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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선생을 서예가라 하고, 누군가는 선생을 경제학자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그냥 교수라고 부른다. 모두 틀린 호칭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 옥중에 머물며 때때로 멀리서 들려오는 호남선 열차 소리에 고뇌하던 순간들의 회상과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를 애송하던 모습에서 어쩌면 선생은 ‘여행자’로 불리고 싶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벽을 마주하고 앉았을 때에도, 책과 붓을 들었을 때에도 선생은 틀림없이 바다로 향하는 강물을 상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철학적으로도 선생은 머리에서 가슴, 가슴에서 발로 이어지는 먼 여행의 실천자였으니 말이다.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인생의 황금기를 감옥에서 보내야했던 선생은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20년 20일 만에 광복절특사로 풀려났지만 다음 세기까지 무려 12년의 가석방 처분을 받고 있었다. 주거지 이전은 자유롭지 못했고, 열흘 이상 여행이 불가능한 것을 포함 몇 가지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관할 파출소를 통해 규칙적인 활동보고서도 올려야하는 보안관찰 처분도 덤으로 떠안은 반쪽짜리 시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7년 동안 칩거 중인 선생에게 멋진 제안이 들어왔다.

중앙일보 이근성 기자는 은둔의 철학자에게 마치 현장학습을 권장하듯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라는 기획안을 내밀었다. 보수적인 신문사 내부의 우려와 반대도 있었지만 여러 가지 깊은 생각으로 수정과 보완을 거듭한 끝에 매주 떠나는 여행 칼럼을 제안하고 밀어붙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95년 11월부터 10개월간 연재된 글은 폭발적인 인기 칼럼이 되었고, 한 권의 책으로 엮어졌다. 이 땅의 진정한 여행자를 발견하고 빛낸 선생의 얇고 깊은 기행문 <나무야 나무야>는 그렇게 20년 넘게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안중찬의 書三讀]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8211; 산따라 강따라 떠나는 당신으로부터의 사색

“우리는 어차피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스승이기도 합니다. 이 배우고 가르치는 이른바 사제의 연쇄를 더듬어 확인하는 일이 곧 자신을 정확하게 통찰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중학교 때든가 나는 이곳 얼음골에 아버님을 따라온 적이 있습니다. 여든일곱에 440여 쪽의 책을 출간하시고 여든여덟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이 생각납니다. 아버님은 그 책에서 사람은 그 부모를 닮기보다 그 시대를 더 많이 닮는다고 하였지만 내가 고향에 돌아와 맨 처음 느낀 것은 사람은 먼저 그 산천을 닮는다는 발견이었습니다.” - 14쪽, 얼음골 스승과 허준 중반부


밀양 얼음골에서 국토 기행을 시작했다. 자신의 옥바라지에 인생을 바친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여의고 심경이 복잡했던 터라 고향의 산기슭을 먼저 찾았던 것이다. 스승 유의태와 제자 허준의 비장한 해부 이야기를 통해 한 사람의 성장을 위해 바쳐진 수많은 사람의 애정과 헌신을 통찰한 첫 번째 엽서를 띄웠다. 글을 쓰기 위해 떠난 여행은 결코 편하지 않았지만 머리로만 생각하던 현장을 직접 밟아본다는 것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때때로 생각이 달라지기도 했고, 머리보다는 발이 더 잘 알고 있음을 실감했으며 교감도 깊어졌다.

석양의 북한강에서 무감어수 감어인(無鑒於水 鑒於人)을, 섬진강 나루에서 진선진미(盡善盡美)를, 강릉 단오제를 다녀오던 비행기에 안에서 우리 삶의 원형을, 무등산에 올라 자유의 최고치 평등을 이야기한다. 팔공산 백흥암에서 소이부답하던 비구니 스님을 통해 사찰의 막강한 소유 구조 위에 서있는 무소유의 역설과 종교계에도 만연한 여성 지위의 한계를 발견하고, 꿈꾸는 백마강에서 반쪽짜리 통일의 아쉬움과 신라가 왜곡한 삼천궁녀를 역사가, 이천의 도자기 가마에서 인생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훈도해 줄 가마에 대한 생각이 차곡차곡 엽서로 쌓였다.

[안중찬의 書三讀]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8211; 산따라 강따라 떠나는 당신으로부터의 사색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돼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 29쪽, 소광리 소나무숲 종반부


울진 소광리 소나무숲에서 띄운 나무들의 연대에 관한 우화의 엽서는 이 책의 제목 ‘나무야 나무야’를 만들어낸 근원적인 이야기다. 200년 300년 더러는 500년의 풍상을 겪은 태백산맥 깊은 소나무숲에서 나무와 나무의 연대로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는 선생의 핵심 철학을 그대로 끌어안은 현장답사였다. 경복궁 복원을 위해 생각 없이 잘려나간 당시 소나무의 비참함은 최근 평창 동계올림픽 스키장으로 활용되느라 황폐화된 가리왕산의 아픔과 같다. 권력에 짓밟힌 민초들의 애환을 향한 가슴시린 은유가 희망의 언어가 여전히 유효한 세상이 안타깝다.

당신의 좌절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지월리로 오시기 바랍니다. 어린 남매의 무덤 앞에 냉수 떠놓고 소지 올려 넋을 부르며 “밤마다 사이좋게 손잡고 놀아라”고 당부하던 허초희의 음성이 시비에 각인되어 있습니다.(34) 나는 당신이 제주에 오기를 바랍니다. 일출봉에 오르는 대신 차라리 한라산 기슭의 억새꽃 속에 서서 한라산의 넉넉한 품속에 안기기를 바랍니다.(59) 나는 당신이 언젠가 이 산성에 오르기를 바랍니다. 남한강 푸른 물굽이가 천년 세월을 변함없이 감돌아 흐르는 이 산성에서 평강공주와 만나기를 바랍니다.(83)

이 책이 따뜻한 것은 수많은 당신들 때문이다. 시골 어딘가 잡초 무성한 폐교와 도시 어딘가 억척스러운 여인을 발견하는 버스 안에서 절절하게 떠오르는 당신도 있다. 당신은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이자 역사 속에 사라져간 인물, 때때로 특별한 사연일 수도 있지만 해석은 모두 읽는 이의 몫이다. 선생은 덕분에 글쓰기가 편리했노라 고백했고, 독자들도 더 깊은 몰입과 교감에 빠져 들었다. 많은 엽서들은 결론이 없는 숙제로 이어지고, 수많은 당신들은 그 해답을 찾아, 선생의 흔적을 따라 가는 것이 이 책의 생명력이다.


”나는 당신이 언젠가 이곳에 서서 강물의 끝과 바다의 시작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이 받은 색종이에 담긴 바다의 이야기를 읽어주기 바랍니다. 그동안 우리 국토와 역사의 뒤안길을 걸어왔던 나의 작은 발길도 생각하면 바다로 향하는 강물의 여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마지막 엽서를 당신이 내게 띄울 몫으로 이곳에 남겨두고 떠납니다. 강물이 바다에게 띄우는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 158쪽, 철산리의 강과 바다 종반부

[안중찬의 書三讀]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8211; 산따라 강따라 떠나는 당신으로부터의 사색

선생은 강화도의 북동쪽 철산리에서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자유(自由) 그 자체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고, 반대쪽 하일리의 일몰에서는 내일의 일출을 기대하는 희망을 강조했다. 뻘에 번지는 낙조가 아름다운 그 섬에서 선생과 함께 했던 날들을 추억한다. 철산리의 여운과 함께 때때로 서울에서 멀지 않은 강화도 하일리 바닷가를 찾는 것은 그리움 때문이다. 이제는 바다 건너 석모도까지 다리가 연결되어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하일리에는 하일리만의 특별한 노을과 발자국이 있다.


“강화도의 서쪽 끝 하일리(霞日里)는 저녁노을 때문에 하일리입니다. 저녁노을은 하루의 끝을 알립니다. 그러나 하일리의 저녁노을에서는 하루의 끝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이 적 (赤)과 흑(黑)으로 확연히 나누어지는 산마루의 일몰과는 달리 노을로 물든 바다의 일몰에서는 저 해가 내일 아침 다시 동해로 솟아오르리라는 일출의 예언을 듣기 때문입니다.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선생이 당쟁이 격화되던 숙종 말년 표연히 서울을 떠나 진강산 남쪽 기슭 이곳 하일리에 자리 잡은 까닭을 알 것 같았습니다. 이곳 하일리에서는 오늘 저녁의 일몰에서 내일 아침의 일출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48쪽, 하일리의 저녁노을 도입부


지금이야 서울에서 한 시간여 거리에 불과하지만 300년 전 하곡이 서울을 등지고 도착하던 시절에는 이틀쯤 걸리던 곳이다. 당시 조선에 만연했던 이기론(理氣論)에 입각한 주자학 일색의 허학과 파당에 실망한 지행합일의 양명학자가 다시는 서울을 찾지 않겠다는 각오로 찾아온 하일리였다.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며 이광사, 이긍익, 신작, 이건창을 길러낸 강화학파의 산실인 것이다. 선생이 그곳을 찾는 것은 위당의 제자였던 노촌 이구영을 옥중에서 만나 스승으로 모신 까닭이었음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영재 이건창의 생가 마루에 앉아 올려다 본 명미당(明美堂) 현판에서 일제의 치욕에 맞서 통분의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의 낙관을 발견했다. 내륙에 자리한 그곳 생가 바로 옆에는 병인양요 때 자결한 영재의 조부 이시원의 산소가 있으며, 다시 바닷가 하일리로 향하는 길목에서 하곡의 산소와 영재의 산소를 둘러보는 여행은 세파와 자본에 오염된 아쉬움이 있을지언정 여전히 평온하다. 조선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등의 뿌리도 그곳에 있다는 선생의 말씀으로 복기하며 서여 민영규의 ‘떨리는 지남철’을 생각했다.

[안중찬의 書三讀]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8211; 산따라 강따라 떠나는 당신으로부터의 사색

“파주에서 서쪽으로 시오리 임진강가에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습니다. 세종조의 명상이며 청백리의 귀감인 방촌 황희 정승의 정자입니다. 18년간의 영상직을 치사하고 90세의 천수를 다할 때까지 이름 그대로 갈매기를 벗하며 그의 노년을 보낸 곳입니다. 당신은 아마 비슷한 이름의 정자를 기억할 것입니다. 서울 강남의 압구정(狎鷗亭)이 그것입니다. 압구정은 세조의 모신이던 한명회가 그의 호를 따 지은 정자입니다. 반구정의 ’반‘(伴)과 압구정의 ’압‘(狎)은 글자는 비록 다르지만 둘 다 ’벗한다‘는 뜻입니다.” - 19쪽, 반구정과 압구정 도입부


반구정에서 임진강 너머 북녘 땅을 바라보며 압구정과의 비교를 통해 피라미드 해체의 정신으로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조직해내고 키울 수 있다는 성찰의 엽서가 뜨겁다. 홍류동 계곡에 몸을 던졌다는 신라의 개혁정치인 고운 최치원을 찾아 해인사 입구의 그리 높지 않은 석벽에 직접 새긴 1110년 전의 시가 목은, 점필재, 매월당, 만해로 계보를 이었다. 너른 마당 만해(萬海)의 시비와 대비되는 일해(日海)의 극락보전 편액 글씨를 통해 진리는 간 데 없고 색만 어지러운 세상 이야기로 백담사가 부끄러웠다.

한낱 어린이에 지나지 않았던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에서 보낸 엽서는 역사관도 따뜻한 지역의 정서를 담았다.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간다는 진리의 엽서로 온달산성 어딘가에 살아 숨 쉬는 평강공주를 불러냈다. 광화문의 동상 속에는 없는 충무공을 한산도 곳곳에서 발견하며 얼마나 많은 우상들이 현대인들을 지배하는가를 날카롭게 성찰했다. 지월리 허난설헌의 무덤에는 봉건미덕의 상징 신사임당과 대척점에서 진짜 여성들이 겪은 차별과 억압의 아픔이 무엇인가를 고뇌하게 한다.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덕천강가 산천재(山天齋)를 찾아 남명 조식을 만난 뒤 진정한 재야정신을 되새겼다. 모악산 미완의 미륵 앞에서 주역의 마지막 64괘 미제(未濟)에 담긴 물을 건너던 어린 여우의 꼬리가 젖는 실수의 깨달음도 얻었다. 성산 일출봉에 올라 구름에 잠긴 아침 해를 바라보며 기쁨과 아픔, 환희와 비탄을 같은 창문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풍경임을 들려주며 빛은 어둠을 만들고 어둠은 빛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그렇게 실패로 끝나는 일출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당신과 나의 몫으로 이월되기 때문이다.

[안중찬의 書三讀]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8211; 산따라 강따라 떠나는 당신으로부터의 사색

가벼운 한 권에 담긴 무거운 생각 속으로 몰입했다. 붓글씨의 대가인 선생이 노트북에 설치된 페인터 SW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한 그림이 일품이다. 반신반의했던 선생의 국토 기행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중앙일보 사장은 ‘새로운 세기를 찾아서’라는 주제의 세계 기행도 허락했다. 선생은 매번 단수여권으로 출국하고, 당국에 신고하고, 한 곳을 다녀오면 다음 여권 만들기에 바쁜 가석방자만의 특별한 여정을 소화했다. 차원이 다른 여행자를 바라보는 독자들의 시선도 새롭게 출범한 민주정부의 마음이 움직였다. 사면복권. 선생은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다.

욕심을 부릴 것이 아니라, 욕심을 버릴 것을 그랬나? 선생의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안 읽은 것 같은 상황이 묘하다.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느낌과 깨달음을 주는 절제된 문장이 특별한 까닭이다. 장래희망이 여행인 현대인들에게 신영복 선생의 여행 3부작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변방을 찾아서>는 영원히 덮을 수 없는 축복의 안내서가 될 것이다. 어디에 있더라도, 누구와 있더라도 문득문득 들려오는 따뜻한 목소리와 문장들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이 책은 속 깊은 당신에게 손짓하는 이 땅의 초대장이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출판기획자로 ‘더불어민주당’+‘the민주’ 당명을 만들고 제안했다. 컴퓨터그래픽 및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며,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발행일시 : 2018-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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