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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시, 가나자와
달리는 수레 위에는 공자(孔子)가 없습니다
가나자와(金澤)대학의 가모노(鴨野幸雄) 교수는 지나가는 말처럼 웃으면서 내게 물었습니다.
“외과 수술을 받고 병원 침대에 누워서라도 삶을 연장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자택에서 식구들과 함께 조용히 임종을 맞는 것이 좋은가?”
정년을 몇 해 앞두고 있는 노교수의 개인적인 관심사 같은 질문이었지만 그 평범한 질문에는 가나자와 시의 만만치 않은 철학이 담겨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자와는 인구 45만은 작은 지방 도시이지만 작은 교토(京都)라고 불리는 고도(古都)이며, 문화 도시로서 자부심을 갖는 고장입니다. 특히 가나자와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내발적(內發的) 발전’ 이론의 본고장입니다. 내발적 발전이라는 개념이 여러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총합적인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가모노 교수의 질문이 그것을 함축하고 있듯이 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 도시의 경우에도 외부 수혈을 받아야 하는 비자립적인 연명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가나자와에서는 외부 자본을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의 지방 도시들이 다투어 보여주고 있는 리조트 유치 경쟁이 없습니다. 가나자와의 모든 회사는 ‘본사 회사(本社會社)’입니다. 이것이 가나자와의 가장 큰 특징이었습니다.
이웃 도시인 도야마(富山)의 경우가 자주 비교되는데, 도야마는 도쿄의 돈을 끌어들여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외부 자본이 빠져나가자 심각한 경제 침체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그동안의 성장 정책이 남긴 환경 파괴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그 유명한 ‘이타이이타이 병’ 을 앓아야 했습니다. 내발적 발전은 물론 지역 단위의 경제적 자립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경제보다는 ‘삶’ 을 지키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철학을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자와 경제동우회가 추진하는 경제 프로그램 역시 경제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문화 프로그램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금속, 인쇄, 섬유, 봉재 등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가나자와의 중소기업과 기술을 보존하는 것이 프로그램의 기본 원칙이었습니다. 지역의 전통적 기업과 기술을 보존함으로써 모든 단계의 부가가치를 지역 내에 귀속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제조업, 유통, 서비스 부문을 긴밀히 연결시킴으로써 ‘연관 산업의 집적(集積)을 이루어내고 이러한 경제적 토대 위에 문화, 교육, 의료, 복지를 포괄하는 공동체의 건설을 지향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문화의 집적이야말로 산업의 인큐베이터이며 그것이 곧 ’삶의 질‘ 이라는 높은 자각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가나자와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 역설적이게도 가나자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본 자본주의를 보게 되고, 나아가 세계 경제의 현 주소를 읽게 됩니다. 도쿄를 핵으로 하여 추진되고 있는 일극집중(一極集中)과 수직적 분업 체계를 선명하게 읽게 됩니다.
한 가지 예로 일본이 그 속도와 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신칸센(新幹線)만 하더라도 전혀 다른 의미로 읽혔습니다. 신칸센은 광범한 지역을 일일생활권으로 묶어내는 첨단 기술과 속력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을 도쿄에 예속시키는 강력한 벨트라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일극집중 구조가 우선은 급속한 경제 성장에 효과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역의 이윤이 외부로 누출되는 구조입니다. 결과적으로 신칸센은 지역의 경제 잉여를 외부로 누출시키는 거대한 파이프 라인이며 결국은 지역 경제를 무력화하고 자연과 인간을 황폐하게 하는 무서운 철마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일본은 다이묘(多名)를 중심으로 하는 분권적 봉건제였고, 그 중에서도 가나자와는 가장 중세적인 도시였습니다. 당연히 근대화 과정에서 낙후될 수밖에 없었던 고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가 지역 경제를 무력화하고 이를 기업 내 분업 체계에 통합시키는 새로운 상황을 맞아, 가나자와는 이 고장의 낙후성에서 오히려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냈습니다. 특히 국가를 단위로 하는 복지 정책이 해체되는 WTO 체제하에서 가나자와는 어느 새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 고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엽서에 어울리지 않는 역사의 발전 경로라는 추상적 개념을 이야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이 도시의 사람들이 그들의 역사와 전통에 기울이는 애정과 이 고장의 산천에 쏟고 있는 정성입니다. 한 가지 예로 그들은 자동차 도로 확장 때문에 매몰되었던 도로면 수로(水路)를 단정히 복구시켰습니다. 수로에는 자동차 대신 맑은 물이 가득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복구(復舊)나 복고(復古)가 아니었습니다.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도로와 나란히 달리는 수로와 그 수로에 흐르는 맑은 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시가와문(石川門), 겐로구엔(兼六園), 무사가옥(武士家屋) 등 어느 것 하나 곱게 보존되고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한낱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한 나로서는 유적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이 고장 사람들의 다정한 손길과 따사로운 애정을 제대로 만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성장이 양적인 개념이고 발전이 질적인 개념이라는 범박한 구분을 개의치 않는다면, 그리고 설령 그것이 단순한 복고와 복구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는 엄연한 삶의 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의 명문고였던 제4고(第四高)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교정에 세워진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의 시비(詩碑)는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제4고 졸업생이었던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소설 《풍도(風圖)》에서 받은 감명이 새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가 그려낸 김방경(金方慶) 장군의 초상이었습니다. 몽골 제국의 지배라는 그 모멸적인 상황을 인내하는 김방경 장군의 고뇌였습니다. 그는 김방경 장군의 고뇌를 통해 고려 민중의 고난과 저항을 그려내고, 그러한 고려 민중의 대몽 항쟁이 몽골의 일본 침략을 저지하였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었습니다. 몽골의 일본 침략이 좌절된 것은 신(神風)의 도움 때문이라는 일본 역사 교과서의 시각과는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나는 가나자와의 문화가 그저 유미주의적인 범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근대성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일찍부터 키워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오늘날 가나자와의 내발적 발전의 싹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사진을 찍기 위해 다시 이시가와 성문(城門)을 찾아갔습니다. 아침 햇살을 담뿍 안고 있는 성문은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하늘에 솟아 있었습니다. 다가오는 세계화 논리의 전일적 지배로부터 지역의 자립성을 방어하고, 나아가 인간적인 삶을 지키는 견고한 자위(自衛)의 진지(陣地)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척 부러웠습니다. 우라 나라에도 이러한 진지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하는 부러움이었습니다. 도도한 세계화 논리와 성장 신화에 맞설 수 있는 고장을 하나라도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자기 고장의 역사를 계승하고, 산천을 지키고,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키워낼 수 있는 진정한 삶의 고장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 젖습니다.
가나자와가 추구하는 ‘완만한 성장’ 역시 매우 부러운 것이었습니다. 완만한 성장은 기본적으로 ‘속도’에 대한 반성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철학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완만한 것이라 하더라도 속도는 가속으로, 가속은 결국 질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속도의 속성입니다. 일찌감치 합의해 두어야 하는 것은 ‘제로(0) 성장’ 과 ‘완만한 저하(Pull-down)' 까지도 수용하려는 각오라고 생각합니다. 가속(加速)보다는 감속(減速)이 관리하기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차에서 내리기 위해서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가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가나자와에서 한적한 골목을 걸으면 이곳 저곳에서 걸어가고 있는 공자(孔子)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공자의 모습에서 ‘달리는 수레에는 공자가 없다(奔車之上無仲尼)’는 경구를 상기하게 됩니다. 자동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1m의 코스모스길은 한 개 점(點)에 물과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가을을 남김없이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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