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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에서 만나는 유년 시절
문화는 사람에게서 결실되는 농작물입니다
네팔 왕국의 수도 카트만두는 옛날에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1,400m의 산상호수였습니다. 만쥬슈리(文珠寶薩)가 큰 칼로 산허리를 잘라 물을 흘려보내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신(神)이 호수를 마을로 만들어주었다고 구전되어오듯이 막상 카트만두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바로 신입니다.
사원이나 탑에 신상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골목에도 있고, 시장에도 있고, 지붕에도 있고, 처마 밑에도 있습니다. 심지어 연못 속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신상들의 모습은 가난한 네팔 사람들의 차림새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공포의 시바신이 그의 처 파르바티와 함께 듀버 광장 을 내려다보는 모습은 마치 창문 열고 바깥을 구경하는 여염집 부부 같습니다.
네팔의 신은 근엄하거나 숭고하지 않습니다. 쿠마리라는 살아 있는 여신이 있지만 이 여신은 어린 소녀입니다. 그리고 여신의 역할이 끝난 뒤에는 보통 사람들 속으로 돌아와 대체로 보통사람들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당신이 카트만두에 오면 가장 먼저 수많은 신을 만나게 됩니다. 신은 신이되 사람들과 가까운 자리에 내려와 있는 신을 만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만나는 것은 사람들의 손길입니다. 오랜 세월과 풍상에 젖어 갈색을 띠고 있는 목조 사원이나 궁궐 건물에 배어 있는 사람들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허술한 건물에도 창틀과 기둥에는 어김없이 정교하게 조각된 갖가지 문양들이 사람들의 정성스런 손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점의 좌판위에서 햇볕에 따뜻이 익은 자잘한 기념품들에서도 구석구석 사람들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마 신상이나 손길보다 먼저 사람들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순박한 얼굴을 만나게 됩니다. 수줍고 어색해하는 사람들의 눈길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 순박한 눈길은 험악하게 변해버린 우리들의 얼굴을 반성하게 합니다. 이처럼 카트만두에서 만나는 것은 신상과 사람, 물건과 사람들의 손길이 혼연히 무르녹아 있는 다정한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이 다정함이 사람들의 표정과 마음으로 완성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카트만두의 타멜 거리에서는 유년 시절을 만난다고 합니다. 비단 타멜 거리뿐만 아닙니다. 카트만두의 곳곳에서 우리들의 지나간 유년시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산광장에서 어느 골목으로 접어들더라도 그 좁은 골목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유년시절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기도 하고 산업화 이전 우리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숫자로 계산하며 직선과 격식에 갇혀 있던 심신이 그 틀에서 해방되어 맨발과 땅의 접촉에서 건져올리는 편안함, 그것이 바로 우리의 과거이고 우리의 유년시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 카트만두의 분지에 괴어 있는 유적과 사람들은 이처럼 커다란 거울이 되어 잃어버린 우리의 유년시절을 보여줍니다. 카트만두가 호수였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비단 유년시절뿐만이 아닙니다. 카트만두에는 도처에 삶의 원형을 보여주는 거울이 있습니다. 파슈파티나트의 화장터 풍경이 그렇습니다. 장작더미 위에서 타고 있는 시체나 그 시체를 뒤적여 고루 태우는 사람이나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가족이나 그리고 임종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나 어느 한 사람 슬퍼하는 이가 없습니다. 바로 그 밑을 흐르는 강가에서는 빨래하고, 물 긷고, 식기를 닦고, 머리를 감는 일상이 태연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관광객들만이 이 태연한 광경에 충격을 받을 뿐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삶의 찰나성과 삶의 영원성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닥신카리 사원에서 보는 암흑의 여신 칼리에게 바치는 번제(燔祭)도 그렇습니다. 짐승을 산채로 목을 베고 솟아나는 피를 신상(神像)에 바르고 자기의 얼굴에도 바릅니다. 짐승의 체온과 비명소리가 채 가시지 않은 피와 그 피로서 행하는 제의는 보는 사람을 당혹하게 합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성가가 은은히 흐르던 성체 미사의 포도주와는 극명한 대조를 보입니다. 그 적나라한 원시성이 우리의 생각을 압도합니다.

 

나는 카트만두에서 만나는 이 모든 것이 한마디로 '문화의 원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의 문화가 치장하고 있는 복잡한 장식을 하나하나 제거했을 때 마지막에 남는 가장 원초적인 문화의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사람의 삶과 그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문화의 자연'(Nature of Culture)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산업(Cultural Industry)란 말이 있지만 문화의 본질은 공산품이 아니라 농작물입니다. 우리가 이룩해내는 모든 문화의 본질은 대지(大地)에 심고 손으로 가꾸어가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람에게서 결실되는 것입니다.
문화가 농작물이란 사실이 네팔에서처럼 분명하게 확인되는 곳도 드물 것입니다. 오늘도 잘 사는 나라에서 이곳을 찾아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카트만두의 골목을 거닐며 네팔의 나지막한 삶을 싼 값으로 구경하며 부담없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걱정되는 것은 혹시나 그들이 네팔에서 문화의 원형을 만나고 그 문화의 원형에 비추어 그들 자신의 문화를 반성하는 대신에 네팔의 나지막한 삶을 업신여기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우리가 문화의 원형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 이후의 산업화 과정은 한마디로 탈신화(脫神話)와 물신화(物神化)의 과정이었습니다. 인간의 내부에 있는 '자연'을 파괴하는 과정이었으며 동시에 외부의 자연을 허물고 그 자리에 '과자로 된 산'을 쌓아온 과정이었습니다. 더구나 앞으로 예상되는 영상문화와 가상문화(cyber culture)에 이르면 문화란 과연 무엇이며 이러한 문화가 앞으로 우리의 삶과 사람에게 무엇이 될 것인가를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진정한 문화란 사람들의 바깥에 쌓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성에 씨를 뿌리고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성숙해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네팔에서 만나는 유년시절을 통하여 지나간 과거를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깊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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