를 축으로 하여 짜여진 사회 조직에서부터 연공 서열 또는 종신 고용이라는 기업의 인사 원리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관철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문득 후지 산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높이 약 4000m를 자랑하는 후지 산. 정상에 백설을 이고 있는 아름다운 후지 산. 그러나 화산 폭발로 이루어진 산이며 키 큰 나무 한 그루 키우지 않는 산입니다. 일본 경제의 전개 과정은 마치 화산 폭발처럼 경제적 논리가 아닌 민족주의의 증폭과 전쟁이라는 정염(情炎)을 도약대로 삼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후지 산은 과연 국가는 부강하나 국민은 가난하다는 일본 경제와 일본 사회의 진면목을 한눈에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짧은 일정을 쪼개어 후지 산이 보인다는 짓코쿠도케(十國峠)와 아시노코(芦の湖)를 찾아갔지만 후지 산은 짙은 구름 속에 그 모습을 숨겨놓고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끝내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 역시 일본다운 것이라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비록 후지 산은 보지 못했지만 전철, 신칸센, 택시를 번갈아 바꿔 타면서 도쿄에서 아타미를 거쳐 하코네에 이르는 동안 나는 시골의 작은 마을들을 지나며 키 작은 풀들이 살아가는 여러 가지 모습을 좀더 가까운 지리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검소와 근면이라는 완고한 질서 속에서도 키 작은 풀들은 각자의 취미와 삶의 여백을 만들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학생들의 이른바 '루스 삭스(loose socks)'라는 스타킹에 이르러서는 충격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도쿄에서부터 작은 지방 도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학생들이 하나같이 발목에 흘러내려 겹겹이 주름이 잡히는 스타킹을 신고 있었습니다. 학교 유니폼으로 오인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고 난 하굣길에 바꿔 신는다는 사실을 듣고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유행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소속감에 대한 강한 집착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일본 사회를 살아가는 집단적 지혜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똑같은 키를 가진 풀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일본을 '있다'와 '없다'라는 이진법의 언어로 일도양단할 만큼 그 인식이 감정적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관습과 문화를 너그럽게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과는 반대로 유독 일본에 대해서만은 기어이 우리의 잣대로 재단하려는 아집마저 없지 않습니다. 과거의 은원(恩怨)이 있는 당사자들 사이의 인식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호수에는 그 호수에 돌을 던진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지게 투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 개, 세 개의 돌을 던진 사람의 얼굴이 호면(湖面)에 비칠 리가 없습니다. 시골 여관의 다다미방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과 함께 엽서를 적고 있는 나 자신부터도 평정한 심정일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결코 호수가 호숫가의 나무를 비추듯 명경(明鏡)처럼 수동적인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돌을 받은 호면의 파문 역시 우리의 인식을 온당하게 이끌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나는 후지 산 정상에 군림하고 있는 냉혹한 백설은 사랑할 수 없지만 그 인색한 눈 녹은 물로 살아가고 있는 아사쿠사의 근검과 인내는 얼마든지 배우고 사랑할 수 있는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친절에 대해서도 그것이 속마음(本音)이 아니라고 매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서슬 퍼런 사무라이들의 일본도(日本刀) 아래에서 살아오는 동안 스스로 인정(人情)을 단념하고 차디찬 돌멩이 한 개씩 가슴에 안고 있는 외로움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일본인들이 몸에 익히고 있는 겸손과 절제와 검소함이 비록 쓸쓸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들의 헤픈 삶을 반성할 수 있는 훌륭한 명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작 혼란스러운 것은 후지 산과 아사쿠사라는 두 개의 이미지가 이루어내는 극과 극의 대립입니다. 물론 키 작은 풀들이 눈 녹은 물로 자라듯이 고도 성장의 혜택을 입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또 실제로 해외 여행에서는 강력한 엔화가 보장해주는 경제적 여유를 향유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이 두 개의 이미지를 연결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일찍이 아시아를 탈출하여 서구를 지향하며 달려가는 일본 자본주의의 보습은, 우선 일본인 스스로도 그러한 모습으로부터 새로운 세기의 대안적 성격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반면 일본인의 생활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근검과 정제는 어느 시대에나 소중히 해야 할 인간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이미 그 의미가 총체적으로 회의되고 있는 근대성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는 일본의 지성입니다. 그리고 공정한 사회에 대한 진지한 모색도 없이 오로지 단계적 패권 정책에 몰두하는 일본 자본의 비정한 '작위(作爲)'입니다. 그리고 더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그 길을 쫓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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