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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신영복 ‘쇠귀체’의 역설의 힘

이동국(예술의 전당 서예관 큐레이터)


‘처음처럼’은 두산에서 만들어내는 소주다. 한병에 1350원이다. 소주는 먹거리보다 좀 비싸다. 하지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술이다. 기뻐서, 슬퍼서, 화가 나서, 사람한테 속고, 세상에 버림받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늘 소주가 있고, 마지막 나와 독대 시간에도 늘 소주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누구나 막연히 소주를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식당 아줌마가 달려온다.
“술은 뭘로 드릴까요?”
“소주요.”
“무슨 소주 드실래요, ‘참통’ ‘처음처럼’ ‘참이슬’ 있어요.”
“‘처음처럼’ 주세요.”
이제 그냥 소주가 아니다. 공자가 정명(正名)이라 했듯이 맛도 맛이지만 브랜드가 소주를 결정한다. 요컨대 ‘처음처럼’이 소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처음처럼’은 여느 소주와 다른다. 소주 절학이랄까, 아니면 철학이 담기 소주랄까 뭐 이런 것이 있다는 이야기다. 혹자는 소주에 뭐 거창하게 철학까지 이야기하는하는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아지만 ‘처음처럼’은 소주 그 이상의 힘이 있다. 그러면 그 힘의 실체는 무엇인가. 필자가 판단할 때 힘의 근원은 신영복의 쇠귀체다. 또 ‘처음처럼’이란 메시지다. 따라서 본고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신영복 쇠귀체의 힘과 아름다움에 대해 논의하고자한다.
특히 신영복의 경우 작가적 측면에서 우리시대 여느 프로 작가처럼 전업 서예가도 아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작품이라는 측면에서도 우리시대 여느 프로작가들의 글씨에서 볼 수 있는 조형이나 미감과도 딴판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시대 어느 서예 대가도 따라가 못하는 글씨에 대한 대중적인 인지도 영향력 시장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작가로서 신영복은 물론 그의 글씨로서 쇠귀체는 매우 역설적인 구조와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신영복의 모습에서 오히려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여사로서 아마추어이면서도 프로서화가들과 다르며 ‘유어예(遊於藝)’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펼쳤던 문인 사대부나 선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신영복의 이러한 면 또한 역설이라 아니할 수 없다.

민중

솔직히 ‘처음처럼’이 소중병에 나타났을 때 ‘어,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필자의 노리를 스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늘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보여줄듯 말듯, 보일 듯 말 듯 한 여느 소주 광고 포스타 속의 아가씨와 함께 등장하는 ‘처음처럼’ 이 최류탄의 독가스 눈물, 독재타도의 함성과 오버랩 되면 될 수록 이곳이 신영복의 자리도 아니고 쇠귀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술집에서 만나는 ‘처음처럼’은 데모현장에서 걸개그림이나 벽보에 익숙한, 아니 익숙하기보다 뇌리에 아예 콱 박힌 쇠귀체와는 전혀 딴판으로 다가왔다.
이때 충격은 대학 4학년 때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신영복의 책 ‘감옥으로부터 사색’의 타이틀 글씨를 처음 본 때 만큼이나 강렬했다. 적어도 글씨자체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필자에게는 당시 쇠귀체의 ‘감옥으로부터 사색’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서체 자체가 혁명적이었다고 생각되었다. 책의 내용이 아니라 먼저 글씨미감으로 이렇게 가슴에 꽂히다니. 글씨는 그 사람이라 했다. 또 사람마다 다 설정과 기질이 다르다. 그런 까닭에 필자는 이렇게 확일적적으로 궁체라는 글씨 감옥에 사람을 가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던 때였다. 예술이라면 응당 시대를 담아내야하고, 그 와중에 사람이 당연히 드러나는 것인데 이름을 가리면 사람을 분간 할 수 없으니 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당시 한글하면 궁체일색이었고, 정통으로 한글을 쓴다는 사람은 아무도 감히 궁체를 벗어날 생각조차 못할 때였다. 그런 만큼 쇠귀체를 보는 순간 ‘글씨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궁체 자체의 미감은 한자로 치면 당해처럼 더 이상의 가감을 불허하는 정리 된 글씨의 극점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극도의 절제도 좋지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도 절제만큼이나 큰 미덕이다.
특히 예술이라고 한다면 본질이 감정의 표현에 있는 만큼 더더욱 그렇다. 지금도 한자를 쓴다거나 한글 중에서도 소위 ‘민체’ 와 같이 작가의 개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글씨를 쓴다는 것은 궁체작가에 게는 금기사항이나 내지 불문율 같은 것이다. 그러나 궁체마저도 한글의 전부일 수도 없고 전부이어서도 안 된다. 궁체는 단지 글씨의 다양한 서체중에 왕실의 삼엄한 법도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글씨일 뿐인 것이다.


내용과 형식

그렇다면 쇠귀체의 실마리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우선 신영복선생의 증언을 들어보자.

“ 궁체나 고체를 쓰는 동안 나는 차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조나 별곡,성경구절 등을 쓸 때에는 느끼지 못하던 것을 특히 민요 저항시 민중시 등을 궁체나 고체로 쓸 때에는 아무래도 어색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유리그릇에 된장을 담은 느낌이었다. 형식과 내용이 맞지 않았다. 쓰기는 민중시를 쓰고 싶고 글씨는 궁체라는 모순 때문에매우 오랫동안 고민을 하였다.” 신영복, 「서예와 나」,『현대작가선10-손잡고 더불어』(학고재,1995), 10쪽.

윗글에서 보여지듯 신영복의 문제의식 내지는 글씨철학은 바로 내용과 형식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조나 별곡, 성경구절 등을 쓸 때에는 느끼지 못하던 것을 민요 저항시 민중시 등을 궁체나 고체로 쓸 때에는 아무래도 어색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는 고백은 글씨는 물론 모든 예술의 상식이기에 더욱더 값지다.
서예만 놓고 봐도 현실적으로 내용의 성격에 따라 조형이 부합되는 작품은 사실상 없다. 그저 기계적으로 씀만이 있다. 오늘날 프로 서예작가 누구도 자작으로 내용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내용적으로 볼 때 사람마다 다른 희노애락 과 애오욕 의 감정들과는 무관한 표정들의 글씨만 양산되는 것이다. 요컨대 쇠귀체의 태동배경이 된 문제의식은 내용과 조형 정신의 괴리에 근본적으로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

그렇다면 더 구체적으로 쇠귀체의 텍스트는 무엇인가. 어머니의 글씨다. 이것은 의외다. 글씨하면 의심 없이 늘 한글 궁체나 왕희지를 들먹이는 것과는 딴판이다. 다시 신영복의 증언을 들어보자.

“당시 칠순의 할머니였던 어머님의 붓글씨는 물론 궁체가 아니다. 칠순의 노모가 옥중의 아들에게 보낸 서한은 설령 그 사연의 절절함이 아니더라도 유다른 감개가 없을 수 없지만,나는 그 내용의 절절함이 아닌 그것의 형식, 즉 글씨의 모양에서 중요한 느낌을 받게된다. 어머님의 서하늘 임서하면서 나는 고아하고 품위있는 귀족적 형식이 아닌 서민들의 정서가 담긴 소박하고 어수룩한 글씨체에 주목하게 되고 그런 형식을 지향하게된다” 위의 책, 10쪽.

“한글은 한문과 달리 그림이 아니다. 기호일 뿐이다. 극도로 추상화된 기호로서의 각박한 한글체를 궁체가 그 고아한 형식으로 어느 정도 누그려뜨려주는 면은 충분히 인정된다. 그러나 궁체는 노봉 편필이라는 단순한 필법 그리고 정형화된 결구로 말미암아 글의 내용에 상응하는 변화를 담기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에 항상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어머님의 모필 서한은 어떤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고 생각된다. 어머님의 글씨에서 느껴지는 서민들의 체취와 정서는 궁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미학으로 이해되었다.” 위의 책, 11쪽.

그렇다. 신영복의 고민, 이를테면 내용과 형식의 괴리 문제는 바로 어머니의 한글 편지에서 풀린 것이다. ‘어머니의 서한을 임서하면서 나는 고아하고 품위 있는 귀족적 형식이 아닌 서민들의 정서가 담긴 소박하고 어수룩한 글씨체에 주목하게 된다’는 고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신영복은 글씨를 학습함에 있어 민중의 정서를 궁체가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찾은 어머니의 한글 편지 글씨만을 독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실천을 해냈기 때문에 쇠귀체의 조형적인 글씨 미학이 성립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쇠귀체는 한글궁체나 고체 아니면 민체등 순수 혈통만을 따져서는 풀리지 않는다.
특히 철선 같은 강인함과 또 고무줄 같은 인장력이 겸비된 쇠귀체의 문필과 점획, 그리고 글자와 글자간에 얽히고설킨 ‘따로 또 같이’ ‘다 함께 여럿이’ 가는 결구와 장법에 있어 원칙과 융통성의 토대는 한글 이외의 어떤 요소가 가미 된 것이다.


국한혼용

요컨대 쇠귀체의 조형적인 힘은 또 다른 측면을 봐야 한다. 그것은 한자에 대한 체득이다. 즉 한글과 한자의 격이 없는 혼융에서 쇠귀체의 힘의 근원이 발견된다. 이러한 신영복의 실천은 우리 서예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그러나 한글의 경우는 모든 글자가 그 형식이 극도로 추상화된 기호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그림에서 그 내용을 어떻게 형상화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글에서는 그 형식을 어떻게 구상화해야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선 기존의 한문서법의 5체, 즉 전(篆),예(隸),해(楷),행(行),초(草)의 다양한 획을 한글에 도입하는 시도를 하게 된다. 한편 글자 한 자로써 불가능하거나 불충분한 경우는 여러 글자를 연결하여 표현하는 새로운 구성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우리 한글 또한 알고 보면 한자의 고전을 토대로 만들어 진 것이다. 훈민정음은 제자원리도 초성글자 아(牙),설(舌),순(脣),치(齒),후(喉) 오음(五音) 은 형상과 작태를 중성글자는 천(天),지(地),인(人) 삼재(三才)의 의(意)를 점획의 근본으로 삼아 상형(象形)에 근본을 두어 그 변화하는 모습을 그렸고, 글자는 고전을 본받은 것이라 [자방고전(字倣古篆)]하여 우리 글씨체를 형성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國)·한(漢) 병진주의자(竝進主義者)로 20세기 근현대서단에서 최고 서예가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일중 김충현은 다음과 같이 갈파하고 있다.

“고체는 옛 자형을 그냥 따라 써서는 그 생명을 끌어 낼 수가 없는 것이고 획의 중묘(衆妙)를 잡아넣음으로써 생명을 배태시키는 것이요, 이들 생명을 모아 한 글자를 이루고 나아가 한 작품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김충현, 「국·한 서예 논고」, 『예에 살다』(범우사, 2000) 143쪽.

“훈민정음 원본의 글씨를 보면 과연 고전(古篆)의 기원설이 부합된 것을 알겠고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의 자체도 살펴보면 얼마든지 그 글씨로서 발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전∙예의 필법으로 그 자체를 본령 삼아 써보니 조형미를 내포하여 좋게 보였다....한자의 전예를 써야만 한글의 고체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충현, 앞의 책, 같은 곳.

이러한 사실을 알고 보면 방법론이나 실천에 있어 쇠귀체가 그저 보통글씨와 다른 개성의 발현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정통의 오소독스한 힘이 더 근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법과 정통성에 대해 작가 자신이 자기 검열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답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나의 시도에 대하여 서예의 정통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궁체를 한글 서예의 정통으로 계승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도의 정통은 어디까지나 서법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서법은 집필 묵법 용필 필세 등 그 법이 넓고 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본은 한자이든 한글이든 결국 필법으로 요약된다. 중봉(中峰) 관직(管直) 장봉(藏峰) 현완(懸腕) 현비(懸臂) 등 용필의 요체를 의미한다. 붓이라는 매우 불편한 필기도구를 효과적으로 운필할 수 있는 이른바 ‘방법에 관한 법’이다. ⋯ 그리고 이 필법은 현재 거의 최고수준으로 완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앞으로 새로운 형식을 추구해나가는 과정에서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필법이 개발될 수도 있지만 전통∙정통의 계승은 이 필법의 계승으로서의 의미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 신영복, 앞의 책, 12쪽.

사실 쇠귀체는 프로로서 전문 서예가들의 작품과는 내용을 떠나 우선 조형 자체가 판이하게 다르다. 이 말은 쇠귀의 글씨 조형을 보고는 어떤 서예 고전을 그가 천착해서 나온 글씨인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이 말은 쇠귀체가 완전히 기본이 되는 텍스트를 소화화고 체화되어 나왔다는 뜻으로 읽혀진다. 그래서 쇠귀체는 우선 글씨가 너무 쉽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도 익숙해져 있는 사람도 그토대를 짐작하기 어렵고 짐작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딱히 붓으로 쓴 것과 볼펜으로 쓴 것과 도구의 차이를 빼면 구분이 가지 않는다. 보통 서예가들이 붓글씨와 볼펜 글씨가 현격하게 차이나는 점과도 딴판이다. 사실 글씨는 도구가 다르다고 근 본 조형까지 달라질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현상은 역으로 글씨의 일상과 예술 간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또 글씨연마가 그 만큼 철저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감옥

그러면 이런 쇠귀체가 본격적으로 단련된 현장은 어디인가. 그것은 감옥이다. 우리시대 여느 작가처럼 서숙이 아니다. 다시 신영복의 증언을 들어보자.

“내가 서도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쏟게 된 것은 역시 20여년(1968-88)의 옥중생활이다. 재소자 준수사항, 동상 예방수칙 등의 공장 부착물들을 붓글씨로 써 붙이는 일이 계기가 되어 교도소 내에 불교방 기독교방 카톨릭방 등에 추가하여 동양화방 서도방이 신설되면서 상당한 시간을 기울 일 수 있게 되었다. 온 종일 글씨를 썼던 기간도 7,8년은 되었다.” 앞의 책, 6쪽.

이것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감옥에서 글씨를 쓰다니. 그것도 취미정도가 아니고 본격적인 작가 이상으로 글씨를 연마하였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온 종일 글씨를 썼던 기간도 7,8년은 되었다’는 증언에서 오히려 감옥이 아니었더라면 쇠귀체도 없었다는 확신이 간다. 더구나 이러한 극공(極工)의 시간은 복잡다단한 일들이 무작위로 벌어지는 일상에서 갖기란 오히려 더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원교 이광사 등 많은 작가들이 정작 유배지에서 예술과 학문이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보면 필시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나 운명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다.
또 이런 극공과 더불어 신영복의 글씨를 내용과 조형에서 이끌어 준 사람 또한 감옥에서 만들어 졌다. 그것은 자칫 예술에 있어 극공의 끝은 독단이기 쉬운데 그것을 잡아 준 쇠귀체의 소중한 서예 인연이다. 즉 앞서 언급한 어머니를 포함해서 노촌 이구영 만당 성주표 정향 조병호 등 네 사람이다. 그중 노촌은 쇠귀의 한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만당으로부터 ‘성친왕’ 해서법첩왕희지’와 ‘안진경’ 행서법첩을 배웠고, 정향으로부터 전서와 예서는 물론 행서에서 ‘미불’임서를 주력해서 지도를 받았다.
물론 신영복의 글씨 인연의 뿌리는 더 거슬러 가면 전통시대 우리의 학문과 예술의 전수문화가 그러했듯이 가학이다. 그리고 학창 시절 글씨의 끈을 놓지 않고 생활 속에서 실천한 것이 쇠귀체의 저력이다.

“내가 붓글씨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어린 시절 할아버님의 문화를 입었기 때문이다⋯이때의 붓글씨란 한낱 습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의 정서는 훗날 까지도 매우 친숙한 것으로 나의 내부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책, 5쪽

“4.19혁명 직후 대학을 중심으로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이 싹텄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가까운 친구들 중에는 국악, 탈출, 굿 등을 배우기 시작하여 그쪽으로 심취해간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
당시 대학 2학년이던 나는 그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붓글씨를 상기하고 붓과 벼루를 다시 꺼내놓았다. 학교게시판의 공고문을 써 이기도 하고 행사 때는 아치의 글씨를 도맡아 썼다⋯그때까지 남들 앞에 별로 꺼내놓고 싶지 않았던 붓글씨가 적어도 나의 경우 당시 젊은이들 사이 만연했던 민족적 패배의식과 좌절감을 극복하는 작은 계기로 나의 삶속에 복원되게 된 것이다.” 위의 책, 6쪽.

특히 ‘그때까지 남들 앞에 별로 꺼내놓고 싶지 않았던 붓글씨가 적어도 나의 경우 당시 젊은이들 사이 만연했던 민족적 패배의식과 좌절감을 극복하는 작은 계기로 나의 삶속에 복원되게 된 것이다’는 신영복의 증언은 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그어느 때보다 깊이 묻고 찾는 이 시점에서 여전히 중요한 자각이다.
그리고 서예가들이 늘 ‘서예를 민족예술의 정수’라고 구두선(口頭禪)처럼 되 뇌이면서도 현실에서는 정 반대의 실천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도 분명 차별적이다.


문인예술


그러나 신영복의 쇠귀체의 힘은 단지 조형에서만 구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쇠귀체의 진정한 힘은 이런 조형과 함께 내용과 메시지에서 온다. 필자는 우리시대 서예의 죽음이 단순히 전통시대 지필묵에서 볼펜도 아닌 이제 자판으로 바뀐 우리시대 문자문화에 있어 도구 재료의 변환에서만 비롯된다고는 보지 않는다. 서예 위기의 본실은 그것과 함께 더 근본적으로는 작가들이 문학적 기능을 포기한데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다른 예술이 그러하지만 서예가 어떤 예술보다 정신을 문제 삼고 있는 데에서도 작가 스스로 문학적 기능을 포기한다는 것은 심하게 말하면 작가 정신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궤를 이룬다.
그리고 정신의 포기는 도미노 현상과 같아서 앞서 살펴본 대로 글씨에 있어 조형정심마저 갉아 먹게 된다. 즉 내용과는 전혀 다른 조형을 구사하는, 민중의 정서를 궁체로 담아 낼 수 없다고 하는 신영복의 고민과는 정 반대로 박제화된 글씨만 양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글씨일 것 같으면 굳이 관객이 발품을 팔아 전시장을 찾을 당위도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사실 우리시대 서예의 난맥상, 이를 테면 바다에 떠 있는 섬과 같은 일상이라는 외부와 단절되고, 전혀 소통이 되지 않은 서예문화의 위기본질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영복의 ‘쇠귀체’ 힘의 절반을 차지하는 내용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앞서 문학이라고 거창하게 이야기 했지만 오히려 신영복의 문학은 지극히 소박하다.
그저 일상의 체험을 시나 일기 편지 등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담아 낼 뿐이다. 사실 관객이나 대중의 공감이라는 것은 바로 작품을 통해 나의 삶속에서 작가의 삶이 발견되는 지점이다.

신영복은 20년간의 감옥에서 무수한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하지가 않다.
물론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이해 못할 철학적 명제를 원론대로 이야기 했다는 뜻 은 더욱더 아니다. 오히려 신영복의 글을 아무리 어려운 철학적 명제라도 자신의 삶과 체험 속에 완전히 녹여 그 고갱이만 건져낸 것이다. 그래서 지극히 간명하고 그래서 지극히 살쉽다. 이러한 일상의 실천에서 건져 올린 희망 사랑 믿음에 대한 메시지나 시어들이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위험까지도 녹여내면서 ‘쇠귀체’ 와 만나 폭발적인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지극히 단적인 사례에 불과하지만 다음 문장들을 보면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해 보자.

“사람은 누구나 어제 저녁에 덮고 잔 이불 속에서 오늘 아침을 맞이하는 법이지 만 어제와 오늘 사이에 밤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입니다.” 신영복, 「서화달력 더불어 숲」(돌베개, 2006) 12월.

“아름다운 도자기가 익고 있는 가마 아궁이 앞에 앉아서 생각합니다. 우리와 우리들의 삶을 저마다의 훌륭한 예술품으로 훈도해 주는 커다란 가마를 생각합니다.” 위의 책, 3월

“붓글씨를 쓸 때 한 획의 실수는 그 다음 획으로 감싸고 한 자의 실수는 그 다음자 또는 다음다음 또는 다음다음 자로 보완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행의 결함을 그 다음 행의 배려로 고쳐갑니다. 이렇게 하여 얻어진 한 폭의 서예작품은 실수와 사과와 결함과 보상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서로 의자하고 양보하여 감싸주는 다사로운 인정이 무르녹아 있습니다.” 위의 책, 8월

어떤 내용 일 지라도 일상의 체험에서 걸러져 나온 것들이다. 밤을 희망으로 간주한다든지, 가마를 보고 삶 자체를 예술품으로 훈도하는 발상이나 글씨의 점획 결구 장법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승화시키는 대목에서는 촌철살인 같은 한마디가 어떤 큰 철학책보다 더 큰 무게감이 담겨있는 것이다.
또 단적인 예이지만 “學而不思卽罔 思而不學卽殆”를 “실천이 없는 이론은 어둡고 이론이 없는 실천은 위태롭다” 위의 책, 「서화달력 더불어 숲」(돌베개, 2005) 9월.로 재해석 해내는 신영복의 어법은 심지어 고전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자신의 생각으로 곱씹고 곱씹어서 나오는 글이라는 점에서 그의 문학은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명히 체화된 메시지를 가지고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까지 그려내는 데에서는 서예가를 넘어 우리시대 진정한 문인화가내지는 문인 예술가, 이를테면 추사 김정희 표암 강세황 다산 정약용 지하 신위 등과 같은 사람은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근대화 백 년 동안 전통서화가 서구미술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그림은 제도권의 정규미술로 편입되면서 전문적인 직업작가로서 길을 걷게 되었고, 글씨는 제도교육에서 제외되면서 사설교육관리인 서숙과 공모전을 통해 교육되고 작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술교육은 거의 전통적인 토대가 허물어지다시피하면서 전적으로 서양미술중심으로 교육되면서 문인예술가로서 문인화가로서 작가적 지위나 신분은 자연스럽게 없어진 것이다.
우리시대 문인화 사군자 수묵화 한국화 동양화 등 다양한 이름으로 전통서화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정체성이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있다고 해도 전통시대의 그림자만 쫒아가는 매너리즘의 연장으로서 사군자 문인화가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론을 대신하여 - 다시 ‘처음처럼’



지금까지 신영복 쇠귀체의 힘이나 조형적 토대를 소주이름 ‘처음처럼’을 실마리로 풀어보았다. 필자가 처음 본 ‘처음처럼’은 80년대 말 당시 어는 누구와 어는 상황과고 타협할 수 업는 너무나 강한 쇠귀체의 정신성 때문에 분명 타락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결론에 도할 한 지금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민중이 아니라 대중이 먼저 쇠귀체를 메시지와 함께 받아드릴 수 있을 정도로 더 건강해졌음을 깨달게 된다. 글씨는 만인의 것이다. 그런 만큼 쇠귀체의 대중적인 확장은 서예의 죽음을 이야기 하는 이 마당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하여 민중을 넘어 대중이 좋아하는 쇠귀체의 메시지를 역으로 우리 서예가가 참으로 귀담아 들을 때가 된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신영복의 경우 전업 서예가가 아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그런 만큼 조형이나 미감도 우리시대 여느 프로작가들의 글씨에서 볼 수 있는 조형이나 미감과도 딴 판이다. 그러면서도 글씨에 관한 한 우리시대 어느 서예대가도 따라가지 못하는 대중적인 인지도 영향력은 물론 시장성까지 확보하고 있다. 이런 신영복의 모습에서 오히려 조선시대 문인사대부 예술가의 살아있는 한 전형을 본다.
사실 우리시대 서예의 가장 큰 문제는 일상의 문자생활과 유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섬 같은 형국이라 할 수 있는데 서예가들은 일상으로의 탈출은커녕 화선지라는 네모 칸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지필묵과 한자, 즉 서예하면 필수불가결한 조건인 도구와 재료 문자 모두가 이제 사라지다시피한 현실에서 서예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이해 부족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그 해답을 굳이 신영복의 쇠귀체에서 찾아본다면 서예의 잃어버린 반쪽인문학기능을 절대적으로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내용을 던져버리면 버릴수록 작가는 법의 도그마에 더 옥죄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삶의 체험이나 생각으로서 내용이 없는 작품 앞에 관객이 있을리 또한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예가는 글씨만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동시에 시인이고 사상가다. 역사적으로 그랬고 지금이나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쇠귀의 붓글씨의 마력은 바로 자신의 삶으로부터 배태된 이러한 내용들을 쇠귀체에 담아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너무나 쉽고도 너무나 어려운 말이지만. 쇠귀의 붓글씨의 마력은 바로 자신의 삶으로부터 배태된 이러한 내용들을 쇠귀체에 담아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너무나 쉽고도 너무나 어려운 말이지만 ‘글씨는 그 사람이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것이다. 쇠귀의 붓글씨는 정신이다. 조형이전에 그의 철학이 문자조형과 내용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처음처럼’은 바로 신영복 그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서예란 그것을 글씨로서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격과 사상 그리고 당대사회의 미학을 오늘의 과제와 정서로 지양해내는 작업이어야 하며 더구나 이 모든 것을 우리시대의 것으로 형상화하는 동시에 나의 것으로 이룩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는 요지의 신영복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과거나 현재에도 그랬지만 한국서예의 미래방향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지금에도 작가 자신은 물론 우리 서예가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화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통성의 또 한 가지 문제는 법첩의 임서와 같이 과거의 명필들이 도달한 미학의 계승문제이다. 명필들의 글씨에는 그 필법 사상 인격 그리고 미학을 읽을 수 있고 나아가 그의 사상과 미학을 통하여 당대의 문화와 사회상 그리고 미학을 읽을 숭 있고 나아가 그의 사상과 미학을 통하여 당대의 문화와 사회상 그리고 시대 미학을 읽을 수 있다. 위,진 시대의 해행초, 주 ,진,진 시대의 전예에서부터 조선중기의 동국진체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문화적으로 완성체로서의 서체가 갖는 의미 역시 전통 정통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서예란 그것을 글씨로서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격과 사상 그리고 당대사회의 미학을 오늘의 과제와 지양해내는 작업이어야 하며 더구나 이 모든 것을 우리시대의 것으로 형상화 하는 동시에 나의 것으로 이룩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쩌면 서도의 차원을 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명필들의 인격 사상 미학을 과제로 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다른 모든 예술장르와 마찬가지로 서예도 현재의 사회와 역사적 과제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신영복, 「서예와 나」, 앞의 글, 12쪽. (이동국 /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큐레이터)



*당해-당나라 해서라는 뜻. 안진경이나 구양순의 글씨가 대표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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