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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非근대를 조직하다

- 신영복의 관계론과 인간적 삶의 조직 -


성공회대학교 시민사회단체학과 강수진 석사학위논문(2013)

 


 

Ⅰ. 서론

1. 들어가며


문제의식 : 오늘날의 근대적 삶은 비인간적이다. 인간적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모든 사회관계의 끊임없는 교란, 항구적인 불안과 동요가 부르주아 시대를 그 이전의 모든 시대와 구별해 준다. 고정된 것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모든 신성한 것들은 모욕당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마침내 자기의 생활 상태와 상호관계를 냉정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1)


  오늘 어느 신문 칼럼의 한 문장이라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끊임없는 혁신, 항구적인 불안과 동요, 새로 생겨나는 모든 것조차 미처 자리 잡기 전에 이미 낡은 것이 되고 마는’ 가속화, 고정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급속한 해체 등은 근대성의 역사적 경험(이기홍, 2010: 49)인 동시에 오늘의 모습이기도 하다. 오히려 마르크스(Karl Marx)의 목소리는 더욱 선명히 파장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이런 근대성의 특징들은 불안정성, 불평등성, 지속불가능성의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의 모습으로 진화되어 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실업에 대한 보편적 두려움, 전문인 양성을 지향하는 교육, 소비로의 대리만족, 경쟁으로서의 가치매김, 속도와 효율우선주의 등으로 근대적 원리는 일상의 공간과 시간의 내부로 깊숙이 들여져 있다. 또한 이것은 IMF, FTA, 금융위기, 20대80을 넘어서 이제 1대99의 극빈부차의 모습으로 그 특성을 돌출시키고 있다. 인간을 기능적인 노동력으로 유도하고 소모하는 ‘자본주의의 인간상’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일상에서 인간적 자존감과 여유로움은 오히려 낯선 단어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자본주의는 개인과 가족, 사회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수성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 뿐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기초적 생존의 조건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하고 삼중 사중으로 소외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인간적인 삶인가? 왜 우리는 다수가 행복하지 못하고 자연스럽지 못한 삶을 지속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위기 속에서 위험을 인지한 경험들은 삶의 근거나 동기를 다시 찾기 위해 본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상태와 서로간의 관계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때임을 자각하게 한다.


글의 시각 : 신영복의 관계론은 인간적 삶을 위한 인식론적,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신영복은 우리가 서 있는 “현재의 시점은 근대사회 이후에 세계의 다양한 사고와 정서를 단색적으로 도장해온 ‘존재론’에 관한 근본적인 반성의 시점이고, 동시에 이러한 반성을 기초로 한 관계론에 대한 각성의 시점”(신영복, 1998c)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이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이 필요하고 이에 대응하는 보다 나은, 인간적인 삶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우리가 고민하여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동양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모습에 풍부하게 내장되어 있는 관계론적 가치관,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적인 삶의 모습들을 드러낼 시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글의 시각은 자본주의를 근대성으로 보고 이로 인해 피폐해진 오늘날의 우리의 삶은 이것의 비판적 성찰과 반성의 지반위에서 ‘인간적 삶’으로 방향성을 잡아야 한다는 신영복의 관점에 대한 공감을 전제한다. 또한 이를 내포하고 있는 신영복의 담론인 관계론이 인간적 삶을 위한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신영복의 담론인 관계론을 어느 하나의 정의로 마름하기에는 어렵다. 관계론은 신영복이 감옥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야기하고 있는 담론의 이름이다. 그의 관계론은 상태를 설명하기도 하지만, 삶, 세계관, 혹은 인식론이나 실천론으로 불려 질수도 있다. 목수의 그림을 통해 관념적 지식의 정체와 마주하기도 하고, 콜럼버스의 달걀을 통해 오늘날의 동서양의 문명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그 전화의 방향성에 대하여 통찰적으로 접근하고 있기도 하다. 이글은 관계론을 사회사상의 측면에서 바라보면서 우리가 지어갈 사회, 인간적 삶을 위한 방법론으로 읽어내려는 입장이다.


글의 범위 : 사회사상으로 본 신영복의 관계론에서 非근대2)의 요건들을 조직한다.


  그러하기에 글의 내용은 신영복의 관계론에서 非근대의 요건들을 엮어내는 것에 그 중심이 있다. 고로 이 글은 신영복의 관계론을 전체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인간적인 삶과 사회를 꾸려갈 수 있는 실천적 방법론을 엮어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확인 작업이다. 다시 말해서 관계론을 대변하지도 않으며 신영복의 관계론이 조직론이라고 아울러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글이 신영복의 관계론에 대한 전체적 의미나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충분한 평가가 결코 될 수 없음을 미리 밝혀두며, 다양한 재구성의 가능성 역시 열려있음을 환기시켜 둘 필요가 있다.

  서론에서 다루는 근대와 본론의 사상, 자유, 주체역량, 연대, 변방 등의 논의되는 범위는 관계론의 범위와 그것의 이해를 위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영복의 각 의미들은 非근대를 조직해내는데 있어 그들의 자리를 찾아갈 것이며 그 자리에서 각각의 의미들은 새로운 역할을 얻을 것이다. 이들의 관계와 영향은 서로에게 ‘非근대’ 적 변화를 이끌어 낼 것임을 이글에서는 가설하고 있다. 즉 非근대적인 삶, 인간적인 삶을 조직하는 결로 이 글은 엮어질 것이다. 관계론이 인간적 삶을 조직함을 확인하는 작업은 담론의 성격 및 유의미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글의 짜임 : 非근대에 필요한 요건들을 신영복의 관계론에서 추출하여 재구성한다.


  ‘블록놀이’가 연상되어지는 방식으로, 인간적인 삶을 조직함에 있어 필요한 요건들을 관계론에서 추출하여 재구성한다. 하나의 블록은 블록을 쌓는 이의 상상에 따라 집의 지붕이 되기도 하고 자동차의 몸체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세계를 완성시킨다. 이렇듯 이 글은 신영복 관계론의 문장과 단락의 부분들이 非근대의 요건으로 그대로 옮겨와 자리한다. 그리고 그 뜻과 표현은 실천적 조직의 역할로서 보존되어진다.

  짜임의 방식이 이러한 이유는 글의 시각과 범위에서 조건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문학적인 글의 형식과 내용으로 담겨진 그의 담론을 해체하거나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이글의 성격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담론이란 장(場)에서 인간적 삶을 조직하기 위한 요건의 블록들을 모아 非근대라는 세계의 가능성들을 형성하는 것이기에, 그의 목소리를 살리는 것이 글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적합한 방법이겠다.


글의 순서


  서론의 첫 부분은 근대적 삶에 대한 기본적인 지적으로, 신영복이 말하는 근대는 무엇인지에 대한 배경적 서술과 그것의 모순을 기준으로 하여 대비되는 非근대에 대한 개념적 설명이다. 본론에서는 본격적으로 신영복 담론인 관계론을 그의 사회사상으로 보고 이에 그가 일컫는 사상이란 것을 정리한다. 관계론의 지반이 된 신영복의 삶과 마르크스와의 대응점들, 그리고 동양사상에서 영향 받은 부분들을 정리해 본다. 그 다음으로는 관계론이 非근대를 조직하는데 있어, 그 요건들을 내포하고 있음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즉 非근대의 출발선과 그 방향성으로, 신영복이 말하고 있는 자유와 성찰, 그리고 인간의 이해라는 중심적인 의미에 대하여 살핀다. 이를 바탕으로 非근대를 조직하는 구체적 내용에 접근한다. 이것은 주체적 역량에 대한 이야기이며 연대와 변방의 설명이다. 본론으로 다룬 것들을 인간적 삶을 조직하는 것으로서 정리하고, 관계론의 유의미성을 오늘에 자리매김하는 것을 결론으로 한다.



2. 선행연구들과 대비하여


  신영복에 관한 선행연구로는 그의 서예관에 대한 김은숙과 김성장의 글이 있다. 전자는 다소 단편적인 시각이긴 하나, 신영복에 대한 학문적 접근의 첫발을 내디딘 점에 의의가 있겠다. 「신영복의 삶과 서예관에 관한 연구」(김은숙, 2004)라는 김은숙의 연구는 신영복의 서예관이 형성된 과정을 살피면서 그의 서예정신이 그 삶과 통일되어 있음에 주목하였다. 김성장은 「신영복 한글 서예의 사회성 연구」(김성장, 2007)를 통해 신영복의 서예 중 한글 서예의 내용과 형식 미학에 있어 시대의 저항 정신과 민중적 감수성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분석하였다. 특히 신영복의 서예는 동양고전의 사상이 이론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과 사회변혁의 감수성을 서예의 형식으로 발전시킨 점을 신영복 한글 서체의 특징으로 보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부분은 ‘신영복의 서예에 대한 평가(김성장, 2007: 50-57)’에 대한 것인데, 대체로 기존 서단 내에서가 아니라 서단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지적하며, 서단이 신영복에 대한 거론을 기피하는 이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눈에 띈다. 서예 평론가 정충락의 인터뷰를 통해 그것이 ‘사대주의적 관점이며, 서단에 우리 글씨가 없는 것 또한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모순된 현실을 김성장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비단 서단의 경우만이 아니라 우리 학계의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3) 결론에서 김성장은 신영복의 남다른 이력과 학문적 깊이가 서품과 인품의 일치로 녹아져 있으며, 그것이 토착성과 예술성, 시대성과 대중성이란 특징을 가진 신영복 서예의 독특한 미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역시 서예뿐만 아니라 신영복의 전반적인 학풍 및 삶의 성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에 사회학이나 인문학, 혹은 서예 같은 특성 분야로 그를 담아내기에는 그 일면적 한계를 담보해야 한다.


  한편 이들의 연구는 모두 신영복 서예관의 원천인 그의 담론, 관계론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거나 서예관의 형성과정으로서 간단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글에서는 신영복의 관계론을 사회사상적인 범위에서 정리해보고 거기에서도 인간적 삶을 조직할 수 있다는 방법론적 확인 작업을 할 것이다. 그 방법론은 인식과 실천이 받침 되고 서로 조응함으로써, 그 시대성과 보편성, 그리고 대중성 및 예술성을 모두 품고 있음을 부차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이것은 그의 담론의 태생과 주체(정체성) 그리고 성격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에 신영복의 삶과 사상이 응축되어진 관계론에 대하여 보다 세심하게 들여다볼 필요성이 전제된다. 이런 이유로 관계론의 지반적인 내용이 더 충실하게 채워질 것이고, 그것의 사상적 맥락을 드러내는 것과, 인간적 삶을 조직하는 실천적 구성틀로 그의 담론이 어떻게 재구성되어 쌓여지는지를 보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앞선 논문들과 더불어 학문적 영역에서의 상보적인 역할을 할 것이며, 더 나아가 실천적 영역에서 또한 신영복의 담론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를 발전시키는 데 일조하길 기대한다.



1. 근대


1) 근대


  (1) 근대의 역사


  신영복의 관계론에서 논해지는 근대의 범위와 성격을 알아보는 것에 앞서 일반적인 근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근대는 서양의 역사를 중심으로 중세와의 대비 속에서 정의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근대의 성격들을 형성하게 된 중세에 대하여 먼저 간단히 살펴보고 이것의 반동으로 생긴 근대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중세의 세계관은 신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져 있었으며 따라서 신의 말씀을 연구하는 신학이 모든 학문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에 존재란 신의 창조물이며, 신의 말씀이 진리였다. 이에 인식이란 그 말씀에 도달하는 것과 동일했다. 이런 점에서 중세는 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 봉건영주가 지배하였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는 신과 성직자들이 지배하던 시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종교적인 삶의 기준으로써 오히려 사람을 저버리는 결과를 낳은 천 년 간의 중세는 14-16세기를 거치는 르네상스를 통해 다시금 잃어버린 사람을 찾자는 흐름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의 시대에는 특히 새로운 실험정신의 활발한 모습들을 볼 수 있고, 과학혁명이라 불리는 이 실험정신은 수많은 중요한 발명과 발견을 이루어내기도 한다. 한편 중세의 종교관이 무너지고 타 민족과의 교류가 이뤄지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다시 철학의 핵심문제가 된다. 이에 신의 성에 갇혀 있던 중세시대의 피폐해진 사람들의 인간적인 삶의 욕구는 신의 절대적 진리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근대를 잉태하게 된다. 중세를 넘어서는 이런 시대적 상황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기술의 혁신적인 발달로 더욱 급속한 변화에 놓이게 되는데, 개인의식의 성립과 과학의 발달, 교역의 확대로 인한 도시의 성장과 경제구조의 변화 등으로 본격적인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모습들은 근대의 성격을 말해주는 중요한 부분들이라 하겠다. 이런 서양의 역사성을 내장하고 있는 근대성(modernity)은 오늘날 어떤 시기를 지칭하는 연대기적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특징을 지시하는 개념으로 정의되어지고 있다.

  근대를 보기위하여 중세에 대한 범주를 매우 한정적으로 대비시켰지만, 그것이 중세의 진실을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사용된 현대와 고대의 중간이라는 중세라는 이름 자체가 의미하듯, 중세에 대한 폄하된 부분에 대한 지적(Gutberlet, 2008: 81-86)4)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기원 후 500년부터 1500년 사이의 천 년이 단지 극복되고 넘어야 하는 어둠의 시기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에 대한 오늘날의 과분한 관심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중세 시대에서 물려받은 미덕과 장점은 의외로 쉽게 잊혀져있는 듯하다. 중세 역시 우리가 근대적 시각에서 벗어난, 다양한 입장과 관계론적 관점으로 재조명해야할 역사일 것이다.


  (2) 근대의 특징과 그 주체


  서양에서 출발한 근대성은 자유와 규율에 관한 이중적 사고를 전제로 한다(김진균·정근식, 2000: 20). 근대성 담론은 초기에는 자연적 질서에 대한 과학적 추구, 정치적 혁명에서의 자기결정, 경제적 행위에서의 자유로 이어지며, 이를 보증하기 위한 것이 근대적 제도들에 관한 것들이었으나 이후 이런 제도들이 갖는 속박의 측면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그 모순들이 담론화 된다. 여기에서는 후자의 측면에서 근대성을 논하는데, 특히 근대성이라는 범주를 자본주의라는 모습에 두는 것은 이글의 문제의식에 그 준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시각은 다양하다. 마르크스처럼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초점을 둔 시각도 있으며 버만(Marshall Berman)5)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에 그 무게를 더하는 해석도 있다. 신영복이 말하고 있는 근대는 그것의 특성으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해 주목할 뿐 아니라 그 특성들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비인간적 삶에 대한 유력한 혐의자로서 위치하고 있다. 그의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은 발전보다는 모순에 그 중심을 둔 마르크스에 가까운 정치 경제학적 입장인 동시에 비판적 사회철학을 내포한 문명론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는 마르크스가 포착한 근대성의 특징으로 대신하여 읽어내도 무방하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과 그것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형성된 종류의 문명으로 이해된다. 그는 부가 생산되는 바로 그 관계들 속에서 빈곤이 생산되고, 생산력의 발전이 일어나는 바로 그 관계들 속에서 억압을 생산하는 힘이 존재하는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성격(이기홍, 2010: 17)을 거침없이 파헤친다. 마르크스는 자본축적이나 시장을 통한 상품형태의 끝없는 확장으로부터 낡은 사회를 전면적으로 해체하는 ‘생산의 지속적인 혁명화, 부단한 혼란, 영속적인 불안과 동요’를 근대성의 특징으로 포착해 낸다. 이런 불안정성은 과거는 물론이거니와 새로 생겨나는 것조차 미처 자리 잡기 전에 이미 낡은 것이 되고 마는 경쟁과 해체의 가속화를 촉진하고, 그로 인해 현재와 미래를 불안과 미지의 시간으로 경험하게 한다. 이렇게 150년 전의 마르크스가 이야기 하는 자본주의는 오늘날 신영복의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근대의 시간성은 중세 이후 현재를 포함하는 진행형일 뿐 아니라 경제 및 정치, 정신문화적인 영역까지 포괄하고 있는 공간성을 가지고 있다.


  근대의 특징, 근대성은 그것의 주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과 그것이 전세계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형성된 문명의 주체에 대한 이야기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가와 작업을 자기목적인 양 여기는 노동자, 근대의 주체는 마르크스가 지목한 자본가와 노동자이다. 그러나 이들은 상반된 위치와 모습을 지닌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성 중심주의와 과학주의로 새로운 사고방식이 계몽주의라는 정치적 운동6) 속에서 펼쳐지고, 합리적 인간의 이상, 발전에 대한 낙관, 과학적 진리에 대한 신념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자유와 평등은 모순적으로 관계 지어진 이들의 근대적 삶의 양식 속에서 만들어 진다.

  근대의 주체 형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자료는 매우 구체적이고 통시적이다. 특히 그는 『자본론』Ⅰ권에서 새로운 인간의 생산을 위한 봉건적 집단들의 해체와 폭력적 토지수탈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에 대한 유혈적 입법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7) 푸코(Michel Foucault) 역시 『광기의 역사』(Foucault, 1991: 41-290)에서 17세기와 18세기 사이에 유럽에 불어 닥친 대감금의 열풍8)을 통하여 비이성적 행동은 비생산성으로 가치화 되어졌음을 추론한다. 인간을 가르는 기준은 한편으로는 노동력 보유의 여부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 규율의 습득 정도였고, 정상적 인간상은 노동하는 인간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근대 권력은 새로운 정상인을 효과적으로 재생산하기 위한 섬세한 장치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처벌하고 감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근대적 인간의 모습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말하고 있다. 근대적 인간을 위해서는, 개개인들이 규율9)에 복종할 수 있도록 분리된 공간에서 일과 시간표에 따라 훈련되어지고, 개개인의 힘과 능력을 권력의 목표에 부합할 수 있도록 일사불란하게 만들어야 함을 서술하고 있다. 사회적 인식으로서의 윤리와 규범, 벤덤(Jeremy Bentham)의 판옵티콘(Panopticon) 체계 등은 규율의 다른 모습들이다. 이를 통해 복종하면 할수록 더욱 유용해지는 인간형, 감시가 내면화된 인간, 스스로의 습관에 의해 복종하는 인간으로서의 개인, 그렇게 근대인은 제조된다. 결국 신과 절대 권력의 통제가 사라진 근대라는 권력의 배치 안에서 구성된, 지배를 내면화한 인간이 근대의 주체로 생산 되었다(Foucault, 1994).10) 

 

    (3) 우리의 식민지적 근대성

   

  그렇다면 우리의 근대는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국 사회의 식민지 경험이라는 변수와 맞물리면서 다양해진다.11) 식민지성과 근대성을 배타적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그에 대한 문제제기 또는 상호 병립의 가능성에 대한 재해석이 그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대부분12)은 근대성 자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 근대화를 결국 성취되어야 할 과제로 파악하고, 자본주의 발전의 보편적 경로에 주목한다(김진균·정근식, 2000: 18). 이에 반하여, 이글에서는 서구 자본주의의 부(富)는 주변부 사회에 대한 약탈의 결과라고 규정하는(Wallerstein, 1985: 35). 월러스타인(Immanuel Wallerstein)의 관점13)에 유의미성을 둔다. 서양의 근대화는 그 내재적 계기14)로서 비서양 사회에 대한 식민지화를 요구하였고, 이 배제와 통합적 힘의 현실화는 식민지 내부의 또 다른 힘과 만나면서 표출되었다. 바로 여기서 식민지의 엘리트 혹은 지식인들을 주목하게 된다. 김동춘이 보고 있는 한국의 근대모습은 이런 맥락에서 읽혀진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정치, 경제 질서, 냉전과 분단으로 연결된 지난 100여 년의 역사는.... 지배 엘리트들이나 지식인들이 전통을 위로부터 제거한 과정이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김동춘, 2000: 235-236).”

 

  자신을 문명화하지 못한 집단으로 인식하게 된 식민지의 엘리트들은 ‘근대적 발전’에 대한 열망 속에서 저항과 순응의 양식으로 서구를 이상화된 대상으로 전화 시킨다. 이렇게 근대성의 특징적 힘들이 식민지 속의 힘들과 조우하면서 식민지적 근대를 만들고, 그것은 다시 근대성 자체를 강화해 나갔다. 그리하여 ‘식민지가 근대의 실험장’이 된다(강상중, 1997: 15 재인용). 

  효과적인 식민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식민지인’이 존재해야 했다. 일제가 가져온 근대적 질서에 적응할 수 있는 근대인으로서 개조할 필요가 있었다. 보통학교 체제의 확립을 통한 근대규율의 내면화와 1930년대에 진행된 공업화 과정은 노동자계급을 창출하였다(조형근, 2010). 전통적 가족 질서, 신앙 체계, 의료 체계가 붕괴된 곳에서 새로운 지식을 접하고 새로운 습관을 익힘으로써 새로운 질서에 적합해진 인간들이 생산되고 있었다.15) 동시에 이미 조선 후기부터 존재했던 자생적인 근대 지향성, 문명·개화의 논리로 한국인들 자신에 의한 근대적 주체의 형성도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들 양자는 근대성의 정당성 자체를 의문시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근대성은 오랫동안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극복의 대상이다.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으로서 그것은 미래의 기획으로서가 아니라 비판적으로 성찰되고 인식해야 할 것으로 현재적이다.

2) 근대의 세계관, 존재론


  근대와 근대적 주체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들을 잉태한 서양의 사고방식 혹은 세계관은 어떤 것일까? 신영복에 따르면 근대성의 특유한 사고방식은 세계를 존재들의 집합으로 인식하고, 모든 존재와 존재들 간의 관계가 경쟁적이며 각자의 존재성을 배타적으로 키워가려는 운동을 한다고 본다. 이를 그는 존재론적 세계관이라 부른다. 존재론에 대한 탐구는 서양의 철학사를 열어보는 것과 다름없다. 근대철학의 색인을 찾아 들어가 보자면,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라는 의미의 코기토(cogito)에 대해 말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는 ‘나’라는 존재를 신의 피조물로 본 중세적인 관점과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것으로써 중세와 근대의 경계선은 바로 인간에 대한 관점의 전환인 것이다. 중세의 인간은 신의 창조물로서 신의 말씀이 곧 진리(확실한 지식)이고 이를 따라야 하는 수동적인 주체다. 반면 데카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 ‘나’라는 자아가 자신의 능력으로써 확실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며,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이 능력이 인간 자신에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자연에 대한 지식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즉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나는 신으로부터의 독립 된 주체로서 ‘중세를 벗어나는 사고’인 것이다. 따라서 ‘주체’라는 범주는 근대철학에서 가장 중심적이며 근본적인 범주이다. ‘주체’없는 근대철학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주체라는 말에는 언제나 ‘객체’ 혹은 ‘대상’이라는 짝이 따라 다닌다. 왜냐하면 내가 ‘사고하는 주체’라면, 이 주체가 사고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근대철학의 출발점인 주체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피조물인 자연세계로부터 인간이 분리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럼으로써 이후의 근대철학으로선 진리, 즉 주체가 대상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가 된다. 진리야말로 주체에서 출발한 근대철학이 어떻게든 도달해야 할 목표였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라는 범주를 독립시키자마자 진리라는 범주가 중요하게 따라다니게 된다.

  요약하면 주체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요, 진리는 그 목표점이다(이진경, 2011: 44). 이 두 개의 범주는 근대철학 전체의 기초와 방향을 특징짓는 가장 근본적인 범주이다. 또한 이것은 근대철학의 모든 질문 자체가 그것에 매일 수밖에 없었고, 그에 대한 대답 역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지반이었던 것이다. 존재론은 근대의 모태이기도 하고 서양 철학16)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훑어본 것처럼 근대적 세계관은 한때 새로운 문명 건설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고 그것이 출현할 당시의 국면에서는 진보성을 담지 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세계관이 정착된 뒤로 보수화, 반동화한 것도 사실이다. 신영복의 관계론이 마주하는 존재론은 이렇게 고대와 중세를 지나 근대로 넘어오는 곳에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즉 고대의 자연과 나의 관계에 대한 고민, 혹은 중세의 신과 나의 관계에 대한 고민의 안에 있던 나라는 존재는 중세를 넘어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을 맞이하면서 자연과 신이라는 우물을 뛰쳐나와 ‘나의 확장’이라는 존재론적 방식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특히 ‘나의 확장’은 자본주의 시대인 근대사회의 세계관으로서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들 간의 관계방식이다. 즉 존재론적 세계에서는 모든 존재와 존재들 간의 관계가 경쟁적이며 각자의 존재성을 배타적으로 키워가려는 운동을 말한다(신영복, 2002). 이러한 존재론적 논리는 자본축적 과정에서 전형적으로 관철되고 있는데, 특히 신영복에게 있어 존재론은 자본주의 200년사를 철학적 패러다임으로 정리한 것으로서 더 나아가 근대성의 바탕이 되고 있는 철학적 사고의 구조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라 하겠다(신영복, 1999).



2. 근대의 모순


  신에 대한 인간의 반란은 빈곤의 생활을 풍요롭게도 하였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유나 평등 같은 가치들을 보편적 가치로 인식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경제적 면에서는 산업혁명이란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자본주의라는 구조를 강고히 하게 하였다. 자본주의는 보통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를 말하지만 오늘날은 경제체제 뿐만 아니라 정치 및 사회, 문화 등의 모든 영역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존재론적 패러다임을 의미한다.


1) 자본주의의 구조


  마르크스의 생산영역의 구조 분석을 바탕으로 하여 신영복은 생활영역의 구조적 변이를 설명한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이기에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사회이다. 즉 자본주의의 모든 것은 ‘상품’으로 존재한다(Marx, 2007a: 43)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품의 가치표현 형태는 역사적으로 등가물→일반적 등가물→화폐라는 발전과정을 거쳐 왔다17). 화폐가 출현하면서 상품사회의 문화와 의식구조는 상품구조로부터 화폐구조로 전환된다. 생산물뿐만 아니라 생산적 활동 그 자체에 대하여도 화폐가 권력을 행사한다. 쉽게 말하면 돈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그것을 얻고자 사람들은 아등바등 한다는 것이다. 점점 화폐의 세상이 되어가면서 화폐화 될 수 없는 생산물이 그랬던 것처럼 화폐화 되기 어려운 생산 활동은 점차 소멸 된다. 자신의 능력을 화폐화 할 수 없는 사람은 도태된다. 이제 생산능력보다는 생산물을 화폐화 하는 능력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자본주의사회가 상품사회라고 하는 것은 결국 화폐권력이 군림하는 사회라는 의미와 다름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역시 이러한 화폐권력을 기본 구조로 하고 있다. 근대사회의 기본구조는 초월적 권력을 갖는 화폐권력 구조와 다름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 상품과 화폐에 대한 인식을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신영복, 2009: 7)고 신영복은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최고의 상품인 화폐를 상품화하기에 이른다. 화폐는 자본이 되고 자본은 자기증식이 그 본질이다. 상품에서 화폐로, 화폐에서 자본으로, 그리고 자본으로부터 자본축적으로 나아가는 필연적 경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법칙적 인식인 것이다.


  신영복은 이런 자본주의의 구조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적 언어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놓는다. 특히 인간의 삶에 있어 자본주의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 구조가 일상적 의식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다.


  “상품과 화폐’18)는 우리를 맹목이 되게 하는 가장 상징적인 것이며, 이것은 일단 상대방을 묻지 않으며 못 보게 합니다. 자기가 만든 물건을 소비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소비하는 사람이 만든 사람을 만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과 인간이 단절되는 물신성이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입니다(신영복, 1998).”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이러한 불안정성, 특히 그 축적과정의 최고단계인 금융자본주의 구조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도 그 기본에 있어서는 존재론적인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개별적 존재가 서로 관계하기보다는 경쟁하고 승부하는 관계, 즉 다른 것들의 희생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신장해가는 존재론적인 구조와 운동 원리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유용한 물건이라도 안 팔리면 가치 없는 상품이다(Marx, 2007a: 106-165). 팔려고 하면 먼저 소유 또는 사유라는 개념이 있어야 한다.19) 상품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팔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것을 만들고 쓰는 사람의 인간적인 어떤 면모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적인 정체성이나 인간적 가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신영복, 2010). 그 예로 신영복은 미(美)에 대한 이야기를 든다. 미(美)라는 것이 아름다움인데, 그 어원은 앎이다. 그 반대어로는 ‘모름다움’이 된다. 그러나 상품미학에서는 이게 전도돼 있다. 이미 아는 것은 아름답지 않고, 모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에 대한 동경, 자기 것에 대한 역정, 비하의식, 상품미학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새로 나오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상품을 사람들이 사고팔기 위해서 오랜 기간 교환과 저축의 의식을 키워야 하고 사회적 구조가 만들어져야 하고 그 속에 사는 동안에 우리 스스로가 상품이 되고 인간적 정체성이 완전히 박탈되고 등신같이 돼 있고, 상품이 오히려 등가물에서 일반적 등가물(general eqivalent), 화폐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것은 상품으로서 잘 팔려야 하고, 그래서 학문도 학교도 잘 팔려야 하는 이런 결정적 구조 속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라는, 적나라한 현재의 모습을 그는 정곡으로 가리키고 있다.


2) 자본주의의 모순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은 경쟁이란 법칙으로 확대재생산 과정이며 이것이 자본주의 그 자체의 동력인 동시에 모순이 된다. 우리가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이런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하여 마르크스의 생산영역에 관한 연구내용을 바탕으로 한, 신영복의 요약을 두 가지로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축적은 노동을 소외시키고 노동계급을 궁핍화하는 과정이다(Marx. 1987: 54-68).20) 자본축적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한다. 이는 기계화로 나타나며 노동자의 수를 감소시킨다. 자본 축적은 이처럼 노동자가 항상적인 실업위험에 놓이게 된다. 노동자의 자율성은 줄고, 종합적인 노동능력도 잃게 된다. 그런데 자본축적이 노동을 소외시킨다는 사실에 있어서 가장 역설적인 것은 노동이 자본을 축적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축적의 주체가 그 축적의 결과로 소외된다는 사실이다. 즉 소외구조를 재생산한다는 것인데, 자본축적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재생산한다는 사실이다. 자본축적과정은 풍요의 과정으로 인식되나 내면에 있어서 노동자계급의 ‘궁핍화’과정이 아닐 수 없다. 궁핍화의 의미는 물질적 소비수준이 낮아진다는 개념이 아니라 종속화의 의미이다. 노동의 지위가 열악해지고 노동의 자율성이 침해된다는 의미이다. 세계적인 실업문제, 비정규직의 양산과 취업자의 불안은 물론이며, 국제경제의 수탈적 구조와 빈곤층의 광범위한 확대현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욕망을 양산하고 경쟁을 유발시키는 근대사회의 속성으로서,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둘째, 자본축적은 불균형의 누적과정, 이윤율저하의 과정21)이며 공고((Marx, 1990a: 251-309)와 독점화((Marx. 1990a; 1990b: 407-730)의 과정이기도 하고, 이것은 패권화의 과정으로 연결된다. 자본축적은 재생산과정22)이기 때문에 당연히 균형이 요구되고 가치에 있어서의 균형과 개별생산물의 종류와 양에 있어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자본축적과정은 무정부적일 수밖에 없으며, 원천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을 전제로 한다. 총자본량의 증대는 ‘더 많은 이윤량’과 ‘더 낮은 이윤율’을 동시에 만들어 낸다. 또한 소비 없는 생산이 가능하게 되고 균형이 깨지는 시점에서 불균형상태가 되는데, 이것의 누적인 공황은 자본축적과정의 독특한 중단과 혼란이다. 그것은 또한 생산부문간의 불균형과 생산-소비간의 불균형이 폭력적으로 조정되는 과정이며, 열위(劣位) 자본이 탈락하는 독점화의 과정이다. 이런 과정은 결국 해외로 그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게 되고 자본축적→독점→대외팽창이라는 필연적 과정을 밟게 된다. 독점자본의 대외팽창은 자본축적의 내재적 모순이 발현되는 과정이다. 그것은 제국주의이며 패권주의이고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식민지화, 세계화이다. 자본은 축적할 수밖에 없는, 자기증식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기에, 엄청난 생산력 증대를 가져왔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인간의 삶을 소외시킨다. 이런 모순은 정책적 대응에 의해 해결될 수 없는 것이며 같은 질서 내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해체에 의하여 해소되는 성질의 것이다. 여기서 신영복은 소외개념에 대하여 강조를 한다. 주체가 완전히 배제당하고 억압당하는 역설적 구조인 자본축적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우리가 근대사를 바라볼 수 있는(신영복, 2010)관점이 되기 때문이다.


  신영복은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모순뿐 아니라 그로인해 유발되는 현 사회의 모순들에 대하여 더욱 세심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우리가 일상적이고 표피적인 문제로 느끼는 자본주의적인 과잉생산을 포함하는 물질적 낭비에 대한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의 낭비, 관계의 파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적 낭비는 그래도 작은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낭비보다 더 심한 낭비가 바로 인간의 낭비입니다. 인간의 낭비, 쉽게 떠오르는 것이 실업과 최근에 당면 과제가 되고 있는 고용조정입니다. 부패보다도 더 심한 인간의 낭비, 인간성의 유린입니다. 자본주의체제가 양산해내는 가장 심각한 낭비는 인간의 낭비, 인간성의 완벽한 유린입니다. 이러한 낭비의 가장 심각한 형태가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입니다. 인간관계 자체가 변질되고 와해된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신영복, 1999).”


  그는 오늘날 우리가 다른 존재,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를 보지 못하는 존재론적 사고에 갇혀 있기에, 개인 간이든 회사와 회사 간이든 나라와 나라 간이든 비극적인 일들이 청산될 수 없다고(신영복, 1998b) 본다. 이런 객관적인 구조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전망을 하고 어떤 모색을 해야 할 것인가? 신영복은 우리들의 사고와 삶 그리고 사회구조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인식의 기초위에서 미래의 담론들을 ‘관계론’적 전망과 패러다임 위에서 새로이 건설해가야 한다(신영복, 1998b)고 이야기 하고 있다.



3. 非근대


1) 非근대23)


  “현재를 A라 한다면, 이 A가 갖고 있는, 우리시대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모순, 부조리, 갈등 이것을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실천적 노력, 그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를 A라 한다면 미래는 非A입니다. A가 아닌 것, A가 갖고 있는 이러저러한 모순 구조를 재구성한 것, 그게 바로 미래입니다. 미래는 현재와 다르지만 그것은 B, C, D가 아닌 非A입니다.”24)


  앞에서 논의했듯이, 근대의 범주를 자본주의로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전화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근대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이 내재되어 있는 현재이다. 그 현재가 A라면, ‘A는 근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는 현재인 A의 모순과 갈등이 해체되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해체’는 뚝딱 만들어지는 완성품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근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내가 내일의 아주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영복의 표현처럼 오늘 덮고 자는 이불 안에서 내일을 맞이하기 때문이다(신영복, 1990a). 삶은 변증적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며 축적되는 것이지 밖에서 오는 어떤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하기에 현재 A는 탈의처럼 한 번에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상관없는 B나 C같은 새로운 무엇으로 단번에 갈아입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는 非A, 즉 非근대다. 그것이 탈근대로 후인식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는 非근대’라고 말 할 수 있다.


  탈근대는 근대의 비판으로 시작된 하나의 흐름이지만, 그 방향은 너무 다양하고 그 간극이 매우 크기 때문에 하나로 정의되기 어렵다.25) 혹자는 근대적 주체와 진리의 해체로 현재가 탈근대, 즉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해체 후는? 신영복은 미래에 대한 담론들이 목적론처럼 모델화 하여 제시되는 것에 강하게 경계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부터 정해놓는 것은 화(和)가 아닌 동(同)적인 존재론적 시각인 것이며, 어떻게 완성될지 모르는 다양한 발전과 열림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하나의 모습도 아니며 또한 일면적이거나 직선적인 어떤 것이 아닌, 변증적인 운동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 동시에 그 과정 자체이다. 그 과정은 모순을 기준으로 하여 해체되고 다시 재구성되어진다. 이것이 관계론적인 그의 관점이다. 그러하기에 현재를 근대적 사회로 보고 그로부터의 모순들과 갈등을 정확히 직시하는 것, 그 모순들과 갈등을 비판적 성찰을 통해 해체하는 과정이 그에게는 미래를 향한 실천의 출발인 동시에 그 미래를 이야기하는 서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 표로 정리해보면 단선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인식과 실천의 관계론적 성격들은 서로의 영역을 교집합하고 있으며 물론 그 영역들 역시 막혀 있지 않다.


<표 Ⅱ-1> 非근대의 위치 : 근대와 탈근대 사이

(관계론적 인식과 살천의 담론 형성표)

담론성격

인식

실천

인식

담론영역

근대

非근대

탈근대

담론내용

주체철학

이분법, 동일성

자본주의

과학주의

계몽주의

비인간주의

자유, 성찰, 인간이해, 연대, 변방 등의 요건들로 근대의 모순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천 및 인식

해체되고 있는

혹은 해체된 근대

그 이후


  非근대? 근대가 아니면 전근대인가, 그렇지도 않다면 탈근대라는 뜻인가? 근대라는 말 자체가 시기적인 구분이 포함되기에 전근대-근대-탈근대라는 계열을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표 Ⅱ-1>은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 非근대라는 새로운 공간이 자리 해 있다. 익숙한 담론적 영역에서 非근대의 위치를 설정해 보는 것은 그것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한다. 근대와 탈근대를 논하는 내용들은 인식론적 성격의 담론들이다. 주체나 대상, 진리 등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 관한 것으로 근대와 탈근대의 경계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非근대는 인식과 실천의 영역 모두를 내포하고 있다. 근대의 모순에 대한 반작용으로 탈근대가 꿈틀거리고 있다면, 그것은 인식의 영역에서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근대나 탈근대 모두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근대나 탈근대는 순식간에 변화할 수 없으며 인식의 전환만으로도 변화되지 않는다. 변화, 그것은 실천적 활동의 영역이다. 또한 미래를 포함하고 있는 현재이며 동시에 역동이다. 그러나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담론의 공간은 이를 주의 있게 관찰하지 않는다.


  신영복은 그 비어있는 공간을 인지한다. 근대에서 탈근대를 향하는 변화에 대한 그의 살핌은 인식의 영역뿐 아니라 실천의 영역 또한 포함하고 있다. 그가 非근대라는 영역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거나 탈근대와 따로 논의하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 非근대의 자리를 굳이 별개로 꺼내와 근대 및 탈근대와 나란히 놓은 이유는 그의 사상적 맥락에서 ‘실천’의 자리에 대한 주목의 효과이며, 관계론의 시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신영복의 담론에 어떻게 배여 있는지에 대한 들여다봄이다. 그의 사상은 뒤에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기에 여기서 결론적으로만 명시한다면, 인식의 원천인 실천에서 시작되어 실천에서 완성되어진다. 그래서 그 존재형식 또한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그러하기에 그의 탈근대는 인식론적 담론에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위의 ‘관계론적 인식과 실천의 담론 형성표’의 구성 원리다. 그의 담론에서 이야기되는 탈근대에 대한 지향점은 결코 인식론적 영역에서만 논해지는 부분이 아니다. 인식뿐 아니라 실천의 쌓임과 어우러지는 작용이 그의 사상적 운동법칙이기 때문이다.


  신영복은 오늘날을 제대로 직시하고 그것의 모순을 극복하는 힘은 밖이나 미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내부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모순을 우리가 근대성이라 아우른다면 非근대는 이런 근대성이라는 모순들을 해체하고 과거의 경험들과 그 안의 우직함을 동력으로 삼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가 아닌 非근대의 현재를, 즉 현재안의 새로운 현재, 곧 미래를 만드는 과정, 그 실천이 ‘非근대’라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非근대는 근대의 모순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천이며 인식’이다. 근대에서 탈근대로 향하는 걸음에서 신영복의 담론은 非근대라는 실천의 영역을 거쳐야 한다. 근대를 인식하고 그것을 非근대의 실천의 공간을 통하여 다시 탈근대로 인식되어지는 일정은 그의 사상형성의 흐름이며 담론형성의 원리이다. 이렇게 새로운 실천적 담론의 지형은 머리 만으로의 탈근대, 지식인들이 점유하는 탈근대가 아니라, 발로 내려오는, 민중의 삶으로도 그릴 수 있는 영역으로서, 그의 담론은 영역의 확대와 실제적 변화를 담보하고 있다. 그러므로 非근대라는 영역은 전근대-근대-탈근대라는 상식적 인식의 지형을 탈주하여 생명점으로 새로운 공간을 연다.


2) 非근대의 지반


  非근대를 향하는 신영복의 관계론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非근대의 지반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정리해보자면, 자본주의의 환상과 논리 깨트리기, 미래는 외부로부터 온다는 구도 같은 식민지적 문화 깨트리기, 그리고 이상주의와 낭만주의의 역할 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통합적 사고에 대한 것들이 있다. 신영복의 표현을 빌자면 ‘근대적 문맥’에서 깨어나기가 非근대의 지반이 되는 내용들인 것이다. 이것들은 그 실천과 더불어 동시에 진행되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깨기’26)는 새가 알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또 다른 세상을 향하여 건너야 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非근대는 인식이기도 하고 실천이기도 하다. 또 그것들의 다양한 어우러짐으로 인한 새로운 상태이기도 하다. 근대적 문맥이 우리의 일상과 구조에 얽혀있듯이 非근대의 내용 역시 단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는 아닐 것이다. 근대의 모순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천이라는 ‘非근대’의 개념은 다른 표현으로 ‘깨어나기'이며 신영복의 표현대로 ‘근대문맥 넘어서기’와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말처럼, 태어나려면 누구든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그랬던 것처럼 신영복이 우리의 非근대에 대한 담론에 살며시 꽂아준 갈피의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1) 자본주의의 환상과 논리 깨트리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것은 재화와 노동력 그리고 우리 자신까지도 가치형태, 즉 상품으로 존재한다. 상품에는 자신의 본질 즉 정체성이 소멸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용가치를 갖는 경우조차도 그것은 하위개념으로서 교환가치의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도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사람의 인격이 소멸되는 이런 구조적 원리가 매우 비인간적이란 것은 누구나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연봉 1억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이 등식의 비인간적 의미를 읽지 못하게 된다. 이렇듯 우리는 자본주의 환상 속에서 당연한 듯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나기’는 ‘자본축적의 모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동의어이다. 근대에 대한 환상에 대한 자각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근대의 환상 속에서 우리의 본질, 인격을 소멸시키는 바로 그 근대를 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력을 향상시킨다는 기계화는 오히려 노동자가 항상적인 실업위험에 놓이게 하고 종합적인 노동 능력도 잃게 한다. 뿐만 아니라 노동 및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구조를 재생산하는 환상이다. 그로 인해 노동계급은 풍요가 아닌 궁핍화로 가속화 되고 빈곤층은 광범위하게 확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구조에서의 불균형적인 생산과 소비는 성장이란 명목으로 지속적으로 추구되지만 오히려 자본주의의 독특한 혼란인 공황을 일으키는 환상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신영복은 자본주의 역사는 풍요의 역사였는지, 세계적인 규모에서 봤을 때 과연 풍요로운지, 빈곤, 무지, 환경, 질병, 부패 이런 것들이 과연 200년 동안 효과적으로 해결되어 왔는지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하며, 이러한 형태의 자본축적운동이 지속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있어야 된다(신영복, 1999)고 말한다.


  신영복은 자본주의 환상뿐 아니라 자본주의 논리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속도, 성장, 번영에 대한 무비판단적인 지향, 목적과 수단에 대한 생각 등은 非근대를 위한 전환이 요구된다고 본다. 효율성과 전문성에 대한 신화도 이와 다르지 않다. 특히 종합적인 판단의 부재를 낳는 기능적 전문 지식인의 육성은 지나친 속도, 효율성, 전문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애의 단적인 예로 볼 수 있으며, 인간을 바라보는 근대의 시각을 여실 없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인간 자체로서의 목적이 아니라 생산성을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일에 있어서도 관계론적 시각에서 볼 때 목표는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반대로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표이기에 목표보다는 그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 타당한 시각인 것이다.


  (2) 식민지적 문화 깨트리기


  “현재가 A라 한다면...‘현재’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과거 봉건사회도 있고 현대자본주의 사회도 있고 미래지향적인 대안적 사회도 물론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복잡한 갈등구조를 어떤 형태로든 지양해 나가려는 실천적 의지 속에 미래가 非A라는 형태로 열리는 것이지요.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지요. 현재와 아무 상관없는 이질적인 B, C, D 이런 것들이 밖에서 온다는 의식구조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실천이나 의지가 완전히 무장해제 당하고 있는 격이지요. 이러한 생각이 바로 식민지문화의 일반적 구조입니다. 저는 이런 인식구도를 깨뜨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장지숙, 2011).”


  미래는 글자 그대로 未來인가? 그렇다면 그 未來란 것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신영복은 어디선가 이미 완성된 미래가 존재하고, 그것이 여기 이곳으로 다가온다는 구도가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를 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담론의 문제점은 미래의 어떤 실체가 현재를 향하여 다가오는 구도로서, 현재와 미래의 엄청난 비대칭성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타자인 미래를 주체화하고 주체인 현재를 타자화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종속화(從屬化)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이러한 시각은 기존의 보수적 구조를 은폐하고 급속한 변화의 이미지를 가시화하고 있다(장지숙, 2011)는 신영복의 예리한 지목이다. B, C, D를 타자로 규정할 경우 A가 곧바로 B, C, D로 전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는 A의 내부모순에 운동성을 강화하는 과정을 거쳐 A가 非A로 지양되는 유기적이고 변증적인 과정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A가 바로 B. C, D로 전이된 사례는 정복과 식민화 같은 국가 간의 사례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또 개인적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그런 경우의 변화를 미래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 신영복이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역사나 삶의 연속성을 전제하지 않는 미래담론에 대한 문제성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가 위에서 감지되어진 정복과 식민화와 같은 전이과정, 그러한 단절의 역사를 겪어왔기 때문에 소위 BCD담론을 특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장지숙, 2011)이 신영복의 견해다. 그러하기에 현재인 근대에서 지양되는 非근대의 지반, 즉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실천이나 의지의 지반은 종속적인 미래관에서 깨어 나와 우리의 현실에 뿌리를 내린 독립적이고 주체적이어야 하며 이것은 동시에 현재의 근대성을 해체하고 非근대를 향하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기 되기도 한다.


  한국사회의 근대적 특수성에 대하여 신영복은 보다 더 냉철한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한국사회의 특수성 그것은 한 마디로 종속성(從屬性), 다른 말로 하자면 중심부를 향한 열등의식이다. 화폐가치가 패권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문화적 지형 역시 중심부의 근대적 가치가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당연히 우리의 교육목표와 가치는 비주체적이고 종속적인 것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은 우리사회의 엘리트 재생산과정 그 자체가 종속적인 것으로 구조화되고, 정치적 종속과 경제적 종속 그리고 엘리트 충원구조 그 자체마저 종속적 체계로 완성되는 단계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단계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바로 사회의 구조화된 콤플렉스, 열등감이다. 신영복은 한 사회가 문화적 열등의식에 갇혀 있는 경우 그 사회에는 합리적인 가치를 제시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문제 해결능력 그 자체가 소멸한다(신영복, 2007a)고 본다. 신영복은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구조적 모순과 그 안에서의 한국 근대적 특수성으로 인한 개인과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콤플렉스, 즉 열등감에 대하여 통찰적으로 직시하면서도, 근대에 대하여 섣부른 대안 역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내용임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 역시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하는 근대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3) 이상주의, 낭만 그리고 통합적 사고


  뜬금없이 이상주의(理想主義)와 낭만이라니. 그러나 글의 맥락을 따라 이들의 상대어를 연상해 보자면 이성주의와 합리성 정도가 될 듯하다. 물론 사전적 의미의 반대어는 따로 있겠지만,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근대적 사고원리인 존재론적 세계관에 물들어 있는 우리의 사고를 반성하고 그에 상반되는 非근대의 인식틀이 되는 창의적 사고, 인문학적 상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우리는 대개 이상과 현실을 분리하지만 불가능한 꿈들이 현실과 맞서는 힘이 될 때가 있기도 하다. 또 몇 년 전의 수첩에서 지금의 내 모습이 희망으로 적혀 있음을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이상이라는 것도 오래 살다보면 현실의 다른 표현일 수 있음을 가끔 경험하기도 한다. 신영복은 노래, 배추씨앗, 노동자, 수첩 등 우리가 대상, 즉 현실을 본다는 것은 대상이나 현실의 불변성을 넘어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과거와 미래를 아울러 보는 것이라 한다. 그는 이를 ‘통합적(holistic) 사고’라고 일컫고 있다(장지숙, 2007). 통합적 사고의 시각에서는 ‘이상’이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과 튼튼히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상의 본래의 의미는 현실을 끊임없이 개선하고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다이호우잉27)은 말했는지도 모른다(戴厚英. 2005: 277). 현실은 그 속에 이상을 담고 있다. 신영복은 이런 현실과 이상을 잘라내는 자체가 근대적 사유인 분석임을 각성시킨다. 이상과의 관련성 속에서 현실을 보는 태도, 그것이 큰 것과 작은 것,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들을 유연하게 결합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기에 철학적 추상력과 문학적 상상력을 같이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신영복, 2010).

  하나 더 보태어, 신영복은 이상과 현실의 결합 외에 더 중요한 또 하나가 낭만과 창조성이라고 말한다. 낭만성은 이상주의의 구성요소의 하나로서 기존의 체제, 양식 이런 것들이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장애물로 변할 때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정서라는 것. 낭만의 이러한 자유로움이 이상과 마찬가지로 힘겨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기도 하며, 숨통을 틔워주기도 한다고 본다. 그는 비록 이상주의나 낭만이 사회인식에서 논리성도 부족하고 실천에서 치열함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갖고 있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조적 열정은 모든 운동의 초기형태에 필요한 소중한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상주의나 낭만이 현재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또 매몰되지 않기 때문에 현재 상황의 모순이나 한계를 잘 드러내 준다고 본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표현을 빌려 오늘의 당면과제를 조감할 수 있는 그런 ‘독립(Jaspers, 1996)’일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여서 그는 논리성, 과학성 이러한 담론도 사실은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문맥이라고 보고 이에 이상주의와 낭만은 현실의 모순을 장기적인 시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유용하다28)고 읽어내고 있다. 그래서 시적 관점, 시적 정서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적 관점은 대상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고, 이런 통시적이고 투시적인 관점은 사물과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신영복, 2010). 이렇게 이상주의와 낭만의 역할은 우리가 갇혀 있는 근대문맥에 맞대할 수 있는 관계론적 미래관의 인식론적 방법으로써 새로운 자리를 매김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 조건과 실천주체의 정서마저 무시되어지는 관념성과 도식성이란 이상주의의 결함에 대해서도 신영복은 놓치지 않고 있다.

  非근대를 위한 지반에 대하여 간단히 추려보자면 우선 시대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서의 자본주의의 환상과 논리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한 미래에 대한 식민지적 구도와 개인과 사회에 내재돼 있는 콤플렉스 깨기, 그리고 우리가 익숙하게 구사해오던 어법과는 다른 어법으로 자기를 열어가는 세계인식, 즉 이상주의와 낭만주의에서의 창의적 에너지에 대한 인식으로 볼 수 있겠다.

  


Ⅲ. 신영복의 관계론


1. 사회사상


1) 사상 그리고 실천과 이론


  신영복은 사상(思想)이란 따뜻한 가슴(warm heart)이라고 정의한다. 일반적으로는 사상은 냉철한 이성(cool head)이라고 이해되고 있으나 그의 사상은 마음 즉 정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상은 어떤 사회나 인생 따위에 대한 통일된 판단 체계나 일정한 인식체계이다. 그런데 신영복이 말하는 사상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사상이라는 뜻을 살필 때에 생각한다는 뜻으로 풀이되는 사(思)는 한자의 모양처럼 밭을 생각하는 마음, 곧 노동의 마음이다. 그는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시간들과 공간으로 깊이 들어가 그 안에서의 꿈틀거리는 의미를 현재로 생환시켜 들어 올려내고 있다. 노동이라는 단어의 생명점을 찾아낸 것이다. 그의 사상은 밭을 돌보는 농부의 마음(思)으로 그것에 어우러지는 것들(想)이 바로 사상이 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오늘날은 예전처럼 농사가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니 그 뜻을 조금 더 여유롭게 넓혀보자면 노동 혹은 생활에 대한 그리고 그와 어우러지는 것들의 쌓임이 곧 사상인 것이다. 그러니 머리의 작업으로만 생각하는 사상과는 달리 신영복의 사상(思想)은 발과 가슴까지 연이어서 일어나고 반응하여 쌓여지는 일들을 일컫는다. 그에게 사상은 머리가 아니라 실천에서 출발하고 또 실천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사상은 단지 생각하거나 판단하거나 혹은 추리를 하는 식의 머리만의 작업이 아니라, 그 생각한 것을 실천으로 쌓고 생각과 실천이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사상의 내용과 형태는 실천이라고 신영복은 정언한다. 사상의 존재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이다. 사상은 실천의 결과가 이론으로 정리되고 이것이 다시 실천의 재료가 되는 과정이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몸과 마음에 체화되어 그 사람의 생각과 실천뿐 아니라 감성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신영복, 1996b). 그러하기에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한 개인의 육화된 사상이 되지 못한다(신영복, 2006a: 509).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로서 가슴에 갈무리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슴에 이르게 되는 실천의 여정이 감성으로 피어나는데, 그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사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옳기 때문에 혹은 사명이기 때문이라는, 이성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하지 않으면 자기가 불편한, 양심의 가책이 되는 그런 정서적 내용을 갖는 것이다(신영복, 1999).29) 그러기에 사상의 최고의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서 ‘가슴’에 갈무리되어 있는 것이다. 신영복의 사상은 추상적 관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면서 발로 설 때 이루어진다. 이런 삶의 결론이 곧 사상이자 논리인 것이다(신영복, 1989).


  신영복의 사상은 실천뿐 아니라 이론과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실천과 이론의 관계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자면, 실천이란 이론의 궁극적인 종착지다. 실천을 통해서 그 진리성 여부가 검증되기도 하고 실천의 결과가 이론으로 다시 재정리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게 다시 실천 과정에서 진리성이 검증되는 변증법적인 통일과정 속에 있게 되기 때문에 실천의 문제가 가장 궁극적이라고 신영복은 보고 있다. 왜냐하면 실천이 곧 우리들의 삶이기 때문이다(신영복, 2007b). 한편 이론이란 그 자체가 항구성을 갖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어떤 주체가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고 조직하며 또 어디서부터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신영복, 2007b)라고 한다. 실천과 이론 그리고 사상의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사상은 세계에 대한 참여의 방식이며 절대적인 불변의 성격이 아니다(신영복, 2007b). 신영복은 이에 한발 더 나아가 기존 지배 이데올로기를 학습하거나 수용, 혹은 포섭되어지는 형식으로 우리의 의식이 이루어지게 되는 점을 자각하고 우리의 의식을 주체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신영복, 2006c). 이런 이유로 그는 실천, 사상, 이론의 고유한 자리를 찾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물이나 인식을 더 복잡하게 하는 지식, 실천의 지침과 실천과 더불어 발전하지도 않는 이론은 질곡(桎梏)이며(신영복, 2007b), 이론이나 진리 자체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불변하는 별처럼 우리가 사랑하기만 되는 이론이나 진리는 없다. 오히려 이론이란 세계에 대한 참여의 방식이자 세계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그는 덧붙이고 있다.


2) 사상을 민중 곁으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가 몸소 겪은 자기 인생의 결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는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이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여하한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이질화하고 결국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삶과 사상의 어느 쪽을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라는 방법상의 문제는 그 사람의 처지에 따라 그 사람의 할 나름이겠지만, 삶을 내용으로 하고 사상을 형식으로 하는 상호작용의 법칙성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삶의 조건에 먼저 시각을 돌려야 하리라 믿습니다. 실천과 삶의 안받침이 없는 고매한 사상을 문제 삼아야 하리라 생각됩니다(신영복, 2005: 297-298).”


  신영복의 사상과 우리가 통상 인식해 온 사상과의 구별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애국독립운동을 하거나 정치적 이름을 남기는 사람, 많은 공부를 하여 학문적으로 높은 치적을 쌓은 사람, 혹은 역사적으로 전기(傳記)적인 훌륭한 이들만이 전유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온 사상의 자리30)를, 신영복의 사상은 평범한 삶을 짓는 우리의 이웃, 나의 벗과 가족들의 삶에서도 읽어낼 수 있고 명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상의 본래의 의미와 자리를 민중31)에게 되찾아주는 사건인 동시에 민중들의 삶에 대한 보다 적합한 가치32)를 부여할 수 있는 열린 해석이며 선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로 인해 사회의 구성원들 하나하나가 주체들로 자리매김 되고 비로소 그들의 입장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본래 민중의 곁에 있었던 사상의 본연의 자리를 되찾아주는 것뿐만 아니라 비로소 민중 각자의 삶이 주체가 되는 사회가 이루어지고 그 사회가 다시 그들의 역사를 만들 수 있는 선언이다.


  그의 사회사상이 내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의미는 그가 겪어온 사회와 그의 삶이 녹아 있는 것과 동시에 그와 같이 한 민중의 자리가, 민중의 모습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민중은 누구인가, 우리 사회의 민중은 어디에 있는가? 신영복은 민중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한 그 시대, 그 사회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당대 사회의 생생한 현재 상황 속에서 민중의 진정한 실체를 발견해내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의 대립, 현실의 왜곡, 사실의 과장, 진실의 은폐 등 격렬한 싸움의 현장에서 민중의 참모습을 발견해내고 그것의 합당한 역량을 신뢰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가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민중’에 대한 왜곡된 오늘의 자리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상과 연민이 만들어낸 민중이란 이름의 허상이 우리들을 한없이 피곤하고 목마르게 합니다. 그것은 ‘왜 불행한가?’라는 불행의 원인에 대한 질문으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눈물의 예술’로 그 격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은 위안을 줌으로써 삶을 상실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민중이란 결코 어디엔가 기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이 ‘창조’되는 것이라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응달의 불우한 사람들이 곧 민중의 표상이 아님은 물론, 여기에는 감상주의의 오류가 있습니다. 민중은 당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하여 창조되는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적 역량’입니다(신영복, 2005: 292-293).”


  이러한 역량은 단일한 계기에 의하여 단번에 나타나는 가벼운 것이 아니며, 장구한 역사 속에 성공과 실패 그리고 그 환희와 비탄의 기억들이 거대한 잠재력으로 묻혀 있다가, 역사의 격변기에 그 모습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당대의 모순 위에서 창조적 에너지로 응집되고 증폭 되어지는 것이 민중이라는 명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삶의 전반에서 그들과 접속하고 그 자신이 변화하며, 또 합당한 이름으로 그들을 불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신영복은 민중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것도 실은 다른 형태의 감상주의임을 빠트리지 않고 경계하고 있다.


  그 시대의 모순과 대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민중이란 어딘가 기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생활정치를 통해 재구성되는 이질적인 행위의 주체들로서, 당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하여 창조되는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의 역량이다. 그들의 삶의 조건과 실천에는 당대의 당면하고 있는 사회와 그 모순이 녹아 있다.



2. 관계론의 지반


1) 그의 삶


  한 사람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굳이 그의 생애를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신영복이라는 사람의 담론과 사상적 궤적을 따라가려면 그의 생애를 관통하지 않고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인간’과 ‘관계’라는 화두로 대표되는 그의 담론은 관념으로 구축한 이론의 성채라기보다는 그의 생애와, 시대의 삶을 읽어내는 성찰과 실천의 힘으로 길어 올려지는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2011년 9월, 신영복은 전남 해남의 한 작은 초등학교 분교에 와 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학교였고, 앳된 대학 강사시절에 감옥에 들어가 20년의 감옥생활을 ‘나의 대학시절’로 마치고 나와서 그 이듬해부터 다시 대학의 강단에서 20년간을 서 있었다. 이제 일흔이 넘은 그는 또 다른 여로의 길을 따라 남도 끝 무렵의 초등 분교의 작은 마당 앞에 서 있다. 오늘 그가 거기에 그 있는 이유는 그곳이 ‘이 시대의 변방’을 찾아 떠나는 여행33)의 첫 목적지이기 때문이다. 그의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우리시대 변방의 최극단인 감옥에서 나온 이후 세상살이를 조금씩 다시 익혀갈 무렵인 1996년에 그의 첫 여행에 대한 글들이 『나무야나무야』라는 책으로 엮여 나왔다. 이 글은 전국의 사연 있는 곳을 다니면서 국토와 역사에 대해 느낀 바를 엮은 책인데, 역사와 현실이 살아 숨 쉬는 지역 곳곳을 다니면서 역사의 흔적 속에 남아있는 바랜 울림과 그 세월의 먼지를 훑어내고 과거를 현재로 다시 소환시키는 내용이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서 있게 함으로써 오늘날의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통찰력 있게 써 내려가고 있다. 그 다음 해인 1997년에는 유럽의 중세가 벗어나는 곳이며 식민주의의 출발지인 스페인의 우엘바 항구에서 시작하여 세계의 역사 현장을 찾아다니며 20세기를 되돌아보고 맞이할 21세기에 대한 성찰적 메시지를 『더불어숲』이라는 책으로 엮어내었다. 2년간의 국내외의 여행은 그에게 있어 ‘자기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우리의 아픈 상처를 되돌아보는 귀중한 공부’였다(신영복, 2005: 12)고 말한다.

  그를 세상에 알린 그의 첫 저서는 1988년 출옥과 더불어 출간된 그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내는 엽서들을 그의 지인들이 모아 엮어낸 것으로, 스테디셀러로 읽혀지고 있는 글이다. 감옥에서의 서편이 그의 첫 번째 책이었다면 그의 첫 번째 여행지는 감옥이 아니었을 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그는 그의 대학시절로 표현하지만, 그 시절만큼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세상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어찌보면 여행과 상통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출옥 후의 여행이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 반성의 시각과 성찰에 대한 것이었다면 감옥으로의 여행은 그 자신을 향한 성찰과 추경험을 통한 고난한 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1) 학창시절


  그러나 감옥에 앞서, 그의 세상으로의 여행의 첫 발은 할아버지로부터 한문공부를 배우고 학교에서는 교장의 아들이자 장난기 많은 소년으로 자란 그의 어린 시절이다. 친구의 가난과 약자의 패배, 이데올로기의 모순으로서의 전쟁의 모습들이 추체험으로 소환되는 그의 기억들은 오늘의 빛을 받아 조약돌처럼 반짝인다. 그는 그 때를 ‘심부름 같은 길’이라고 말하곤 한다(신영복, 1990b). 그러나 그 푸릇한 길 위에도 다섯 살 때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열 살 때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여지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흔히 신영복을 책으로만 접한 사람들은 한복을 입고 한옥에서 살아가는 선비 같은 이미지를 떠올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혁34)은 여섯 명의 배우가 각기 다른 밥 딜런(Bob Dylan)을 연기 한 I'm Not There35)라는 영화처럼 신영복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면 아마도 더 많은 배우들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다.36) 이 말을 증명하듯, 학창 시절 동료들이 기억하는 그의 면모 가운데 도드라지는 것은 그의 명석함이 아니라 오히려 다재다능함이다. 대학동창 홍재영은 유머스러운 장난꾼, 만능 탤런트,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던 엔터테이너, 그리고 그 시절의 순수했던 지성을 향한 항심, 친화력과 공동체의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신영복을 20년을 두 번이나 넘는 긴 세월 이후에도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강준만 외, 2006: 276).


   “우선 떠오르는 기억은 그의 유머 감각, 명랑하고 쾌활했던 성품, 장난기 등이다. 그가 학구적이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다방면으로 박학다식 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는 주변의 친구들을 항상 재미있게, 지루하지 않게, 즐겁게 해준 엔터테이너이기도 했다. 그 당시 상대에는 홍릉제란 연례 축제가 있었는데 무대를 주름잡은 주인공은 언제나 신영복과 유장희였다. 신영복은 행사 사회부터 즉석 재담, 시나 가사의 낭송, 가장행렬에 이르기까지 끼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로 팔방미인이었다(강준만 외, 2006: 278).”


  이렇게 충분한 가능성으로서의 새내기 대학생이었던 그에게 미국이라는 외세의 거대한 힘은, 신영복에게 중요한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4.19를 미완의 혁명, 분실된 의거(신영복, 1990d)로 만들었다. 결국 박정희 주도의 군사 정변인 5.16이 왔다. 해방정국의 변혁적 운동의 복원이라는 의미의 4.19가 군부세력에 의해 짓밟힌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그가 비로소 역사에 눈뜨게 된 계기는 그가 대학시절 접하게 되었던 시대적 모순을 반영하는 책들을 통해서였다. 당초에 4·19가 독재자의 실정에 의해 유발된 것으로 소박하게 생각했지만 4·19이후 5·16까지의 시기에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구조적으로 인식해갔고, 따라서 이 같은 사회는 원천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신영복, 1989). 그가 학생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3학년이 되던 1961년이다. 그는 상대 학생들로 조직된 경우회, 종교단체 CCC 산하 경제복지회, 동학연구회, 고려대 연세대 학생서클 세미나를 드나들면서 마오쩌둥, 마르크스, 케인스, 슘페터 같은 이들의 책을 읽었다. 이후 경제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1965년 무렵에는 숙명여대 강사로 경제학을 가르쳤으며 1968년은 육군 중위로 임관해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삶을 들여다봄에 있어서, 그의 삶에서의 두 번째 여행길이기도 하고 최고의 고지였을 감옥으로의 여행기가 시작된다.


  (2) 통일혁명당 사건과 감옥생활


  1968년은 수사당국이 발표한 통혁당 사건으로 그의 인생 항로가 결정적으로 바뀌는 해다. 사건의 전말은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등을 중심으로 1964년 3월 만들어진 통일혁명당이 무장봉기, 주요 시설 파괴, 정부요인 암살 등의 방법으로 정부 전복과 공산정권 수립을 꾀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으로 학생, 지식인 등 33명이 기소됐다. 군인의 신분이었고 통혁당의 존재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뒤에야 알게 된 신영복은 통혁당의 핵심 인물로 지목돼 그 해 7월 구속된 후,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 받는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실제 통혁당은 그가 투옥된 이후에 조직된 것으로 북에서 발표되었고(강준만 외, 2006: 54), 더 웃지 못 할 일은 최고형이 징역 2년 이상의 유기징역형인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죄로 기소된 사람에게 군사재판에서는 기소죄목이 아닌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구형하고 선고했다는 것이다(강준만 외, 2006: 52). 이런 연유로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되었고 군사법정에서 다시 무기형을 선고 받았다.

  

  우리시대의 가장 첨예한 모순의 한복판을 몸으로 체험하며 온몸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징역생활에서 도덕적 가식을 부리거나 무언가를 숨기거나 감추는 일은 불가능하다. 한 방에서 몇 년을 같이 보내는 동안 서로의 삶과 살아 온 내력을 공유하며, 개인에 대한 이해를 넘어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사는 그들을 통해 또 다른 사회가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강준만 외, 2006: 56) 신영복은 밑바닥 인생들과 맨몸으로 부대낀 오래 감옥생활을 통해 지식 청년으로서의 관념성을 깨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감옥은 청년 신영복에게 새로운 역사의식을 일깨워주었다. 그곳의 생활은 해방 전후의 분단현실을 온몸으로 담아내고 있는 분들과 일상을 같이 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막연하게 책에서 보았던 한국 근현대사의 산증인들을 만나 이들로부터 생생한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강준만 외, 2006: 57). 20여 년의 수형 생활을 통하여 그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배운 바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해방 전후의 역사를 관념적으로만 이해해오던 것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과 나눈 인간적 이해와 공감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를 그 모순구조 속에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확실한 토대가 되었다고 말한다(신영복, 1992).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이해, 이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20년의 옥중여행은 신영복의 관계론에서 그 씨앗이 열매되게 하는 진정한 거름으로, 그의 ‘자유’로서 완성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서랍 속에는 교도소의 흙 한 조각이 간직되어 있다. 그리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좌절과 고통이 응어리진 그 흙에서 그는 수시로 우리 시대 우리 역사의 한 조각을 읽는다(신영복, 1990b).


  (3) 은사들과 독특한 한글 서체


  신영복은 감옥시절 한학의 대가인 노촌 이구영37) 선생과 4년간 한방에서 지내게 된다. 한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대개 보수적이기 쉬운 편이나, 노촌 이구영 선생은 드물게도 더불어 고르게 잘사는 대동의 꿈을 간직한 채 사회주의적 사고를 체화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우리의 전통과 정서가 진보적인 사상 속에 무르녹아 있는 중후한 인격의 학자(신영복, 1995: 5-14)로 회고한다. 노촌 선생은 옥중에 계시는 동안 가전(家傳)되던 의병 문헌을 들여와 번역을 하였고, 그는 자연스럽게 옆에서 번역 일을 도우면서 한문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그가 동양고전을 비교적 진보적 시각에서 선별하여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노촌 선생님의 생각이 간접적으로 전승되는 것이라고 그는 술회하고 있다. 신영복은 동양고전을 통해서 얻은 내용과 징역살이에서 깨달은 내용을 '관계론'이란 개념으로 정리해간다. 근대를 뛰어넘는 사회는 관계론을 기반으로 할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2004년 말에 출간된 『강의』의 핵심내용이다.


  감옥에 서도반이 생기면서 만당 성주표38), 정향 조병호39) 선생에게서 체계적인 지도를 받게 된다. 그 이전 한글서체는 궁체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시나 민요, 또는 투쟁 현장의 목소리 같은 것을 쓰면 내용과 형식이 전혀 맞지 않게 된다. 신영복은 그런 내용과 형식 사이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중 어머니께서 보내는 모필 서간체 글씨에서 영감을 얻어 궁체에 대비되는 민체 또는 연대체, 어깨동무체, 신영복체라 불리는 서체를 창안하여 서민적 형식과 민중적인 내용을 담아내는 독특한 경지를 이루어낸다(강준만 외, 2006: 60). 신영복에 있어 서예란 인격과 사상, 그리고 당대 사회의 미학을 오늘의 과제와 정서로 지양해내는 작업이며 우리시대의 것으로 형상화하는 동시에 나의 것으로 이룩해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재의 사회, 역사적 과제와 관련되지 않을 수 없으며 다른 분야에 비해 그 사람과 그 작품의 통일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또 요구된다. 그리고 서예는 그림과 달라서 그 사회성과 역사성이 직접으로 표현되는데(신영복, 1995), 이 점이 서예가 다른 장르에 비하여 사회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이유라는 것이다. 이 같은 서예에 대한 그의 생각은 서도에서 뿐 아니라 그의 삶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성격이다. 민중성과 역사성을 신영복의 서체가 갖는 특징으로 정리한 김성장40)은 신영복의 작품의 내용은 철저하게 그의 사상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으며, 그 서체형식은 사상과 일체가 된 표현이라고 분석한다. 특히 신영복의 상품로고, 책의 제호, 현판 및 비문, 달력과 간판 글씨 등을 통하여 그 대중성과 시대정신에 대하여 주목한다. 그리고 긴장감과 견고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깊은 울림을 자아내는 신영복의 한글서체는 민중적 서예미학의 출발이자 새로운 길(김성장, 2007: 20-39)이라고 평한다. 신영복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의 글, 그림 등의 모든 작품 활동을 관통하는 성격과 특징을 가장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그의 한글서체라고 할 수 있다.


2) 카를 마르크스


  (1) 그들의 닮은 점과 다른 점


  신영복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분석에서 가장 체계적인 이론으로, 가장 정합적인 관념성, 가치의 물신성 등에 관하여 뛰어난 통찰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부르주아 휴머니즘의 한계와 허구를 뛰어넘은 실천적인 인간 이해가 마르크스에 의해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인류사를 인간의 자기소외 그리고 자기회복의 과정이라 보는 마르크스의 관점이 그의 휴머니즘이라고 평하는 신영복은 그를 ‘실천적 휴머니스트’라고 표현한다(신영복, 1992). 신영복에게서 마르크스를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으나, 마르크스의 어떤 부분이 신영복과 함께 읽혀질지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맥락에 맞게 그 범주를 전제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근대의 모순으로서 자본주의의 구조를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글에서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신영복의 사회사상인 관계론의 지반으로서 보고 있다. 이 초석 위에서 마르크스와 신영복에 있어서의 대응점들이 발견된다.


  우선 마르크스와 신영복의 연구의 바탕이 되는 철학적 입장은 인간에 대한 애정41)에서 연유된 것이며 그 연구 과정의 출발은 당시 시대적 모순에 대한 근원을 찾아보려는 작업이라는 관점을 하나의 전제로 놓았다. 마르크스에 대한 해석과 시각은 오늘날까지 분분하다. 좀체 친구나 동료로 삼기 어려울 만큼 완고한 성격이었던 점을 들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가진 소유자였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기도 할 것이며, 그러하기에 그의 저작들은 가난 앞에 무능력한 자신의 현실에 대한 핑계로써 혹은 도피처로 개인의 유토피아적 세계를 그린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마르크스의 인간관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를 세기의 혁명가 혹은 철학가로 보는 입장이든 일개의 성격 괴팍한 선동가로서 보는 입장이든 양쪽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은 그를 ‘공산주의자’로서 일컫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교집합에서 그의 인간상을 찾는 것이 가장 편차가 적은 그의 모습일 것이다.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인간소외의 극복이고 인간적인 존재로의 회복이라고 정의한다. 자연주의로서의 휴머니즘, 휴머니즘으로서의 자연주의이며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해 온 모순의 참된 해소(Marx. 1987: 84; 2007b: 836-976)라고 명시한다. 적어도 공산주의자 마르크스는 ’인간의 회복‘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 인간은 모순의 참된 해소를 전제하고 있다.42) 에릭 프롬(Erich Fromm)은 마르크스의 철학적 특징을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본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해방하고 자기 자신 속에 잠재된 유적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인 것이다(Fromm, 1983: 12).


  “하루의 징역을 끝내고 곤히 잠들어 고르게 숨 쉬는 가슴 위에 사천왕보다 험상궂은 얼굴로 눈떠 있는 짐승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한 마리의 짐승을 배워야 하는 그 혹독한 처지가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 되어 가득히 차오릅니다(신영복, 2005: 267-268).”


   ‘개인의 아픔에서 삶의 진실과 역사성을 깨달을 수는 없는가(신영복, 2005: 241-242)’라는 신영복의 물음은 그의 인간에 대한 시각과 그 자신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는 문구이다. 인간에 대한 진실과 역사성은 인간에 대한 애정 없이는 결코 거둘 수 없는 열매다. 그러기에 진실과 역사를 가리는 모순에 대하여, 한 개인에서부터 문명론에 이르기까지의 실천적이며 성찰적인 작업은 어찌 보면 그들에게 있어 당연한 과정인 것이다.


  이들의 시각에서 또 다른 중요한 공통점은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보는 관점과 자본주의를 근대성의 대표로 전제한다는 것, 이에 자본주의에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발전론자들이나, 근대의 다양한 모습들43)을 제시하는 입장들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마르크스와 신영복은 자본주의를 모순으로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라는 근대성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인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사회적 관계를 갖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모순의 본체다. 신영복과 마르크스가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종합적인 인간’의 모습은 부자, 전문인 등의 파편화된 인간형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와는 상반되는 지향점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그들이 ‘모순’에 접근하게 되는 영역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외연인 생산양식에 초점을 두고 그것의 작동원리를 분석해내었고, 신영복은 이 생산양식을 물질적 기반으로 하는 생활양식, 그의 표현으로는 정신문화영역의 구성원리를 심도 있는 논리로 읽어내고 있다. 이 지점들은 마르크스와 신영복의 닮은 점 안에 있는 다른 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이들은 주저 없이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인간과 자본주의에 대한 공통된 시각이다.


  이들의 대응점을 하나 더 들자면, 그들의 언어이다. 마르크스는 당대의 노동자에게 가장 설득력을 가진 ‘과학적 언어’로 자본주의에 대하여 피력하고 있으며, 신영복은 오늘날의 민중에게 가장 대중적인 ‘인문학적 표현’으로 자본주의의 한계와 인간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들의 언어는 그들이 서 있는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44) 그들의 시각에서 시대를 대변한다 함은 그 시대적 모순 위에 서있는 사람을 청자(聽子)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마르크스는 노동자에게 신영복은 대중, 혹은 민중으로서의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시대적 위치의 다름으로 인해 마르크스와 신영복의 언어가 다름은 당연하다. 초기 자본주의 시기이면서 동시에 혁명을 듣고 경험했던 마르크스의 동시대인들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양극화되는 격랑의 시기에서 불안과 가난의 고통에 노출되어 있었고, 마르크스는 노동자에게 그들의 위험과 위치를 정확히 알리고 있었다. 오늘날 역시 신영복은 자본주의의 한계에 도달한 비인간적 상황들을 마주하여 가장 필요한 인간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알아듣기 쉬운 인문학적 언어로 청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45)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서로 다른 언어적 표현이지만, 각 시대의 모순에 첨예하게 서 있는 노동자와 당신이라는 그대에게 그들은 인간의 삶과 자본주의에 대해서 끊임없이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 하고 있는 셈이다.


  신영복과 마르크스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을 정리해 보자면, 공통점으로는 첫째, 시대적 모순의 근원을 찾아보는 그들의 시각은 인간에 대한 애정에 바탕하고 있다. 둘째는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보는 관점과 자본주의를 근대성의 대표로 전제한다는 것, 이에 자본주의에 있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점이다. 다른 점은 모순의 해석에서 그들의 표현 방식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같이 과학적 표현을 사용하였고 신영복은 그의 『강의』처럼 인문학적 표현을 쓰고 있다. 그들의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같았으나 그 논의 영역은 사뭇 다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생산양식의 분석이라는 과학적 언어로 정확히 풀어내고 있는 반면, 신영복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마르크스가 추후에 기획하고 있었던 생활양식, 정신문화적 영역을 인문학적 시각으로 깊이 있게 통찰하여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2) ‘실천’과 ‘관계’의 개념화


  마르크스의 ‘실천에 대한 개념화’와 신영복의 ‘관계의 개념화’의 출발지는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합이라는 시각이다. 개념이란 대상을 파악하거나 그 파악 방법과 관련해 다른 개념들을 조직해내고, 그것들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특별한 용어이다. 마르크스가 실천을 개념으로 도입한다는 것은 그 말에 바로 이런 기능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46) 마르크스는 ‘실천’이란 개념을 철학에 끌어들여 근대철학의 사고의 틀을 넘어 그것을 해체한다(이진경, 1997: 30). 그가 철학적 개념으로 실천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저작은『독일이데올로기』와 그 책에 부록으로 실려 출판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인데, 여기서 마르크스는 ‘실천’에 관한 몇 개의 핵심적인 명제를 제출한다(이진경, 2011: 196). 이 명제들은 마르크스의 실천의 개념을 통해 변환되는 근대의 중요한 개념인 주체, 대상, 인식, 진리의 새로운 정의들이다.

  그는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말한다(Marx & Engels, 1991: 191). 관계의 총체라 함은 관계를 맺는 행위, 곧 실천을 의미한다. 따라서 관계가 달라지면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사회관계가 달라지면 그 본질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실천이 그 본질을 만들어 낸다는 것. 근대철학의 출발점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집어엎는 것이다. 항구적인 기초이고 출발점인 주체가 아닌 관계 속의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 역시 주체나 철학의 목표였던 진리는 실천적인 올바름을 파악하는 문제로 전환된다. 지각이나 감성은 대상과 목적을 갖는 ‘활동’이요 ‘실천’으로서 대상을 그저 비추어 주기만 하는 거울이 아니라 대상을 다르게 파악하는 실천적 맥락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양식이나 일상적인 실천, 혹은 목적을 갖는 실천 속에서 사물을 지각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 역시 현실적 실천 과정의 산물로 파악하여야 한다. 이를 실천적 활동 속에서 지각하고 사고하며 판단하는 주체가 있으며, 그러기에 인간도 사회적 관계의 총체가 되고 이런 실천을 통해 포착되는 진리 역시 영원한 진리가 아닌 실천 속에서 증명되어지는 문제인 것이다. 주체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한 마르크스를 통해, 주체는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이란 것이 명확해지고, 그 결과 주체와 진리라는 짝에 의해 형성되었던 근대적 주요 개념들은 그 자체가 해체된다. 요컨대 마르크스는 실천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근대적인 문제설정 자체를 해체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근대철학을 벗어나는 개념들과 사고방법을 포함하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실천의 개념화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철학적 혁신을 가능하게 한 탈근대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이진경, 2011: 195-219).


  신영복의 인간 역시 실천의 결과물로 말하고 있다. 즉 모든 주체가 관계하는 방식에 따라 본질이 규정되는 것이다(신영복, 1998c). 개별적 존재란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 존재라는 것이며 생명, 물질, 개인, 집단, 국가, 문명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체가 서로 관계하는 방식에 따라 그것의 본질이 규정되는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주체가 마주하는 대상 즉 개인이나 사회현상은 그것이 맺고 있는 사회적 연관 속에서만 참모습이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대상을 그 사회적인 연관 속에서 파악하는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파악하는 사람,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다. 발 딛고 있는 자리에 의해서 그 시각이 결정된다. 승용차를 타면 버스의 횡포에 속상하고 버스를 타면 도로 공간을 사유화한 승용차에 속상해 한다(신영복, 1990c). 근대적 인식론은 불변의 진리성에 대한 탐구와 열정이 기조를 이루어서 과학으로서 위상을 정립해 왔다. 그러나 신영복이 말하는 진리는 본질에서 불변의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 매개의 실천과정에 조직되는 수많은 진리라는 점에서 상대적인 것이다(신영복, 2009: 4). 초역사적 불변의 진리는 없으며 진리는 조직하는 것이다. 고로 역사는 역사가가 수많은 지난 사건들 가운데 일부를 선택해 조직하는 것처럼 진리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하는 것이며 참여하는 능동적 의미가 된다. 신영복은 인식에 대해 그것은 관계이며 대상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 그 자체가 기본적 인식평면과 시각을 결정한다고 본다.


  “토큰에 배어 있는 따스한 체온에 감동하는 사람의 인정은 고마운 것이다. 그러나 토큰마다 빠져나가는 그의 체온을 서러워하는 그 '할멈'의 자리가 진실에 더욱 밀착된 입장이며, 새벽 홍등 속에 앉아 있는 여자의 치열한 생존을 이해하는 사람의 가슴은 넉넉하다. 그러나 그 누이를 어찌할 수 없는 오라비의 참혹한 입장이 그것의 진실에 더욱 밀착된 자리이다(신영복, 1990c).”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더 그러한데, 대상을 대상으로 저만치 떼어놓고 인식한다는 것은 적어도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는 부정확하고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주체와 대상은 현실적 실천 과정의 산물이며 주체가 대상에 대한 감성 역시 주체의 실천적 맥락에서 읽혀진다는 것이다(신영복, 1998c).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신영복의 감성에 대한 설명이다. 이 부분은 생각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한다는 그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이러한 실천적 과정에 있어서 뛰어난 세계인식의 모태가 되는 것이 감성이다. 대상세계를 타자화하지 않고 자신의 범주 속으로 받아들이는 역할은 감성의 몫이다. 조직과 참여에 있어서 감성은 세계의 범위를 확정하고 인식과 실천의 전 과정을 감당하게 하는 애정으로 작동한다. 참여점이 건설되는 지점이 바로 가슴이다(신영복, 2006a).”


  마르크스는 감성을 지각과 더불어 대상과 목적을 갖는 활동이요 실천이라고 하였고, 신영복은 뛰어난 세계인식의 모태가 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감성은 세계의 범위를 확정하는 것이며 애정으로 작동한다고 본다. 이 애정은 인식과 실천의 전 과정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내용은 글쓴이가 앞에서 마르크스와 신영복의 닮은 점으로 제시한 그 ‘애정’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그들의 공통점은 신영복이 말하는 애정의 의미가 입증되는 내용이 된다. 즉, 인식과 실천을 감당하게 하는 애정은 바로 그들의 감성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들의 감성은 인간의 삶에 민감하며 그들의 인식과 실천은 그 감성에 충실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감성은 자본주의에 대한 모순에 대한 인식과 비판적 실천을 우리에게 명확히 제시해주었고, 신영복의 감성은 마르크스의 유산과 동양사상의 자원을 바탕으로 하여 非근대의 조직이란 실천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표 Ⅲ-1> 마르크스와 신영복의 인식론적 상응점들

개념화

대상을 파악하거나 그 파악 방법과 관련 해 다른 개념들을 조직해내고 그것들과 긴밀히 결합하는 것.

 

마르크스의 ‘실천’의 개념화

신영복의 ‘관계’의 개념화

주체

실천은 주체의 본질을 만듦. 관계가 달라지면 존재도 달라짐.

관계하는 방식에 따라 그것의 본질이 규정되는 것. 실천의 산물

대상

실천 과정의 산물

주체가 맺고 있는 사회적 연관 속에서 파악될 수 있음. 실천의 산물

진리

실천 속에서 증명되어지는 문제

매개의 실천과정에 조직되는 수많은 진리라는 점에서 상대적인 것

지각, 인식 감성

지각, 감성;

대상과 목적을 갖는 활동, 실천

인식, 감성; 그것은 관계, 주체의 실천적 맥락에서 읽혀진다.

 


  위 <표 Ⅲ-1>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실천’과 신영복의 ‘관계’는 동일한 의미로 읽혀진다. 마르크스와 신영복은 이 두 단어를 가름 없이 쓰고 있으며 신영복의 ‘관계’는 ‘실천에 의한 상호적인 변화’의 의미가 더 농축되어 있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실천’ 역시 이를 바탕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특히 신영복의 ‘관계’는 대상을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망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신영복, 1998c). 그러기에 주체와 대상 그들의 인식, 그리고 진리는 신영복에 있어 모두 관계라는 얼개의 부분들로서의 각기 다른 이름들이다.


  인간을 사회관계의 총합으로 보는 마르크스와 신영복의 공통된 시각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근대의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지점으로서 마르크스사상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며, 그 위에 非근대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관계론의 근원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간을 사회관계의 총합으로 보는 시각은 ‘실천’과 ‘관계’의 개념화를 잉태한 것이다. 언뜻 보면 신영복이 그의 관계의 개념에 대하여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듯이 보이지만, 오히려 마르크스가 당시 서양에서 드물게 동양적 사고를 하였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동양적 사고는 서양적 사고와는 다르게 인간을 사회적 관계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영복은 서양과 동양의 이분법적이고 단정적인 가름에 있어 주의를 잃지 않는다.47) 그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사실은 역전된 패러다임이라고 설명한다. 고대에는 오히려 서양이 계속 옮겨 다니는 경험으로 인해 많은 것들과 절충하고 소통하는 관계론적 문화였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이든 국가든 어느 역사든 일정하게 권력을 장악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배타적인 존재성으로 존재하게 되는 점(신영복, 2010: 62-63)을 상기 시키고 있다. 또한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으로의 이분법적 비교라는 오해는 양 사상의 시기나 지역 간의 차이 등 사상적 다양성의 요소들을 배려하지 않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논점이 근대사회의 모순을 바라보는 관점임을 다시 한 번 염두 해둘 필요가 있다.

  이런 흐름 위에 서양의 사고방식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을 독립된 개체로 보았다. 그러하기에 관련 자료나 서적을 통해 동양이나 서양의 관계론적 세계관을 숙지했다 치더라도 근대의 한복판에서 ‘탈근대’한 마르크스의 비범한 통찰력과 직관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이에 마르크스의 철학적 사고가 동양사상과 닮아 있다면, 현 근대성의 근원인 서양사상의 대안으로서 동양사상에 주목하는 것에 일면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근대를 넘어 서고 있다면, 그것은 동양사상이 근대를 넘어서는 非근대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 방증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이것이 또 다른 중요한 의미이다.


  신영복은 서양문명의 모순과 자본주의 모순을 병행하여 관찰하고 이에 동양적 사상과 문화에서 그 모순을 넘어설 수 있는 구성 원리를 관계에 대한 시각으로 엮어 내고 있다. 그가 마르크스나 동양사상에서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인간을 보는 시각에서 마르크스와 동양적 사고방식의 교차점이 그의 관계론에 중요한 중심적 바탕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에 방점을 둔다. 마르크스는 실천이라는 개념으로 근대의 정의들을 해체 하였다. 그리고 신영복은 관계라는 개념으로 非근대적 삶의 구성을 시도하고 있다.


3) 동양사상


  신영복이 동양에서 그의 사상적 나침반을 얻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이 동양이며 그의 사고나 몸에 익힌 문화 역시 동양적 사유로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한계에 주목하여 그 지반을 전복코자 했던 사람들이 자주 중요한 자원으로 삼는 것이 동양이다. 종종 그것이 서양이 대신해서 말해주고 대신해서 만들어준 ‘동양’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이는 깊은 사유 없이 동양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근대를 넘을 수 있다는 착각과 이미 대안을 선취했다고 믿고 있는 환상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양이 탈근대의 동력 내지 자원이 될 수 있는 것은 근대적 사유와의 대결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새로운 종합을 통해서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되는 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이진경, 2011: 468-469). 이 장에서는 신영복이 동양사상을 지반으로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으로 갈음하고 있는 내용을 네 가지로 요약해 보고 그의 고전독법의 관점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볼 것이다.


  (1) 동양사상의 특징


  동양사상의 첫 번째 특징은 비종교적이며 현실주의라는 것이다. 동양적 사고를 현실주의적이라고 하는 까닭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 때문이다. 동양 사상은 또한 사후(死後)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며 신학적 사유 체계가 아닌 비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서양에서의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의미이나 동양의 도(道)는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으로서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점은 동양사상과 서양철학과의 분명한 차이점이다.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이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으며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다.

  둘째, 동양에서는 자연(self-so)이 최고의 질서이다. 최고의 질서란 그것의 상위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기서 질서라는 의미는 이를테면 시스템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장(場)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장이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자력장(磁力場), 중력장(重力場), 전자장(電磁場)과 같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체계이며 질서다. 중요한 것은 장을 구성하는 개개의 부분은 부분이면서 동시에 총체성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집합(集合)과 장(場)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동양학에서 자연이란 자원(資源)이 아닐 뿐 아니라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對象)이 아님은 물론이다. 생성과 소멸이 통일되어 있는 질서이다. 그러하기에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진다.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근대사회의 신념 체계인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人本主義)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째 특징으로는 인간주의적 가치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동양 사상의 특징으로서 인간주의라고 하는 경우 그것은 그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인문적 가치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동양적 가치는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구하는 그런 구조이다. 그래서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상정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인성이란 개별 인간의 내부에 쌓아가는 어떤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의 의미라는 것이 동양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성이란 개념은 어떤 개체나 존재의 속성으로 환원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개인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장(場)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동양적 인간주의는 철저하게 관계론적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동양 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니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님은 물론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이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고 있다.

  네 번째 특징은 모순의 조화와 균형이다. 모든 사상은 대립, 모순, 긴장, 갈등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순 구조를 내장하고 있으며 동양 사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대립과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의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다. 즉, 모순 대립의 두 측면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적 구성 원리와 대단히 큰 차이점이다. 동양 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견제이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이고 따라서 유가적 가치는 인문세계(人文世界)의 창조에 있다. 그것은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 문화 생산자로서의 인간의 자부심이기도 하지만 한편 오만한 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 좁은 의미의 인간주의가 갖는 독선과 좌절을 견제하고 지양하는 체계가 바로 유가의 대립 면으로서의 도가 사상이다. 노장(老莊)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을 최고, 최량의 질서로 상정하고 있다. 그래서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대하여 무위무욕(無爲無欲)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하다. 인본주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것의 독선과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체제 이데올로기가 바로 도가이다. 유가와 도가는 이로써 서로 견제하고, 이로써 중용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영복은 위의 특징들을 통해 동양사상이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기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2) 동양고전과 그 독법


  신영복이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60년대 대학시절의 문화에 대한 반성과도 관련이 깊다.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한국 사회는 근대화 모델을 따라 줄달음쳐 갔다. 해방 이후의 격동과 한국전쟁, 그리고 전쟁 후의 부패와 가난을 겪는 동안 한국 사회는 오로지 서구적인 문화, 서구적인 가치 등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기에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기 어려웠다. 자존심이 없는 개인, 자부심이 없는 민족처럼 불행한 인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반성 속에서 신영복은 감옥에 들어가서 동양고전을 깊이 읽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준거를 동양고전의 지혜와 가치를 통해 찾아보려는 생각이었다(강준만 외, 2006: 58-59). 이렇게 그는 그의 사고와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의식에 대한 반성뿐 아니라 우리 시대에 대한 반성의 일환으로 감옥생활에서 동양고전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훨씬 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당시 교도소 규정은 재소자가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돼있는데, 다른 책에 비해 동양고전은 한 권을 가지고도 오래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고전에 대한 정통적이고 훈고학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항상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읽으려는 까닭은, 새로운 시대에 앞서 문명의 패러다임에 대한 자각적인 반성이 필요하다는 그의 고전독법의 관점 때문이다. 그는 관계론이라는 21세기의 새로운 문명과 사회 구성 원리에 관한 화두(話頭) 아래, 동양의 오래된 관계론적인 사상의 보고인 고전을 통해서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패러다임을 드러내고자 한다(신영복, 2007b).

  그의 고전독법의 관점에 대해 살펴보자면, 우선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으며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관점이 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고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하며 이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양 고전과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를 대비시키는 이유는 패권적이고 존재론적인 패러다임의 압도적 포섭에도 불구하고 소비나 소유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며(신영복, 2007b), 우리의 고전 강독의 화두인 관계론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내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시선으로서 신영복은 미래에 대한 모델을 미리 설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실천을 받아오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교조적이거나 관념적인 건축의지가 된다(신영복, 2007b)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새로운 미래에 대한 전망보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현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고전 강독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며 당대 사회의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이다. 즉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과 모색이다. 신영복의 고전 강독에는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과 이러한 열망을 사회화하기 위한 거대담론이 오늘날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고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 담론을 재구성하는 과제를 전제하고 있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특히 그것이 관철하고자 하는 세계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사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담론이 주류를 이룬 춘추전국시대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신영복, 2006a: 22)고 보고 있다. 때문에 당시의 담론을 통하여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그의 고전강독은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해야 한다(신영복, 2006a: 23)는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

  고전독법의 마지막 관점은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이 주목하는 것, 비종교적인 인문주의, 바로 동양적 구성 원리이다.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적 가치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다. 이 부분이 고전 강독에서 확인해야 할 중요한 지점인 바로 실천적 관점이다. 일상적인 일들의 사회적인 의미를 탐색하고, 그 결과로 삶을 영위해갈 사회에 대하여 정당한 이해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것이다(돌베개편집부, 2004). 신영복은 동양학에 대한 관점을 이 지점에 세우는 작업이야말로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며, 고전 독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고전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신영복, 2006a: 15-33). 사회과학적 담론을 그가 만났던 사람들의 삶과 정서와 어떻게 결합시켜나갈 것인가(신영복, 2007b)를 고민하는 그의 모습 역시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3) 노자를 보다


  ① 노자48)를 말하는 이유


  노자를 따로 불러내는 이유는 신영복이 노자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관계론의 성격이라 해도 크게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신영복 자신이 자본론과 더불어 노자에게서 가장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여기에서 연유하는 듯하다. 그가 말하는 노자사상의 특징(신영복, 2006a: 251-306)을 이 글의 맥락 위에서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본다면, 우선 기존의 상식과 고정관념, 실천을 반성케 하는 인식론적, 실천적 철학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 동양 사상의 정체성은 논어보다는 오히려 노자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노자 사상은 근본주의적이며 귀무론(歸無論)적이다. 근본주의적이라는 의미는 인의예지(仁義禮智) 같은 도덕적 가치를 인위적 규제라고 보고, 인간과 문화와 자연에 대한 종래의 통념을 깨트리고 전혀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을 말한다. 귀(歸)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무(無)는 무위(無爲)이기도 하며 이것은 작위(作爲)를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노자의 사상은 상대주의 사상이기도 하다.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말하는 것인데,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뜻으로서, 이러한 차별적 인식이 특히 어려움, 없음, 짧음, 낮음 등의 의미를 부당하게 폄하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인식의 상투성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노자는 자연을 최고의 질서라고 보는 인식론이며 실천론이다.

  노자사상의 두 번째 성격은 그것이 비판과 저항 담론인 동시에 대안 담론이라는 것. 중국 사상은 지배 담론인 유가 사상과 비판 담론인 노장사상이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으며, 노자는 근본적으로 반문화적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이라는 근본적 질서를 회복할 것과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주창하는 노자의 반문화 사상이 지배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나아가 저항 담론과 대안 담론으로서 그 지반을 넓혀가게 된다. 노자는 계몽주의든 합리주의든, 기존의 인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건축적 의지를 해체해야 한다는 해체론이다. 현재 자본주의는 누적된 모순으로 말미암아 문화와 의식구조에 있어서 엄청난 허구와 비인간적 논리를 구축하고 있으며, 그 어떤 체제보다도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다. 엄청난 건축을 완성해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자의 언어와 담론이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 구조를 조명해내고 자본주의 문화의 허구와 총체적 낭비 체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신영복은 읽고 있다.

  이를 근간으로 세 번째 특성은 바로 그 내용이 민초의 정치학이라는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 노자는 패권 경쟁을 반대하고 그에 기생하는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반전 중명 사상을 설파하고 약한 자가 이긴다는 희망을 선포하고 있는 노자의 비판 담론은 전쟁의 최대 희생자인 민초들의 삶과 투쟁에 뛰어난 실천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상이며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경제학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정치학이다. 노자의 정치론을 간명하게 보자면, 요컨대 지도자나 정치가의 가장 중요한 품성은 백성, 즉 민중을 신뢰하는 것이다. 신뢰함으로써 신뢰받는 일이다. 백성들을 믿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지도자라는 것이다. 모든 정치적 목표는 백성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 백성들의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집단적인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도달한 결론이기에 충분한 임상학적 과정을 거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결론인 셈이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그러한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노자사상은 인식론적·실천적 철학이며 동시에 비판·대안 담론이고 민초들의 정치학이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신영복이 동양 사상에서 노자를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며 그의 관계론이 갖는 특성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본격적으로 논의될 非근대를 향한 조직론의 중요한 성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② 물의 철학


  특히 신영복은 약한 자가 이긴다는 희망을 선포하고 있는 노자의 비판 담론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 한다.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이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낮은 쪽으로 흐르는 것, 그래서 결국 가장 큰 바다를 이루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연대이다. 그래서 연대성은 약자의 정서이면서 민초들의 전략전술이 된다(신영복, 2001).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모든 역량을 받아들이는 연대는 다양성의 승인이라는 또 하나의 의미를 품고 있다. 다양성의 승인은 차이의 수용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똘레랑스(tolérance)49) 같은 차이의 공존이 아니다. 그렇다면 다양성의 승인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신영복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논어의 구절을 풀이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화(和)라는 것을 저는 연대성으로 봐요. 연대는 공존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그게 바로 화(和)지요. 동(同)이란 ‘자기와 같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흡수합병이 동(同)의 논리지요. 이는 곧 지배의 논리이고 우리가 그 대가를 뼈아프게 치르고 있는 제국주의의 논리입니다. 연대를 하려면 동(同)의 논리가 아닌 화(和)의 논리에 철저해야 하지요(신영복, 2001).”


  이 ‘화동담론’에서 동(同)은 존재론적인 패러다임이고, 화(和)는 공존의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이런 화(和)도 궁극적인 게 아니라 다시 변화(化)해야 하는 과도적인 단계임을(신영복, 2010: 71) 그는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다양성들을 엮어내는 원칙이나 방식에 관한 신영복의 관점이다. 기존의 연대의 담론들과 대비되어지는 연대에 대한 신영복의 담론의 특징이기도 하다. 진정한 조화는 공존의 변증적인 운동을 잉태하며 그 결과는 탈근대를 위한 화(化),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변화뿐 아니라 관계의 변화로 확장되는 과정을 풀어내고 있다. 연대는 바로 변화의 방법론인 것이다. 그래서 신영복에게 ‘차이는 반가운 기회(만남)’이다.(성시윤, 2011) 이 역시 개념적 풀이보다는 신영복의 실천적 역동성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연대에 대한 설명이다.

  결국 신영복이 바다를 연대의 최고의 개념이라 표현하는 이유는 그것이 연대와 다양성을 상징하며 우리 삶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은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며 바로 가치이기 때문이다.50) 동양사상에서 노자를 불러내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3. 관계, 非근대를 조직하다


1) 관계 그리고 자유 : 관계론과 그 관점


  (1) 관계론

 

  ① 생명과 물질의 본질은 존재가 아닌 관계


  신영복의 관계론에 대해 “너와 나의 관계‘의 그 관계를 말하는 건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 맞다. 그 관계다. 일상에서 쓰이는 의미가 사회학의 단어로 그것도 어떤 대상들을 조직하는 개념어로서 쓰인다는 것이 다소 생소한 느낌이기도 하다. 신영복이 관계론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이야기를 꺼낸 것은 년 1998년 11월 경주문화엑스포 국제학술회에서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이라는 내용으로 기조강연을 하면서부터다.51)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그 요지다. 강연의 내용을 더 들어보자면,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고 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 원리라 말하고 있다.


  누구나 각자의 일상 속에 품고 있는 ‘관계’에 대한 이해를, 그는 강연의 서두에 현대원자물리학이라는 첨단과학에 대한 이야기로서 그리고 세계의 구성 원리인 관계론의 문맥으로 연결해 가고 있다. 물질성 자체가 물질적인 존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상태는 정신적인 상태를 변화시키는 운동을 하고 반대로 정신적인 상태는 물리적인 상태를 변화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음을, 이 과학의 최첨단 분야가 입증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생명에 대한 연구를 그 예로 드는데 우선 생명은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를테면 관계성의 총체로서 규정한다는 것이다.

  용기(容器), 신진대사(新陳代謝), 자기복제(自己複製), 진화(進化:유전과 변이) 등의 네 가지의 경우를 보자면 첫째, 생명은 세포처럼 일정한 개체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생명에는 그것이 담겨있는 용기(容器)가 있는데 용기가 있다는 것은 그릇의 안과 밖의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개념이다. 둘째, 신진대사라는 것 역시 외부와의 물질과 에너지의 교환이고 오픈 시스템이다. 셋째, 자기복제도 마찬가지로 세포분열이건 또는 아들딸을 낳는 일이건 자기(自己)가 자기 아닌 비자기(非自己)를 만들어내는 지점에 서 있다는 사실, 이것도 엄청난 관계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전과 변이를 내용으로 하는 진화 역시 환경과의 관계개념이다. 그래서 그는 ‘생명이 바로 나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성의 총체다.' 그러므로 ‘존재론은 생명론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개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신영복, 1998c). 궁극적으로는 대상과 주체의 관계를 통하여 물질세계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체의 존재를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고 관계 속으로부터 존재를 이끌어내려는 가설체계가 현대원자물리학이라는 것이다.


  ② 인문학적인 설명


  마르크스가 그의 탈근대적 철학적 사고를 대중들과 소통하기 위해 근대의 언어, 합리성과 설득력을 담보하는 과학적 언어를 사용했듯이, 신영복 역시 그의 관계론을 최첨단 과학 분야를 통해 여전히 대표성을 잃지 않고 있는 ‘근대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늘날 그의 목소리가 남달라 보이는 것은 과학적 사고를 수렴하면서도 이에 인문학적 시각을 그것과 배합하여 들어낼 수 있는 그의 감성과 철학이다. 신영복은 그의 경험과 동양고전을 통해서도 관계론을 펼쳐 보이고 있다.


  “약 1년 6개월 동안 사형수로 있었고 이어서 무기수로서 20여년을 살았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나로 인한 여러 사람들의 아픔이 다시 나의 아픔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이라는 존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있는 것이구나....(신영복, 1998c)”


  “붓글씨를 쓸 때, 글씨의 획이 굵어지면 그 다음 획으로 그 굵은 획을 어떻게든 커버를 해야 합니다. 또한 행과 행의 조화를 모색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되는 한 장의 서도 작품은 서로가 서로에게 한껏 기대고 있는 글씨가 됩니다. 서로 기대고 도와서 이뤄내는 높은 조화와 균형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경우를 서도의 높은 경지라고 생각합니다(신영복, 1998c).”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중략)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신영복, 2006a: 90).”


  “논어 위정편에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론만 있고 실천하지 않으면 어둡고, 실천만 하고 이론이 없으면 위태롭다고 합니다. 실천은 조건적이고 특수한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에 보편성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 없으면 상당히 위험합니다. 학과 사의 균형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문화와 전통 속에는 이처럼 풍부한 관계론이 있습니다(신영복, 1998b).”


  신영복은 주역의 사상에서 동양적 사고의 기본적인 틀을 보고 있다. 그것은 세상을 인식하는 범주(範疇)이며 관계론적인 사고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신영복, 1998b)는 것이다. 『주역』은 사회 경제적으로 농경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는 유한 공간사상이며 사계가 분명한 곳에서 발전될 수 있는 사상이다. 반복적 경험의 축적과 시간관념의 발달 위에서 성립할 수 있는 사상이며 변화에 관한 사상이고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다. 사물과 사건과 사태에 대한 일종의 범주적 인식이라고 하였다. 요컨대 주역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역』(신영복, 2006a: 130-132)에서는 철학적 구도 이외에 매우 현실적이고도 윤리적인 사상이 일관되고 있다. 절제사상이다.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절제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며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은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 관계론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논어에 대한 신영복의 관심은 섬세하다. 특히 『논어』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사회 변동기에 광범하게 제기되는 인간관계에 대한 담론인데, 그 이유는 사회의 본질이 바로 인간관계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신영복, 2006a: 145). 신영복은 사회에 대한 모든 개념은 제도와 인간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제도와 인간이라는 두 개의 범주가 인간관계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될 수 있다고 본다.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인간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처럼 사회는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라 할 수 있다는 것. 즉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이고 그것은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라는 것이다.

  신영복은 『자본론』과『논어』는 다 같이 사회관계를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동질적인 책(신영복, 2006a: 146)이라고 본다. 자본 제도는 위계적인 노동 분업, 생산자에 대한 지배 체제이고, 계급 관계는 생산관계이기 이전에 인간관계이다. 때문에 제도의 핵심 개념은 바로 인간관계라는 것이다. 생산자에 대한 지배 권력이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에 의하여 행해지든, 사회주의 사회의 당 관료에 의해 행해지든 본질에 있어서는 그 역시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신영복은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 제라고 강조한다. 그것이야말로 사회변혁의 문제를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재편 과정으로 접근하는 것으로써, 이러한 태도야말로 정치 혁명 또는 경제 혁명이나 제도 혁명 같은 단기적이고 선형적인 방법론을 반성하고 불가역적 구조변혁의 과제를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누군가는 관계론이 불교의 연기(緣起)의 윤회론(輪廻論)과도 비슷하다 한다. 이에 윤회라는 그릇에 담아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개별적인 존재로 윤회할 뿐 아니라, 불가에서는 말하는 윤회와는 다른 것이겠지만. 사회라는 집합체도 윤회한다고 보는 자신의 생각이 적어도 그런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신영복은 답한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만다라처럼 얽히고설킨 인연으로 사회를 만들고, 그 사회는 다시 다음 사회로 이어지는 사회적 윤회를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테면 ‘존재’의 윤회가 아니라 ‘관계’의 윤회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녀에게, 벗에게 그리고 후인들에게 좀 더 나은 자기가 계승되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러한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좀 더 나은 세상으로 윤회되기를 원하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신영복, 2003: 371). 그러나 불가의 윤회론과 신영복의 관계론52)에 있어 결정적인 구별점은 그 귀(歸)에 있어 관계를 조직한다는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관점이라고 설명한다.


  ③ 관계론적 인식과 실천


  그러면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인식과 실천에서 이 관계론적 구성원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앞서 실천과 관계의 개념화에서 알아보았듯이, 사람은 실천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을 가지게 되며 이를 다시 실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진실성이 검증되는 것이다. 실천은 인식의 원천인 동시에 그 진리성의 규준이라 한다. 이처럼 신영복은 ‘실천→인식→재실천→재인식’의 과정이 반복되어 실천의 발전과 더불어 인식도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해간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거의 결정적으로 인식의 좌절, 사고의 정지를 의미한다(신영복, 2005: 277). 1984년 3월 1일자 감옥에서 형수님께 보내는 ‘한발걸음’이라는 서신은 신영복의 이러한 인식과 실천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독서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까닭은 ‘인식→인식→인식······’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현실의 튼튼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저는 다른 모든 불구자가 그러듯이 목발을 짚고 걸어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제가 처음 목발로 삼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즉 ‘과거의 실천’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의 인식이 내가목발로 삼은 그 경험들의 임자들의 인식을 배우고 그것을 닮아감으로써 비로소 걸음걸이를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징역 동료들의 경험들이 단지 과거의 것으로 화석화되어 있지 않고 현재의 징역 그 자체와 튼튼히 연계되거나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음으로 해서 강렬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실천이란 죽은 실천이 아니라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의 발견은 나의 목발에 피가 통하고 감각이 살아나는 듯한 감동을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각자 저마다의 걸음걸이로 저마다의 인생을 걸어가는 것이겠지만 거대한 실천의 대륙 위를 걸어가게 마련입니다(신영복, 2005: 270-280).”

 

  앞서 관계론의 인문학적 설명에서 예시한 논어의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에서 학(學)과 사(思)에 대한 신영복의 풀이는 관계론적 인식과 실천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이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에 관한 철학적 담론으로서, 그는 이것을 ‘학사담론’(신영복, 1998b)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영복은 이 관점을 역사의식으로 연장하고 있다. 즉 역사현상은 그것이 개인이든 사건이든, 하나의 단절된 객체로 한정할 수 없으며, 그것에 선행하는 여러 가지의 계기에서부터 그것의 발전, 변용의 가능한 방향에 긍하는 총합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관계론적 시각에서 ‘과거’란 완성되고 끝마쳐진 어떤 불변의 것이 아니며, 반대로 역사인식은 언제나 현재의 갈등과 관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사회의 진상을 직시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그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직접 방문하는 것이라는 소박한 민중의식은 뛰어난 것(신영복, 2005: 248)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는 역사현상에 있어 아무리 많은 자료를 동원하고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구사한다 하더라도 사회, 역사의식이나 철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과학적 사상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는 한, 결국은 코끼리를 더듬는 장님 꼴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사고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대상과 필자의 ‘관계’이다. 대상과 필자가 어떠한 관계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얼마만큼의 깊이 있는 인식이, 또 어떠한 측면이 파악되는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 즉 구경하는 관계 그것은 한마디로 ‘관계없음’이라 한다(신영복, 2005: 311-313). 세상에는 관조만으로 시작되고 관조만으로서 완결되는 인식이란 없기 때문이다. 앞서 관계론의 지반에서 ‘관계의 개념화’로 확인했듯이, 신영복은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의 출발은 대상과 내가 이미 맺고 있는 관계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대상과의 일체화야말로 우리들의 삶의 진상을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동시에 우리 스스로를 정직하게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앞서 관계론을 인식론적 면에서 읽어내었다면, 또 다른 면인 실천론적 범위에서의 관계론적 시각을 세워보자. 그에 있어 관계란 생명과 물질의 본질인 동시에 세계의 구성 원리고 사회, 개인의 구성 원리다. 그러나 개인, 사회, 세계의 구성 원리로서 관계가 갖추어야 할 실천적 조건이 있다. 관계일수 있는 조건은 대응면의 평등이다. 즉 존재론에 상대하는 세계인식론, 관계론의 현실적 조건은 관계하는 주체간의 대등(對等)이다. 이 최소한의 기본적이 조건이 없으면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조건이 없는 관계는 존재론, 즉 불평등한 관계이며 궁극적으로 흡수이며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패권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조건보다 먼저 앞서는 것은 개별적 존재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신영복, 1998c).

  서두에서 관계는 누구나 품고 있는 일상의 것이라고 했다. 신영복의 관계론적 관점으로 들여다보자면, 일상의 관계에는 ‘능동적 참여’를 만들어내는 필요성과 그 과정이 내장되어 있다. 각자가 마주하는 모순이라는 내적 계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 모순을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 인간적 삶을 위한 인식이야 말로 자신을 키워내고 진정한 자기변화를 담보할 수 있다. 즉 모순을 인식 한다는 것은 능동적 참여의 출발이다 곧 실천인 것이다. 능동적 참여(이희욱, 2009)는 ‘대상을 대상화(對象化)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관계망(關係網)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한 애정이며 이것은 내가 대상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인해 대상과의 입장의 동일함이 관계의 최고의 형태라고 신영복은 말하고 있다. 실천론적 영역에서 관계는 자기이유로 인식한 모순을 인간적 애정으로 결합시켜 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식은 그 본질이 능동적 참여이며 나와 이미 맺고 있는 관계의 발견에서 출발한다.


  (2) 관계론의 관점, 自由


  ① 자유(自由)는 자기이유


  홍윤기는 신영복이 주목하는 과거의 일들은 흘러간 것이 아니라 그 수많은 현재 중의 하나로 그 나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음(신영복, 1998a)을 지적하면서 신영복의 글에서는 역사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그 이음매, 과거의 사건을 우리의 현재와 접합시킬 때 즉 역사를 생환시키는데 있어 그 기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신영복은 ‘자기이유’에 대한 이야기로 답을 한다. ‘자기이유’는 관계론의 관점으로서, 인간적인 사회, 인간적 삶을 위하여 우리의 일상과 대상들을 파악하고 조직하는 관점인 동시에 현재의 복잡한 관점을 정리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설명한다. 그러기에 자기이유는 사회인식이나 역사인식의 토대로서, 현재가 미래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과거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저는 발전사관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면서 오히려 모순관계를 중심에 놓는 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부문의 세력과 이해(利害)의 모순을 변화와 운동의 내적 계기로 개념화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자유(自由)라는 개념이 그러한 관점에 근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시민사회의 정치적 자유라는 일반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손바닥에 직접 쓰면서) 자(自), 그리고 유(由), 자기의 이유, 자기의 이유를 갖는 사회, 그리고 자기의 이유를 갖는 개인의 삶. 이런 관점이 역사해석에도 유용하고 개인의 사상이나 실천에 있어서도 유의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신영복, 1998a).”


  자유는 일상과 대상들을 파악하고 조직하는 관점이며, 현재가 미래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과거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신영복은 말한다. 앞에서 살폈듯이, 관계는 자기가 아는 것을 인간적인 애정과 결합시켜 가는 과정이다(신영복, 2006b). 여기서의 안다는 것은 기존의 지배적 사회인식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 모순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식된 모순을 인간적인 애정으로 결합시켜 간다는 것은, 현재의 모순들이 자기이유에 의해 해석 되고 그로인해 보다 나은 삶으로 일상과 대상들을 다시 조직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현재의 모순을 재구성하는 실천으로 전화시키는 내적인 동력53)이 자기이유이라는 것이다. 즉, 버섯을 독버섯이니 먹는 버섯이니 나누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인식일 뿐이지 버섯 입장에서는 그런 것에 아무 의미도 없는 게 당연하다. 자유도 이와 같다. 결국 모든 이는 자기 자신의 이유로 걸어가는 것(김도형, 2011)이라고 신영복은 설명하고 있다.


  ② 자기이유로 본 역사와 시장


  신영복은 과거든 현재든 인간의 삶을 자유라는 시각으로 보려고 한다. 과연 인간이 어떻게 해야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의 답은 얼마만큼 생산하고 또 얼마만큼 소비하고 소유해야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떠난 세계의 역사현장들을 다녀본 결론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경제적 풍요 속에 있으면서도 사실은 자기의 이유, 자유를 갖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궁핍하고 문명 이전의 원시적 삶의 조건에 있으면서도 아주 자족적이고 자유로운, 한마디로 자기의 이유들을 갖고 있는 모습들을 마주한다. 신영복은 욕망의 충족도 상당 부분 자유의 내용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증폭될 수 있기 때문에 상한을 설정할 수 없고 그래서 자유는 양적 접근보다는 질적으로 접근해야 된다고 본다. 질적이란 의미는 자유의 최고치는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규정되어지는 부분인데, 모순의 양측면의 평등성이란 의미로 읽을 수 있겠다(신영복, 1998a).


  역사현장과 마찬가지로 시장도 자유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시장54)이 갖는 양면성에 대해 먼저 언급한다. 시장 또는 시장경제가 보장하는 자유로움을 존중한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의미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의 시장은 동시에 모순의 현장이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모순이 집중되는 구조이며 이 교환당사자의 모순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앞서서 모순의 양측 면에 있어서의 평등성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특히 이 점과 관련하여 시장이 결코 평등한 공간이 아니라는 데에 그것에 대한 거부의 이유가 있다. 교환 당사자 간의 불평등만 시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모순, 개인과 전체의 모순, 인간과 자연의 모순 등 여러 모순관계에 있어서 대립측면의 평등성을 시장에 기대할 수 없다(신영복, 1998a)고 신영복은 보고 있다. 물론 개인의 개성과 자유, 사회의 다양성과 변화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것과 연결되기에 시장의 원리, 시장의 기본 패러다임은 존중 되어야겠지만, 문제는 이 시장에 있어서의 상품가치에 대해서만큼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론 자유의 공간이긴 한데, 그것이 가치 교환의 현장으로서 무수한 부등가교환의 복마전으로 전락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 합법적인 수탈의 현장이 되고 비정한 공간으로 전락할 수 있는 그런 양면성이 있다. 그래서 이 점 때문에 신영복은 시장경제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자로 끝까지 남을 수 없다. 오히려 시장이란 공간 그 자체가 어떤 저의를 가진 집단 또는 사회적인 힘이 통제해내고 있다면 최소한으로 우리가 부여했던 시장의 자유공간으로서의 의미도 훨씬 축소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장과 자유를 연결시키는 정서는 반봉건적인 시민사회의 정서에서 유래된 매우 오래된 패러다임인 것이다(신영복, 1998a).

  이렇게 역사와 시장에 대한 그의 인식은 자유라는 관점으로 읽혀지고 있다. 그의 자유라는 개념은 그가 처한 현실에서 모순을 드러내고 새로운 인식과 실천을 구성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를 능동적 운동과 변화의 실천으로 엮어내는 신영복의 자유의 개념은 과거에 대한 관점과 미래에 대한 구도에도 그 영향을 파생시키고 있다.


  (3) 자기의 이유와 관계의 구성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이유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신영복은 궁극적으로 자유라는 개념이 자기의 이유를 갖는 것이라고 본다면 자유라는 것은 어떤 단일한 개념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고 한다(신영복, 1998a). 오히려 진정한 자유로움은 다른 사람들과의 배타적인 정체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내 속에 들어와 있고 내가 겪은 모든 사건 또한 내 속에 들어와서 나를 만듦으로 동시대 사람들과 얼마나 융화되느냐의 문제임(신영복, 2007b)을 신영복은 반복적인 추체험을 통해 깨달게 된다.

  그러하기에 여기서 찾아보아야 할 것은 자기이유를 구성하는데 있어 가장 바탕에 있게 되는 것에 대한 주목이다. 신영복은 열등감, 즉 콤플랙스에 대한 자각이라고 명확히 가리킨다. 앞서 非근대를 위한 지반에 있어 식민지적 문화를 깨트리는 것에 대해 살펴보았듯이 열등의식을 안고 있는 한 온당한 자기이유, 온당한 관계를 만들어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서구적인 것 혹은 보다 근대화된 어떤 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그에 한없는 열등감과 패배감에 시달리는 것은 자기 것,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신감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있어서 그 사람의 판단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콤플렉스이며 합리적인 판단을 가장 심하게 왜곡시키는 것 역시 콤플렉스다. 이것은 생활의 시공간 어느 영역에서나 끼어든다. 그래서 개인에 있어서는 최소한 자기가 어떤 종류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확실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고 신영복은 지적한다. 또한 이러한 콤플렉스가 사회화되어 있는 경우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데, 콤플렉스가 사회문화 속에 구조화되어 있는 경우에는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한 사회는 성장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하더라고 발전은 가망 없는 사회라고 조망한다. 자기이유와 관계의 구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사고, 판단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콤플렉스란 대등한 파트너가 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상태이기에 관계할 수 있는 주체적 입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콤플렉스를 청산하는 일이 없이는 우리가 진정한 자유나 해방을 이야기하지 못한다(신영복, 1999)고 신영복은 말하고 있다.


  신영복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하기에 관계 맺음이 없이 길들이는 것이나 불평등한 관계 밑에서 길들여진 모든 것은, 본질에 있어서 억압이라고 본다. 한 개의 나무의자든, 높은 정신적 가치든, 무엇을 공유한다는 것은 같은 창문 앞에 서는 공감을 의미하며,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운명의 연대를 뜻한다. 그러나 정작 관계 일반의 본질은 긴장과 갈등이며, 이 팽팽히 맞선 관계가 ‘살아 있는’ 관계의 실상임(신영복, 2005: 286)을 그는 짚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를 그 자신과 그 자신이 놓여 있는 존재 조건을 정직하게 인식하는 계기로 삼고, 이 긴장과 갈등을 견딜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역량을, 그는 그 개인의 고독한 의지 속에서 구하려 하지 않고, 우리들이 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튼튼한 연대감 속에서 찾으려 한다. 결국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픔’을 공유하는 것에부터 시작하는 것(신영복, 2005: 286-287)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관계 시작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서 각자의 자기이유로 깊숙이 발목 박고 서 있는 것 그 자체임을 강조한다. 그곳에서 고유한 주관이 객관으로 그 지평을 열어주는 노력을 통해 비로소 전체와 튼튼히 연대되어지고 구성되는 것이라고 한다.


2) 非근대를 향한 걸음은 어디서부터 : 그 출발지와 방향


  (1) 주체적 인식, 성찰


  자기 자신에 대한, 우리들의 처지에 대한 정직하고도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신영복, 1999).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이다. 그러고 관계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신영복은 성찰55)이란 나 자신을 돌이켜보고 내가 맺고 있는 사회, 역사,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신영복, 2010: 1-2)라고 한다. 그는 우리의 인식은 아는 것과 보는 것의 갈등56) 속에서 진행되어지지만 세계와의 능동적 관계형성을 통하여 주체적으로 구성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인식은 본질적으로 능동적 참여이되 소통이며 주체적 조직이되 부단한 변화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반대로 그러한 관계가 자기의 인식과 관념을 변화시켜주고 열어주는 것(신영복, 1999)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는 인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판적 성찰이다. 비판적 성찰은 인식문제를 둘러싼 전체 과정을 거시적으로 조감하는 것이다. 성찰은 최고의 인식이다. 은폐된 것을 드러내고 가두고 있는 벽의 바깥을 생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체와 대상이 맺고 있는 관계망을 포괄하는 사고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주체적 인식의 핵심은 성찰이다. 성찰에 있어 개인의 일차적 과제는 인간에 대한 시선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사실보다는 진실에 주목하고 그 사람과 그 처지를 함께 이해하는 자세(신영복, 1999)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확장하면 기존의 사회의식을 옳게 인식하는 일이다. 바로 사회의식에 대한 주체적 인식(認識)인 것이다. 


  기존의 사회의식을 신영복의 ‘문맥읽기’57)로 들여다보자면, 어느 시대의 어떠한 사회든 사회는 고유의 문맥을 가지고 있으며 개인의 의식은 그 문맥 속에 놓여 있다. 우리의 의식은 특정한 사회, 특정한 문화, 특정한 이데올로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이 갖게 되는 사회의식은 여러 층위의 편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시대적 문맥이라 할 수 있다. 중세의 마녀라는 문맥이 있었듯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문맥 역시 대단히 많다. 아직 한국은 전쟁 중이다. 우리나라가 소통이 안 되는 바탕에는 전쟁 문맥이 깔려 있다. 자기가 변화하지 않으면 소통이 안 된다. 우리 시대가 갇혀 있는 문맥은 분석하고 대상화하는 것이다. 또 우리사회의 특수성으로, 중심부를 향한 열등의식인 종속성(從屬性)이라는 문맥도 있다. 그러하기에 비판적 성찰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절실한 과제(신영복, 2007a)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은 상품사회다. 상품은 등가물로서 자기를 표현해야 한다. 이것이 상품사회의 일반성인 상품 문맥이다. 바로 교환가치다. 사람을 구두 한 켤레와 값이 같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굉장히 서운해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 연봉이 10억 원이라고 하면 섭섭해 하지 않는다. 품성이나 매력과 상관없이 인간이 등가물로 표현된다. 개인이든, 국가든, 혹은 기업이나 단체든 간에 자기 가치를 키우는 것이 근대사회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른 사람을 대상화하고 분석하는 것이다(이희욱, 2009).


  이처럼 성찰58)은 우리와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신영복, 2007a). 현실을 그 역사적 관점에서 인식하는 것, 그리고 구조적 관점에서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한 편으로는 우리들에게 개입하고 있는 편견들을 드러내는 비판적 인식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배제된 부분들을 생환하는 주체적 인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벽을 허무는 해방적 관점, 나아가 현실의 건너편을 바라보는 대안적 관점까지를 포괄하는 인식체계이다. 성찰은 우리 자신을 객관화하되 다시 주체화하는 일련의 변증법적 구조를 띠고 있다고 신영복은 설명한다(신영복, 2007a). 또한 성찰은 자각적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담보하게 하는 궁극적 모태가 되며, 최종적으로는 창조적 전망성을 담보해내는 ‘최고형태의 인식’임을 선언하고 있다.

  (2) 인간의 이해와 인간적 가치


  ① 인간의 이해


  신영복에 의하면 우리가 새로운 것을 실천하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적인 방법론은 바로 인간을 그 중심에 놓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非근대를 향한 걸음은 인간주의에서 출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주의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제고(提高)하는 데 의미가 있다. 그에게 있어 인간에 대한 관심이란 단지 생산과 이익창출, 혹은 소비를 위한 인간의 모습만으로 인간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인간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아파트에 유명한 변호사와 별로 미인이 아닌 부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흔히 말해 어울리지 않는 부부였습니다. 모든 아파트 사람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아파트 사람들이 내린 결론이, 그 부인 집이 부자일 거라고들 했습니다. 루저 파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보는 관점에서 키가 작은 남자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게 등가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제가 감옥 초년에 깨달은 게 있습니다. ‘내가 근대적 사고에 충실한 근대인이구나’하는. 죄수들을 바라볼 때 저 사람이 결손가정인지, 지위는 어떤지 계속 분석하고 대상화했습니다. 그런 기간 동안은 당연히 왕따였습니다(이희욱, 2009).”


  우리가 갇힌 근대 문명은 인간 이해에 있어서 이성으로 상대방을 대상화하고 타자화 하는 인간이성의 주체성에 철저히 매몰돼 있는 사고임을 그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들어내 보이고 있다.


  “똥치골목, 꼬방동네, 시장골목, 큰집 등등 열악한 삶의 존재조건에서 키워 온 삶의 철학을 부도덕한 것으로 경멸하거나 중산층의 윤리의식으로 바꾸려는 여하한 시도도 그 본질은 폭력이고 위선이다(신영복, 2005: 127).”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신영복, 2005: 329).”


  단지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이 그의 모습과 이름 직업 등 그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다. 그 관계를 타고 그의 삶이 전달되고 그의 관계망이 시대성을 띠게 되고 그것이 나와 결합하여 내 안으로 들어와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비로소 그를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서 있는 시대, 그 사람의 삶이 비로소 나에게 읽혀진다.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  「顔淵」

번지가 인仁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愛人이다.” 이어서 지知에 대해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지知란 지인知人이다(신영복, 2006a: 172).”


  애인(愛人)과 지인(知人)은 『논어』의 근본 담론이다. 신영복은 지인(知人)이란 타인에 대한 이해일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본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이기에 그러한 인간을 아는 것이 지(知)라는 대단히 근본적인 담론을 공자는 제기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지식은 사람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지(知)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추구하는 지식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한 점의 인연도 없으며, 지(知)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사회일 뿐이라고 신영복은 강변하고 있다.


  “어느 개인이 자기의 언어를 얻고, 자기의 작풍을 이루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는 어딘가의 ‘땅’에 자신을 세우고 뿌리내림으로써 비로소 이룩되는 것이라 믿습니다...징역 사는 사람들이 겪는 정신적 방황은 대개가 이처럼 땅이 없다는 외로운 생각에 연유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신영복, 2005: 237).”


  인간의 이해에 대해 삶의 질의 문제, 지역, 현장과 치열하게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보는 신영복은 그러하기에 사회와 인간을 분리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의 일상은 관계이며 관계는 일상의 실천인 동시에 사회적 실천이 되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실천을 관통하는 중심축은 인간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사회가 곧 인간이며 사회적 실천과 인간주의가 동시에 추구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은 고뇌하고, 만들어 내고, 땀 흘려서 일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들어내는 것이기도 하다(신영복, 1996b). 이렇듯 변증법적 사고나 동양적 사고가 다 그렇지만 사회와 인간을 따로 떼서 대립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고 본다. 사람들이 곧 사회이고 이 두 개는 병행되어야 한다. 어느 것을 선행시키고 어느 쪽에 더 역점을 두느냐 하는 것은 그 사회의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주의는 마땅히 현장본위주의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정신운동, 도덕재무장운동과 비슷하게 될 수도 있음을 주의하고 있다. 인간주의적 인간상에 대해 규정한다는 것은 그래서 실천 자체를 도식화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긴 하나 자본에 의하여 대상화되거나 소외되지 않은 인간관계(신영복, 1992), 생산을 위한 전문화된 인간형에 반하는 종합적인 인간형이 바로 인간의 발전이자 행복이라고 보고 있다.


  “나는 파르테논 신전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그리스인들이 도달한 인간주의의 절정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자기완성, 자기충족의 인간주의가 달려갔던 ‘인간주의 이후’에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사회가 무한한 정염으로 몰두해 온 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많은 생산과 더 많은 소비를 향하여 달려간 인간주의의 오만과 독선의 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밖으로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스스로 인간의 터전을 황폐화하고, 안으로는 수많은 타인을 양산하여 서로 맞세움으로써 인간관계를 비정한 것으로 만들어 왔습니다(신영복, 2003: 335).”


  그러나 신영복이 세계여행의 길목에서 마주한 것은 오늘의 인간주의가 만들어낸 반인간주의적 현실이었으며, 과연 그 인간을 어떻게, 누가 구원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인간주의는 인간이 만들어 쌓아놓은 자본으로부터 그리고 무한한 허영의 욕망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다(신영복, 2003: 337). 그렇다면 끊임없는 이기심과 경쟁, 돈과 물질주의 같은 자본주의 세례를 받고 있는 조건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갖는 인간으로의 발전이 가능할까?


  ② 인간적 가치


  스승이란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의 거리를 들어 보이며 그곳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인격적 모범이라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말을 빌려 신영복은 스승, 교육의 인간적 가치를 예로, 그에 반하는 오늘날의 신자유적 가치와 대비하여 제시하고 있다. 스승의 인간적 가치, 인격적 가치라는 특징에 주목한다. 그는 사람은 사람을 배우는 것이 가장 쉽고 또 흥미롭기 때문에 교육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인격과 인성(人性)의 형태로서 제시되고, 또한 교육의 궁극적 가치 역시 인성(人性)의 고양(高揚)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성 교육, 열린교육, 팔리는 교육, 산학협동이라는 현재의 우리시대의 교육적 가치에는 미래담론의 허구성과 나란히 우민적 프로그램이 숨어 있음을 직시한다. 교육은 교육서비스의 생산과 소비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은 일견 민주적 구상을 담고 있으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상품논리이며 시장논리임(신영복, 2007a)을 신영복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현안이 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가 그것을 예시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인격이 거세되고 있다는 것, 교육에 있어서 인간의 문제가 제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교육을 인간과는 무관한 하나의 물질적 대상 즉 상품으로 규정하는 것이고, 이러한 체계에서는 스승과 같은 인격적 개념이 설 곳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인간노동'이 가치의 실체라는 관점에서 상품의 가치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명제는 일견 매우 인간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착각을 주지만, 사실은 냉혹한 물량적 계량지표에 의하여 측정되는 어떤 것일 뿐이지, 자본주의하의 상품생산노동이 인간적이라는 주장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님을 신영복은 밝히고 있다. 더구나 세계화과정에 있어서 상품의 가치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하여 결정된다(신영복, 2007a)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보다 인간적 가치로 환치해 보자면, 생산성을 제고(提高)하는 것보다 생산과정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이 더욱 중요하고 자본축적보다는 자본축적의 과정을 인간적 논리로 관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신영복, 2002). 이렇게 우리의 교육이 그 질(質)에 있어서나 양(量)에 있어서 붕괴되지 않을 수 없는 객관적 상황을 상품화와 세계화는 극명하게 보여주며 동시에 강요한다. 인간적 관점이나 우리사회의 주체적 가치는 설자리가 없다(신영복, 2007a). 

  스승이 인간적 가치이어야 한다는 신영복의 주장에는 사회는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이며, 삶의 축적이 역사라는 인간주의적 관점이 바탕에 깔려 있다. 뿐만 아니라 가장 훌륭한 가치는 물질적 풍요와 고도의 소비수준이 아니라, 훌륭한 사람, 훌륭한 인간관계, 그리고 훌륭한 역사라는 거시적 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적 가치는 그 자체로서 화폐가치와 물질적 가치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며, 나아가 근대성에 대한 반성적 관점을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신영복의 인간주의는 사회관계를 인간관계로 이해하게 하고 인간주의적 가치에 주목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관계론의 핵심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관계론의 중심에서 非근대를 위한 방향성으로 우직하게 조직론을 관통하고 있다.


3) 세계를 어떻게 조직 하는가 : 역량의 조직과 그 성격


  (1) 주체역량의 조직


  非근대를 위한 관계의 출발점인 주체적 인식, 비판적 성찰에 이어 이들의 전제 위에 인간에 대한 이해와 그 가치라는 인간의 복원을 신영복이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인간적 삶을 조직하는 구체적 방법들을 지금부터 찾아볼 것이다.


  신영복은 사회변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적 역량이라고 한다. 그것도 양적으로 많은가 적은가 보다도 질적인 측면의 조직적 역량, 조직화된 역량이다(신영복, 1998a). 왜냐하면 다수에게 힘을 부여하는 주요한 수단이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다수는 주로 조직을 통해 힘을 획득한다(Rueschemeyer, 1995: 55-109). 그렇다면 포스트 모던이즘이라는 근대적 주체의 해체 안에서, ‘주체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주체적 역량에 있어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문제의식(Badiou, 2009: 16-17)은 신영복으로 하여금 다시 ‘후사건적 실천이 주체를 형성한다’는 것을 강조하게 한다(이희욱, 2009). 주체는 실천의 산물임을 다시 한 번 각인 시킨다. 주체성이라는 개념은 어떤 과정의 총화로서 표현되는 것이기도 하고(신영복, 1992), 그것은 자기를 어느 동네, 누구의 이웃에, 어떤 문제 속에 자기를 세우는 것(신영복, 1989)이라고 한다.

  주체적 역량을 조직한다는 것을 현장의 언어로 풀어보자면, 세계를 조직하려는 실천과정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운동성을 생활에서 이끌어내는 것이며 역량을 결집하는 것인데, 역량을 결집한다는 것은 여러 부문에서 고립적으로 형성된 역량들이 어떤 형태의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역량의 경우 뿐 아니라 개인의 역량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역량이란 그 개인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의 문제라고 신영복은 본다(신영복, 2001). 관계는 개인적 삶인 동시에 사회적 실천이다. 현실의 다채로운 모순들 속에서 일상을 쌓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며 그 삶은 사람마다 다양하게 관계되어지는 사회적 실천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결국은 우리의 주체적인 역량을 이 모순들 속에서 어떻게 묶어 낼 것인지가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자본과 자본, 자본분파간의 모순, 또는 자본과 노동의 모순, 또는 상품과 소비자 간의 모순, 또는 민족모순, 이런 아주 무수하고도 복잡한 모순들이 별개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로 또는 계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며 이것이 모든 현실의 일반적 모습임을 신영복은 드러내 보인다. 그러기에 이러한 모순군에 대한 원인을 우리의 내부에서 찾는 실천적 관점으로 주체적 역량을 중심으로 모순구조를 재편성하여 대응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실직하고, 교육, 환경, 교통, 빈민, 농민, 노동 등 수많은 현장에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순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그중에 어느 것이 유일한 모순의 현장인가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실천적인 관점에서도 그것이 그리 중요하진 않다(신영복, 1992). 문제는 우리가 좀 더 자유로운 사고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열어놓는 어떤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게 현재의 당면 과제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가 볼 때 소시민적 일상생활을 부정하고 사회 변혁적 요구에 충실한 인간상을 강조하면서 특히 노동 현장을 특권화 함으로써 대중의 현실적 정서를 무시하는 것, 다양한 삶의 현장에 서열을 부여하는 것, 또 바람직한 인간상이나 사회상을 미리 규정하는 발상 등은 실천을 도식화하고 일반대중이 접근하거나 결단하기 어렵도록 만든다고 본다. 대신하여 그는 많은 이들이 현실적으로 몸담고 있으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 즉 학교나 기업과 같은 우리들의 일상적 삶의 영역을 실천의 장으로 삼으면서 긴 호흡으로 주체적 역량을 키워나갈 것을 제안한다(이병수, 2009).


  (2) 강물의 연대


  위에서 주체적 역량을 질적인 측면에서 보자는 이야기를 했는데, 연대59)야말로 그 핵심 고리다. 노자철학에서 살펴보았듯이, 연대는 가장 약한 사람들, 역량이 취약한 사람들의 전술이다. 또 그것 자체가 삶의 실상이며 관계이기도 하다(신영복, 2001). 그렇기에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가 관계하고 있는 관계망에 대한 사고를 길러 나가는 태도가 중요한데,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관계론적 사고를 키워나가기가 무척 힘들다. 신영복은 연대의 방법론에 관하여 노자를 다시 펼친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제8장


  노자의 철학을 물의 철학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처럼,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善)과 같다(上善若水)고 하는 까닭을 신영복은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다. 첫째, 만물을 이롭게 하며(水善利萬物) 둘째, 다투지 않는다.(而不爭)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이다. 주체적 역량이 미흡하거나 객관적 조건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과도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다투는 형식이 된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다.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낮은 곳으로 지향하는 연대이다. 신영복은 이 구절이 노자 정치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본다. 즉 노동. 교육. 농민. 환경. 의료. 시민 등 각 부문 운동이 각자의 존재성을 키우려는 존재론적 의지 대신에 보다 약하고 뒤처진 부문과 연대해 나가는 ‘하방 연대’ 방식이 역량의 진정한 결집 방법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8장은 구체적으로는 연대와 전위 조직의 실천 방법에 관한 강령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풀이한다. 거선지(居善地)는 현실에 토대를 둔다는 의미이다. 현실 노선과 대중노선을 토대로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심선연(心善淵)은 마음을 비운다는 의미로 사사로운 목표를 경계하는 것이다. 여선인(與善仁)의 여와 인은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동지적 애정으로 결속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언선신(言善信)은 그 주장이 신뢰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즉 개혁과 변혁이다. 정선치(正善治)는 그 방법이 치(治)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평화로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영도 방식이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로 강제나 독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최대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이끌어낸다는 의미이다. 사선능(事善能)은 전문적인 능력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며 동선시(動善時)는 주체적 역량과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움직이는 것이다(신영복, 2006a: 290-291).

  이상에서 제시한 실천 방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신영복은 ‘과학적 방법’이라고 부른다. 과학적 방법이란 싸우지 않는 것(不爭)60)이며 따라서 오류가 없는 것(無尤)이다. 이어지는 구절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노자의 ‘물의 철학’에 대한 신영복의 주해는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과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이고, 그 이유는 약한 것이 다수이기 때문이기에, 다수는 그 자체가 힘이고 정의(正義)이기에, 그리고 그 정의의 실천 방법 역시 다투지 않고 아래로 연대하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노자가 제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과학적 접근을 한다면 당연히 각 부문이 갖고 겪는 역량분석이라든가 또는 모순과 대치할 위치라든가 하는 것을 밝혀내고, 나아가 어디서부터 어디와 연대하고 어떤 순서를 밟을 것인가 하는 관점이 되지만, 신영복은 사회변혁을 최고의 종합예술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을 제안한다. 그러기에 연대를 하나의 통일체로 목적화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것들의 총체적인 전화의 과정을 예술적 작업으로 본다.


  신영복은 이런 관계론적 사고를 운동론에 적용하면 그것이 곧 연대론(신영복, 2001)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각 부문운동이 가지고 있는 조직적인 역량의 존재형태와 자기 분야의 문제를 과거로나 미래로 조금 확대해서 보는 관점만 갖는다면 부문 간의 연대, 수준이 높든 낮든, 연대 사업이나 연대조직을 얼마든지 모색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무분별하고 상투화된 연대운동은 오히려 부문운동의 정체성과 전문성을 낮추어버릴 위험이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최고의 비극현장을 중심으로 연대하는 방법보다는 각 부문에서 그런 역량들을 부지런히 꾸려가면서 일단은 외부로 열어놓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신영복, 1998). 이렇게 연대는 관계성의 문제이기에 연대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신뢰성, 신뢰집단의 문제이다. 한 사회의 연대성의 층위는 결국 신뢰집단을 건설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신영복, 2001).


  (3) 변방에 서다


  신뢰집단, 어느 시대든지 그 다음 시대를 열어갈 공간, 집단은 나타났다고 신영복은 지적한다. 공자가 말하는 군자의 개념 역시 당시의 귀족적 신분사회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새로운 엘리트 집단, 주체적인 그룹을 개념화한 것으로 그는 이해한다. 공자가 제시한 군자로 대표되는 엘리트그룹은 특정시대의 특정 엘리트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기보다는 새로운 그룹들에 대한 필요를 제시했다고 보고 있다. 주체적 집단을 사람이라는 대상 이외에도 실천을 사회화하는 공동의 노력, 혹은 그것을 수행하는 역할에 주목하는 사회적 공간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신영복, 2007a). 이점에 있어서 개인의 결단을 돕고 그 결의를 지속적으로 견지하게 하는 오늘로부터의 독립공간으로서의 공동공간의 건설은 그 자체에 의의가 있다고 설명한다. 갈등구조와 그 모순을 사회변화의 동력으로 사고할 수 있는 역동성을 내장하는 곳, 그것이 바로 사회적 공간, ‘신뢰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변방61)은 신뢰집단, 사회적 공간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신영복은 변방을 ‘기존의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와 창조의 공간’이라고 말하고 있다(신영복, 2012: 91). 그것을 저항이라는 형식으로 이해해도 된다면, 저항이라는 형식으로의 신뢰집단, 사회적 공간으로의 독립공간은 부단히 자기의 이해관계를 버리고 꾸준히 소통하면서 변화하는 유목주의(nomadism:노마디즘)62)적인 운동성을 갖는다고 본다. 그리고 그곳은 중심부에 있지 않고 변방에 위치하며, 이런 사회적 공간이 우리의 역량을 지킬 진지63)의 역할을 담보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흔히 변방은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로 인식되기에 그에 대한 관심은 사회적 약자와 마이너리티에 대한 온정주의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신영복이 말하는 변방64)은 결코 공간적 의미나 감성적 관점이 아닌,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과 새로운 가능성이다(신영복, 2012: 39-40). 그렇기에 변방 의식, 변방성은 갇혀 있는 틀을 깨뜨리는 탈문맥이며, 새로운 영토를 찾아가는 탈주65) 그 자체라고 말한다.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이유, 그곳이 변화의 공간이고, 창조의 공간이고, 생명의 공간이라는 이유는 이런 변증적 관계와 유기적 운동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리라. 그러기에 비록 어떤 장세(場勢)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변방 의식을 내면화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그는 덧붙이고 있다(신영복, 2012: 26).

   

  “변방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층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중심부 내에서도 변방이 있을 수 있고, 변방에서도 중심이 있을 수 있다고 봐요. 그래서 변방이라는 것은 특정한 카테고리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현재 상황을 넘어서려는 새로운 지향성을 갖는 그런 관점을 변방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변방에 대한 다이나믹한 적극적 의미를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변방에 있다는 사실이 결코 주변부나 사회적 약자로 직결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변방은 굉장히 자유롭고 새로운 것이 창조되는 곳. 역사적으로도 그랬어요. 변방이라는 것은 자기의 어떤 처지를 뛰어넘어 보다 먼 미래,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끌고 나가는 공간이 변방입니다(반디앤루니스, 2012).”

  그렇다면 변방성을 내포한 이러한 공간들은 그 건설을 위해 어떤 조건들을 감당하고 있어야 하는가? 신영복의 이야기(신영복, 2001)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내부의 민주주의, 정치적 민주주의에 관한 것인데, 내부의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뿐만 아니라 주민들과의 정치적 민주주의이다. 이러한 일상생활에서의 민주주의야말로 민중적 토대인 동시에 나아가 신뢰의 바탕이 된다. 그는 현재 우리 사회의 역량 배치나 조직 정형으로 볼 때 모든 운동단체는 이러한 기본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생활에서의 민주주의’로서, 절차적인 형식논리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민중현실의 문제, 즉 정치목표의 문제인 것이다. 정치적 당면과제를 설정하고 동시에 그 목표의 민주적 공유에 대한 이야기이다. 둘째, 민중의 지근거리(至近距離)에 근거지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신뢰를 구축해 가고 그 근거지를 기반으로 외부를 향해 연대가능성을 열어놓는 일이 순서다. 한마디로 긴 호흡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이것은 일하는 스타일에 관한 것인데,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옥에서 얻은 이 충고의 배경에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라는 인식이 전제해 있다. 겨울철에 남쪽 방과 북쪽 방은 온도 차이가 내복 두 벌이지만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든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북쪽방 수인들이 방을 바꾸려하지 않는 경험을 통해 신영복은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넷째로는 바로 따뜻한 가슴에 대한 것이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는 인간의 의식은 뇌피질에서 이루어지지만 사고(思考)는 가슴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또 가슴이 원하는 그러한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따뜻한 가슴(warm heart)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즉 일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대부분이기에 우리가 새로운 것을 실천하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적인 방법론은 인간을 그 중심에 놓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가 관계하고 있는 관계망에 대한 사고를 길러 나가는 태도가 중요하기에 껴안고 함께 가야 한다는 의미다(신영복, 2001).

4) 실천과 과정으로서의 조직66) : 非근대 요건들의 재배치

  ‘관계가 非근대를 조직한다’는 주장을 앞서 신영복의 관계론에서 그 요건들의 적절한 추출과 재배치로 그 가능성을 확인하였다면, 과연 그것의 가능성만으로 ‘조직론적 입장으로 읽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요구받는다. 이 물음의 답은 ‘관계는 조직이다’라는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 이론과 실천적 영역에서 이 주장을 받쳐줄 답안을 작성해볼 것이다. ‘조직’에 관하여 이글은 ‘조직체’라는 것보다 ‘조직화’로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즉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실천과 과정으로 조직을 파악하려는 입장이다.


  우선 일상에서 조직이라고 하면 딱딱하고 상하적인 조직도가 떠오르기도 하고, 구시대의 긴장이 흐르는 일사불란한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우리의 시대적 경험 속에서 조직이란 단어는 역사적 사건들 안에서의 쓰임으로 인해 그 의미가 상당히 경직되고 왜곡되어 있다. 이런 시대적 문맥을 벗기고 본연의 의미를 찾아 조직이란 말을 다시 불러 볼까 한다.

  그 미적 표현을 사전적 의미로 가지고 있는 조직(組織)이란 말은 짤 조(組), 짤 직(織), 두 한자가 모두 ‘짜서 이루다’ 즉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만큼 그 실천성을 진하게

내장하고 있다. 날실과 씨실로 짠 천의 짜임새라는 미적 표현은 이것의 이미지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상상의 나래를 조금 더 펼쳐 보자면, 조직은 일방향적이지도, 직선만도 아니다. 그들의 만남은 수많은 세계를 만들어내는 다방향적이며 유기적인 역동성을 내장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 사회 등 인간관계에서 더욱 생동감 있게 표출된다. 인간관계에서의 조직은 그의 구성요소들이 결합하여 유기적인 움직임을 갖는 통일체, 혹은 그 행위와 과정을 의미한다. 곧 조직은 어떤 형태의 관계 맺기를 하느냐에 대한 문제이다(신영복, 2001).

  

  (1) 이론적 받침

 

  이에 조직67)에 관한 다양한 입장과 여러 가지 해석들 중에서 이 글의 시각과 가장 비슷한 이론적 논점을 선택하여 글의 논지를 선명히 하려 한다.68) 

 

  조직사회학 시각의 상호작용론자로 분류할 수 있는 사이먼(Herbert Simon)과 마치(James March)는 조직을 주어진 구조가 아닌 구조화 과정으로 보는 조직분석시각을 태동시켰다. 사이먼은 인간행위의 객관적 합리성은 허구라고 주장하였는데, 조직구조는 이미 저기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구성되는 과정이라는 시각이다. 이들의 생각을 발전시킨 웨익(Karl Weick) 역시 조직구조를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구성 되어 가는 과정(process)으로 보고 이에 따라 그는 조직이라는 용어보다 조직화(organizing)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상호의존적인 조직구성원들의 행위를 통해 구성되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 단순히 환경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내규화하여 구성하는 것이 조직화이며 이것이 조직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공유하는가에 따라 규정되는 인식의 구성물이라는 것이다(유홍준, 1999: 161). 또한 실버맨(Silverman David)은 조직을 그들 자신의 문제해결을 시도하는 동기화된 사람들이 산출해 내는 것으로 정의한고, 과정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는 개인의 행위가 내포한 의미를 통해 일상세계가 사회적 실재로서 규정되기 때문에 사회학적 접근의 중요한 관심사는 행위를 이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에 따라 그는 조직분석의 초점이 조직구성원들의 행위의 소거틀을 확인하는 것이어야 하고, 이는 조직행위자들의 상황정의69)를 연구함으로써 가능하다(유홍준, 1999: 169)고 주장하였다. 곧 조직은 인간의 주체성과 능동성을 통해 구성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실버맨의 이론으로 조직을 읽어보자면, 근대와 그 모순이라는 상황정의 속에서 동기화된 非근대를 일상세계로 산출하여 사회적 실재로 만들어내는 것이 ‘조직하다’이다.


  정리해보면, ‘조직이란 문제 해결을 위한 동기화된 사람들이 상호작용을 내규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글의 범위에서 볼 때 非근대의 요건들은 관계론에서 추출되어진 관계론적 관점, 성찰, 주체역량, 연대, 변방, 인간의 이해와 인간적 가치 등이다. 요건들의 재배치가 조직이라면, 이 요건들이 위의 조직이란 정의에 적합하게 상응되어야 한다. 조직의 정의를 세 부분으로 그룹화 하여 각 그룹에 非근대의 요건들을 각각 배치해 본다. 이렇게 하여 조직의 정의를 관계론적으로 재구성해 보자면 다음처럼 읽어낼 수 있다. 즉 조직이란 ➀ 문제해결을 위한 관계론적 관점과 성찰을 통해 ② 동기화된 사람들을 연대와 변방성으로 주체적으로 역량화 하고 ③ 내규화하는 것이다. 내규화는 현실적인 삶의 틀에서의 감성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그것은 인간의 이해와 인간적 가치로 발현된다.


(2) 실천적 받침


  땅끝마을의 작은 운동장에 서 있는 신영복에게 다시 돌아갈 때가 됐다. 인간적 삶을 위한 조직화(組織化)를 관계론에서 구상해보았다면, 그의 변방을 찾는 여행길이 조직화(組織畵)의 한 부분을 그려내고 있는 붓길 임을 짐작할 수 있다. 조직화를 보는 법은 그의 담론과 실천이 맞닿아 있는 지점, 접맥 지점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非근대 요건들을 이론적 정의에 부합시켜 재배치하는 작업이다. 관계론을 조직론으로 읽어내는 것의 실천적 받침을 위의 관계론적으로 재구성된 조직의 정의를 기준으로 하여 신영복을 통해 쌓아 보일 것이다.


  ➀ 문제해결을 위한 관계론적 관점과 성찰


  그의 엄밀하고도 깊은 통찰성을 가장 확연하게 보여주는 자료는 그의 여행기다. 1996년의 국내 여행기70)와 1996년 말부터 1년간71), 그리고 1999년의 35일의 세계여행72)은 일반적인 여행기라기보다는 역사 탐찰기, 혹은 문명 성찰기다. 그것은 단순히 문화나 역사 유적지를 방문한 기록이 아니라 역사지를 매개로 하는 실천적 철학서라고 해야 더 옳다. 특히 1999년 12월, 20세기를 성찰하고 21세기를 열어가는 희망을 탐색하는 세 번 째 세계여행의 첫 걸음은 아프리카에서 시작한다. 20세기에 가장 주목받지 못한 땅, 패권주의, 제국주의로 인해 국경이 모두 직선인 아프리카의 비극을 케냐의 카쿠마 유엔기지 난민촌 등을 돌며 확인한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전의 참사 또한 근대의 자화상으로 마주하였다. 대상을 분석하고 소유하는 것에 매몰되어 있으며,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근대의 착각과 오만의 모습이었다. 쿠바의 자립 공동체와 멕시코의 대학생들과의 만남, 그리고 프랑스의 콩코드 광장에서 그는 자유란 외부로부터의 억압이 없는 독립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진정한 자유는 자기의 이유를 갖는 것이며, 혁명 또한 모순을 은폐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그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일임을 기억한다.

   

  “혁명이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만들어내려는 미지의 작업입니다. 따라서 인식의 혁명이 먼저 요구됩니다....... 낡은 틀이 와해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틀에 대한 분명한 구상이 마련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 진정한 위기입니다.......우리는 지금 이상이 없는 현실과 현실이 없는 이상이 함께 추락하는 역사를 맞고 있습니다....... 동시대의 모든 민중들에 의해서 이상이 공유되고 있는 혁명은 비록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하더라도 본질에 있어서 승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실패는 그대로 역사가 되고 역사의 반성이 되어 이윽고 역사의 다음 장에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 점철되어 있는 숱한 좌절을 기억하는 방법도 이와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승리와 패배를 기억하는 방법을 새롭게 바꾸어내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역사 인식의 전환이기 때문입니다(신영복, 2003: 150).”


  절망과 좌절은 다시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82회 사회주의 혁명 기념일 축제를 보며 신영복은 사회의 저력은 무엇인가, 무엇이 변해야 그 사회가 변하는가 묻는다. 그것은 일상의 삶을 묵묵히 짊어지고 있는 민중이 변할 때 비로소 그 사회가 변하는 것이라고. 사회의 변화는 인간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한 진정한 역사가 되지 않는다고. 그러기에 인도의 8억의 인구와 같이 가려는 간디가 인도의 정신임을 그 여정 길 위의 민중, 그들의 삶과 이야기를 통해 읽어낸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인 판문점에서 우리의 21세기를 출발하는 전제는 평화구조의 정착, 공존임을 확인한다. 모든 다양한 주체와 가치를 승인하는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만드는 일이 새로운 문명의 출발이며 패권과 지배의 상징으로부터 화합과 공존의 상징으로 바꿔내는 것이 지구 21세기의 과제임을 신영복은 20세기의 마지막 여행기에 남기고 있다.

  그의 시선은 역사를 살아있는 실체로 복원하고 생환케 한다. 신영복은 과거로 떠나는 여행은 ‘역사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에서 배우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 그러기에 정작 ‘역사는 과거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현재의 과제로 돌아오는 귀환’이라고 한다(신영복, 1996a: 96). 이것은 그 시절을 정직하게 맞서서 걸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 시절이 채워질 때 비로소 역사로 가능하다고 보는 그 자신의 체험적 사고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그의 여행길은 유독 인간과 역사에 대한 통찰과 믿음이 진하게 배여 있는 것일까?


  ② 동기화된 사람들의 연대와 변방을 통한 주체적 역량


  21세기의 대안적 의미로서 대표적으로 읽혀지는 스페인의 협동조합 그룹인 몬드라곤에서 보낸 신영복의 엽서(신영복, 2003: 305)를 다시 꺼내본다. 신영복은 몬드라곤 기행을 통해 어느 공동체 내부에서 공동체적 철학과 윤리 또는 문화가 정착된다 하더라도 그 공동체를 감싸고 있는, 그리고 외면할 수 없는 치열한 경쟁논리 때문에 그 공동체가 결과적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없는 한계도 동시에 봐야 했고, 이런 시도가 보편화되지 않고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세계적 정서, 문화로 정착되기는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가장 보편적인 삶의 형태, 예를 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기업 같은 틀에다 몬드라곤이나 가나자와 같이 자립적이고 수준 높은 공동체적 전망을 그 속에 심어나가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몸 가까이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집단들을 점진적으로 바꾸어내는 노력들이 지속됨으로써, 고립됨으로 인해 겪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변질을 예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중소기업들에 주목한다(신영복, 1998a). 그 수도 많고 몸 가까이 있는 삶의 형식에서부터 시작하여 낮은 수준이지만, 아주 현실적인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영복이 몸담고 있는 성공회대학교의 ‘노동대학’과 ‘인문공부’ 과정은 이 같은 태동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동료 교수들인 김동춘과 박경태와 함께 신영복은 2000년 3월에 노동대학 1기를 출범 시킨다.


  “DJ 정부 들어오고 나서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고 구조조정 세게 하고 하면서 운동 자체가 판이 꼬꾸라진 셈이죠. 그래서 교육도 잘 안 돌아가고.... 기존 노동교육이 죽었고 실제로 멀리 보는 교육이 없는 거 같아서 대학이 그런 역할을 해야.... 이런 합의가 이뤄진 거 같아요.... 워낙 그런 프로그램이 없으니까 당시 부산의 한진 중공업의 노조위원장, 이런 사람들이 매주 왔어요. 비행기 타고. 그 정도로 전국적으로 공부할 데가, 노동자들이 공부할 데가 없었던 거죠.... 단기 기능적인 교육프로그램만으로 노동교육을 다 했다는 건 말이 좀 안 되는 거고, 사회적인 비젼을 갖고 기본적인 노동자적인 소양을 갖는 프로그램들이 먼저 나왔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나오지는 못 했었죠.... 그런 역할을 우리가 일정 대리했던 거죠.”73)


  현재 노동대학은 10년이 넘게 정규적이고 지속적인 노동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다양한 노동자들의 만남과 학습의 장이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가를 양성하는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 최근에는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단체 활동가, 농민, 학생, 시민으로 수강생이 다양해지고 있으며 11년차를 맞이하기까지 1,000여명이 넘는 수강생을 배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신영복은 2008년 가을부터 전국의 기업인을 위한 ‘인문공부’74) 과정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역시 수강생들의 요구로 심화과정을 개설할 만큼 큰 반향을 얻고 있다.


  신영복의 행적은 오히려 학교 외부에서 다양하게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몇 건을 꼽아 표로 보자면, 2009년과 2011년 전국순회강연, 시민사회와 연대의 맥락으로 후원 강연회나 서화전이 눈에 띈다. 그와 더불어 강연회를 같이 다니는 ‘더숲트리오’ 노래패75)는 신영복의 강연과 교수들의 노래공연의 조합이라는 특색을 더해준다. 


<표 Ⅲ-3> 신영복의 연대와 변방성

날 짜

제 목

내 용

비 고

 2011.11.4

- 2012.1.10

신영복의 이야기콘서트 ‘아름다운 동행’

인천, 수원, 전라도 광주,

도봉구청, 부산,

서울서대문;

인권센터설림기금마련

전국순회강연

2011.9.23

신영복의 이야기콘서트 ‘강물처럼’

강릉시민사회단체 연대기금마련

후원 강연회

 2011.

8.24 - 8.30

‘아름다운 동행’

미등록학생 장학금마련 성공회대 교수서화전

후원 서화전

2011.2.19-20 2011.5.28-29

-

시민단체와 더불어숲1) 주최  밀양, 전주 강연

지역강연

 2009.10.23

- 2010.2.26

-

서울, 청주, 춘천,

울산, 제주, 전주

전국순회강연

2008.

6.16 - 6.22

-

시민공간 <나루>

건립후원 서화전

후원 서화전

2007.

2.7 - 2.13

‘함께 여는 새날’

인권과 평화의 메시지. 성공회대교수 전시회

전시회 

2006.12.1

‘그날이오면' 후원 강연회

인문사회과학서점 ‘그날이오면' 후원 강연회

후원 강연회

 

 

  연대는 강연뿐 아니라 그의 독특한 서체로도 이루어진다. 제호, 비문, 현판으로서 전국 각지,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글씨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 형식과 내용에서 농밀한 연대의 메시지와 변방의 창조성이 여실히 배어나 있다. 그 글씨를 읽어 보자면 ‘함께 맞는 비’, ‘손잡고 더불어’, ‘희망의 인문학’,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권종대선생 추모비’, ‘벽초 홍명희 문학비’, ‘여순사건위령탑’, ‘서울시립대학교 학생운동탑’, ‘천호지하차도’, TV프로그램 ‘인물현대사’, 영화포스터 ‘황진이’, 오페라 ‘수천’, 소주상품 ‘처음처럼’ 등 이외에도 다수가 있다. 그 내용만 봐도 그의 길이 큰 대로가 아니라 사람들의 공간, 일상 속으로 향해 있음을 알 수 있다.


  ③ 내규화는 현실적인 삶의 틀에서의 감성


  非근대 요건들의 재배치 마지막 작업인 내규화는 현실적인 삶의 틀에서 실천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것이 감성으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신영복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주의에 대한 신뢰가 그 공동체의 구심력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후의 경쟁력이 되기도 하지만, 인간의 삶이 파편화된 냉혹한 시장현실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현실을 통찰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각이 인간과 인간관계에 대한 담론을 재구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안은 어떤 특수한 전형을 만들어내는 노력보다는 가장 보편적 정서와 가장 현실적인 삶의 틀에서부터 출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신영복은 말한다(신영복, 2003: 310). 일상적 실천에 우선 충실하고 다시 그 일상적 실천을 부단히 축적해가는 과정에서 전형은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리라고 본다. 이러한 일상적인 삶의 틀을 주어진 조건으로 인정하고 그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대상을 좀 더 인간적인 것으로 바꿔나가는, 평범하면서도 꾸준한 노력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대안은 차별성에 열중할 것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보편성에 충실해야 옳다고 그는 생각한다. 나아가면서 길을 만드는 일이다.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길을 만들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나마도 동시대의 평범한 사람들과 더불어 만들어갈 수밖에 없기에, 약자들이 힘을 결집할 수 있는 연대라는 것이 현 단계의 유일한 틀임을 실천으로 말하고 있다.

  현실적인 삶의 틀에서의 내규화는 문제의식과 지향점을 일상적인 삶에 녹여내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인식과 실천으로 연동되는 것이며, 맞대하고 있는 모순에 있어 비판과 저항적인 운동성으로 실재하는 것이다. 이런 역동성은 다양한 이해의 구조 안에 있는 역량들을 민중이라는 응집된 주체적 역량으로 조직한다. 민중의 정치학으로서의 출발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선이 머무는 곳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의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그를 알고 있는 많은 이들은 입을 모은다.


  “겉과 속이 일치하고 또 사상과 이론과 실천이 함께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배울게 많은 분입니다.” - 노회찬76)


  “가진 게 없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심적으로 의지하고,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고 따뜻하게 느낄 수 있는 거, 그게 바로 신영복 선생님이 꿈꿨던 세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 권해효77)


  “똑똑하고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 발 빠르게 대응하는 그런 진보지식인이 하는 역할이 있겠죠. 신 선생님의 역할은 거기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 있는 역할을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이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걸 만들어 주시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사상가인 거 같아요.” - 박경태78)


  실천적 받침은 동시에 신영복 사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즉 그의 사상은 이론보다는 실천으로서 대변되고 있다. 사상이란 머리가 아니라 실천에서 출발하고 또 실천에서 완성된다는 신영복의 정의를 다시 불러오게 하는 지점이다. 사상은 따뜻한 가슴, 감성으로 피어나는 것임을 신영복은 보여주고 있다.


  “제 자신이 어떤 존재이기보다는 여러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합니다. 한 해를 돌이켜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 아픈 한 해였습니다. 아마 앞으로 오랜 세월을 이렇게 감당하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보다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나서 위로와 격려를 나누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목적을 내걸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대화가 가능하리라는 작은 기대로 만나는 일입니다. 그런 작은 만남에서 확인하는 위로와 격려는 어쩌면 작은 약속 하나쯤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신영복, 1998d).”


  15년 전의 신영복의 새해 인사가 무색하다. 마치 저물어 가는 올해의 송년인사 같다. 변함없는 것은 시대의 누추한 행보이나, 오히려 우리의 곁에서 어깨 나누는 그의 변함없는 걸음걸이는 다행스럽고 고맙다.79) 마르크스의 인간의 복원이라는 열망은 아직도 요원하고, 노자의 강물은 먼 바다를 향해 언약 없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등불은 우리가 나아갈 길을 여전히 밝히고 있으며, 그들과 같은 신영복의 애정과 감성은 인간적 삶을 향해 그 길 위, 우리 옆에서 지남철의 떨림으로 깨어있다.



 Ⅳ.  결론



1. 인간적 삶의 조직


조직이란 : 현실적인 삶 속의 주체적인 실천과 과정


  이글은 조직에 관하여 이미 만들어진 ‘조직체’로 보지 않고 실천과 과정으로 파악하려는 ‘조직화’로 보는 입장이다. 인간관계에서의 조직은 그의 구성요소들이 결합하여 유기적인 움직임을 갖는 통일체, 혹은 그 행위와 과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수가 힘을 얻는 주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곧 조직은 어떤 형태의 관계 맺기를 하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조직은 현실적인 삶 속의 주체적인 실천인 동시에 그 과정이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조직이란 문제해결을 위한 동기화된 사람들이 상호작용을 내규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非근대의 요건들은 관계론에서 추출되어진 관계론적 관점, 성찰, 연대, 인간의 이해, 주체역량 등이다. 조직사회학적 이론에 非근대의 요건들을 재배치해 보자면, 이 요건들이 위의 조직이란 정의에 적합하게 상응된다. 이렇게 하여 조직의 정의를 관계론적으로 재구성해 보면, 문제해결을 위한 관계론적 관점과 성찰을 통해서 동기화된 사람들을 연대와 변방성으로 주체적으로 역량화 하고 내규화하는 것이다. 내규화는 현실적인 삶의 틀에서의 감성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그것은 인간의 이해와 인간적 가치로 발현된다.

 즉 非근대를 조직한다는 것은 관계론적 관점과 성찰로 주체적 역량들이 연대와 변방성을 갖고 인간적 가치를 현실적인 삶 속에서 쌓아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조직을 조직사회학적 이론으로 읽어내고, 실천적 받침으로 살피는 과정은 ‘관계는 非근대를 조직 한다’는 주장을 증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엇을 조직 하는가 : 인간적인 삶, 非근대


  인간적 삶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오늘의 근대적 모순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천과 인식, 즉 非근대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근대적 삶이 비인간적이라는 문제의식을 전제하고 있다.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근대의 성격은 인간적 삶을 파괴하고, 수단적 존재로서 인간을 소외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적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관점과 인간적 가치에 대한 복원이다. 이성으로 상대방을 대상화하고 생산과 이익창출, 혹은 소비를 위한 인간의 모습만으로 인간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인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일상은 관계이며 동시에 사회적 실천이다. 사회적 실천이 인간주의와 병행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非근대는 근대적 모순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천이며 그것의 축적인 인식을 말한다. 실천성이 진하게 내포된 이름이다. 이것은 탈근대 담론에 앞서 근대가 탈근대로 전화하는 과정과 그 관계에 보다 주목하고 유의미성을 두고 있는 시각이다. 이것은 신영복의 관계론에서 추출되어진 탈근대를 향한 실천적인 내용과 그 성격을 일컫는 말이다. 非근대의 지반으로는 첫째, 자본주의의 환상과 논리를 깨트리는 것이 필요하며 둘째, 식민지적 문화 깨트리기, 셋째로는 이상주의와 낭만 그리고 통합적 사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非근대를 조직하는 것이다.


누가 조직 하는가 : 민중, 신뢰집단


  과학적 진리에 대한 신념과 발전에 대한 낙관, 합리적 인간의 이상을 의문시 하지 않는 근대인이 아니다. 그 시대의 모순과 대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민중이란 어딘가 기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생활정치를 통해 재구성되는 이질적인 행위의 주체들로서, 당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하여 창조되는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의 역량이다. 그들의 삶의 조건과 실천에는 당대의 당면하고 있는 사회와 그 모순이 녹아 있다. 이들의 실천의 결과는 이론화 되어 그들의 사상이 된다. 민중 사상은 창조적으로 응집되고 증폭되는 역량의 근원이 된다. 사상의 내용과 형태는 실천이다. 사상은 몸과 마음에 체화되어 그 사람의 생각과 실천뿐 아니라 감성으로 표현된다. 그러기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양심과 같은 정서적 내용을 갖는다. 결국 민중 사상은 세계에 대한 참여의 방식이다. 또한 신영복은 다음 세대를 열어갈 주체적 집단의 필요성에 대해서 논한다. 이를 신뢰집단, 혹은 독립공간이라 부르는데, 이는 사람뿐 아니라 실천을 사회화하는 공동의 노력, 혹은 그것을 수행하는 역할에 주목하는 사회적 공간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어디서 조직 하는가 : 일상, 삶, 변방


  누구나  ‘관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일상이고 삶이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든, 문화든, 경제든 사회든 그 영역의 내용들이 쌓인다. 그래서 머리띠를 두른 이의 목소리든, 콩나물 값을 흥정하는 시장에서든, 혹은 온라인에서든 조직 또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이 인간적인 삶을 원하는 이들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단 그들은 그 현장의 모순과 우직하게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모순이 있는 곳에서 인간적 삶을 위한 조직은 태동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감당하는 모순들은 그들의 자기반성과 자기이유를 태동시키기 때문이다.

  모순과 접전하고 있는 이들의 자리는 중심이 아닌 변방이다. 그러하기에 변방은 자기의 어떤 처지를 뛰어넘어 보다 먼 미래,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끌고 나가는 공간이다. 그래서 변방은 신뢰집단, 사회적 공간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표현일 수 있다. 신영복은 변방을 기존의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와 창조의 공간이라 명명한다. 현재 상황을 넘어서려는 새로운 지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중심에 대한 저항의 진지 역할을 하며 자기의 이해관계를 버리고 부단히 변화하는 유목주의적인 운동성을 갖는다. 그렇기에 변방의식은 갇혀 있는 틀을 깨뜨리는 탈 문맥적 성격을 가진다.

  변방의 조건을 보자면, 내부의 민주주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있어야 하며, 민중의 지근거리에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생활정치, 생활문화, 생활운동과 같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상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런 일어남은 행위의 주체에 의해 통제되고 평등하게 진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좌경적 이론과 우경적 실천의 조화가 전제되어야 하며, 기본적인 방법론은 인간을 그 중심에 놓는 일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성찰적 이해와 인간적 가치가 그 골격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어떻게 조직 하는가 : 관계론과 자유, 성찰, 그리고 연대


  관계론은 존재의 본질을 관계성의 총체로 보는 세계관이다. 즉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인이나 사회 역시 관계론적 구성 원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우리가 일상 속에 품고 있는 관계는 자기가 아는 것을 인간적인 애정과 결합시켜 가는 과정이다. 안다는 것은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 모순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인식의 출발은 대상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찰이다.  전쟁 문맥, 종속성 등의 식민적 문화, 자본주의와 같은 시대적 문맥을,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편견들을 드러내는 비판적 인식을 의미한다. 성찰은 우리 자신을 객관화하되 다시 주체화 하는 일련의 변증적인 구조를 띠고 있다. 정체성과 주체성을 담보하는 궁극적 모태이다.

  변화와 운동, 즉 실천을 위한 내적 계기로서의 모순은 자기이유를 불러낸다. 모순을 재구성하는 실천으로 진화시키는 내적인 동력이 자기이유 즉 자유다. 자유는 일상과 대상들을 파악하고 조직하는 관점인 동시에 현재의 복잡한 관점을 정리할 수 있는 지점이다. 또한 사회인식이나 역사인식의 토대가 된다. 합리적인 판단을 가장 심하게 왜곡시키는 열등감에 대한 자각과 그것의 극복은 자기이유를 구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다. 관계의 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서 자기이유로 깊숙이 발목 박고 서 있는 그 자체이다.

  결국 관계 일반의 본질은 긴장과 갈등이며, 이 팽팽히 맞선 관계가 살아 있는 관계의 실상이다. 이 긴장과 갈등을 견딜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역량은 연대이다. 모든 역량을 받아들이는 연대성이야말로 약자의 정서이며, 동시에 우리 삶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자체가 목적이며 가치다. 연대성의 중요한 성격은 다양성의 승인이고 이런 다양성들을 엮어낼 원칙이나 방식은 공존이다. 공존은 변화의 단계이며 자기의 변화, 관계의 변화로 확장되는 과정이 연대의 방법론이다.


왜 조직해야 하는가 : 강고한 자본주의에 대항할 진지의 필요성


  자본주의가 뿜어내는 숱한 모순들로 가득 찬 세계를 우리는 현재도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발전과 성장, 효율과 합리, 이성적 사고, 부의 추구 등으로 매우 강고하고 세밀히 조직되어 있다. 마르크스가 알려준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은 바로 상품과 화폐에 대한 의식을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성격은 상대방을 묻지 않으며 서로를 보지 못하게 하는, 인간과 인간이 단절되는 물신성이다. 이는 서로 관계하기보다는 경쟁하고 승부하는 관계, 즉 다른 것들의 희생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신장해가는 존재론적인 구조와 운동 원리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좋은, 유용한 물건이라도 안 팔리면 가치 없는 상품이 된다. 미(美)의 본뜻은 ‘앎’을 어원으로 하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상품미학에서는 아름다움의 반대어인 ‘모름다움’으로 대치되어 최신의 제품이 최고의 상품이 된다. 미래 역시 과거와 현재의 축적이 아닌 미지의 새로운 무엇으로 그 자리가 전도되어 있다. 이렇게 지속적인 자본주의의 내면화와 길들임은 그 속에 사는 우리 스스로가 상품이 되고 인간적 정체성이 박탈된 등신이 되어가는 것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의 대가로 작금의 우리는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적 삶의 궁핍화를, 동시에 살인적인 불균형의 누적과 패권화의 과정임을 온 몸으로 깨달아 가고 있다.

  신영복의 말처럼 자본주의가 대표하는 근대성, 존재론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고, 관계론을 드러내 보일 시점인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적인 삶의 방향성과 실천적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담론에서 관계는 근대적 모순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천을 조직한다.80) 즉 인간적 삶을 위한 실천적 과정을 조직한다.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보는 관계론적 시각은 관계가 인간과 사회를 변화하게 하는 출발지가 되는 것이다. 신영복의 관계론은 인간적인 삶을 조직해내는 진지를 구축한다.



2. 관계론의 유의미성


  관계론이 非근대를 조직한다는 것, 즉 인간적 삶을 조직함을 확인하는 작업은 담론의 성격 및 유의미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신영복의 관계론은 다양한 삶 속 현장의 모순을 고민하고 해결하는 데 있어 실천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여기서는 담론의 태생과 주체 그리고 담론의 성격으로서 관계론의 유의미성을 갈음해볼까 한다.


담론의 태생 : 변방, 서양 그 기준 너머


  관계론의 태생은 신영복이 처한 근대라는 시대성과 한국사회의 식민지적 근현대사라는 공간성, 그리고 그 파고 속의 감옥이란 현실적인 삶의 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신영복의 인식과 발 딛고 서 있는 삶의 실체적 질을 변화하게 하였다. 또한 그의 담론의 지반과 성격에 결정적 인자를 제공하는데, 마르크스와 동양사상의 내면적 집적과 체화가 그것들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의 대한 연구는 근대를 모순론적 입장에서 인식하는데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지반이 되고 있으며, 동양사상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인간과 사회를 읽어내는 관점과 인간적인 삶의 방법론적 실천성을 담보하고 있다.

  이런 신영복의 사상적 거점은 우리의 인식론적 그리고 실천적인 모든 영역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새로운 전환의 지점에 놓여 있기 때문이며, 그에 적합한 인식틀과 실천적 방법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를 위한 인식틀과 방법론은 우리가 쌓아 온 시간과 공간 안에서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과정 자체이기도 하다. 국소주의적인 협소한 의미가 아니라 그 문제들이 발생한 근본적 이유를 들여다봄으로써 얻어내지는 모색의 결과물이며, 섣부른 대안보다는 문제를 딛고 그 안에서 창신의 생각을 벼려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서양에서 이식되어진 틀이나 이론보다는, 그것의 너머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새로운 우리의 삶이 아닌가?


담론의 주체 : 자립적 철학, 문화 정체성


  신영복이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준거를 동양에서 찾고자 한 동기는 서구적 가치에 매몰된 우리 사회의 지적 불구성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지만, 우리의 문화전통 속에서 인류의 공감을 간직하고 있는 보편적 사유를 재구성하려는 학문적 주체성의 측면도 엿보인다. 특히 우리의 몸에 체화된 정신적 문화를 사회 변혁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그의 문제의식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 안에 내재하는 관계의 보편성을 드러내고 이 보편성을 이론화81)한다는 점에서 지적 지형의 한계를 넘는 독창성이며, 외부로부터 이식되지 않은 우리 문화에서 쌓여진 담론이란 점에서 주체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문제의식을 관점으로 한 고전독법은 우리 현실에서 뿌리내린 동양사상의 사회학적 해석인 동시에 실천적 접근이기도 하다. 교조적이거나 개념적이지 않고 현실을 바탕으로 한 성찰적 관점과 비판적 시각을 가진 신영복의 근대문맥 읽기는 탈문맥으로의 문명독법으로서 그 의미들을 재조명케 한다. 뿐만 아니라 비판적 성찰을 철학적 체계로 정립하는 자립적인 철학82)이란 의의도 무게 있게 자리 잡고 있다. 한 개인의 변혁이란 결국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신영복의 체험적 사고, 사회과학적 담론과 사람들의 삶과 정서가 결합되는 인문학적 언어, 그리고 그의 서체와 실천적 영역은 관계론의 대중성을 담보하는 동시에 인간적 삶의 방향성을 내재하고 있다. 문화의 정체성(正體性)83)이란 이런 것들의 축적일 것이다.


담론의 성격 : 그것들의 어울림, 예술성


  우선 관계론은 동양사상의 특징을 받아 형이상학적 차원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축적으로서의 현실주의적 사고이며, 존재성이나 적대적인 성격보다는 서로 견제하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려 한다. 그리고 관계론은 서양의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적 관점과 동양의 관계론적 인간철학을 내재한 인식론이며 실천론인 동시에 문명론적인 거대담론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자본주의의 모순을 조명해주는 저항담론으로서의 대안적 역할로 자리한다. 그러나 자유, 성찰, 연대와 변방 등의 관계론의 요건들은 인간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를 함께 연동시키고 조직하는 민중의 정치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관계론은 크게 인식적 영역과 실천적 영역이란 두 개의 얼개로 볼 수 있다. 이를 신영복은 ‘가장 먼 여행’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여행은 변화이다. 그것은 모순으로부터의 탈주이며 인간적인 삶을 위한 진지인 동시에 변방을 향한다. 얼개의 하나는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다. 인식론적 변화이다. 관념과 이성을 상징하는 머리에서 따뜻한 애정을 품은 가슴으로의 변화를 상징한다.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출발하는 또 하나의 여행, 얼개가 있다. 현장과 삶을 의미하는 발로의 여행이다. 인식론적 변화는 실천론적 변화의 동력이다. 두 여행은 서로 독립적인 여행이 아니라 함께 연동되어 결국 머리와 가슴과 발이 하나의 큰 관계적 역동성을 품고 있다. 따뜻한 인간적 애정과 위로를 지녔으나 명징하고 비판적인 성찰을 가진 사상가로서, 그의 사상과 일치하는 그의 삶은, 신영복의 실천영역들과 그것들이 사회적으로 갖는 의미들은, 바로 이것의 증명이기도 하다.



1) 미셀 버만(Marshall Berman). 2004. 『현대성의 경험』. 윤호병 옮김. 현대미학사. pp. 137-138. Marx & Engels. 『MEW 3』. p. 465.의 영역본(Samuel Moore, 1888)을 미셀 버만이 재인용함.

2) 여기서 非근대는 ‘인간적 삶을 위한 실천이며 인식의 재구성’을 말하는데, 이것은 신영복. 2000. 「강물과 시간」. 『진보평론』. 봄호. 통권 3호와 장지숙. 2011.「미래는 非A이다」에서 응용한 개념이다.

3) 이와 같은 시각에 있어 이글은 김경일의 우려에 동감 한다. “최근 우리 학계가 당면하고 있는 두 가지 경향에 대한 우려를 한다. 하나는 학문과 지식이 일반 독자와 현실로부터 유리돼 좁게 정의된 공동체 안에서 고립적이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생산·유통·소비되는 경향이다. 다른 하나는 이에 따라 현실 적합성을 가진 많은 문제가 학문의 정당한 연구주제나 의제로 설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에 대한 요구가 대중적 차원에서 무시되거나 오도되고 있는 경향이 있다(김경일, 2003: 4-5).”

4) 여기서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Bernd Ingmar Gutberlet)는 인간의 사고와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지, 기록에 의해 전승되는 역사가 얼마큼이나 객관적이고 정확한지, 또 역사는 어떻게 왜곡되고 진실은 어떻게 은폐되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세계사 속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50가지 사실을 통해 기록이 어떻게 날조되고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 특히 중세의 어원이나 개념 등의 근대적 사고의 편향된 시각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5) 미셀 버만(Marshall Berman). 2004. 『현대성의 경험』. 윤호병 옮김. 현대미학사.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은 이 책의 원작 『모든 단단한 것이 자취 없이 녹아 사라진다』에서의 발전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하나는 경제적 발전을 의미하며 다른 하나는 자아발전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두 가지의 발전을 경험하는 개인은 내부에 극적인 긴장을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데, 이 긴장은 해묵은 것들을 해체하고 개인적 자아의 가능성과 감수성의 해방을 이룬다고 한다(Anderson, 1993: 336-371).

6)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는 이 정치성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읽어낸다(Negri, 2002: 125).

7) 『자본론』제 1권은 자본이 어떻게 이윤 또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가, 그리고 자본의 축적과정이 자본가가 임금노동자를 착취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가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특히, 제28장은 15세기 말 이후의 피수탈자에 대한 피의 입법. 임금인하를 위한 법령들에 대한 내용이다.

8) 17세기에 ‘구빈원’이란 이름으로, 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기인, 범죄자, 방랑인, 성병환자, 매춘부, 걸인 등 모든 반사회적 인물들을 대규모로 가두었다.

9) 한국에서의 식민지 규율은 그 공간에서 어떻게 배치되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김진균, 정근식 편저. 『근대주체와 식민지 규율권력』. 문화과학사. 를 참고.

10) 이 부분은 ‘suject’라는 근대철학의 출발지인 데카르트의 주체(동시에 대상)를 연상하게 한다.

11) 한국에서 근대성의 형성이 일제 식민지배의 시기와 겹치면서 시작됐다는 사실과 아울러 일반적인 제국주의 침략과는 달리 식민국과 피지배국이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비교적 비슷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전통과 근대를 둘러싼 근대성과 헤게모니의 역사적 형성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됐다. 전통과 근대는 이러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면서 한 사회에 특유한 근대화의 내용과 구조를 형성해 왔다(김경일, 2003:18-27).

12) 식민지 근대화론과 민족주의적 수탈론·내재적 발전론은 근대의 정당성을 암묵적으로 승인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조형근, 2006: 49).

13) 역사사회학자 월러스타인(Immanuel Wallerstein)은 『역사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으로 살피고 그 실체를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세계체제론적 입장으로 설명하고 있다(Wallerstein, 1985).

14) 이것은 근대의 존재론적 사고방식에서 연유하는데, 그것은 타자의 배제를 통해 자신의 동일성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15) 김동춘은 한국전쟁 직후의 50년대야말로 고도로 도시화되고 ‘자본주의화’된 오늘날 한국사회의 실질적 기원을 이룬다고 본다. 그 이유는 오늘의 한국 자본주의가 단순히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보편적인 원리에 기초하여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공업화 이전부터 존재해 온 한국의 독특한 정치·사회 질서, 특히 전통적 가족·친족 관계가 현대적으로 변형 결합된 기반 위에서 운영된다고 보기 때문이다(김동춘, 2000: 48).

16) 신영복은 서양철학의 전통에서도 존재론적 성격만 있는 것이 아니고 대단히 포괄적인 사유체계가 있으며 동양적 사고에도 부정적인 면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모든 이론은 그 이론이 제기되는 역사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하며 그가 말하는 관계론이나 존재론이라는 개념은 실천적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일국 패권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적 질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 존재론적 개념을 부각시킬 필요와 동양에서 상대적으로 풍부히 계승되고 있는 내용을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17) 이것에 관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지적은 Karl Marx. 2007. 『자본론 1 (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pp. 43-231에 잘 나타나 있다.

18) 마르크스는 『자본론』제1권 제1편에서 상품과 화폐를 시작으로 자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Marx, 2007a: 43-188).

19) 봉건제도 아래서는 땅이나 물건을 개인이 독점적으로 소유한다기보다 신분에 의해 정해지는 엄격한 조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공유되고 있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 재산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간에게 부여한다는 논리였다. 18세기 말이 되자 재산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부 권리가 현대식의 절대적 소유권으로 바뀌었다. 이는 봉건제도가 해체되면서 공유지가 사유 부동산으로서 시장에서 팔고 살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유재산제도로 현대 시장이 형성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점이다(Rifkin, 2005: 174-181).

20) 이와 더불어 (Marx, 2007b: 836-976) 도 참고.

21)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설명하면서 생산성 증가를 위한 생산 설비 등 불변자본의 증가는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시켜 잉여가치를 줄이고 결국, 이윤율을 저하시킨다는 모순을 지적했다(Marx. 1990a: 229-240).

22) 자본론 1권에서는 자본이 어떻게 이윤 또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가, 그리고 자본의 축적과정이 어떻게 자본관계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가를 주로 연구한다. 이 연구를 위해 마르크스는 경제의 한 영역인 생산영역에 주의를 집중한다. 제1권의 결론은 이윤 또는 잉여가치는 자본가가 생산영역에서 착취한 임금노동자의 잉여노동이 응고한 것이고, 자본가는 더욱 큰 이윤을 얻기 위해 새로운 과학기술을 끊임없이 도입하며, 이로 말미암아 실업자가 대규모로 발생함으로써 자본관계가 유지되고 재생산된다는 것이다(김수행, 2009: 19).

23) 여기서 非근대는 그의 담론에서 미래관으로 명명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탈근대에 대한 명명보다는 非근대의 구체성이 그의 담론에서는 중심에 있다. ‘탈근대를 어떻게?’ 에 대한 제안일 수도 있겠다.

24) 장지숙. 2011. 「미래는 非A이다」. 이글은 성공회대 교육대학원 교육사회학특강 녹취록과 신영복. 2000. 「강물과 시간」. 『진보평론』. 봄호. 통권 3호, 그리고 신영복이 미래담론에 대한 비판적 주장을 중심으로 하여 장지숙이 재정리한 것이다.

25) 시기의 의미를 넘어 사회, 문화, 철학적 의미로 확대되면서 1960년 중반부터 나타난 문화운동이면서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과 관련되는 한 시대의 이념, 혹은 운동을 일컬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 한다. 한국은 1980년대 후반 학계를 비롯하여 가히 폭발적인 양적 관심을 보였다. 그것이 우리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어떤 기여를 했는지에 대한 것은 따로 논의해야 할 것이다. 유팔무는 탈근대 담론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류가 한데 엉켜 있다고 본다. 먼저 지난 수십년에 걸쳐 예술분야에서 일어난 변화를 통칭하는 탈근대(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다. 둘째로 주로 프랑스 이론가들(푸코, 들뢰즈, 데리다, 보드리야르 료타르 등)에 의해 대표되는 새로운 철학 조류인 ‘탈구조주의’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사회학자들(다이넬 벨이나 알랭 뚜랭 같은)에 의해 개진된 ‘탈산업사회론’이다(비판사회학회, 2010: 7-8).

26)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는 1923년 『조선혁명선언』(신용하, 1984: 261-262)에서 조선혁명의 내용을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는데, 이족통치의 파괴,  특권계급의 파괴, 경제약탈제도의 파괴이며, 사회적 불균형의 파괴, 노예적 문화사상의 파괴이다. 이들 파괴 이후의 방향은 민중적 건설의 내용들로서 각 파괴마다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신채호의 ‘파괴’는 非근대의 지반적 내용에서의 ‘깨기’와  맥락적으로 다르지 않음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非근대의 지반과 대비되어지는 신채호의 선언은 그때나 지금이나 시대적 상황이 크게 변화된 것이 없음을 증언하는 물증으로서 새삼스럽게 기억된다.

27) 다이호우잉(戴厚英, Dai Houying: 1938~)은 중국 현대여성작가로서, 대표작으로는 자전적 성격을 띤 장편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 『시인의 죽음』, 『하늘의 발자국 소리[空中的足音]』 등이 있다. 이 세 장편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의 격변기를 겪은 중국 지식인들의 연대기를 그린 '3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28) 그래서일까? 신영복의 『강의』의 시작은 시경의 ‘시’로 시작하고 있다.

29) 막심 고리끼(Maksim Gor'kii: 1868~1936) 역시 『어머니』에서 “그들은 바로 양심 때문에 몸을 내던지고 있는 거요.”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Gor'kii, 2006: 174).

30) 사상이 누구의 것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그것의 본연의 모습을 의미한다. 이에 신영복의 다음의 글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 <전쟁> <자본> <상품>과 같이 고도의 사회성을 띠고 있는 개념도 그 사회관계의 본질인 사회적 관계가 사상되고 있음은 물론이고 구체성을 담고 있는 개념마저도 그 연상세계가 감각적이고 형식적인 것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에서는 은행의 금고가, <상품>에서는 백화점 쇼우 윈도우가 연상되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정서적 공감의 원초가 되는 <사람>이 연상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회과학도에게 요구되는 냉철한 이성(cool head)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거대한 허구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냉철한 이성이 따뜻한 가슴(warm heart)을 바탕으로 하여 얻어지는 것이라면 나의 관념세계는 실로 비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정직>이라든가 <양심>과 같이 추상적인 단어일수록 그것과 더불어 사람이 연상되지 않는 한 그것이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는 일에 있어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것이 인간적인 것으로 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연상되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에 따라서 그 사고의 성격 즉 사회적 입장이 정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시대 그 사회의 가장 민중적인 사람들이 사고의 밑바탕을 자리 잡고 있어야만 그의 사상도 시대적 과제와 사회적 모순을 온당하게 반영하고 그것과 튼튼히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자유>나 <평등>과 같은 고매한 개념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표현 해내는 그림으로 그 내용이 채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관념의 유희와 비인간적인 물신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신영복, 1991).”

31) 민중이란 말은 한국에서는 1890년대에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글들에서 처음 발견된다. 이 때 민중 개념은 민, 백성, 중민, 인민 등의 개념과 혼용되고 있다(정창렬, 1989: 9-10). 한국에서 민중이라는 개념이 자주 사용되어진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이 때 민중이라는 말은 다수의 피지배층이라는, 민족독립운동의 주체로서 투쟁하는 세력으로 지목되고 있었다(이만열, 1984;73 재인용). 1960년대 이래의 근대화는 자본주의적 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구성체의 내적 모순의 심화라는 객관적 조건을 낳았으며 4.19와 6.3을 통한 민중의식의 성장이라는 주체적 조건이 부여된다.(성민엽, 1985;108) 민중론이 이론적 논의로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이후 한완상에 와서다. 그는 1970년대 민중 개념은 ‘억압당하고 수탈당하고, 차별받는 피지배자들’로서 지배 엘리트의 대립 개념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이 시각은 민중의 테두리를 명확하게 확정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한 한상진은 계급들을 가로지르는 유사한 심성과 갈증으로 묶여질 수 있는 집단들이 민중을 이룬다고 한다(장상철, 2006).

   지식인, 학생층의 실천운동의 전략적 필요에 의해 발명된 분석적 개념인 1970년대 이후의 민중은(유재천, 1991: 11-17) 외적 요인에 의해 촉발되는 것으로 상정됨으로써 수동적이고 소시민적 존재라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했고,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민중은 역사의 주체, 변혁의 주체로 재인식하게 되면서 민중의 일상과 경험, 의식세계를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1990년대 민중은 이질적인 정체성과 경험을 갖고 있으며 미시적 맥락에 따라 선택하고 행위 하는 일상의 주체다. 해체되는 자명성을 넘어 다양한 주체가 되었다(허영란, 2005).

32) 1980년대 이전까지의 민중사 연구는 민중을 일방적 피해자로 설정함으로써 민중운동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강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민중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상생활에서 민중들이 보이는 다양성, 그들이 구현하는 생활정치를 통해 재구성되는 주체성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중 내부의 다양한 균열, 관계의 미시적 맥락을 살펴봄으로써 민중을 재인식해야 한다. 각 시기에 제기된 민중론은 해당 시점의 역사적 과제에 대한 인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서 각각의 논의에서 사용된 민중이라는 용어의 개념 역시 단일하게 정의하기 어렵다(허영란, 2005).

33) 신영복이 직접 자신의 글씨가 있는 곳을 답사하고, 그 글씨가 쓰여 진 유래와 글씨의 의미를 풀어낸 경향신문에 연재한 글(2011.9.14.~12.27)을 묶어 『변방을 찾아서』라는 책을 2012년에 출간하였다. 해남 땅끝마을의 서정분교를 시작으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작은 비석이 있는 경남 봉하마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덟 곳을 답사하는 내용이다. 짧은 답사기이긴 하나, 그의 글씨가 대부분 변방에 있는 연유, 그곳으로부터의 ‘오늘의 변방’의 의미를 끌어 올려내고 있는 것에 우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34) 신영복 서화 에세이집 『처음처럼』의 장지숙과 공동 엮은이로 신영복 홈페이지 모임 <더불어숲>과도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1980년대 초에 故 노촌 이구영 선생이 설립한 한문 공부 모임인 <이문학회>의 회우로도 활동하고 있다.

35) 토드 헤인즈(Todd Haynes) 감독의 2007. 『I’m Not There』 은 미국 가수 밥 딜런(Bob Dylan)의 시적인 가사를 줄기로 삼아 밥 딜런의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각각의 다른 6명의 배우들이 연기한 영화이다.

36) 이승혁을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이문학회에서 2011년 10월 6일에 인터뷰 한 내용 중.

37)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 1920~2006)은 충북 제천에서 만석꾼 갑부이자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월북하여 남파공작원으로 파견되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문장가 월사 이정귀의 후손으로 부친 이주승과 작은아버지 이조승은 구한말 의병활동에 참여해 의병장들인 이강년과 유인석의 비서를 각각 지낸 전력이 있다. 그는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의 제자였으며, 일제 당시인 1943년 독서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구영은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연암 박지원 등 실학사상을 강의하였다. 1950년 9월 북한으로 넘어갔다가 1958년 7월 부산에서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접선에 실패하여 9월에 체포되었는데, 그를 체포한 경찰은 일제 강점기에 그를 고문했던 형사였다. 남쪽 감옥 22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는데, 감옥에서 신영복, 심지연 등에게 한학과 서예를 가르쳤다. 1980년 출소해 경기 안양시에 이문학회를 창립, 후진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출소 후에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과 『의병운동사적』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신영복. 1998e: 5-11).

38) 만당 성주표(晩堂 成周杓: 1921~2003) 서예가. 대자 현판글씨로 유명하여 속리산 법주사, 동래 범어사 등 전국의 사찰에 많은 편액을 썼고, 임경업 장군 사당의 현판을 쓰기도 했으며, 신영복에게 성친왕 해서 법첩과 왕희지·안진경 행서첩으로 임서하게 하였고 현판 글씨를 서도의 최고 형식으로 꼽았다(신영복, 1995: 5-14).

39) 정향 조병호(靜香 趙柄鎬: 1913~2005) 현대 한학자이자 서예가. 출신지는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이며 거주지는 충청남도 대전(大田)이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과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의 문하에서 한학과 금석학을 배웠다. 1939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서예부문에 입선하였다. 그 후 1950년에 중국‧만주국‧일본으로 구성된 3국 합동서예전인 흥아전(興亞展)에 참가하여 작문과 서예부문 모두에서 입선하였다. 중국의 금문(金文) 글꼴을 연구하고, 깊은 금석학 지식을 겸비하면서 그 명성이 중국에 까지 알려졌으며, 중국서법학회 주선으로 중국의 고궁박물관과 역사박물관에서 전시회가 개최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2012년 9월 8일 검색).

40) 김성장(김성장, 2007)은 그의 논문에서  신영복 서예에 대한 조희연, 임규찬, 손병철, 정현식, 이동국, 한홍구의 평을 정리하고 있다.

41) 신영복은 애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진정한 애정은 우리시대의 가장 첨예한 모순의 한복판으로 걸어 나가는 일, 그리고 그 현장의 첨예한 칼끝으로부터 부단히 상처받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생각을 확실한 물적 토대위에 발 딛게 하는 길이며, 우리의 삶을 튼튼한 대지위에 뿌리내리게 하는 길이며, 이윽고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시대의 사람’ ‘우리사회의 사람’으로 완성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은 언제나 사람에서 비롯되고 언제나 사람에게로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신영복, 1991).”

42) 다이허우잉(戴厚英) 역시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마르크스, 엥겔스의 저작을 잘 읽어보라구. 되풀이해서 읽는 동안에 두 위인의 마음속에는 ‘인간’이라는 두 글자가 크게 씌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거야. 그의 이론, 그의 실천은 모두 이 ‘인간’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 인간을 ‘인간’일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 모든 현상과 그 원인을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었어.”(戴厚英, 2005: 129)

43) 근대의 모습은 자본주의뿐 아니라 공산주의, 사회주의, 절대군주제 등 다양하게 존재한다.

44) 윤구병은 「민중이 하는 말과 지식인이 쓰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계급사회는 말도 둘로 갈라놓아 지배계급 쓰는 말 다르고 피지배계급 쓰는 말 다르다.... 같은 계급사회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봉건적 신분질서에 바탕을 둔 말의 이중질서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자기에게 맞는 새 이중질서를 세웠다.... 지식인들은 민족언어를 헌신짝같이 내던지고 식민본국의 문법에 맞지 않는 제 나라의 문법체계를 제멋대로 왜곡하고 훼손하는 일에 도리어 즐거움을 느끼기까지 한다. 경제적 식민화보다 문화적 식민화가 더 무섭고, 식민본국의 지배계급을 감싸고도는 제국주의 지식인보다 식민지 매판지식인이 식민지 원주민의 의식에 더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는 까닭은 바로 매판지식인이 사이에 끼여 식민지 원주민의 감성과 사고를 왜곡하고 변질시켜서 제국주의 식민본국의 식민문화에 예속시키기 때문이다.... 민중지향적인 지식인은 먼저 민중이 하는 말을 배워야 한다. 민중이 하는 말을 배우는 것은 다만 언어습득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매판화되어버린 자신의 의식과 감성의 건강을 되찾는 일이다. 민중지향적인 지식인이 민중의 말로 민중 편에 서서 이야기하고 글을 써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민중이 쉽게 지식인이 자기들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사연을 알아들을 뿐 아니라, 본래 바른 의식과 감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지식인과 다른 까닭에 불필요한 열등감을 느끼고 도리어 병적인 의식과 감성이 낳은 매판적 어투와 문체를 본받으려고 하는 위험에서 민중을 건져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민중과 더불어 살겠다고 주장하면서도 지배자의 말을 버리지 않는 지식이 민중을 위하는 민중의 지식인일 수는 없다(윤구병, 1989).”

45) 아동문학가 이오덕(1925~2003)은 다음과 같이 일갈하고 있다.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 많다. 어떤 사람이고 모두 일을 해야 먹고 사는데, 대통령 하다가 나온 사람은 골프만 치면서 놀고먹어도 된다고 보는 것도 상식에 못 미치는 사람의 사회다.... 아이들에게 온갖 잡동사니 지식을 암기시키는 경쟁을 붙여서 서로 해치는 적이 되게 하고, 그래서 이곳저곳에 자살하는 아이들이 연달아 나오게 하는 교육을 강행하면서 전혀 반성할 줄을 모르는 것도 상식 이하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대우를 해주도록 요구하는 노동자의 머리 위에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도깨비 같은 구사대가 횡행하는 것도 상식 이하다.... 어린애들까지도 환히 알 수 있는 그 상식이 통하고 실현되어야 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모든 학문과 종교와 예술이, 그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도록 하기 위한 실천적인 것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못할 때 그 학문과 종교와 예술이 설 건강한 자리를 잃게 되고, 그래서 그것 자체가 또 상식 이하의 것으로 떨어지고 만다(이오덕, 1988).” 

46) 마르크스의 실천에 대한 개념적 설명은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 『맑스주의와 근대성』에 빚을 많이 지고 있다.

47) 신영복은 서양철학의 전통에서도 존재론적 성격만 있는 것이 아니고 대단히 포괄적인 사유체계가 있고, 반면에 동양적 사고에도 부정적인 면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모든 이론은 그 이론이 제기되는 역사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함을 강조한다. 어떤 사상이든 사회역사적인 제한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 일국 패권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적 질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 존재론적 개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고, 반면에 서양적인 것과의 건강한 관계에서 동양에서 상대적으로 풍부히 계승되고 있는 내용을 드러내는 일이 요구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통찰적 시각은 관계의 틀을 크게 만든다. 근대사회의 부정적인 패러다임으로서 드러나는 존재론마저도 포괄하고 관계해서 질적인 발전을 추구할 수 있다.

48) 노자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그 중에 신영복과 상반되는 강신주의 해석은 흥미롭다. 신영복의 노자는 자연의 생성변화가 곧 도의 내용이고 근본적으로 반문화적 체계이며 현대적 의미로는 해체론이라고(신영복, 2004) 말하고 있다. 반면 강신주는 노자를 장자와 대비하여 분석하는데, 오히려 노자보다 장자가 신영복의 노자의 성격에 가깝다. 그는 노자의 도는 국가의 교환논리이고, 여기에 입각해서 바람직한 통치자(성인聖人)를 규정하려는 정치철학이며 피통치자들을 자발적인 복종과 파시즘적 열광의 상태로 이끌기 위한 것(강신주, 2004)이라고 본다. 정치적 관심과 군주를 중시하는 노자에 비해 장자는 제자백가 중 유일하게 민중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했으며 삶의 지평에서 인간을 이해하려 했다(강신주, 2007)고 한다.

49) 똘레랑스(tolérance): 자기와 다른 종교·종파·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과 권리를 용인(容認)한다는 의미에서 출발되었으나,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한다는 관용(寬容)과 혼용되고 있다. 그러나 신영복은 똘레랑스 역시 차이가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진정한 소통이 어려운 존재론적 시각이라고 본다.

50) 현실은 항상 우리를 차이와 동등함의 혼합 상태에 직면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것은 이것이 어떻게 해석되는가 하는 방식이다. 바로 가치의 문제다. 사회적, 문화적 다양화 과정이 오랜 연대의 형식에 깃들어 있는 동등함의 환상을 진부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차이에 대한 관점의 변화는 새로운 연대의 형식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다. 여기서 신영복의 연대에 대한 시각과 비슷한 지점에 있는 연대 담론들을 함께 보는 것도 유의미하다. 부르주아(Léon Bourgeois)는 인간은 혼자서는 자신의 고유한 안녕을 보살필 수 없으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연대가 사회 정치의 토대로서 시민의 높은 성찰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자명한 사실이었다. 오페(Claus Offe, 1989)는 새로운 연대의 더 강한 발전을 위해서는 연합적 도안이 도덕적 능력의 교육과 서로 일치해야 한다고 했고,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 1871)는 『방어와 저항에 대하여』에서 연대를 최상의 문화적 도덕적 개념으로, 셸러(Max Scheler, 1980)와 아들러(Max Adler, 1964)는 연대를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인간성의 상호적인 인식(Rainer Zoll, 2008)이라고 설명하였다.

51) 지면으로는 1998년 6월 월간 우리교육에 실린 성공회대 제3회 교사아카데미 강좌의 내용이 보다 앞선 글이다. 그러나 신영복이 ‘관계론’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쓴 최초의 자료는 1977년 4월 15일자의 감옥에서 아버지에게 보내는 글로써, ‘서도의 관계론’(신영복, 2005: 101-102)이다. 신영복의 ‘관계’의 개념에 대해서는 ‘사랑은 경작되는 것(신영복, 2005: 22)’에서 사랑에 대한 시각을 통해 가늠할 수 있으며 ‘고독한 풍화(風化)(신영복, 2005: 23)에서는 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신영복이 생각하는 ’관계‘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52) 이병수는 신영복의 관계론은 사회 구성의 원리를 의미하며,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연대론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그의 연대론은 관계론의 사회 구성적 실천 원리로서, 인성의 고양, 사랑, 자유, 평화, 화이부동 등 윤리적 가치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윤리적 덕목은 개인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 변혁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는 맥락에서 전투적, 실천적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이병수, 2009).

53) 생텍쥐페리(Antoine Marie Roger De Saint Exupery: 1900~1944)는 이를 『인간의 대지』에서 그것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그가 해야 할 일의 범위 내에서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갖는 것(Saint Exupery, 2009: 55)이라고 하였다.

54) 시장과 자본주의를 구분하고 있듯이,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도 시장은 존재해왔다(Braudel, 1976). 여기서 신영복이 가리키는 시장은, 애초부터 제도적, 문화적 공간으로 존재하는, 즉 생산과 소비, 유통이 투명한 영역의 ‘시장’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를 끊어놓음으로써 독점과 지배의 힘, 즉 자본이 집중되는 형태의 자본의 메카니즘이 작용하는 공간으로서의 시장임을 확인해 둔다.

55) 이홍균의 2007. 「성찰성 논의에 대한 반론 : 비판·성찰 능력은 마비·억제되지 않았는가」은 신영복의 ‘성찰’을 읽는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그는 성찰성 논의에 있어 사회규범론과 사회압력론을 살펴보고, 의미와 가치의 영역이 축소·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비판·성찰능력이 마비·억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인식의 기반 위에 비판, 성찰 능력을 부활시키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사람들에게는 사회 규범과 사회 압력이 동시에 존재하며, 사회규범이 내면화 되어 있기도 하고 사회 압력이 투입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성찰이 마비되어 있지 않기도, 마비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사회규범론(에밀 뒤르케임, 막스 베버, 조오지 허버트 미드, 탈코트 파슨스, 위르겐 하버마스, 안토니 기든스 등)과 사회압력론(칼 맑스, 허버트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 칼 폴라니, 미셸 푸코, 알렌뚜렌 등)은 각각 부분적 적합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홍균은 기존의 성찰성 논의는 성찰이 부분적으로만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찰이 전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성찰성 마비에 대한 진단을 차단하는 이론적 효과와 성찰성 회복을 위한 논의를 차단하고, 성찰의 회복을 방해하는 이론적 효과를 낳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뿐 아니라 기존의 성찰성에 대한 논의는 사회 질서의 파괴를 이론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국내의 사회규범론자들은 그 부분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고 본다. 곧 성찰은 진행 중이 아니라 회복 대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 자아 정체성의 상실, 사회 질서의 파괴, 환경 파괴 등의 원인은 비판·성찰 능력의 마비·억제·축소에 의한 것이지만 기존의 성찰성 논의는 그 현상을 조명하고 있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이론적 논의 자체를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찰이 마비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마비된 성찰의 부분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의 논의로 연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와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에 앞서서, 의미와 가치의 축소와 상실이 일어나고 있는 원인이 우선적으로 분석되어야 한다는 이홍균의 글을 통해 신영복의 ‘성찰’이 단지 윤리적이거나 비논리적인 인문학적 이야기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관계론에 마르크스가 왜 지반이 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56) 의식과 인식을 일정하게 구별하고 있다.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보다는 다소 주체적인 면이 있다. 의식은 주입된 것, 학습한 것임에 반하여 ‘인식’은 그 알고 있는 것, 즉 ‘의식’을 성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식에 대한 주체적 인식이 일차적 과제가 된다(신영복, 2010: 14)는 것이다. 습득을 통하여 ‘알고 있는 것’을 ‘사회의식’이라고 하고, 이에 비하여 ‘본다는 것’을 ’사회인식‘이라고 하겠다. 

57) 문맥읽기: 주체와 대상이 맺고 있는 관계망을 포괄하는 사고의 확장, 문제를 둘러싼 전체 과정을 거시적으로 조감하는 것을 신영복은 문맥읽기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58)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위험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성찰성이라고 말한다. 신영복과 사유의 방향은 다르지만, 현대사회는 위험사회로 이행되고 있으며 이는 존재론적 재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본다. 벡은 이런 현실인식을 기초로 한 성찰적 근대화를 주장한다(Beck, 2006: 7-8).

59) 신영복이 연대의 의미를 동양에서 찾아내듯이, 한국사회에도 그 문화가 내재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사회학적 연원과 그 흐름을 알아두는 것은 오늘날의 연대에 대한 새로운 역할과 관계론에서의 연대의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는 데 있어서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연대(solidarité)라는 단어는 연대 보증이라는 법률 용어였으나 1830~1840년대에 이르러 사회적 결집의 의미로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어떤 필연적인 결합(Bourgeois, 1896) 혹은 삶의 근본적인 특징이란 고전적 개념에서, 일치하지 않는 다른 상태를 가진 사람을 지지하는 것(Wildt, 1996)으로 또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라는 정의까지 그 개념은 사회문화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이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으레 사용하는 연대의 개념을 에밀 뒤르케임(Émile Durkheim)은 기계적 연대와 유기적 연대로 구별한다. 기계적 연대는 파편화된 예전의 사회, 유기적 연대는 노동 분업의 사회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기계적 연대의 기초는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동등함과 이해관계와 목표의 동등함이고, 유기적 연대의 기초는 차이와 동등함의 혼합이다. 기계적 연대는 공동체의 구성원에 관계하는 반면, 유기적 연대는 공동체 외부의 인간과도 관계한다. 근대에는 연대의 두 가지 형식이 같이 존재한다. 평등이 연대 개념의 구성적 계기이나 사회가 계속해서 분화하고 변화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평등은 오늘날 새롭게 사유되어야 하며 이것이 유기적 연대로의 발전 이유가 된다. 그래서 라이너 촐은 포괄적인 것이 아니면 진정한 연대가 아니라고 주장 한다. 노동자 연대는 공동체에서의 연대의 가장 좋은 본보기이나 오늘날 필요한 것은 타자와의 연대다. 즉 공동체와 집단의 한계를 넘어 선 연대다. 기존의 사회가 급속한 개인화를 겪는 한편 새롭게 등장하는 다양한 차이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어서 이들에 대한 타자화와 차별화로 이어지는 한국의 현실에서 연대의 변화에 대한 논의는 더 큰 의의를 지닌다(Zoll. 2007).

60) 신영복은 부쟁(不爭)의 설명을 위해 이를 부전(不戰)과 대비시키고 있다. 부전(不戰)은 승패가 가름되어야 하는 경쟁이지만, 부쟁(不爭)은 객관적조건과 역량의 부조합으로 일어나는 일 같은 성질이라고 한다(신영복. 2012. 성공회대 교육대학원 교육사회학특강 10월 25일 강의).

61) ‘변방’이라는 개념은 신영복. 2011.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pp. 59-64. 에서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들어나기 시작한다.

62) 들뢰즈(Gilles Deleuze)가 1968년 발표한 『차이와 반복』에서 유목적 노모스(nomos)라는 표현으로 처음 나온다(Deleuze, 2004: 104), 이진경이 2002년에 들뢰즈와 가타리(Félix Guattari)가 저술한 『천개의 고원』에 나타난 유목주의를 “어떤 외부적인 체계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탈주하면서 사는 것”으로 번역하며 그것을 철학적 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재인은 이진경이 들뢰즈의 유목주의 관련 저서들로부터 노마디즘 개념을 이끌어낸 것에 대해 “들뢰즈 철학에서 노마드는 그 존재감이 아주 미미하며, 명확한 개념규정도 되어있지 않은 단어일 뿐”이라고 반박했다(고대신문, 2007). 이정우는 유목적 삶의 방식(철학적)이 아닌 유목민들에 대한 (역사적) 논의를 하고 있다고 본다(이정우, 2008: 139). 신영복은 출소 후 자유롭게 독서를 하게 되면서, 차이, 변화, 유목주의, 혹은 탈주 등의 틀뢰즈와 가타리의 개념들이 자신의 생각과 유사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들과 신영복의 非근대의 요건들을 맥락적 의미에서 표로 간명히 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논의는 이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영역이기에 차후 연구로 남겨놓기로 한다.


<표 Ⅲ-2> 탈근대를 향한 방법론적 개념들

담론자

들뢰즈/가타리

신영복

담론어들

차이→변화

접속(사건)

탈영토화(유목주의)

탈주(창조)

차이→조화→변화

관계(연대)

변방(신뢰집단)

자유



63) 그람시(Antonio Gramsci:1891~1937)는 현대 국가권력의 속성으로 인해 진지전(War of Position) 혹은 일종의 정치적 참호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진지전은 사회조직과 문화적 영향력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전선에서 전개되는 전략적 투쟁을 뜻하는데, 새로운 사회가 확고히 건설될 때까지는 진지전이 계속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전선들에서 승리함으로써 비로써 정면공격 또는 기동전이 가능하게 되고 따라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고 본다(Gramsci, 2006: 245-328).

64) 신영복은 2001년부터 신뢰집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2010년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변방이란 단어를 공식적으로 쓰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연대를 통한 변화의 성격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뢰집단에서 변방으로의 그 이야기의 확장은 창조적인 공간이라는 성격의 은유와 상징이기도 하지만, 그 추상성을 현실로 끌어내리고 변혁의 생명력이 더욱 강화된 이름이다. 변방은 신영복의 관계론이 지향하는 실천적 구체성이다.

65) 생명체의 욕망은 그 배치(영토화)들을 끝없이 변화(탈영토화) 하게 하는데, 각 개인이나 집단이 자기 책임 하에 새로운 것을 구성해 나가려는 시도를 가리킨다(Deleuze & Guattari, 2001).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목주의와 탈주에 대한 이정우의 논의는 염두 해 둘만하다. 그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형식 논리적 대립으로 이해하거나, 거기에 실체화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속류 노마디즘’을 낳는다고 본다. 왜냐하면 개념적 구분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할 때는 지역적, 시대적, 집단적인 무수한 맥락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생존을 위해 끝없이 탈주하는 동물들에 대한 통찰 속에서 나온 들뢰즈와 가타리의 ‘탈주’ 또한 그저 단순히 무엇인가를 창조해내는 기쁜 활동성만이 아니라 죽음을 담보하는 절박함이 내장되어 있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해내는 과정이라고 읽고 있다(이정우, 2008).

66) 여기에서는 실천과 과정으로서의 조직을 이야기 하는 입장에서 사회학적 지향성을 가진 조직론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 이유는 우선 경영학, 행정학에서는 조직을 보다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관심은 있으나, 개인의 자유나 선택은 흔히 비예측성과 비효과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러한 관점에 무심한 편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조직사회학은 조직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파악하는데 일차적인 관심을 둔다. 또한 통제를 벗어나려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하고 그에 따라 어떻게 행위 하는지가 주요 관심사(유홍준, 1999: 158)이기 때문이다.

67) 조직이론의 태동은 19세기 말 산업화의 전개와 근대국가의 발달로 인한 조직관리의 필요성의 증대라는 사회적 배경과 함께 조직연구의 목적과 지향들의 차이들로 인해 사회학, 심리학, 경영학, 행정학 등의 학문적 배경을 갖고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직의 개념에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고안한 사회적 발명품 혹은 기구로서 일단 존재하면 자체의 정체를 갖는 것, 혹은 구성원의 활동을 조정하여 특정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영속적인 사회체계나 협동의 체계 등 다양한 정의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조직을 이미 주어지고 구조화되어진 체계(system)로서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와는 다르게 통제와 계급갈등의 장으로 조직을 정의하거나, 실버맨(David Silvermam)처럼 문제해결을 지향하여 동기화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과정으로 조직을 규정하는 관점도 나타났다. 초기의 조직이론에서는 조직을 합리적이고 폐쇄체계로서 보는 조직관이 지배적이었고 이론적 관심이나 내용들이 주로 조직내적 측면들과 변수들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인간관계이론이 조직의 비공식적 구조를 강조하면서 조직을 자연적 체계로서 보는 관점이 출현하게 되는데, 1950년대에 들면서 조직이 조직외부의 여러 환경요소들과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고, 이러한 조직외적 측면들과 변수들에 대한 관심이 일면서 1970년대 이후로는 조직의 구조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조직을 둘러싼 환경이나 권력, 갈등으로 이론적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유홍준, 1999; 이창순, 2001: 22-42).

68) 기존의 조직론을 이글의 시각을 설명하는데 활용하였으나,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전개하진 않았다.

69) 실버맨은 상황정의를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사회구조로부터 행위자에게 주어지는 사회세계의 의미를 통해 행위자들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정의한다(유홍준, 1999: 165).

70) 이 여행기는 1995년 11월부터 1996년 8월까지 중앙일보에 연재한 글로서 『나무야나무야』로 1996년 9월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71) 1996년 말부터 1년 동안 8차례에 걸쳐 23개국 47개국 유적지 및 역사현장을 둘러 본 것을 중앙일보에 연재하였다. 이것이 1998년 『더불어숲』이라는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고, 2003년에 개정판으로 합본되었다.

72) KBS 1TV 일요스페셜. 1999. 『일요스페셜 - 신영복 교수의 20세기 지구 마지막 여행 : ‘희망찾기’』. 12월 25~26일 이틀에 걸쳐 방송된 KBS 1TV프로그램. 1999년 10월말부터 35일 동안 10개국 30여 곳을 순례하였다.

73) 2012년 9월 30일 성공회대 새천년관 박경태 연구실에서 인터뷰 한 내용 중.

74) 2008년 9월 ‘CEO를 위한 인문공부’를 개설. 전국 대상의 기업인 중심의 12주 인문학 과정.

75) 성공회대학교 교수들로 김진업 사회과학부 교수, 김창남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경태 사회과학부 교수이다.

76) ‘TV책을 말하다’. 『신영복 : 강의-나의 고전독법』. KBS1TV.  2005년 1월 20일. 에서의 인터뷰 내용 중.

77) 위의 자료와 동일.

78) 박경태를 성공회대 새천년관 박경태 연구실에서 2012년 9월 30일에 인터뷰 한 내용 중.

79) 윤무한(1943~2011)은 해방 전후의 혼란기를 살아가면서 1960년대 이후 인물들의 삶을 주목하고 함석헌부터 전태일까지 열네 명의 한국 현대사 인물들을 『14인의 책 :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를 통해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인물들의 공통점은 이 땅에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밝히기 위해 투신한 이들로서 시대적 담론을 이끌어가며 우리 현대사회와 문화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이들이다. 신영복에 대해서 윤무한은 세기경영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한국사회에 대해 희망의 출구를 열어놓았다고 평하였다(윤무한, 2012: 261-282).

80)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Marx &, Engels, 1989: 37-41)이라는 실천의 중요성과 ‘세계의 조직’을 누구보다도 강조했던 마르크스의 말이 떠오른다.

81) ‘무엇을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느냐’ 혹은 ‘관계론이 이론이라 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진보적 국제정치경제학자 로버트 콕스(Robert Cox)의 ‘이론’에 대한 관점이 좋은 이정표가 될 듯하다.  그 내용은 신영복과 같은 맥락이기도 하고 동시에 관계론이 비판이론임을 재증명하는 보론의 역할이 됨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 역사적 맥락에서 독립된 이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이란 인간의 정신이 자신과 맞선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론은 사실들이 이해 가능하도록 지각되고 또 조직되는 방식에 대한 자기성찰, 즉 인간 정신의 자기의식인 것이다. 따라서 이론은 경험의 세계에 의해 형성된다는 의미에서라면 현실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행동으로 그 현실을 재생산 혹은 변화시키는 이들의 정신을 방향 짓는다는 점에서라면, 그런 현실의 형성보다 선행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론은 항상 누군가를 위하여 또 어떤 목적을 위하여 존재한다.... 그 이론을 사용하는 자의 목적이 현존하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변혁하려는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현존 질서의 유지냐 변혁이냐 하는 이 두 가지 목적에서 두 가지 다른 이론이 나오게 된다. 첫 번째 종류의 이론은... 세계를 주어진 것으로 보며 그러한 현존 질서의 틀 내에서 생겨나는 특정한 문제들과 기능 장애들을 바로잡을 지침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두 번째 종류는 내가 비판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현존 질서가 어떻게 해서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변화해나갈 가능성들은 어떠한지에 관심을 둔다. 첫 번째 이론의 관심사는 기존 사회 구조의 유지를 목표로 삼는 특정한 개혁들인 반면 두 번째 이론의 관심사는 구조적 변혁의 가능성과 그것을 위한 전략의 구성이다(Cox, 2005: 13-14).”

82) 마르크스는 자립적 철학(a self-sufficient philosophy)이란 현실에 관한 기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인간의 역사 발전으로부터 끌어낸 일반적인 결론들을 총괄한 것. 각 시대 개개인들의 실제 생활 과정 및 활동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만 밝혀지는 것이라고 했다(Marx & Engels, 1991: 50). 신영복은 비판적 성찰이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전체적 조망과 역사 인식을 갖게 하는 철학적 체계로 정립되어야 한다고 하였다(신영복. 2006a: 506).

83) 1980년 이후 인문학 뿐 아니라 역사학, 사회학, 역사사회학 등의 학계 흐름에도 ‘관계’지향적인 기준과 시각이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역사사회학자 찰스 틸리(Charles Till)는 정체성이라는 것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성격과 결과라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범주, 연대, 역할, 연망 또는 집단의 경험으로 공적이며 관계적이라고 한다(Tilly, 2001: 55-82). 신영복이 개인의 정체성이란 ‘그가 맺고 있는 사회성이 그 실체라는 것(신영복, 2011: 53)’과 상통하는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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