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士)와 심(心)이 합하여 지(志)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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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타워브리지
사(士)와 심(心)이 합하여 지(志)가 됩니다
“언젠가는 지구상의 모든 언어는 사라지고 오직 영어와 중국어만 남게 될 것이다.”
런던에 오면 이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런던에는 방학 기간은 물론이고 학기 중에도 영어를 배우려는 어학연수생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유적지와 박물관은 비롯하여 오페라 하우스나 뮤지컬 공연장에도 영어를 배우러 온 외국인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언어들은 언젠가 고어(古語)로 퇴장되고 세계의 언어는 영어 일색이 되리라는 말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국어는 물론 15억에 달하는 인구와 유구한 문화적 전통이 있어 쉽게 퇴장되지 않으리라고 예상되기 때문에 결국 언어는 영어와 중국어 두 개만 남게 될 지도 모릅니다.
영국은 언어를 수출하는 나라였습니다. 영국은 과거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지만,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는 과거와 달리 지금은 해가 지는 노후국(老朽國)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를 사용하는 곳으로 따진다면 지금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최후의 식민지이던 홍콩이 반환되었지만 영국은 그곳에 영어를 남겨놓았습니다. 영어에 대한 관심은 세계화 물결과 함께 그 어느때보다도 높습니다. 영국의 수출이 이 영어라는 레일을 타고 순항해 왔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영어는 이제 레일이 아니라 그 자체가 최고의 상품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언어 수출은 매우 상징적인 변화를 보여줍니다. 일찍이 산업혁명의 본고장으로 자본주의의 길을 가장 앞서서 달렸던 영국자본주의의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자동차 산업만 하더라도 로버, 로터스, 팬더 등이 이미 다른 나라의 소유가 되어 있으며 영국자동차의 자존심인 롤즈로이스도 곧 넘어갈 것이라는 기사가 실리고 있습니다. 산업뿐만 아니라 건물들도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시의회인 카운슬홀이 일본 자본에 매각되자 그 건물에 입주한 2차대전 참전용사회와 한동안 말썽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당신이 아마 한 개쯤 가지고 있을 버버리, 닥스, 아구아스큐텀, 오스틴리드 등의 유명 브랜드의 옷이나 웨지우드, 로열 엘버트와 같은 도자기도 브랜드만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조 공장은 없고 브랜드만으로 존재하는 기업은 마치 언어만으로 남아 있는 영국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영국 자본주의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계 자본주의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생각하게 합니다.

 

유럽 경제의 장기 침체와 관련하여 최근에는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영국 경제와 유럽 경제 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유럽병'을 진단하고 그 처방에 관한 정책 다발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핵심문제가 바로 실업입니다.
이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처방은 일자리를 만드는 일임은 물론입니다. 일자리는 노동을 필요로 하는 산업이 있어야 합니다. 경제의 몸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국의 경제는 이를테면 머리만 있고 몸이 없는 구조로 바뀌어 있습니다. 몸에 해당하는 산업이 없는 구조입니다. 산업이 없는 경제에 일자리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정책 당국이 이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 산업을 담당할 자본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본은 이미 런던 금융 시장을 중심으로 국제 금융 시장으로 그 자리를 옮겨놓고 있습니다. 영국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이 몸체에 해당하는 공장들을 건설해주기를 기대하고 최대한의 투자 여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노후 자본주의 국가는 머리만 남은 국가입니다. 언어와 브랜드와 금융만으로 남아 있는 경제 입니다. 몸에 해당하는 산업이 없는 나라입니다. 비단 영국뿐만 아니라 대다수 선진 자본주의 국가는 이미 해외 투자로 외국에다 그 몸을 만들어놓고 있거나 외국 자본을 자국에 유치하여 국내에다 남의 몸을 들여놓고 있습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 위기에서 역력히 보듯 엄청난 규모의 금융 자본이 화폐 가치가 폭락한 현지의 기업들을 헐값으로 인수, 합병하고 있습니다. 손에 흙을 묻히지 않는 양반의 나라, 머리로만 살아가는 양반의 나라인 영국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합니다.
이처럼 새로운 세계 자본주의의 탈산업적 특징의 하나가 바로 부가가치가 높은 언어 수출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Straford-upon aven)에 있는 셰익스피어 생가에서 나는 언어 수출의 노하우를 확인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수많은 관광객들의 줄 에 끼여 서서 나는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생각하기 전에 영국이 만들어놓은 또 하나의 해가지지 않는 제국을 실감하였습니다. 토플 시험 준비에 방학을 통째로 바치며 영어권 젊은이들이 누리는 그 엄청난 기득권을 부러워하던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언어의 상품화는 자국 통화가 국제 통화가 되고 있는 것만큼이나 엄청난 기득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국이 이러한 언어 상품의 수출국이 될 수 있는 토대는 해가 지지 않을 정도로 광대한 영토를 거느렸던 영연방제국의 역사에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영국박물관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소장품을 자랑하는 박물관입니다. 소장품은 각국의 문화재에 그치지 않고 이집트 람세스 2세 석상,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아시리아의 성문 등 유적을 아예 옮겨다 놓기까지 했습니다. 대영제국의 위용을 눈앞에다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템즈 강과 타워브릿지, 아름다운 윈저 성과 버킹엄 궁전, 표준 시간을 독점하고 있는 그 리니치 천문대 등 양반 국가의 후광이 되고 있는 유적들을 돌아보는 동안 나는 내내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기름 묻은 손으로 산업 현장에서 시달리고 있는 당신의 처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막대한 금융 자본이 세계를 넘나들며 외환과 증권 시장을 손쉽게 조작하고 있는 것이 국제 경제의 실상입니다. 사랑채에서 유유히 소일하며 장리채부(長利債簿)를 넘기고 있는 양반의 모습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개인이 신분 상승하는 과정과 방법은 어떤 것이며, 한 국가가 양반 국가로 지체를 높이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제 구조가 뒷받침되어야 하는지... 생각하면 망연해질 뿐입니다. 개인은 신분 상승을 도모하고 국가는 국제 분업 체계에서 상위권에 진입하기 위하여 진력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국제 분업 체계에서 상좌에 앉은 자본주의가 이른바 양반 자본주의라 한다면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경쟁은 양반의 자리를 다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에 양반의 권세를 적은 대목이 있습니다. 관가에 진 빚을 대신 갚아주고 양반 신분을 사들인 부자에게 양반이 누리는 권세를 다음과 같이 문권에 적어주었습니다. '농사도 짓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고, 대강 문사(文史)나 섭렵하면 크게는 문과에 오르고 작게는 진사는 된다. 궁사(窮士)가 시골에 살아도 무단(武斷)을 할 수 있으니, 이웃집 소로 먼저 내 밭을 갈고 마을 일꾼을 데려다 김을 맨들 누가 감히 시비할 것이랴. 코에 잿물을 붓고, 머리끝을 잡아 돌리고 수염을 뽑더라도 감히 원망하지 못하리라.'
바로 이 대목에서 돈으로 양반 신분을 산 부자가 양반되기를 포기합니다.
“나를 장차 도둑으로 만들 작정이란 말이냐”는 말을 남기고 달아나 버립니다. 연암은 그의 자서(自序)에서 사(士)와 심(心)이 합하여 지(志)가 됨을 일깨우고 무릇 양반된 자의 지(志)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나는 머리만 남은 현대 자본주의의 팽대한 금융자본이 과연 어떠한 지(志)를 갖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입니다. 브랜드도 없이 대동강 물을 팔던 봉이 김선달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진 자본이 머리가 되고 중진 자본이 몸이 되고 그보다 못한 나라의 자본이 발이 되는 구조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 체제와 불평등 분업의 상호 침투라는 이중 구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의 머리를 빌리기도 어렵지만 남의 몸을 빌리기도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몸을 빌리는 것이든 머리를 빌리는 것이든 구은 어차피 이질적인 것의 조합이며 언제 이별을 고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동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런던 금융 시장은 국제 금융 시장 중에서 최대의 규모를 자랑합니다. 자본주의의 길을 가장 앞서서 달려간 영국이 수도 런던에 세계 최대 규모의 금융 시장을 만들어놓은 것도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과정은 당신의 말처럼 상품화의 과정입니다. 도중에서 만나는 것마다 그것을 상품화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의 노동력은 물론이며 신체의 일부마저 상품화하고 사랑과 명예에 이르기까지 상품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마치 미다스(Midas) 왕의 손처럼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화시켜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손에 닿는것마다 금이 되기를 원했던 미다스 왕의 손은 결국 저주의 손으로 변해버립니다. 옷도, 의자도, 식탁도, 빵도, 치즈도 모두 금으로 변해버립니다.
상품으로 둘러싸인 세상은 마치 황금으로 둘러싸인 미다스왕의 정원과 같습니다. 황금 정원에 서 있는 미다스 왕의 모습은 소외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의사 소통 수단인 언어를 상품으로 만들고 유통 수단인 화폐를 상품으로 만들어온 현대 자본주의가 앞으로 어떤 뜻(志)을 지향할 것인지 생각하면 망연해질 뿐입니다. 상품이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항상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뜻을 바쳐야 할 곳은 수단이 아니라 아름다운 대상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자기의 영혼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을 갖지 못한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런던을 떠나기 전에 템즈 강변을 찾았습니다. 석양에 보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타워브리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유심히 템스강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마침 썰물 때를 만나 수위가 낮아진 템스 강은 양안(兩岸)의 바닥을 보여주며 느린 걸음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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