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역보따리 내려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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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보따리 내려놓자
아버님께


'대전시 중구 대정동 36번지.'
지난 20일 우리들이 이사온 새 교도소의 번지입니다. 이 골짜기의 옛 이름은 도적골[賊谷]이었다 합니다. 이름에 붙은 살(煞)이 얼마나 질긴 것이었으면 옛날의 그 도적골에 이제 동양 최대의 교도소를 짓고 각지의 도둑 수천 명이 들어앉았습니다. 역사의 익살 같습니다.
제1호송차에서 제1번으로 내린 저는 그 소란 속에서 먼저 주위의 산야를 둘러보았습니다. 임꺽정이가 산채를 이룰 만한 험준한 산세도 못되고, 어디 울창한 숲이 있었을 성싶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야산들의 능선 몇 개가 이리저리 엎드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마 옛날 이곳에 근거했던 선배들도 실은 오늘 묶여온 후배들과 마찬가지로 변변찮은 좀도적에 불과하였으리라는 생각에 잠시 쓸쓸한 마음이 됩니다.
구 교도소의 철문을 버스로 나올 때 우리들은 20여 분의 짧은 시간에 불과하지만 '사회'를 보는 기쁨에, 옥담 벗어나는 해방감(?)에 저마다 흐르는 물이 되어 즐거운 소리 내더니 저만치 새 교도소의 높은 감시대와 견고한 주벽(周壁)이 달려오자 어느새 하나둘 말수가 줄면서 고인 물처럼 침묵하고 맙니다.
중촌동 교도소에서 우리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인색한 겨울 햇볕을 똑같이 나누어 입던 낯익은 나무들이 우리보다 먼저 와 서 있습니다. 와락 반가운 마음이 되다가 그 모습이 너무 처연합니다.
여름이면 무성한 잎사귀로 척박한 땅을 축축히 적셔주던 그 넉넉한 팔을 죄다 잘리고 남은 몸뚱아리 새끼로 동인 채 낯선 땅에 서서 새로운 뿌리 내리려고 땀 흘리고 있었습니다. 온갖 시새움에도 아랑곳없이 3월과 4월 사이, 바야흐로 봄이 오고 있습니다.
산자락 깎아내린 미답의 생땅 위에 자! 우리의 징역보따리 내려놓자. "우리의 힘겨운 청춘을 내려놓자."

 

인편에 어머님 환후가 많이 좋아지셨다는 말을 듣고 마음 가벼워집니다.

 

백유유과 기모태지읍 기모왈 타일태자미상읍 금읍하야 伯兪有過 其母笞之泣 其母曰 他日笞子未嘗泣 今泣何也
대왈 유득죄태상통 금모지력불능 사통시이읍
對曰 兪得罪笞常痛 今母之力不能 使痛是以泣
(백유가 잘못을 저질러 어머니가 종아리를 때렸는데 그가 울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전에 때릴 때는 울지 않더니 지금은 왜 우느냐?" 대답하기를 "전에는 아팠는데 지금은 아프지 않으니
어머님의 근력이 쇠하였음을 슬퍼합니다.")

 

{소학}(小學)을 읽다가 불현듯 어머님께 종아리 맞아보고 싶은 충동이 가슴 가득 차오릅니다. 백유(伯兪)와는 달리 종아리 맞지 않았으되 그 아픔이 선연한 눈물이 될 것 같습니다.
어머님께서 걱정하시던 겨울도 감기 한 번 앓지 않고 지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평안을 빌며 이만 각필합니다.

 

 

198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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