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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삶과 서예관에 關한 硏究


원광대학교 교육대학원 김은숙(2003)


Ⅰ. 서    론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힘들고 어렵다. 부처님도 인간의 삶은 ‘고해(苦海)’라고 하였으며, 인간은 끊임없이 부딪히는 고난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어떤 사람은 두 배 세 배로 느껴 고난에 지친 삶을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그 고난을 정면으로 받아 들여 자신을 발전시키고 승화시키는 계기로 삼는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시기에 ‘세한도(歲寒圖)’라고 하는 불후의 명작을 남겨 그 어렵고 힘든 유배의 시절을 예술로 승화시켰고, 원교 이광사는 유배시절 원교서결(員嶠書訣)을 짓고, 다산 정약용은 유배시절 다산초당에서 주옥같은 저서를 짓고 서예와 그림을 통해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였다.

  쇠귀1) 신영복 또한 학생에서 교수로, 교수에서 사형수로,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무기수에서 가석방으로, 가석방에서 사면 복권으로 반전을 거듭하는 삶을 거쳐 지금은 성공회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러한 그의 삶은 우리 현대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일면이며 또한 우리 현대사의 “질곡의 역사”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신영복의 삶 속에서 6・25와 4・19 ・ 5・16과 유신 독재 시절을 거치며 살아 나가는, 결코 역사에서 분리될 수 없는 현실과 시대를 반영하는 인간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영복의 삶을 연구하기로 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중심(中心)을 흩트리지 않고, 동양 고전 공부와 서예를 통해 ‘차가운 이성(cool head)’을 ‘따뜻한 마음(warm heart)’으로 변화시켜 승화시킨 점이 존경스러워서이다. 그는 감옥에서 결코 남을 원망하거나 사회를 원망하고 비난하지 않았으며 그 속에서 자신을 도야하는 계기로 삼았다. 특히 1년 6개월의 삶을 사형수로, 그 이후에는 무기 징역을 언도받고도 어떻게 그렇게 영혼의 울림이 되는 글2)들을 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연구 의욕을 불러 일으켰다. 논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면서도 학생들을 원망하고 학교의 현실과 교육정책에 상당한 불만이 있어 왔다. 따라서 학교에 대한 사랑이 시들해짐은 물론 학생들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적지 않게 있던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그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용기와 희망을 갖게 되어 학생들에 대한 애정을 다시 갖게 되었으며 학교생활을 희망차게 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서예에 대한 그의 생각과 글씨에 매력을 느껴서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친근함을 느끼고 작품의 내용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그의 한글 서체인 ‘연대체’ ・ ‘어깨동무체’ ・ ‘협동체’라 불리는 새로운 한글 서체가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Ⅱ장 신영복의 생애를 통해 그의 어린 시절의 삶과 감옥에서의 변화되는 삶, 그리고 퇴소 후의 활동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제Ⅲ장 학서 과정과 서예관에서는 정향 조병호와 만당 성주표로부터 서예를 배우는 과정과 신영복체3)라 불리는 서체의 형성과정,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출소 이후 강연과 기고문 등에 나타난 서예정신에 대해 살펴보겠다.

 제Ⅳ장 신영복 서예작품의 내용분석에서는 현실생활에 기초한 그의 서예 내용, 관계론을 강조하여 더불어 삶을 이야기하는 신영복의 다양한 서예작품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고, 아울러 오늘날 자기 철학의 부재로 남의 글이나 글씨의 모방만을 일삼는 서예인들에게 신영복 서예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Ⅱ. 신영복의 생애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의 상황에 따라 인간의 존재하는 모습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면에서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분단 국가에서 우리의 삶은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 특히 신영복의 삶에는 그러한 우리 사회의 많은 현실과 역사가 담겨 있다. 감옥에서의 20년은 그에게 많은 변화를 준 시기이다. 차가운 이성을 따뜻한 가슴으로 변화시켜 관계론을 형성하고 서예학습을 통해 인간관계에서의 관계론을 서예에 접목시킨 시기이다.

  본 장에서는 그의 생애를 크게 3시기로 구분하여 1절은 어린시절과 청년기로 일정하게 보호된 환경 속에서의 생활, 2절은 감옥에서의 삶으로 인간관계를 변화시켜 ‘관계론’을 형성하는 과정과 스승을 모시고 서예를 배우는 과정, 3절은 퇴소후의 활동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가. 어린 시절과 청년기

 

  아버지는 자작농의 맏이로 일제 때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한 교사였고, 어머니는 지주의 막내 외동딸로 아들 신영복은 1940년 10월에 잉태되어 1941년 8월에 태어났다. 고향은 경남 밀양이지만 아버지의 임지인 경남 의령군 유고국민학교의 교장 사택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다. 그 당시 관사에서의 생활은 학생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으로 오히려 친구들에게 멀어지는 듯한 생각이 들어 일부러 장난을 하여 벌을 자초하고 꾸중을 듣는 생활을 한다. 그는 스스로가 ‘교장선생님의 아들’로 성장하였다는 사실이 자신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회고한다.4)

  위로 두 누나와 형, 그리고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다. 학교의 사택과 교실 그리고 운동장에서 시작된 그의 어린 시절은 당시의 가난하고 어려웠던 식민지의 시절과 해방 전후의 격동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된 환경이었다. 중학교까지 밀양에서 보내고 고등학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한다. 실업계인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그의 자형이 그 학교의 교사로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정형편상 둘째까지 서울로 보내서 유학시킬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의 ‘강력한’5) 추천으로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한다.

  대체로 3형제 중 둘째는 형과 다투면 동생이 형한테 대든다고 야단맞고, 동생과 다투면 동생하나 거두지 못한다고 야단맞는 게 일상이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바깥에 친구가 많은 편이었으며 따라서 집에서 보다는 바깥에서 더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집안의 장서를 읽는 누이들과 형을 따라 뜻도 모르면서 조숙한 독서를 하기도 했다.

  대학생활은 교지인 ‘상대평론’의 편집위원, 단과대학 신문인 ‘상대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며 학회와 써클 활동에서 후배들의 세미나를 지도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만나게 되었고, ‘청맥’지의 편집위원 이문규 ・ 김질락 등을 알게 되었다.6) 그는 대학 ・ 대학원시절의 대부분을 학교 연구실에서 살았다. 신영복은 훗날 당시의 생활에 대하여 ‘이 시기까지의 길은 내가 원해서 선택한 나의 길은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닦여진 길이었으며 누군가에 의하여 닦여진 책과 교실이고, 심부름 같은 길이었다.’7) 고 술회하고 있다.    1960년 일어난 4・19는 신영복에게 있어서 해방과 전쟁과 분단의 의미를 한꺼번에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 후 1963년 서울대학교 상과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같은 대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65년부터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를 하다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8)으로 당시 중앙 정보부에 연행되었다. 신영복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1960년대의 상황과 통일혁명당 사건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1960년대의 상황을 살펴보면 억압되고 경직된 분위기로 4・19(1960)이후에 급진전한 민족통일 운동은 5・16군사정변으로 일체 불법화 되었다. '반국가단체를 조직하거나 그것에 가입하거나 또는 가입할 것을 권유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발표하고 이후 모든 정당 ・ 사회단체를 해산한다.(5월22일) 그리고 ‘중앙정보부 설치에 관한 법률’(6월10일) ・ ‘반공법’(9월4일) 등을 계속 발표하고 4・19후 민족통일 운동을 주도했던 혁신세력 및 학생들을 체포하여 ‘혁명재판’에 회부함으로써 평화통일론 일체를 탄압했다.9) 이렇게 억압되고 경직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1968년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한다.

  통일 혁명당 사건은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지하당 조직사건으로 158명이 검거되고 5명은 사형이 선고되고 무기징역 4명 등 관련 피고인 30명 전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진 60년대 최대의 공안사건이다.10) 신영복은 ‘청맥’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부분 때문에 통일 혁명당 사건과 관련되고 그로 인해 사형을 선고 받고 그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나. 감옥에서의 삶


  먼저 그가 감옥에서 변화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사형을 언도받고 1년6개월 동안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사형수 표식을 달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는 오히려 어떻게 하면 낭만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그러다 무기로 감형이 되었을 때는 오히려 끝도 안 보이는 터널을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하는 절망적인 생각뿐으로 그 나름의 철학을 만들어 내기까지는 5년 정도의 기간이 걸렸다.11) 처음에 그는 자신이 사형을 당할 만큼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였으며, 감옥에서의 엄한 규율과 강제, 끊임없는 냉소와 모멸 속에서 그가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이론과 사상은 껍데기에 불과함을 느꼈다. 이런한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제일 먼저 선택 한 것은 창백한 이성을 버리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이었다.  그것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감옥에서의 삶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넓은 정신세계를 향유하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차단된 외적 부자유로부터 벗어나 절대 자유로의 향유이다.

  그는 감옥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으로 목수가 있었다.  그 목수는 집을 그릴 때 항상 맨 아래 주춧돌부터 그렸다. 일반적으로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이 집을 그릴 때에는 지붕부터 그리지만 그 목수가 그리는 집을 보면 주춧돌부터 실제로 집을 짓는 순서대로 기둥 세우고, 마루 넣고, 문 달고 지붕을 맨 나중에 그리는 과정을 보며12) 자신이 갖고 있던 이성은 이론적인 껍데기에 불과하였음을 깨닫고 이러한 껍데기의 이성을 버리고자 노력한다. 동아일보에 기고한 ‘나의 길’에 나와 있는 변화의 과정이다.

일제 때 그를 체포하였던 그 때 그 형사에게 해방 후에도 다시 체포당한 노인에서부터 비누로 양치질을 할망정 거저로는 치약 한 개라도 받지 않던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나에게 경이를 안겨 준 사람들은 일일이 열거 할 수 없다. 나는 모든 개념 모든 단어를 사람들의 얼굴로 채우고 싶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변혁하고 싶었다. 내가 만난 것은 물론 개개인의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들의 총화에서 또 하나의 만남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회와의 만남이고 역사와의 만남이다. 처음 5년간은 관계를 시도하는 기간이었다.  학력이나 시대적 배경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과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가서 말을 하면 사람들은 도망가기 일쑤여서 나는 말을 버리기로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색하여 ‘냉철한 이성’(cool head)을 버리고 ‘따뜻한 가슴’(warm heart)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있기 위해 노력하고 가능하면 언어를 버리려 노력하였다. 언어를 버리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픔을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13)  


  신영복이 감옥에서 만난 개개인은 사회와 역사와의 만남이었다. 처음에 그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창백한 이성’   ‘냉철한 이성’ 때문이었다. 신영복은 용기를 내어 껍데기 뿐인 이성을 버리고, 자신의 ‘하얀 손’을 부끄러워하며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한다. 그는 언어를 버리고 아픔을 공유하기 위해 일부러 뜨거운 국그릇을 들어 자신의 손이 노동자의 손처럼 굳어 있다는 것을 보이고 ‘따뜻한 가슴’으로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인간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는 20년의 수형생활을 통해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배운 바가 많다고 회고한 바 있다.

 

 첫째는 해방 전후의 역사를 역사로서 이해해 오던 관념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또 한 가지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과 나눈 이해와 공감입니다.14)


  감옥에서의 생활은 ‘모로 누워 칼 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로 옆 사람을 단지 37⁰C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15)하는 형벌 중의 형벌을 이겨내며 보낸 시간이지만, 그동안 갖고 있었던 역사에 대한 관념성을 버리고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해 주었다. 드디어 그는 관념에서 갖고 있던 혼자 존재할 수 있다는 ‘존재론’을 버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와 공감을 통해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관계론’을 깨닫는다. ‘관계론’을 통한 사람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 이것은 선생이 서예를 대하는 태도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감옥에서 스승을 모시고 서예를 공부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Ⅲ장 학서과정과 서예관의 서체의 형성과정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다. 퇴소후의 활동


 감옥에서 20년의 생활을 보내고 1988년 8ㆍ15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한 후 반년쯤 있다가 결혼을 하는데 그의 나이는 49세, 상대는 KBS라디오의 클래식프로를 맡고 있던 유영순PD로 출감 직전에 만나 선 한 번 보고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20년의 감옥생활은 이미 스스로의 선택권을 포기하고 단지 선택되어진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만을 남게 한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었느냐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대답한다.


 감옥에서는 자기가 함께 할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냥 선택되어지는 대로 그렇게 생활할 뿐이다. 그 감옥에서도 그렇게 무리 없이 생활을 하였는데 결혼생활이 얼마나 어렵겠느냐는 생각과 함께 어머니께서 그토록 원하시니 불효자의 마지막 효도라 생각하고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아들을 낳았다. 아버지의 마음과 할아버지의 마음이 동시에 존재한다.16)

 

  그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하여 그 개인이 이룩해 놓은 ‘객관적 달성’보다는 주관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주관적 지향’을 더 높이 사야 한다17)고 강조하며, 인간관계는 상대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일종의 동태관계(動態關係)로 파악하는 면을 볼 수 있다. 즉 사람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 조건이 아니라 그가 노력하려고 하는 ‘지향’, 주관적인 내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1995년 감옥에서 연마한 서예작품과 감옥 이후에 준비한 서예작품을 모아 세실 레스토랑에서 첫 전시회를 연다. 그의 작품을 본 후 유홍준은 ‘그의 옥중서체가 형성되기까지’라는 글을 한국일보에 싣는다. 그 글은 신영복의 도록집인 ‘손잡고 더불어’에 실려 있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중앙일보에 연재한 글을 ‘나무야 나무야’(圖1) ・ ‘더불어 숲’(圖2)이라는 책으로 출판하고, 책 앞의 표지는 모두 그의 독특한 서체인 한글로 쓴다. 현재 그는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 ‘한국사상사’ ・ ‘신영복 함께 읽기’를 가르치고 학교에서 서도반 동아리 활동을 지도하며 ‘더불어 숲’18)에서 매주 목요일 더불어 숲 회원들의 요청에 의해 서예를 함께 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 신문인 프레시안에 2001년 9월 24일부터 166회의 고전강독을 연재하여 논어에서부터 주역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젊은이들과 신세대들이 고전을 가까이 하고 고전에 관심과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가 고전을 강의하고 고전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감옥에서의 생활 때문이다. 감옥에서 많은 책을 열독할 수가 없었고 한 번에 3권이상의 책이 허용이 안돼 고전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한학자 이구영19) 에게 4년 동안 무릎을 맞대고 한방에서 지내며 고전을 배운 것이 그에게는 행운20)이었다고 한다.

  감옥이전의 삶은 엄밀한 의미에서 배우고 시키는 것을 하는 심부름 같은 삶이었고, 감옥은 혹독하게 우리 사회와 시대를 체험하는 기간이었으며, 감옥 후는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는 중21)이라고 그는 말한다.

  사회에 있었다면 아마도 하지 못했을 서예와 고전공부를 감옥에서 할 수 있었던 점에 대해 그는 행운이라고까지 생각한다. 통일 혁명당사건으로 감옥에 가게 된 것에 대해서도 그는 남을 원망하거나 사회를 원망하지 않는다. 사형수의 표식을 달고 그는 호세리갈22)을 생각하며 멋있게 낭만적으로 사형을 맞이할 것을 생각하고, 무기수로서 생활을 할 때에도 부모 ・ 형 ・ 형수 ・ 계수와의 관계 속에서 그들이 염려하는 건강과 고전공부, 서예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편지글로 써서 드러내고, 출소 이후에는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해 선 한 번 보고 결혼하는 모습을 통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항상 최선의 해답을 찾으려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Ⅲ. 학서과정과  서예관

 

  학서과정에 있어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더구나 감옥이라는 지극히 한정된 공간에서 서예의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지만 신영복은 감옥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 서예와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본 장에서는 신영복이 서예와 만나게 된 계기, 감옥에서 두 분의 스승을 모시고 서예를 배워 가는 과정, 어머니의 모필 서한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된 신영복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의 고민과 서예에 대한 미학, 사랑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서체의 형성과정 및 특징


 신영복이 서예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영향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할아버지의 사랑방에 불려가서 유지(油紙)에다 습자를 하였다. 할아버지는 친구 분들이 방문하면 그때마다 그를 불러 글씨를 쓰게 하였다. 이 때의 붓글씨란 한낱 습작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은 먼 훗날 많은 영향을 끼친다.23)

  4.19혁명 직후 대학을 중심으로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이 싹텄던 시절 그의 가까운 친구들 중에는 국악 ・ 탈춤 ・ 굿 등을 배우기 시작하여 그쪽으로 심취해간 이들이 있었다. 당시 대학 2학년이던 그는 그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붓글씨를 상기하면서 붓과 벼루를 다시 꺼내놓고, 학교 게시판의 공고문을 써 붙이기도 하고 행사 때는 아치의 글씨를 맡아서 썼다. 24)

  그 후 감옥에서 다시 서예와 만나게 된다. 재소자 준수사항, 동상 예방수칙 등의 공장 부착물들을 붓글씨로 써 붙이는 일이 계기가 되어 다시 붓을 들게 되었으며, 교도소 내에 불교방 ・ 기독교방 ・ 카톨릭방등에 추가하여 동양화방 ・ 서도방이 신설되었다. 감옥에서 그는 글씨를 써 붙이며 민체를 깨우쳤다.25)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와 있는 글 속에서 그가 서예를 대하는 자세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지난 달 하순(1981년 세모)에 저희 서화반이 이사를 하였습니다. 5, 6년 동안 작업장으로 사용해 왔던 강당 옆 계단으로부터 열세 평짜리 큰 방으로 옮겨왔습니다. 사글세를 살다가 전세를 얻은 폭입니다. 방이 크기 때문에 윗목에 책상을 벌여 놓아 작업을 하고 아랫목에서 먹고 자는 이른바 숙(宿) ・ 식(食) ・ 작업(作業)의 전 생활이 한 곳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서화반의 식구도 일곱으로 늘고, 저녁잠만 자러 오는 악대 부원 10명도 이 방의 동숙인입니다. 온종일 글씨를 썼던 기간도 7, 8년은 되었습니다. 저는 낮으로는 줄곧 공장수들이 출역하고 난 빈 방에 건너와서 종일 붓글씨를 쓰며 혼자 지내곤 했습니다. 몸 때 얼룩진 방에는 고달픈 보따리들을 올망졸망 매달아 두었고, 방 한쪽 구석에는 긴 밤의 체온이 밴 침구가 반듯이 개켜져 있었습니다. 저는 이 방의 주인들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들어올 때까지 이 작은 공간의 임자가 됩니다. 저에게 주어진 이 작은 일우(一隅)가 비록 사면이 벽에 의하여 밀폐됨으로써 얻어진 공간이지만, 저는 부단한 성찰과 자기 부정의 노력으로 이 닫힌 공간을 무한히 열리는 공간으로 만들어 감으로써 벽을 침묵의 교사로 삼으려 합니다. 필신기독(必愼其獨) 혼자일수록 더 어려운 생각이 듭니다. 아침 나절 한 벼루 가득 먹을 갈았더니 묵향이 공방에 충만합니다. 오랜만에 대자를 써 보았습니다. 호계삼소 석과불식(虎溪三笑 碩果不食),26) 변형(deformation)은 능소한 숙련과 능대한 용단이 적절히 배합될 때 뛰어 나오는가 봅니다.27)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선생은 감옥에 있으면서 서예를 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일우(一隅)의 작은 공간을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능소한 숙련과 능대한 용단의 조화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변형이 나올 수 있음을 깨닫는다.

  다음은 서예의 사승관계(師承 關係)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잊을 수 없는 두 서예 스승을 옥중에서 만난다. 만당(晩堂) 성주표(成周杓)와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이다. 이 두 스승은 그의 서예와 서예의식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먼저 만당 성주표는 대자(大子) 현판(縣板) 글씨로 유명하여 속리산 법주사, 동래 범어사 등 전국의 사찰에 많은 편액을 썼고, 임경업 장군 사당의 현판을 쓰기도 했으며, 신영복에게 성친왕(成親王) 해서(諧書) 법첩과 왕희지(王羲之) ・ 안진경(顔眞卿) 행서첩으로 임서하게 했다.28)

  또 정향 조병호는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 ・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을 사사했으며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 소당(小棠) 김석준(金奭準) ・ 백당(白堂) 현채(玄采)의 정통을 이어 일찍이 1933년에 시서화사(詩書畵社)에 입문하였다. 1939년 제1회 선전에 입선하자 일본인들이 벌인 전시회에 참여하였다는 지인들의 비판을 받고 이후 서도계와 인연을 멀리하고 일제하에서부터 은거하였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 고궁박물관과 역사박물관에 글씨가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본인은 막상 서예가라는 말은 매우 싫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서(篆書)(圖3)의 권위자로 특히 와전(瓦篆)(圖4)에는 독보적인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29) 교도소에서 그를 초빙하기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을 때에도 매주 하루를 할애하여 지도하고, 전주교도소로 이송되기 전까지 6년 여를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심지어는 교도소의 허락을 받아 자택으로 재소자들을 데리고 가서 소장하고 있는 명필들의 진적을 일일이 짚어가며 일러주기까지 하였으며, 자신의 글씨는 배우지 말고 옛 명필들의 글씨를 배우라고 하며 글씨를 글씨로만 쓰는 것은 사자관(寫字官)에 지나지 않으며 더구나 상품화된 서예란 아예 서도(書道)가 아니라는 생각을 굳게 갖고 있었다. 인격(人格)과 학문(學問)의 온축이 그 바닥에 깔리지 않는 글씨는 글씨일 수가 없다는 생각을30) 갖고 있던 스승의 인격과 서예관은 신영복의 삶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정향 조병호의 서예 지도를 받으며 많은 것을 생각한다. 글씨가 무르익으면 어린 아이의 서투른 글씨로 ‘환동(還童)’ 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고 관직(管直) ・ 장봉(藏鋒) ・ 현완(懸腕) ・ 현비(懸臂)31)를 바탕으로 한 엄정한 중봉(中鋒)의 뼈대를 깨닫게 된다. 다음은 정향 조병호의 글씨에 대하여 아버지께 쓴 편지글에서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

이윽고 바라보면 피갈회옥 (被褐懷玉) 장교어졸(藏巧於拙)32) 일견 어수룩한 듯하면서도 그 속에 범상치 않은 기교와 법도, 그리고 엄정한 중봉이 뼈대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멋이나 미에 대한 통념을 시원하게 벗어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대범함이 거기 있습니다. 아무리 작게 쓴 글씨라도 큼직하게 느껴지는 넉넉함이라든가 조금도 태(態)를 부리지 않고 여하한 작의(作意)도 비치지 않는 담백한 풍(風)은 쉬이 흉내낼 수 없는 경지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글씨로써 배워서 될 일이 아니라, 사물과 인생에 대한 견해 자체가 담담하고 원숙한 관조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결국 글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며, 도(道)의 가지에 열리는 수확이 아니라 도(道)의 뿌리에 스미는 거름 같은 것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은 모난 감정에 부대끼고 집념의 응어리를 삭이지 못하고 있는 저에게 정향 선생님의 어수룩한 행・초서가 깨우쳐준 것은 분명 서도 그 자체를 훨씬 넘어서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33) 

 

  그는 스승에게서 서예 이상의 사물과 인생에 대한 완숙(完熟)한 관조(觀照)의 경지를 배웠으며, 그는 스승을 도(道)의 뿌리에 스미는 거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는 간절함으로 감정의 응어리가 삭을 수 있도록 도와준 분이라고 생각한다. 모난 감정으로 부대끼고 있는 그는 스승으로부터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자신의 삶을 달관(達觀)하는 인생의 지혜를 배운다.

  다음으로 어머니의 모필 서한(毛筆 書翰)(圖5)의 영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쇠귀는 성주표와 조병호로부터 붓글씨를 배우며 혼자 한글 서예를 연습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특히 궁체를 쓰면서 내용과 형식의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즉, 성경이나 서정적인 시를 쓰는 경우에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민중시나 저항시를 쓸 때에는 내용과 형식이 맞지 않음을 느끼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모필 서한을 받고 그 서한으로부터 한글의 글씨 형태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서예를 하며 고민하는 과정, 글씨의 형태에 있어 어머니의 모필 서한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과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저는 어머님의 서투른 글씨와 옛 받침이 좋습니다. 요즈음의 한글 서도는 대체로 궁중(宮中)에서 쓰던 소위 궁체(宮體)를 본으로 삼고 있지만 저는 궁정인들의 고급한 아취보다는 먼 친척 아주머니들처럼 순박한 농부와 누항(陋巷)의 체취가 배인, 그런 글씨를 써보고 싶습니다. 누구든지 친근할 수 있고 나도 쓰면 쓰겠다는 자신감을 주는 수수한 글씨를 쓰고 싶습니다.34)

 당시 칠순의 할머니였던 어머니의 붓글씨는 물론 궁서체가 아니며 칠순의 노모가 옥중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한은 설령 그 사연의 절절함이 아니라도  감개가 없을 수 없지만 그는 그 내용의 절절함이 아닌 그것의 형식, 즉 글씨의 모양에서 매우 중요한 느낌을 받게 된다. 어머니의 서한을 임서하면서 서민들의 정서가 담긴 소박하고 어수룩한 글씨체에 주목하게 되고 그런 형식을 지향하여 나오게 된 것이 오늘날 그의 독특한 한글 서체이다. 그는 어머니의 모필 서한에서 영향을 받아 서로 연결되면서도 서로 어울리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듯이 글씨에서도 서로 의지하고 연결되는 아름다움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다음은 어머니의 모필 서한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된 신영복체라 불리는 그의 한글 서예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서민적이고 소박하다. 궁체가 궁중에서 쓰여져 귀족적인데 비해 그의 글씨는 그때 당시 서민이었던 어머니의 모필 서한에서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글씨의 형태가 소박하며 그 속에 담고 있는 내용도 서민적이고 민중적이다.35)

  둘째로는 다양한 변화를 바탕으로 한 역동성이다. 신영복의 글씨체는 획의 굵기와 필세의 리듬에 변화가 많은 것을 특징으로 한다. 신영복의 글씨에 나타나 있는 변화에 대한 유흥준의 ‘그의 옥중서체가 형성되기까지’에 나와 있는 글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하 윤순은 미불의 글씨를 통해 성공을 하였지만 원교 이광사는 오히려 미불의 글씨를 완전히 소화하지 못하였다는 평을 받는데 신영복 선생이 미불의 글씨에서 그 점・획의 필법과 필세와 리듬을 익혀 그것으로 독자적인 한글서체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그것을 하나의 법도로 지긋이 눌러주면서 진중한 무게를 실어준 점에 대하여 감옥에서의 생활 때문이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36)

  20년 20일 동안의 철저히 단절된 감옥에서의 절제된 생활로 인해 겸손과 절제의 미덕으로 글씨에 안정감이 있다고 말한 점에 대해서 추사의 고사를 들어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가 전주 ・ 남원을 거쳐 완도로 유배 가던 길에 해남 대흥사의 현판글씨를 비판하며 초의 선사에게 ‘대웅보전’이라 쓴 원교의 글씨를 떼어 내고 ‘무량수각’이라 쓴 자신의 현판을 걸으라고 했으나, 햇수로 9년의 외로운 귀양살이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다시 초의에게 자신의 글씨를 떼어내고 원교의 글씨를 걸으라 하며 “옛날 내가 귀양 가던 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나? 있거든 내 글씨를 떼어내고 그것을 다시 달아 주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어.”라고 하였다.37)


  이와 같이 유배의 시절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 신영복도 정향으로부터 서예를 배우는 과정에서 미불의 글씨를 배우며 그의 화려함만을 배우지 않고 자신을 절제하는 힘을 함께 배웠다. 즉 그의 작품에서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진중한 힘이 느끼게 하는 것은 20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을 절제하며 침잠(沈潛)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세째로는 연대체 ・ 어깨동무체 ・ 협동체라 불리며 다양한 자형들이 한데 어울려 함께하고 있는 모습을 들 수 있다. ‘여럿이 함께’(圖6)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이 모두가 뜻을 같이하여 동지애로 연대감을 북돋는 모습이다. 즉, 그가 한글서체에서 보여주는 가장 남다른 점은 관계성을 중시하는 '연대의식'의 표출이다.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한 진보적이고 현실적인 인식을 서체에 담아내려함이다.

  넷째는 그의 서예가 그림과 글씨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38)는 점이다. 그의 작품 ‘서울’(圖5)이라는 글씨를 보면 ‘서’에서는 산의 모습을 ‘울’에서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상형문자의 모습39) 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기호로 된 언어를 어떻게 형상화시키고 다양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에 대하여 유홍준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글씨와 그림은 기원이 같고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는 서화일치론의 이론을 바탕으로 조맹부가 얘기한 “그림과 서예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서화동원(書畵同原)에 바탕을 두지 않더라도  그의 글씨에서는 그림과 같은 모양을 볼 수 있으며 그 절묘함이 산과 도시와 강으로 이어지는 즐거운 묵희(墨戱) ․ 필희(筆戱)를 보게 되는 점은 어쩌면 그의 그림 취미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40) 


  유홍준이 지적하였듯이 신영복은 글씨와 그림이 함께 있는 작품을 많이 하였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그림의 형상이 보이도록 하고 있어 글씨와 그림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글씨와 그림의 차이로 글씨는 ‘추상적인 형식에 구체적인 내용’이고 그림은 ‘구체적인 형식에 추상적인 내용’41)이라는 면을 지적한다.


2. 편지글 속에 나타난 서예정신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서예를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으며 그러한 생각들은 부모 ・ 형 ・ 형수 ・ 계수에게 편지로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와 있고, 그 이후 이러한 서예에 대한 생각을 여러 강연 활동을 통하여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서예정신에 대해서 세가지 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의 면을 살펴 볼 수 있다. 서예는 예부터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의 하나로 기본적으로 '인간학'이며, 내면세계 즉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즉, 한(漢)의 양웅(揚雄)은 '서(書)는 마음의 화(畵)'라 하였고, 당(唐)의 유공권(柳公權)은 '심정(心正)이 곧 필정(筆正)'이라 하여 서예와 인간의 심성을 함께 보고 있다.42) 따라서 명필들의 글씨에서 그 필법 ․ 사상 ․ 인격 그리고 미학을 읽을 수 있고 나아가 그의 사상과 미학을 통하여 당대의 문화와 사회상, 그리고 시대미학을 읽을 수 있다. 즉, 서(書)는 마음의 표현으로 도덕성을 이야기하고 인격수양을 강조하며 먼저 마음의 도를 닦을 것을 강조한다. 예부터 달관한 사람은 그 글씨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성리학자 퇴계의 글씨는 무언가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을 주며, 추사의 글씨는 초신입묘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외경(畏敬)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필묵(筆墨)에 나타나는 성정(性情)은 곧 필자 성정의 발로라 하였듯이 필자의 성정을 다스리는 것이 서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일이다.43) 이렇듯이 서예는 그 사람을 표현하는 예술로 발전하여 왔으며, 서예를 하는 사람들은 먼저 인격을 수양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왔다. 서예가 그 사람이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승화시킬 수 있는 면에 대해 선주선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예는 지고한 예술(藝術)이다. 그리고 가장 순수한 예술이다. 서예는 예술이기 이전에 깊은 학문이요, 법도(法度)요, 소도(小道)이다. 모든 예술의 기조가 되는 선조(線條)의 예술이며 세간사에 지보(至寶)인 덕목의 예술로서 그 신비로움과 가치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언어는 심성(心聲)이요, 글씨는 심화(心畵)란 말처럼 글씨의 한 점 ․ 한 획 ․ 결구 ․ 장법에서 나타나는 형상과 분위기는 곧 그 사람의 성정의 표출이며 인간정신의 화신(化身)이다. 그러므로 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인식으로 발전되었으며 더불어 인격도야(人格陶冶)의 몫으로 귀하게 여겨져 왔고 앞으로 그러할 것이다.44)


  그는 이러한 인격도야와 함께 서여기인의 모습으로 서예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서여기인과 관련된 서예정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더구나 글씨란 누구의 벽에 무슨 까닭으로 걸리느냐에 따라 그 뜻이 사뭇 달라지고 마는 면을 생각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결코 무심할 수가 없다.45)


  이와 같이 그는 글씨를 쓸 때에 ‘누구에게 줄 것이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의 집에 걸리는가’를 생각하며 글씨를 쓴다. 

  다음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와 있는 ‘작품과 사람의 통일’에 대한 내용으로 그가 작품을 할 때에 내용에 대해 얼마나 많이 신경을 쓰고 훌륭한 작품을 쓰기 위해  노력하였는지 알 수 있다.


  자획의 모양보다는 자구(字句)에 담긴 뜻이 좋아야 함은 물론, 특히 그 사람이 훌륭해야 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작품과 인간이 강하게 연대되고 있는 서도(書道)가, 단지 작품만으로 평가되는 인간 부재의 다른 분야보다 마음에 듭니다. 좋은 글씨를 남기기 위하여 결국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상식이 마음 흐뭇합니다. 인간의 품성을 높이는 데 복무하는 예술과 예술적 가치로 전환되는 인간의 품성과의 통일이, 이 통일이 서도에만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근묵자(近墨者)의 자위이겠습니까.46)

  다른 예술 작품에서도 그 사람의 인격이 중요시되지만 서예는 특히 고래로부터 인격수양과 서여기인이라는 측면에서 그 사람의 인격을 중요시하였다. 사람들이 김구의 작품은 좋은 서예작품으로 인정하지만, 이완용의 글씨는 좋은 서예작품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보아도 서예에서의 인격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는 서예에서 작품과 인간의 품성을 강조하며 먼저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다음의 글에서도 그가 작품보다 먼저 품성을 닦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저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에 앞서 붓을 잡는 자세를 성실히 함으로써 먼저 뜻과 품성을 닦기를 강조합니다. 비록 오래 걸리고 힘들어도 먼저 품성을 닦은 연후에 서예를 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뜻과 품성이 비로소 훌륭한 글씨와 그림을 가능하게 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인도(人道)는 예도(藝道)의 장엽(長葉)을 뻗는 심근(深根)인 것을, 예도(藝道)는 인도(人道)의 대하(大河)로 향하는 시내인 것을’ 그리하여 최고의 예술작품은 ‘훌륭한 인간’ ‘훌륭한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47) 


  위와 같은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작품과 인간의 강한 연대성을 중요시하며 예도는 인도의 대하로 향하는 시내이므로 훌륭한 작품보다 먼저 훌륭한 인간이 되고 훌륭한 역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둘째로 관계론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존재론’은 하나의 고립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데 경쟁력을 갖춘 개인, 경쟁력 있는 회사, 경쟁력 있는 국가로 이는 언제나 승패를 요구하는 그래서 사회의 약자들의 희생을 요구하지만 ‘관계론’은 ‘나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성의 총체’로 인간 생명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소외를 극복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다.48) 그가 이러한 관계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사형수로 있던 시절 ‘죽음은 끝이고 완성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멋있게 낭만적으로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접견하고 돌아가시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나 혼자 받은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 형제, 친구가 같이 사형선고를 받았구나.’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부터이다.49) 그러므로 ‘존재는 곧 관계’라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깜깜한 형장에서 교수형을 받건 햇볕 아래서 땅위에 피를 뿌리는 총살형이건 한 개체가 죽는다는 것의 의미가 결코 그 한 개체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의 느낌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맺어 온 수많은 인간관계가 한꺼번에 떠올랐습니다. 무기징역이라는 긴 터널을 마주하면서 느끼게 되는 심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 개인의 아픔이나 비극이기보다는 나로 인한 여러 사람들의 아픔이 다시 나의 아픔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이라는 존재는 수많은 관계 속에 있는 것이구나, '관계는 존재'라는 실존철학이 맞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50)


  그는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사형수로 복역했던 1년 6개월 그 냉혹한 현실을 존재가 아닌 관계 속에서의 자신을 발견하면서 극복한다. 이는 서양사상에서 강조하는 개체와 독립이 아니라 동양 예술 정신에서 강조하는 서예의 조화와 통일정신, 상생정신51)이며 전체와 화합하는 정신이다. 신영복은 인간관계에서의 관계론을 서예에서의 관계론으로 말한다. 획과 획, 그 줄과 다음 줄, 행과 행, 방서와 낙관까지도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있는 서예를 좋은 작품으로 여긴다. 다음은 서예에서의 관계론에 대한 글이다.

    어떤 때는 실수를 좀 하지 않나 하는 기대를 합니다. 왜냐하면 실수를 해서 글씨의 획이 굵어졌다고 하면, 그 획을 지우고 다시 쓸 수 없기 때문에 어차피 그 다음 획으로 그 굵은 획을 어떻게든 커버를 해야 되거든요. 그리고 한 글자가 비뚤어졌다면 그 글자를 바로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다음 글자로 그 글자를 바로 세워보려고 노력하고, 그러다가 다시 한 줄이 완성이 되면 그 줄과 그 다음 줄, 행(行)이라고 하죠, 행과 행의 조화를 모색하게 됩니다. 한 행의 잘못은 양쪽 옆에 있는 행들이 채워줍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되는 한 장의 서도 작품은 서로가 서로에게 한껏 기대고 있는 글씨가 됩니다. 맨 마지막에 쓰는 방서(傍書)와 낙관(落款)까지도 전체 균형에 참여하는 그런 한폭의 글씨를 얻을 때가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잘 기대고 있는 한 폭의 글을 얻고 나면 굉장히 행복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흔히 보시는 반듯반듯한 글씨, 한 자 한 자가 독립된 글자들로 이뤄진 작품보다 한 자 한 자는 어딘가 빈 구석이 있고 균형이 일그러져 있지만 그렇게 서로 기대고 도와서 이뤄내는 높은 조화와 균형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경우를 서도의 높은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글씨를 쓸 때마다 이번에는 실수 좀 하지 않나 하는 기대를 갖고 글씨를 씁니다.52) 

 

  그가 서예를 할 때에 글자와 글자와의 관계, 종이와 여백과의 관계, 전체 작품 속에서 낙관과의 관계까지 전체적인 관계와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을 알 수 있다. 예술과 철학으로서의 서도는 관계성의 총체이다. 한 글자만 보태어져도 군더더기가 되고 한 글자만 빠지면 전체의 균형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관계와 조화, 이것이 서도(書道)의 철학(哲學)이고 서도의 미학(美學)이다. 서예에서 획이나 행의 실수를 승화시킬 수 있는 자세와 용기, 이것은 그의 생애에서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그 상황을 극복하는 모습과 일치한다. 다음은 영남대 강연에서 이야기한 서예의 관계론이다.

 

   서도의 높은 경지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파격인데도 멋지게 살려내고 균형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루어지는 겁니다. 엉뚱한 곳에 점이 하나 있는데 그 점을 가리니까 글씨 전체가 확 무너지는 것 같은 경우입니다. 그리고 서도는 다른 예술 장르와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그 글씨와 사람의 관계입니다. 사람이 나쁘고 글씨가 훌륭할 수 없는 것이 서도입니다. 그래서 서도의 정신과 서도의 미학은 글자와 글자, 획과 획, 흑과 백, 작품과 사람의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53)


  서예에 대한 그의 정신과 미학을 나타내는 글로 글자와 글자, 획과 획의 관계, 좋은 작품과 좋은 사람의 ‘관계론’을 알 수 있다. 서예의 관계론을 통한 인간관계에서 그의 신조는 대인춘풍지기추상(待人春風持己秋霜)으로, 곧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고, 자기를 지키기는 가을서리처럼 매섭게 한다.54) 이러한 관계론을 그는 서예에서 찾으며, 인간이야말로 가장 귀중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즉 관계론적 관점에서 자기를 개조해야 한다는 생각인 ‘더불어’라는 철학이 그가 즐겨 쓰는 한글 서체에 그대로 나타난다.

  셋째로는 느림의 미학을 살펴볼 수 있다. 서도와 인생에 대한 다음의 글은 우리가 왜 결과(結果)가 아니라 과정(過程)을, 첩경(捷徑)이 아니라 정도(正道)를 찾아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서도(書道)는 그 성격상 토끼의 재능보다 거북이의 끈기를 연마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글씨의 훌륭함이란 자획(字畫)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먹 (墨)속에 갈아 넣은 ‘정성의 양’에 의해 평가됩니다. 첩경(捷徑)과 행운에 연연해하지 않고, 역경에서 오히려 정직하며, 기존(旣存)과 권부(權富)에 몸 낮추지 않고, 진리와 사랑에 허심탄회한, 그리하여 스스로 선택한 ‘우직함’이야말로 인생의 무게를 육중하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55)


  그는 결과보다 과정과 정도를 중요시하며 먹 속에 갈아놓은 정성의 양을 이야기하고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권력과 명예보다는 진리와 사랑을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우직함’을 강조한다. 즉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진선진미(盡善盡美)56)라 하듯 신영복은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권력과 명예의 허상보다는 진리 ․ 사랑 ․ 노동에 대한 진실을 강조하며 결과보다 과정을 강조한다. 인간의 행복은 과정에 대한 진실, 사랑과 진리에 대한 우직함에서 느낄 수 있다. 다음의 글도 서예를 함에 있어 재능보다는 끈기와 노력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씨란 타고나는 것이며 필재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명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필재가 있는 사람의 글씨는 대체로 그 재능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견 빼어나긴 하되 재능이 도리어 함정이 되어 손끝의 교(巧)를 벗어나기 어려운 데 비하여, 필재가 없는 사람의 글씨는 손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쓰기 때문에 그 속에 혼신의 힘과 정성이 배어 있어서 '단련의 미'가 쟁쟁히 빛나게 됩니다.57)

 

  재능에 의존하여 손끝의 교(巧)로 흐르기보다 거북이의 끈기를 바탕으로 하는 정성과 단련의 기저(基底) 위에 온몸으로 노력하는 혼신(渾身)의 힘과 정성이 서예를 하는 기본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서예에 대한 사랑과 고민,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서도의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추워지기 전에 써보고 싶은 글귀를 몇 가지 적어 두었습니다. 갈수록 글씨가 어려워져 붓이 쉬이 잡혀지질 않습니다. 자기의 글씨에 대한 스스로의 부족감과 더러는 이 부족감의 표현이겠습니다만, 글씨에 변화를 주려는 강한 충동 때문에 붓을 잡기가 두려워집니다. 무리하게 변화를 시도하면 자칫 교(巧)로 흘러 아류(亞流)가 되기 쉽고, 반대로 방만한 반복은 자칫 고(固)가 되어 답보하기 쉽다고 생각됩니다. 교는 그 속에 인성이 담기지 않은 껍데기이며, 고는 제가 저를 기준 삼는 아집에 불과한 것이고 보면, 윤집궐중(允執厥中)58), 역시 그 중(中)을 잡음이 요체라 하겠습니다.59)

  

  서예를 하면서 느끼는 것으로, 무리하게 변화를 주었을 때 나타나는 교(巧)로 흐르는 문제와 계속되는 반복으로 인한 고(固)의 갈등, 그로 인한 인성과 아집의 갈등 속에서 중용(中庸)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느림의 미학은 매직펜과 붓에 대한 비교를 통해 붓의 매력과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며 동양의 정서를 이야기하고, 오늘날과 같은 인스턴트시대에도 우리가 왜 붓을 사용하고 서예를 사랑하며 서예 인구가 꾸준히 늘어날 수밖에 없는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내용이다. 조금 늦더라도 인간적인, 붓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그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매직펜은 붓글씨와 달라 특별한 숙련이 요구되지 않으므로 초심자가 따로 없습니다. 마치 피아노의 건반을 아무나 눌러도 정해진 음이 울리듯, 매직펜은 누가 긋더라도 정해진 너비대로 줄을 칠 수 있습니다. 먹을 갈거나 붓끝을 가누는 수고가 없어도 좋고, 필법의 수련 같은 귀찮은 노력은 더구나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휘발성이 높아 건조를 기다릴 것까지 없고 보면 가히 인스턴트 시대의 총아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편의에도 불구하고 펜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종이 위를 지날 때 내는 날카로운 마찰음, 기계와 기계의 틈새에 끼인 문명의 비명 같은 소리가 좋지 않습니다. 달려들 듯 다가오는 그 자극성의 냄새가 좋지 않습니다. 붓은 결코 소리 내지 않습니다. 어머님의 약손같이 부드러운 감촉이, 수줍은 듯 은근한 묵향(墨香)이, 묵의 깊이가 좋습니다.

  추호(秋毫)처럼 가늘은 획에서 필관(筆管)보다 굵은 글자에 이르기까지 흡사 피리 소리처럼 이어지는 그 폭과 유연성이 좋습니다. 붓은 그 사용자에게 상당한 양의 노력과 수련을 요구하지만 그러기에 그만큼의 애착과 사랑을 갖게 해줍니다. 붓은 좀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는 매운 지조의 선비 같습니다. 매직펜이 실용과 편의라는 서양적 사고의 산물이라면 붓은 동양의 정신을 담은 것이라 생각됩니다.60)


  붓과 펜의 비교에서 그는 부드러운 감촉의 수줍은 듯 은근한 묵향을 예찬하고 있다. 오랜 기간 상당한 양의 노력과 수련을 요구하는 만큼 애착과 사랑을 갖게 해주는 붓에 대한 사랑을 통해 그가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함을 알 수 있다. 서양적 사고의 산물인 실용과 편리, 빠름과 속도를 상징하는 펜의 사용보다는 오랫동안 수련을 한 매운 지조의 선비 같은 동양정신을 담은 붓의 사용을 강조하고 있다.

  이상에서 신영복이 서예를 배우는 과정과 어머니의 모필 서한에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낸 새로운 형태의 한글서체 형성과정, 관계론과 연대성을 강조한 서예정신에 대해 살펴보았다. 논자는 그의 서예정신을 통해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개발과 발전위주의 비인간적 성장이 가져오는 인간성 파괴의 문제를 극복할 단초를 발견한다. 느림과 여유 관계 속의 인간발견으로 인간관계를 개선하여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계의 틀을 구안(具案)해 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Ⅳ. 신영복 서예 작품의 내용분석

 

  오늘날 인류의 공적인 빈곤 ・ 질병 ・ 무지 ・ 오염 ・ 부패(범죄) 등 우리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신영복은 인간적 삶에 초점을 맞추어 관계 속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자본주의를 바라본다면 많은 문제점을 해결 할 수 있다며 ‘존재론적’ 사고를 버리고 ‘관계론적’ 사고를 할 것을 강조한다. 즉, 그가 주장하는 ‘더불어’는 ‘존재론’보다 ‘관계론’쪽으로 변화해야 하겠다는 바람을 담은 말이다.61) 그는 이러한 관계론을 강조하는 내용을 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서예로 구현하여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이루는 서예작품을 내 놓는다.

  본장에서는 그의 작품 속에 담겨있는 현실생활에 기초한 내용, 서예정신의 표현 내용, 오늘날 서예인들에게 주는 교훈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1. 현실생활에 기초한 내용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정직한가를 준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사람의 삶 속에 담겨 있는 시대의 양(量)’을 보면 알 수 있다62)고 한 그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서예도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말한다. 현실에 참여하고 실제 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곳에 서예가 있어야 한다. 즉, 글씨는 인간의 기원과 함께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으며 특히 중국에서의 서예는 고대 거북의 배나 등의 껍데기와 소나 사슴 등의 견갑골에 점을 치기 위한 기복으로부터 기원하였다. 인류의 생활과 함께 한 서예가 오늘날 중국에서는 간판의 글씨와 같은 실제 생활에서의 글씨로 남아 있지만, 우리나라 거리의 간판에서는 서예글씨를 찾아보기가 어렵고, 또한 현실 속에서도 서예를 접하기가 어렵다. 심지어는 중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에서도 미술교과의 일부로 통합되어 독립적인 서예과목은 사라졌다. 그러한 원인을 논자는 서예가 현실과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옥천 상업고등학교의 교사 김성장63)의 글이다.


80년대를 거쳐 오면서 미술이 민족적 민중적 현실의 문제를 온몸으로 껴안고 뒹굴며 미술사의 지평을 넓혀오던 시기에 서예는 서실에 갇혀 있었다. 민족이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서예가들은 그것을 서예로 표현하지 못하였다. 민주화의 현장에서, 노동 현장에서, 통일 운동의 현장에서, 미술이 거대한 걸개그림을 내걸어 사람들의 가슴에 파고 들 때에 붓글씨는 '바깥'에 내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매직으로 싸인펜으로 모조지에 구호를 쓰고 있었다. 서예가들이 왜 이 좋은 소재와 기회를 민족 서예 지평으로 넓혀가지 못했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는 80년대 미술이 닿고자 했던 ‘낮은 곳’을 향한 정신적 지향점에 서예인들이 만들어 가야 할 새로운 길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서예인들이 얼마나 고루하며 현실적이지 못한 옛날의 전통만을 답습하며 서실에 갇혀 있었는지, 서예인들이 지향해야 할 세계가 어디인지를 뒤늦게 깨달은 이의 통회(痛悔)가 드러나 있다. 지식인들의 ‘높은 곳’의 전유물이었던 서예를  ‘낮은 곳’으로의 현실 참여로 끌어들여야 하는 것이 오늘날 서예인들이 해야 할 몫이다. 신영복은 이러한 점을 일찍이 깨닫고 서예의 현실 참여를 실천하였다. 다음의 글은 서예가 현재의 사회 ・ 역사적 과제를 함께 해결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서예란 그것을 글씨로써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격과 사상, 그리고 당대 사회의 미학을 오늘의 과제와 정서로 지양해 내는 작업이어야 하며 더구나 이 모든 것을 우리시대의 것으로 형상화하는 동시에 우리의 것으로 이룩해내어 다른 모든 예술장르와 마찬가지로, 서예도 현재의 사회 ․ 역사적 과제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64)


  그는 서예가 현재의 사회 ・ 역사적 과제와 관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그의 서예 작품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한글 서예는 전교조 용품과 신문 제호인 ‘평화신문’(圖8) ・ ‘전국민중 연대’(圖9) ・ ‘건치’(圖10)65) 등에 쓰이고 있어 현실참여 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전교조 달력(圖11-1, 11-2)에 있는 그의 글과 글씨에서는 ‘교육은 단지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란 아라공66)의 싯구를 인용해 교육에서 희망을 말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서예가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야 하고,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되어 현실적인 삶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그의 말을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특히 서예는 그림과 달라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메시지를 직접 전하는 것이다. 그 사회성과 역사성이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이 점이 서예가 다른 장르에 비하여 사회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이유가 된다. 따라서 서예가 어떠한 전통 위에서 어떠한 내용을 어떠한 형식으로 표현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67)

  서예의 구체성으로 다른 예술에 비해 구체적인 내용을 표현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서예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하겠다. 또한 적극적인 현실 참여와 구체적인 내용으로 사회를 담아내고 역사성이 표현될 때 서예가 좀더 대중화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2. 서예정신의 표현내용

 

  감옥에 있는 동안 성주표와 조병호로부터 서예를 배우고 나름대로의 연구와 노력에 의해 얻어진 작품, 퇴소이후에 세실 레스토랑에서 발표한 작품, 사회활동을 하면서 발표한 서예 작품을 통해 서예 속에 나타나 있는 그의 서예정신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새재’(圖12-1, 12-2)라는 작품을 보면 ‘신경림의 새재를 쓰며 우리의 산천과 바람 속에 살아있는 민중의 설움과 고난 분노와 저항 그리고 그 튼튼한 삶을 배우다.’라고 관지에 적은 것처럼 그는 새재를 쓰면서 이 땅의 민중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글의 내용 속에 들어가 민중들의 튼튼한 삶을 배운 것으로 드러난다.

  또한 박노해 시인의 ‘눈물의 김밥’(圖13)’을 쓰면서 함께 울고, 노동의 새벽 중에서 ‘손무덤’(圖14) 을 골라 쓰며 그의 흰 손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리하여 노동을 통해 그의 흰 손을 투박한 손으로 바꾸려 했고 감옥을 나올 때 그의 손은 두껍고 투박해져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영희의 새에 대한 비유의 글에 나타나 있는 좌익(左翼)과 우익(右翼)(圖15)에 대한 글을 쓰면서 좌익(左翼)과 우익(右翼)으로 분리되어 있는 사회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석과불식(碩果不食)68)(圖16)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주역에 나오는 말로  희망에 대한 희망이 담겨있는 언어이다. 겨울의 나무는 비극의 표상이며 절망의 상징이지만 그 앙상한 가지 끝에 달려 있는 빨간 감 한개는 희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문구이다.

  그의 저서인 ‘더불어 숲’에서 말하려 하고 글씨와 그림으로 표현한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圖17)는 그가 원하는 삶의 형태로 인간 개개인이 나무가 되고 그 나무들이 숲이 되어 지키듯이 사람과 사람이 연대하고 관계해야 함을 강조한다. 인간이야말로 가장 귀중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그는 개인의 생각과 개인의 정서도 관계 속에서 길러지고 관계 속에서 지탱되는 것이라 믿는다. 관계론을 강조하는 그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머리 좋은 사람은 가슴 좋은 사람만 못하고, 가슴 좋은 사람은 손 좋은 사람만 못하고, 손 좋은 사람은 발 좋은 사람만 못하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69)(圖18)


  ‘더불어 한길’(圖19) ・ ‘함께 가자 우리’(圖20) ・ ‘바 깥’(圖21) ・ ‘여럿이 함께 가면 험한 길도 즐거워라’(圖22) ・ ‘너른 마당’(圖23) ・ ‘한 울삶’(圖24), 서울의 상암역에 있는 ‘네 손은 내가 잡고 내 손은 네가 잡고 새 하늘 바람 되어 이 땅의 꽃이 되어(圖25)’ 등을 보면 글의 내용과 글씨의 형식이 조화롭게 연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관계론 중 인간관계에 대한 글로 ‘和而不同’(圖26)에 대해서 화(和)는 공존의 철학으로 자기와 다른 것의 존재를 인정하는 연대성이고, 반면 동(同)은 자기와 같아야 한다는 흡수합병의 철학이므로, 연대를 하고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동(同)의 논리가 아닌 화(和)의 논리에 철저해야 함을 강조한다.70)

  프레시안에 연재한 고전강독의 마지막 강의에서 유종원의 종수곽탁타전(種樹郭啄駝傳)71)(圖27)을 소개하여 모든 것을 자신 스스로 생각하며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을 남겨두고 있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성공회대 곳곳에 붙어 있는 ‘새 천년관’(圖28) ・ ‘오거서’(圖29) ・ ‘너는 나를 따르라’(圖30) ・ ‘감사관’(鑑史館)(圖31) ・ ‘새로운 시대 새로운 대학’(圖32)의 글씨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서울의 천호동에 있는 ‘천호지하차도’(圖33) 글씨는 서예가 거리의 글씨로  쓰여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진각에 세워진 박봉우시인72)의 ‘휴전선’(圖34) 시비는 신영복의 글씨로, 통일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애정이 어울리는 형식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요즘 방영되는 드라마 ‘좋은 사람’(圖35) 이란 제목의 타이틀은 연출을 맡은 유정준 PD가 ‘좋은 사람'73)이란 드라마의 좋은 뜻을 살리고 싶어 글씨도 사회적으로 곧은 인생을 산다고 자타가 인정할 만한 신영복 교수에게 부탁했다. ‘인물 현대사’(圖36)74) 타이틀도 그의 글씨이다.

  부여의 신동엽 생가에 있는 글씨인 ‘생가’(圖37)의 내용 중에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라는 글에서 보듯이 그는 ‘역사는 과거로의 여정이 아니라 현재의 과제로 돌아오는 귀환입니다.’75)라며 부여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인식을 요구하고 있다.


3. 현대 서예인들에게 주는 교훈

 

  지난 6월 20일부터 7월 13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김광업전에 대해  이동국은 ‘오늘날의 서예가들은 서예의 기법(技法)만을 논(論)할 뿐 서예정신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76)고 했다. 선생의 지적처럼 오늘날 서예가들은 작품 속에서 기법만을 논할 뿐 정신을 논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한 점을 염두(念頭)에 두면서 오늘날 우리 서예인들이 반성할 점을 신영복의 삶과 서예를 통해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한 가지 측면은 대구 mbc방송에서 방영한 프로그램에서 서예의 내용과 형식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 신영복이 지적한 내용이다.


  즉 젊은 사람들의 미적 정서에도 맞고 세계적인 추세에도 떨어지지 않으려면 서예의 형식에 있어서는 궁체의 단순한 필법을 벗어나 예술 고유의 조형성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하고, 내용에 있어서는 한문에서 답보하고 있는 유교적인 윤리 수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내용이나 인간적인 정체성에 대한 내용을 모색해야 한다.77)


  즉 내용과 형식의 조화는 그가 한글 서예를 하면서 끊임없이 반성하고 노력한 부분이다. 감옥에서 민중시나 저항시를 궁체로 쓰면서 유리그릇에 된장을 담은 느낌78)이라고 하며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내용이나 인간적인 정체성에 대한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서체의 형식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독특한 한글 서체를 만들어 냈으며, 오늘날 내용과 형식이 조화된,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걸맞는 서예를 창조해 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즉 시대의 요구에도 맞으며 내용과 형식이 조화된 서예를 통해서 서예를 대중화 시키는 일이 오늘날 우리 서예인들이 맡아야 할 임무이다.

  또 다른 측면은 서여기인이라는 인격도야의 측면이다. 오늘날 공모전 비리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가장 깨끗하고 순수해야 할 인격을 강조하는 서예계에서의 공모전 비리79)는 서예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담함을 넘어 아득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가장 깨끗해야 할 곳 중의 하나인 교육계 비리, 인격을 이야기하는 서예계의 비리와는 무관하게 그는 서예를 하고 있다. 물론 그는 공모전 출신도, 국전 초대작가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글씨에는 사상이 있고 맑은 영혼의 울림이 있고, 훌륭한 인격이 있다. 또한 그는 서예가라고 할 수는 없다. 본인도 서예가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옛날의 선비들이 서예와 그림과 학문을 연마 했듯이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의 생애와 서예정신을 통해 오늘날 공모전의 초대작가제도80)로 얼룩진 서예계를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정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위안을 삼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 서예인들은 서예에 대한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내용으로 미적인 감각에 맞는 예술 고유의 조형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고, 서예 공모전을 통해 명예를 얻으려 하기 보다는 인격도야의 면에서 자신을 수양하고 실력을 쌓아 서예를 통한 도를 닦는 모습을 찾아야 하겠다.

 






Ⅴ. 結      論


  신영복은 사형선고를 받고 1년 6개월, 그 후 무기징역으로 절망의 어둠 속에서 20년 20일을 있으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또 다른 형태임을 발견하였다. 감옥에서 그는 ‘냉철한 이성’을 버리고 ‘따뜻한 가슴’을 만드는 노력 즉, 인간에 대한 관심과 노력으로 역사는 차가운 이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눈을 뜬다.

  감옥에서 그는 사람과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동양고전을 공부하고 만당 성주표와 정향 조병호로부터 서예를 배웠다. 특히 정향 조병호로부터는 서예뿐만이 아니라 사물과 인생에 대한 관조(觀照)를 배우고 서예가 무르익으면 나타나는 어수룩한 듯한 대교약졸의 상태, 그러면서 인간의 삶에서도 우직함과  함께 삶의 여유를 배우게 된다.

  또한 그는 한글 서예인 궁체를 쓰면서 형식과 내용의 괴리를 느끼고 새로운 형태의 한글 서예를 모색해 보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모필 서한에서 새로운 서체의 단초를 발견하였다. 여기에서 오늘날 ‘신영복체’라고 하는 새로운 형식의 서체를 만들어 내었으며 그의 이러한 글씨는 ‘연대체’ ․ ‘어깨동무체’ ․ ‘협동체’라 불리고 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글에 나타나 있는 서예정신인 사람과 작품을 통일시키려는 노력, 그리하여 먼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그가 꾸준히 서도를 연마하여 자각한 것이다. 또한 붓과 펜의 비교를 통해 서양적 사고의 산물인 펜보다는 끈기가 필요하지만 여유와 은근함이 배어 있는 동양적 산물인 붓의 사용을 강조하는 느림의 미학을 예찬했다. 인간관계에서의 관계론을 강조하듯이 서예에 있어서도 획과 획, 행과 행, 연과 연의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가장 귀중한 삶의 가치는 바로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는 일, 까마득히 잊었던 사람을 발견하고 그 사람들과 함께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진지(陣地)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81)고 말하며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강조한다. 특히 인간과 인간이 만나서 ‘더불어 숲’을 이루려면 항상 처음처럼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가 서예를 할 때에 가장 즐겨 쓰는 것이 ‘처음처럼’(圖38)이다.

  이상과 같은 신영복의 서예관은 우리에게 삶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관계하며 살아가듯이 신영복의 글씨는 서로 의지하고 연대되어 있다. 한 획이 잘못되면 모두 쓰러질 듯이 획과 획이 서로 관계하고 의지하고 있는 그의 서예를 보면 우리의 삶도 이와 같이 연대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관계론은 오늘날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많은 문제점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다. 범죄의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는 익명성(匿名性)에서 기인하는 범죄가 많다는 것은 관계론을 통한 사회문제 해결 가능성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가 나의 아들이고 나의 형제, 나의 친구, 나의 부모라면 범죄를 쉽게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즉 범죄의 대상이 나와 관계하는 그 누군가라는 관계론을 깨닫는다면 범죄를 할 때 망설임이 있을 것이고, 그러한 점에서 그의 관계론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더 많은 소비가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듯이 더 높은 성장이 인류를 더 좋은 사회, 더 행복한 사회로 이끌지 않는다. 인간에게 있어 행복은 고뇌하고 만들어 내고, 일하는 과정에서 느끼고 만들어진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더 높은 성장 더 많은 행복을 이야기하지 않고 고뇌하고 일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타인에게는 온유하면서도 자신에게는 냉정한 사람으로 자신의 신념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으로 평가 받고 있다.82)

  혹독한 감옥에서의 글은 부모와 자녀사이에, 형제간에 느낄 수 있는 인정(人情)과 애정(愛情)이 넘쳐나는 사색(思索)의 글이지만 우리의 영혼을 울리기에 충분한 내용과 선(禪)과 사색(思索)이 들어 있다. 그는 많은 책을 읽기보다는 많이 사색 하려 노력하였으며 그러한 사색의 결과를 우리는 그의 글씨에서 맛볼 수 있다. 앞으로 선생의 서예정신과 서체에 대한 연구가 계속 되기를 바라며 혹시라도 미진한 논자의 소치로 인하여 다소나마라도 누가 되었을까 염려 된다.



1) 쇠귀(牛耳)라는 호는 서울의 牛耳洞, 그가 살았던 동네 이름에서 딴 것이다.

2)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1968년부터 1988년까지 감옥에 있으면서 부모, 형, 동생, 형수, 계수에게 하루 두 장씩 지급하는 휴지에다 쓴 편지로 물론 연필로 쓴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철필로 먹물을 찍어서 또박또박 박아 쓴 편지를 모아서 낸 책이다.

3) 신영복체, 민체, 연대체, 협동체, 어깨동무체라 부른다.

4) 계간지 『이론』 편집위원장 정운영교수와의 대담 1992년 10월 22일.

5) 그때 당시 대부분 고등학교 졸업 후 은행에 취직하는 것이 일반이었는데, 그 당시 선생님께서 대학 진학을 위해 은행 면접을 포기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월간, 『길』,「길이 만난 사람」, 윤철호님과의 대담, 1993년 5월호 pp. 29-35.

6) 윤철호, 「길이 만난 사람」, 월간 『길』, 윤철호님과의 대담, 1993년 5월호 pp. 29-35.

7) 계간지 『이론』 편집위원장 정운영교수와의 대담 1992년 10월 22일.

8) 통일혁명당(통혁당)사건은  1968년 8월 적발된  사건으로 서울시당 책임자 김종태, 민족해방전선 책임비서 김질락, 전남도당 창당 준비위원장 최영도, 청맥사 편집장 이문규등 총 158명이 검거되고 73명이 송치돼 50명이 구속됐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와 달리 이 사건에 연루 복역한 후 출소한 인사들 가운데는 통혁당이 북한 노동당과는 무관한 조직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월간 조선, 2001년 05월호.

9)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1994, pp. 276-277.

10) 이광식외 2인(박은봉,이종임), 『한국근현대사사전』, 가람기획, 1990, p. 395.

11) 윤철호, 「길이 만난 사람」, 월간 『길』, 윤철호님과의 대담, 1993년 5월호 pp. 29-35.

12) 신영복, 「2000년대를 위한 새로운 삶의 지향」, 1999년 4월 27일 영남대 강연, 『영남대학교 인문학 연구 vol 37』, 1999년 p. 162.

13) 신영복, <동아일보>, 「나의 길」, 1990년 12월 2일 기고.  

14) 계간지 『이론』 편집위원장 정운영교수와의 대담, 1992년 10월 22일.

15)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햇빛출판사, 1988, p. 330-331.

16) 문강선, 「이 시대의 정신을 만나다」, -인고의 휴머니스트 신영복교수-,『작은이야기』, 1999년 1월 창간호 pp. 18-20.

17)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햇빛출판사, ‘객관적 달성보다 주관적 지향을’, 1970년 10월 동생에게 보낸 편지

18) 서울특별시 신월동 동명학원 지하에 있으며 그곳에서 ‘더불어 숲’ 모임과 ‘신영복 함께읽기’ 와 ‘서도반’ 모임을 하고 있다.

19) 월사 이정귀 선생의 후손으로 벽초 홍명희 선생께 사사. 한문 역사를 통해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번역 집필에 몰두하고  수필집 『燕行漫草』, 역서로는 『湖西義兵史蹟』등이 있고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는 심지연 교수가 정리한 것으로 노촌 이구영의 팔십년 살아온 이야기이다

20) 신영복, 「역사와 인간에 바치는 고귀한 삶」,『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소나무, 2001, p. 358.

21) 서영아, <동아일보>, 「더불어 나누는 사람만이 희망이다.」, 2001년 9월 28일.

22) 호세리갈은 필리핀 독립 1년 전에 체포되어 지금 그의 동상이 서 있는 필리핀 르네타 공원 바로 그 자리에 꿇어 앉혀 총살을 당하였으며 필리핀에 대한 애정을 담은 시를 남기고 죽었다. 윤철호, 「길이 만난 사람」, 월간 『길』, 윤철호님과의 대담, 1993년 5월호. pp. 29-35.

23) 계간지 『이론』 편집위원장 정운영교수와의 대담, 1992년 10월 22일.

24) 신영복, 「서예와 나」, 『손잡고 더불어』, 학고재, 1995.

25) 上揭書, 1995.

26) 호계삼소 : 「주역」, 호계에서 세 사람( 고승 혜원, 도사 육수정, 시인 도연명) 이 크게 웃었다하여 학문이나 예술에 열중하여 도정(道程)이 먼 것을 잊어 버림을 나타냄. 『여산기』에 기록. 석과불식:千轉星而樞極不移 陰積陽剝而碩果不食(천전성이추극불이음적양박이석과불식)(易經의 爻辭)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주역에 나오는 말로 희망을 나타내는 글이다. 「새땅에 “희망의 싹”틔우자」, NEWS+, 1998년 9월 24일.  

27)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햇빛출판사, 1988, p. 227-228.

28) 신영복, 「서예와 나」, 『손잡고 더불어』, 학고재, 1995.

29) 신영복, 上揭書

30) 신영복, 上揭書.

31) 현완(懸腕)・ 현비(懸臂)에 대하여 指知執而不知 運腕知運而不知執라고 정향 선생  강의, 2003년 8월 16일.

32) 거친 갈옷을 입었지만 속에는 옥을 감추고 뛰어난 재주는 어리숙함을 감추고.

33)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햇빛출판사, 1988, p. 269.

34) 上揭書,p. 251.

35) 대구 mbc 문화방송 특집 4부작 「다시 찾아야 할 우리 글씨」.

36) 유홍준, 「그의 옥중서체가 형성되기까지」, 『손잡고 더불어』, 학고재, 1995.

37) 유홍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창작과 비평사, 1993, pp.88-89.

38) 대구 mbc 문화방송 특집 4부작 「다시 찾아야 할 우리 글씨」

39) 오숙희, 「어깨동무해 살고픈, 우리시대 선비 신영복」, 월간 『참여사회』, ’1996년 5월 6월호 선생님과의 대담.

40) 유홍준, 「그의 옥중서체가 형성되기까지」, 『손잡고 더불어』, 1995, pp. 68-69.

41) 신영복, 「서예와 나」, 『손잡고 더불어』, 학고재, 1995.

42) 허구, 「書藝論」, 고시원, 1988, p. 30

43) 上揭書, p. 31.

44) 선주선, 『서예통론』, 원광대학교 출판국, 1998, p. 313.

45)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햇빛출판사, 1988, p. 44.

46) 신영복, 上揭書, p. 234.

47) 신영복, 上揭書, p. 208.

48) 김호기, 『말, 권력, 지식인』, 아르케, 2002, p. 155.

49) 윤철호, 「길이 만난 사람」, 월간 『길』, 윤철호님과의 대담, 1993년 5월호   pp. 29-35..

50) 월간 『우리교육』 특별기고,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1998년 6월호, pp. 70-79.

51) 송하경, 「동양예술정신에 나타난 '화(和)'」,한국 동양 예술 학회, 한국 동양 예술 학회지, 2000, p. 180.

52) 신영복,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월간 『우리교육』 특별기고, 1998년 6월호, pp. 70-79.

53) 신영복, 「2000년대를 위한 새로운 삶의 지향」, 1999년 4월 27일 영남대 강연, 『영남대학교 인문학 연구 vol 37』, 1999년 pp. 184-186.

54) 김경환, 「더 높은 인간성을 향한 불안스럽지만, 확고한 떨림」, 월간 『말』, 1996년 8월호 pp. 20-27.

55)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햇빛출판사, 1996, p. 144.

56) 논어(論語) 팔일편(八佾篇)에 나오는 것으로 공자가 소악을 이르기를[子謂韶) “지극히 아름답고 또 더할 것 없이 좋다.”하고[盡美矣 又盡善也] ,무악을 이르기를[謂武] “극진히 아름다우니 더할 것 없이 좋지는 못하다”고 하였다.[盡美矣 未盡善也]

57) 신영복, 上揭書, p. 144.

58) 「中庸章句 序」 남송(南宋) 주희(朱熹), 中庸何爲而作也, 子思子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 蓋自上古聖神繼天立極, 而道統之傳有自來矣. 其見於經, 則 [允執厥中] 者, 堯之所以授舜也;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者, 舜之所以授禹也. 堯之一言, 至矣, 盡矣! 而舜復益

59)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햇빛출판사, 1996, p. 260.

60)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햇빛출판사, 1996, p. 222.

61) 이항복 신영복과의 대담, 「더불어는 삶의 방법이자 목표」, 『월간중앙WIN』, 제 39호, 1998년 8월 1일.

62) 신영복, 「역사와 인간에 바친 고귀한 삶」, 심지연, 『역사는 남북을 가르지 않는다.』의 후기에 실린 내용, 조합공동체 소나무, 2001, p. 359.

63) 1959년 청주출생 옥천상업고등학교 국어 교사, 『내밥그릇』’의 서문에 있는 내용, 『서로 다른 두 자리』, 『내밥그릇』, 『모모둠토의수업방법 10가지』, 『보충수업의 문제점과 대안 찾기』등의 저서가 있다.

64) 신영복,  『손잡고 더불어』, 학고재, 「서예와 나」, 1995.

65) ‘건강 사회를 위한 치과의사’의 모임에서 발간하는 신문 제호.

66) 아라공(Aragon, Louis 1897-1982),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주요저서『파리의 농부』, 『문체론』, 『단장』, 『엘자의 눈』, 『성주간』,등이 있다.

67) 신영복, 『손잡고 더불어』, 「서예와 나」, 학고재, 1995.

68) 신영복, 「새땅에 ‘희망의 싹’틔우자」, NEWS+, 1998년 9월 24일.

69)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햇빛출판사, 1988. p. 313, 1984년 11월 29일.

70) 인물포커스 ,「더불어 나누는 사람만이 희망」, <동아일보>, 2001년 9월 28일 서영아 기자.

71) 인터넷신문인 프레시안에 연재, 2003년 4월 7일.

72) 박봉우(1934-1990), 광주 출생, 휴전선, 휴전선과 나비 등의 시가 있다.

73) MBC TV 수, 목요일 드라마 ‘좋은 사람’.

74) KBS1 TV 금요일 10시 방송.

75)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1996, p. 148.

76) 「운여 김광업의 문자 반야 세계」, 『월간서예』(2003년 6월호), pp. 114-121.

77) 대구 MBC 특별 4부작 「다시 찾아야 할 우리 글씨」.

78) 신영복, 『손잡고 더불어』, 「서예와 나」, 학고재, 1995.

79) <한겨레 신문>, ‘대한민국 서예대전’과 ‘대한민국 서예전람회’ 심사 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른 24명을 적발, 한국서예협회 이사장, 한국서가협회 이사 등 심사위원과 출품자 등 5명에 대해 업무상 배임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나머지 19명은 불구속 입건했다고 서울 경찰청 수사과는 발표했다. 2003년 7월 3일.

80) 초대작가제도 때문에 개개인의 특성이나 정신은 달아나고 획일주의에 빠지고 만다. 자기도 모르게 굳어 버린 작가들은 점수 채워 작가가 되면 방법에 찌든 글씨만 쓰게 된다. 사람 냄새는 도망가고 글씨 냄새만 풍긴다. 김태정 대구 예술대 교수 2003년7월9일hani 인터넷 한겨레

81) 신영복, <중앙일보>, 「어려움은 즐거움보다 함께 하기가 쉽습니다.」, 1998년 1월 23일.

82) <굿데이> 굿데이와 야후코리아가 10월 6일부터 13일까지‘우리시대의 지성인 베스트5’를 설문 조사하였다. 방황할 때 지금 여기서 길을 물어보고 싶은 지성인은 누구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1위 신영복 2위 김용옥, 3위 손석희, 4위 법정스님, 5위 김지하 등이 선정되었다. 신영복은 자신의 신념을 행동에 옮기고 그 대가로 오랜 세월 영어(囹圄)의 몸으로 지낸 뒤에도 여전히 맑은 영혼을 유지한다는 게 그를 1위로 꼽은 주된 이유였다. 2003년 9월 18일, 강근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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