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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평원에서
마라톤의 출발점은 유럽의 출발점 입니다
이 엽서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 북동쪽에 있는 마라톤 평원에서 띄웁니다. 마라톤 평원은 아테네에서 정확히 36.75km 거리에 있는 평원입니다. 당신도 잘 알고 있듯이 이곳은 페르시아 전쟁의 격전지입니다.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페르시아 대군을 맞이하여 고립무원의 아테네 병사들이 절망적인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를 물리친 격전의 땅입니다.
나는 마라톤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올라 2,500년 전의 그 치열했던 전투장면을 상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비 오듯 화살이 날고 창칼로 육박전을 벌였던 아비규환의 전장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평원을 달리는 한 어린 병사의 모습만 떠오릅니다. 패전과, 패전에 뒤따를 파괴와 살육의 공포에 가슴 졸이고 있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승전보를 전하기 위하여 잠시도 걸음을 늦추지 않고 그들이 모여 있는 아고라로 달려가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겼다”는 한 마디를 외치고 어린 병사는 숨을 거둡니다.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 경주가 이 병사를 기리기 위한 것임은 당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그가 출발했던 곳에는 전사자를 추모하는 위령탑과 오륜 마크가 새겨진 작은 성화대가 서 있고 성화대와 나란히 마라톤 경주의 출발선이 대리석으로 땅에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바로 그 출발선에 서 보았습니다. 벅찬 승전보를 가슴에 안고 달려나갔던 어린 병사의 마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마음은 오늘날의 마라톤 경주에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선수의 심정이 되어버립니다. 옛 병사의 마음과 오늘의 마라톤 경주 선수의 마음은 참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아득한 두 마음을 넘나들고 있는 나 자신이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이곳 마라톤 평원을 찾아오면서 나는 많은 역사서가 지적하고 있는 지형상의 특징을 확인해보려는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마라톤 평원은 해안을 향하여 입을 대고 있는 주머니처럼 입구는 좁고 안쪽은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평원입니다. 전함 600척을 이끌고 마라톤 만(灣)에 상륙한 페르시아 대군은 전열을 채 가다듬기도 전에 갑자기 개미목처럼 좁아진 협곡에서 학익진(鶴翼陣)을 펼치고 있던 아테네의 중장밀집(重裝密集) 창병(槍兵)의 돌격과 포위에 당황합니다. 페르시아 군이 자랑하는 대병력의 이점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리는 전략상의 패인이 어렵지 않게 확인됩니다.

 

나는 마라톤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서 당시의 광경을 애써 눈앞에 그려보았습니다만 여전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이 벌판을 달리는 어린 병사의 모습입니다. 아테네 군의 결정적인 승인은 무엇보다 가족들의 생명을 지켜내려는 병사들의 결연한 용기였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됩니다. 어린 병사의 추억 때문에 갖게 되는 감상일 수도 있습니다. 아테네 군이 비록 병력은 열세였지만 그들에게는 싸워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활이 걸린 이유였습니다. 바로 그 이유가 페르시아 군에게는 없었습니다.
생각하면 이 마라톤 전투의 승리는 단지 아테네를 지킨 승리에 그치지 않고 당신의 말처럼 ‘유럽’을 만들어낸 승리인지도 모릅니다. 2,500년의 장구한 세월이 흐른 지금, 마라톤 평원은 그때의 단검조각 하나 묻혀 있지 않은 한적한 벌판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오늘날의 유럽이 유럽으로 보전될 수 있게 한 유럽의 탄생지입니다. 대리석으로 표시된 마라톤 경주의 출발선은 그야말로 유럽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동양의 제국 페르시아의 서진(西進)이 다시 한 번 저지됨으로써 비로소 유럽이 확고하게 그 땅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되어 페리클레스의 황금기로 이어졌으며, 이 찬란한 고대 그리스 문명은 르네상스를 거쳐 유럽의 정신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실로 유럽의 땅과 유럽의 정신이 탄생한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마라톤 평원을 떠나 다시 살라미스 해협을 찾았습니다. 살라미스 해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연기와 불길로 뒤덮인 바다는 간곳 없고 푸른 물결만 출렁이고 있습니다. 마라톤 전투에 참가한 전사들이 갑옷과 무기를 스스로 마련했던 것과는 달리 살라미스 해전에서는 무장(武裝)을 마련할 능력이 없는 무산(無産) 시민들도 노 젓는 병사로 참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작은 변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전쟁에 임하는 아테네 시민들의 의식이 그만큼 고양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리스 민주주의의 기반이 훨씬 넓어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민주주의가 과연 어떠한 수준이었으며 어떠한 내용을 갖는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일단 유럽의 시각을 떠나 논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세계가 승전과 환희 그리고 민주주의로 이루어진 아폴로적 세계까 아님은 물론이며, 그리스 문화도와 다른 많은 고대 문화와 마찬가지로 식민지와 노예의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라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살라미스 해협의 아침 바닷물에 손을 씻으며 이 평화로운 풍경 tr에 그림처럼 앉아 있습니다. 아침 안개 자욱한 포구에는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어깨너머로 먹이를 찾는 갈매기들이 한가롭기 그지없습니다. 생각하면 전쟁의 승패는 물론이고 나라의 흥망 역시 유장한 세월에 비추어본다면 그것은 한바탕 부질없는 춘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찬란히 꽃피었던 그리스의 황금기도 오래지 않아 ‘그리스의 자살’이라는 30년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추락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에게 패망하게 됩니다.
지금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바야흐로 유럽연합(EU)이라는 통합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는 국가를 뛰어넘는 새로운 틀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금세기가 보여준 광기 어린 전쟁과 지금도 가시지 않고 있는 종교적 반목과 민족적 쟁투에 생각이 미치면 국가라는 틀의 완고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인류사가 이룩한 문명은 개별 국가의 흥망과는 상관없이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그리스, 로마의 문명이 그렇습니다.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 망(亡)이 아니라 도(道)가 없어지는 것을 망이라 했던 고인(古人)의 역사관을 수긍한다면 국가란 문명을 담는 그릇이 못 되고, 문명은 국가라는 그릇에 담기에는 너무나 크고 장구한 실체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생각을 작은 그릇에 간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당신은 세계화를 들어 이를 수긍하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류가 지금껏 만들어낸 공동체의 크기가 이러하고, 그 정신의 상한(上限)이 이러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역만리 에게 해의 물가에 앉아서 전쟁의 승패와 나라의 흥망과 문명의 유장함에 젖어보는 나 자신이 역사의 이방인같이 느껴집니다. 절실할 것 하나 없는 이방인의 마음에도 문득문득 강물처럼 감상이 흘러듭니다. 마라톤 평원에 섰을 때의 당황스럽기까지 했던 마음이 그것입니다. 어린 병사가 숨을 거두며 외쳤던 한마디 말이 다시 들려오는가 하면, 올림픽 마라톤 경주의 승리자가 결승점에서 가슴으로 테이프를 끊으며 외치는 말도 귓전에 생생히 들려옵니다.
‘우리는 이겼다’는 외침과 ‘나는 이겼다’는 외침 사이에는 참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가 우리들로 하여금 쓸쓸한 감상에 젖게 하는 까닭은 아마 아직도 ‘내’가 ‘우리’를 이겨야 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철학이 되어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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