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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엘바 항구의 산타마리아 호
콜럼버스는 왜 서쪽으로 갔는가
새해를 맞아 새 캘린더를 벽에 걸 때 우리는 그 속에 담겨 있는 1년간의 여백에 잠시 가슴 뿌듯해집니다. 그러나 잠시뿐 입니다. 수많은 새해를 맞고 보낸 우리들로서는 이 여백이 결코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여백은 결국 지난 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로 채워질 뿐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무게입니다. 쉽게 벗어버릴 수 없는 짐입니다. 그러나 올해에는 과거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의 속도 때문에 여백이 더욱 줄어든 느낌입니다. 사람마다 앞당겨 들어보이는 미래의 그림들 때문에 흡사 시간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역류해 오는 느낌입니다. 더구나 저만치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21세기는 새로운 100년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1000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과거의 무게와 미래의 역류 사이에서 그나마 여백이 줄어든 캘리더를 걸며 더욱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한 세기가 끝나고 새로운 세기가 다가오는 이 비좁은 세월을 만나 나는 1년간 당신에게 엽서를 띄우려고 합니다. 엽서에 적는 글이란 대개의 서간문이 그런 것처럼 매우 사적인 것을 넘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계의 이곳 저곳을 찾아가 그곳에 담긴 과거와 미래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 비록 좁은 엽서 공간이지만 당신과 함께 생각의 뜨락을 넓히고 싶습니다. 나는 물론 당장 당신의 답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멀리 이베리아반도의 끝에 있는 스페인의 우엘바(Huelva)항구에서 이 엽서를 띄웁니다. 당신에게 띄우는 첫번째 엽서입니다. 첫번째 엽서일 뿐만 아니라 나의 첫번째 해외출국입니다. 처음으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조국, 그리고 20년을 갇혀 있어야 했던 조국을 벗어나는 감회가 남다른 것이 아닐 수는 없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감회에 한동안 젖어 있다가 비행기 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비행기는 어느덧 우랄 산맥을 넘고 있었습니다. 10,000m의 고공에서 시속 800km로 우랄 산맥을 넘을 때 문득 “20세기는 내게 잔인한 세월이었다.”던 당신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20세기가 내게는 어떠한 것이었던가.
생각하면 20세기는 인류사는 다른 어느 세기보다도 잔인한 100년이었습니다. 그 20세기를 살아 온 사람들이라면 잔혹한 아픔 하나쯤 갖지 않은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바야흐로 그 20세기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20세기를 마감하고 있는가. 새삼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엽서를 띄우는 이 항구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마을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곳이며 유럽과 아프리카가 가장 가까이 마주보고 있는 곳입니다. 두 대해(大海) 와 두 대륙(大陸)이 만나는 곳입니다. 내가 이곳을 가장 먼저 찾아온 이유는 이곳이 바로 500년 전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향해 출항한 항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 시절의 융성함도 사라지고 인적마저 드문 바닷가에 콜럼버스와 함께 신대륙으로 향했던 '산타마리아호'의 모형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콜럼버스 동상에서부터 세비야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그의 관곽(棺廓)을 거쳐 이 항구를 찾아오면서 내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이 길이 결코 과거로 향하는 여정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 항구는 유럽이 지중해의 역사를 벗어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유럽 주도의 세계사가 시작되는 기점이기도 합니다.
콜럼버스의 출항은 본격적인 식민주의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식민지에 서 빼앗은 부와 이 부를 원시 축적하여 이룩한 산업혁명의 신화가 현대사의 신념 체계라면 콜럼버스는 아직도 살아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식민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 자기와 똑 같은 동류(同類)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그리고 자기를 추종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곳은 지중해를 벗어난 유럽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오늘날 도도하게 전개되는 세계화 논리의 출발 지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유럽이 중세를 벗어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콜럼버스가 이 항구를 떠난 1492년은 바로 그라나다에 있는 아랍왕조 최후의 궁전인 알함브라 궁이 함락되는 해입니다. 이사벨라와 페르난도 왕이 결혼함으로써 통일을 이룩한 스페인이 800년간의 아랍지배를 청산하고 '국토 회복(Reconquista)'을 완료한 스페인 통일의 원년입니다.
통일에 이은 종교재판과 추방, 그리고 식민지 경략(經略)으로 나아간 역사의 행보를 예찬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리스, 로마를 보존하고 전승하였던 코르도바의 문화가 종교적 이유로 여지없이 파괴된 것이 역사의 상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라나다 함락 당시 피로 물들었던 알바이신 언덕은 지금도 당시의 비극을 짙게 묻어놓고 있는 듯합니다. 더구나 이곳에서 바라보는 알함브라 궁전은 말할 수 없는 감회를 안겨줍니다. 시에라네바다 설산을 등에 지고 잠자듯 정적에 잠겨 있는 알함브라 궁전은 당시의 비극 이 그대로 멈추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러한 강력한 세계경영의 힘은 중세적 분립을 청산한 국력의 통일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분단현실이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분단에서 오는 거대한 국력의 소모를 청산함이 없이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민족적 자존을 지켜나가기는 불가능함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열여섯시간의 긴 비행에 시달리는 동안 나는 생각했습니다. 만약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거쳐 중국, 시베리아, 유럽에 이르기까지 육로로 올 수 있었더라면 이 여정이 얼마나 많은 인간적인 만남과 추억으로 채워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의 모항(母港)이던 세비야에는 탈 중세, 근대지향의 흔적이 지금도 숱하게 남아 있습니다. 오페라 <세빌랴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이 바로 이곳을 무대로 삼고 있습니다. 이곳 세비야가 바로 세빌랴입니다. 한낱 거리의 이발사에 지나지 않는 피가로가 귀 족들을 농락하는 이야기는 마치 봉산탈춤의 말뚝이처럼 중세질서에 대한 당돌한 도전입니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라만차의 돈키호테 역시 몰락해가는 중세기사에 대한 풍자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이나 중세사를 청산하고 근세를 지향하는 이야기들입니다. 돈 호세가 카르멘을 처음 만났던 연초 공장과 카르멘이 돈 호세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두는 투우장도 남아 있습니다. 오페라속의 인물과 무대는 물론 가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초 공장만은 가공이 아닌 실제의 건물입니다. 세비야 국립대학이 되어 있는 당시의 연초 공장은 놀랄 만한 규모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연초가 신대륙에서 실려왔는가를 짐작케 하고도 남았습니다.
나는 과달키비르 강가에 앉아 신대륙 무역의 독점항이던 세비야의 번영과 식민지의 부로 쌓아올린 스페인의 거대한 유적들을 다시 한 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세의 청산과 함께 시작된 식민지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왜 서쪽으로 갔는가?'
이 물음은 한마디로 답변하기 어려운 역사의 덩어리입니다. 콜럼버스의 출항을 황금과 향료에 대한 탐욕만으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 (크리스토퍼)'는 콜럼버스의 이름풀이로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과학적 탐구로 격상시킨다거나, 이사벨라 여왕과 후아나 공주에게 바치는 바닷사나이 콜럼버스의 연정으로 격하시킨다는 것은 더욱 가당찮은 일입니다.
그가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에 자행된 1,600만명에 달하는 신대륙 원주민의 살육과, 같은 수의 아프리카 흑인을 대상으로 한 인간사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날까지 맥맥이 이어지고 있는, 그리고 21세기에도 청산되기 어려운 식민주의적 국제원리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그가 서쪽으로 간 개인적인 이유는 더욱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대륙 발견' 500주년에 행해진 가상재판에서 콜럼버스는 유괴와 살인을 저지른 잔혹한 침략자로 단죄되고 '신대륙 발견'이란 당찮은 이름이 여지없이 폐기되었습니다. '신대륙'이 아님은 물론이며 '발견'이 아닌 '도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후의 신화로 남아 있는 '콜롬버스의 달걀'도 이제는 비범한 발상의 전환이라기보다는 생명 그 자체를 서슴지 않고 깨트릴 수 있는 비정한 폭력성의 대명사로 전락되어 있습니다. 과연 신대륙에서는 무수한 생명이 깨트려지는 소리로 가득하였으며 그 소리는 지금도 세계의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콜럼버스에 대한 단죄는 바다만을 상대했던 그에게는 매우 부당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중세의 청산이나 식민지시대의 개막과는 아무 상관없이 험한 파도와 사투를 벌였던 바닷사나이에게는 가혹한 평가일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화려했던 젊은 시절과는 반대로 병고에 시달리며 돌보는 사람없이 '잊혀진 사람'으로 쓸쓸히 세상을 떠난 콜럼버스에게는 더욱이나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개인의 행동은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속에 엄청난 사회성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바르셀로나 람블라스거리에 서 있는 콜럼버스의 동상은 세비야 대성당에 누워 있는 그의 관(棺)과는 달리 야심찬 모습으로 서서 손을 들어 바다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쪽은 당연히 대서양 건너 신대륙이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쪽은 대서양쪽이 아니라 반대편인 지중해 쪽이었습니다. 그를 바다로 보낸 사람이 그 쪽에 있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그가 서쪽으로 간 이유가 바로 그 쪽에 있었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산타마리아호 선상에 올라가 멀리 대서양을 바라보았습니다. 대서양의 푸른 물결이 아득히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바다 저편에 있을 신대륙은 물론 보이지 않습니다. 신대륙으로서의 새로움이 여지없이 짓밟힌 고난의 대륙이 바다 저편에 있을 것입니다. 눈앞의 무심한 바닷물과는 반대로 귓전을 스치는 바람 속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항변이 들려옵니다. “세계는 결국 둥글지 않았다”'는 당신의 말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의 수많은 공항에서 신대륙을 찾아 비행기로 출항하고 있는 수많은 콜럼버스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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